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표지가 섬뜩하다. 들고 다니기 편해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읽곤 했는데, 도대체 다른 사람들이 이 표지를 보고 내가 어떤 책을 읽는다고 생각할까 마음이 조금 쓰였다. 밤에 이 책을 침대에 놓아두면 불쑥 겁이 나곤 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그랬다. 내용을 잘 반영한 표지라는 건 인정하지만(솔직히 상자 하나 그려두고 끝내는 표지는 너무 밋밋하지 않겠는가) 자기 전엔 꼭 반대쪽으로 돌려놓고 자야 안심이 되었다.

리뷰 쓴다고 들어와서는 왜 표지 타령이냐. 그래도 표지가 가장 덜 엽기적이기 때문이다.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솔직히 힘들었다. 재미없고 지루해서가 아니라-사실 교고쿠도의 장광설에는 가끔씩 지치긴 했었다-내용이 함축하고 있는 무게에 그 잔인함에 시달려서라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우부메의 여름'을 읽었을 때는 그런 느낌보다는 '충격적'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었다. 처음 만나는 박학다식하다 못해 너무 수다스럽기까지 한 교고쿠도라는 사람에게 그랬고 너무나 일본적인 색채가 진한 소설의 내용이 그랬다. 그런데 이 '망량의 상자'는 그지없이 무거웠다. 결말 부분에 가서는 그 무거움이 더없어 커져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던 결말이지만 교고쿠도의 외침("말하지 마십시오, 요코씨. 그것만은...")은 내게 향하는 것 같이 아리게 다가왔다. 정말 이 작가는 잔인하다. 사람을 쉴 틈도 주지않고 몰아세우는 기술이 있다.

'망량' 이라는 말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 책이지만, 결코 그 '망량'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내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 또한, 신비감을 자극한다. 귀신이라 하기에도 악마라 하기에도 적합치 않은, 무어라 지칭하는 것이 어려운 그 '망량'은, 기실 사람의 마음 기저에 있는 실체가 없는, 그 무엇이 아닌가 싶다. 내 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나를 집착하게 하고, 혹은 벗어나고 싶게 하는, 형체는 없으나 나를 늘 구속하는 것. 그것은 혹은 욕망으로 혹은 미움으로 혹은 광기로 표출되기도 하면서 내가 떠날 수 없게 옭아매곤 한다.

그리고 '상자'는 그 '망량'이 머무르는 곳이다. 그것은 주로 내 마음에 있겠으나 겉으로 빼내오면 그 어떤 공간도 또한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나의 육신의 일부가 담겨져 있어도 가능할 지 모르겠다. 잊고 살 수 없는, 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참담한 내용이 내 팔, 내 손가락 등으로 바뀌어져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겠기에. 따라서 '상자'에 그리도 집착했던 효에, 구보 슌코, 미마사카 등은 '상자'라는 대상에 자신의 모든 '망량'들을 걸고 매달렸었던 것이리라.

여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결말 부분에 가면 다 밝혀지지만, 저마다 큰 마음의 상처들을 안고 살아간다. 생채기 정도가 아니라 칼로 그어져 속의 것들이 튀어져 나올 정도로 깊고 깊은 상처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닳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지고 넓어져 도저히 감추어둘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끝에 이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망량'들을 '망량'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정당성을 부여한 채, 어쩌면 그 '망량'을 부여잡기 위해 그 어떤 것도 감수한 채 자신도 속이고 남들도 속이느라 필요없는 희생들을 끌어내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몹시...남자가 부러워지고 말았다." 라는 끝대목이 이 책의 많은 부분들을 설명한다. 스포일러가 될 까봐 더이상의 설명이 어렵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마음에 담아두고 착각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부러워지는 건, 우리가 그나마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드러내고 '망량'을 너무나 냉정한 시선으로 가슴아프게만 담아두는 우리네 많은 사람들의 생보다는 어찌 보면 거짓이라 할 지라도 자신이 받아들이기 편한 상태를 고수하는 개인은 행복할 수 있겠다 싶다.

이 책은, 엽기적이기도 하고 기기묘묘하기도 하고 때로는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찝찝한 느낌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그냥 현상적인 얘기들만 본다면 요괴소설이니 하는 분류에 쳐박아 두어도 무색하지 않을 만한 내용이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짚어 생각해보면 그냥 그런 수준에 머무르기에는 아까운 책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나도 이러한 개운치 못한 뒤끝 때문에 별 다섯개에서 하나를 과감히 빼버리긴 했어도.

아마 이 책을 읽어야 교고쿠 나츠히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는 데에는 공감하지 않을까 한다. '우부메의 여름'보다 더욱 강렬하고 더욱 잔인하고 더욱 인상적인 책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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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6-06-0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부작용은 만만치 않지요. 그래도 전 비위가 센 편이라서. ^^

상복의랑데뷰 2006-06-06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본 뒤에 택배아저씨를 보면 호오~하게 된다지요 ^^

비연 2006-06-0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ldhand님) '압도적'..이란 표현이 정말 적절하네요.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 네모난 상자만 보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고 하얀 장갑도 마찬가지..이게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겠죠? 암튼 쇼킹했습니다.

상복의 랑데뷰님) ㅋㅋㅋ 택배 아저씨 볼 때마다 시선을 피하게 될 듯 합니다, 전. 솔직히 님이 추천해주셔서(제 리뷰 댓글에 읽어보라고 권해주셨던 게 기억나서요) 그 기분 나쁜(!) 표지에도 불구하고 읽었더랬습니다^^;;;

비연 2006-06-0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뱀꼬리하나..붙이면...이 내용을 우리 회사 사람들한테 얘기해주었더니만...먹던 케익을 다 접시에 내려놓더군요...(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위가 좋은 걸까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