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관련법에 맞선 지상파 방송사 파업을 비꼰 조선일보의 12월 26일자 만평

조중동이 거리로 나가지 않는 이유

민주주의에 공짜는 없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비록 성숙한 민주화는 아니지만, 지금과 같이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학업을 중단하고 싸웠던 선배들과 펜과 마이크를 놓고 투쟁했던 언론인, 방송인들 덕분이다.
조선일보는 일제 때 지면에 일장기를 걸면서 아첨을 떨었고, 동아일보는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기자들을 대량해고하면서 기득권을 챙겼다. 이들은 '언론'보다는 '이익'을 위해서 동물처럼 몸을 움직여 왔다. 조중동이 한번이라도 언론자유를 위해서 거리로 나갔던 적이 있었나? 그들은 거리로 나가지 않는다. 거리로 나감과 동시에 시민들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중동의 뻔한 스토리 1 - '왜'를 절대로 쓰지 않는다

언론악법과 방송사 파업에 대한 조중동의 기사는 안 봐도 비디오다. 몇 가지 패턴으로 구분해 보았다.
우선 조중동은 사태의 피상적인 스케치만 전달하면서 본질을 흐려놓는다.
아래의 기사는 오늘자 동아닷컴 메인기사인데, '방송 차질 가시화'라는 피상적인 내용만 늘어놓았다. 당연히 이들의 파업에는 '왜'가 빠져 있고, 파업으로 인해 생기는 당연한 결과만을 받아쓰기하듯 나열한다. 이는 국민들이 파업의 이유를 모르게 하고, 동시에 파업으로 인해 얻을 손실에만 신경을 쓰도록 유인하기 위함이다.



▲ 파업이나 노동자 투쟁이라면 본능적으로 질색하는 조중동은 '왜'라는 알맹이가 없이 껍데기만 전달함으로써 사안의 본질을 흐려 놓는다. 중앙일보도 연합뉴스의 보도를 인용해 헤드카피와 기사 본문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인용했다. 


 
조중동의 뻔한 스토리 2 - '구체어' 대신 '추상어'를 즐겨 쓴다

언론악법에 관한 총파업은 명분이 분명하기 때문에 조중동으로서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추상어'를 자주 쓴다. 조중동이 쓰는 언어를 들여다 보자.

현행 신문방송 겸영() 금지 조항은 인터넷 시대를 넘어 미디어 융합 시대로 가는 세계 조류에 어긋난 ‘철 지난 옷’이다. 
선진국들이 멀찌감치 앞서 가 있는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꽁꽁 묶인 규제를 풀어 경쟁을 촉진해야 미디어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
(이상, 12월 26일 동아일보 사설 "언론노조·MBC 기득권만 지키려는 총파업")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는 증오와 저주의 전의를 다지는 날이 돼버렸다.
정치 민주화를 이룬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야의 행태는 그 시절의 폐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위기 극복과 민생안정을 위해 시급한 법안들이 산적해 있다.
(이상,12월 26일 중앙일보 사설, "민심 역풍 기대하는 자해 정치 이젠 안 된다")

“제발 지상파 3사의 80년대의 아날로그 시대 사고에서 벗어나서 IPTV 시대가 되면 어떠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오는지, 새 환경에 맞는 법 개정이 무엇인지, 우리가 적응하지 못했을 때 세계 질서에서 낙오자는 안 될는지를 진지하게 의논해야 한다”(정병국 의원의 멘트 인용한 중앙일보 기사 <정병국 “언론노조 투쟁은 밥통 지키기에 불과”>)


기득권에 기대는 자들, 할말이 별로 없는 자들, 명분이 없는 자들은 이렇게 알량한 장밋빛 언사로 본질을 흐리게 마련이다. 벌써 2~30년도 넘은 패턴을 IT시대에 쓰고 있는 조중동의 행태가 불쌍하기 그지 없다. 조중동은 블로그질도 하고 인터넷 공부도 좀 해서 시대변화를 좀 읽기를 바란다.


다음아고라: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11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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