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나는 너무 착한 작가다
- 소설가 김연수씨의 강연 ‘소설 쓰는 이야기와 소설가로 사는 방법’ 방청기
패배한 열망과, 찢겨진 오시리스의 살갗이 재생한 작가 김연수
<김연수 신작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생활을 낱낱이 저격당한 소설가 지망생의 푸념과 문예과 수시에 합격하고 축사를 기대하는 고3수험생의 메시지, 문예창작과에서 습작하는 친구들의 열망과 소소한 호기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9일 혜화동에 있는 극단 연우소극장에서는 예스24와 문학동네가 공동기획한 소설가 김연수씨의 강연 ‘소설 쓰는 이야기와 소설가로 사는 방법’을 듣기 위해 4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김연수씨에 의하면 20대에는 열망이란 열망은 온갖 총집합한 나날이었으며 패배를 거듭한 끝에 빅뱅이 일어난 자리에서 작가 김연수가 태어났다고 했다. 열망의 화법이 귀에 들어온다. 철저히 파괴된 열망일수록 응어리는 단단해진다. 이집트의 오래된 신 오시리스처럼 낱낱이 찢겨진 열망의 부분들이 회생하여 인생의 새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29일 혜화동 연우소극장 40여 명의 독자들이 독자와 가까운 거리에 앉아서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우문현답과 현문우답
김연수 작가가 이번에 새로 건립한 왕국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홍보를 위한 자리인 만큼 그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소극장이라 무대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작가는 배우처럼 많은 '즉흥극'을 보여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대담에서는 '우문현답'과 '현문우답'을 구분할 수 없는 문답이 오갔다.
독자1 : 소설의 무목적성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의미를 담으려 하는데 교수님은 도대체 의미가 뭐냐고 하신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작가 : 교수에게 소설을 보여주고 대답을 기대하지 마라. 차라리 친한 친구에게 보여줘라. 그런데 그 친구도 별로 해줄 말이 없을 것이다. 그냥 좋은 대로 살아야지 별 수 있겠나?
독자2 : 작중인물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무지 쌈빡하고 성깔 있다. 상황논리에 짓눌렸으면서도 벗어나려고 악다구니를 치는데, 혹시 작가한테도 덤벼드는 거 아닌가?
작가 : 나는 인물들과 싸우기보다는 스스로와 자주 싸우는 편이다. 이번 작품에도 그린 인물이 맘에 들지 않아 나와 많이 다퉜다.
독자3 : 라디오PD 지망생이다. 요즘 소설가, 시인들이 라디오나 방송을 많이 하더라. 목소리가 좋은데 나중에 나와 함께 라디오 프로그램 같이 해볼 생각 없나?
작가 : (손을 전화기 모양으로 하고 귀에다 대고) 나중에 연락 해라. 꼭 듣고 싶었던 FM이 있었는데 김천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서울의 펜팔 친구가 TV 안테나를 높은 데다 걸어보라고 하더라. 새벽 두 시인데 음파를 확인해줄 사람이 없어서 밤새 360도 돌리다가 지쳐서 옥상에서 쓰러졌다. 별이 참 밝더라.
이런 식이다. 소극장에서 그것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마이크도 없이 작가와 독자들은 시덥잖은 이야기에서부터 진솔한 이야기, 섬뜩한 이야기를 매우 극적으로 즐겼다. 하루는 유치원 정도밖에 안 된 딸내미가 자기 소설에서 가장 야한, 그러니까 베드신이 나오는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읽고 있길래 뺏아들었는데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그 부분'을 확 접더란다. 소설의 원 제목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인데 딸이 제목을 이렇게 하면 소설이 잘 나가지 않는다면서 차라리 ‘모기인 동시에 하마인’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겠냐며 진지하게 제안해 왔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소설의 제목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엉뚱하면서도 발랄한, 그러면서도 김연수다운 성찰이 묻어 있는 강연의 내용을 요약한다.
<김연수 작가가 그의 신작('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들고 집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그러니까 유배기간에 첫문장을 발굴한 것이다
출판사에서 청탁이 들어오면 주로 쓰는 편이다. 특별히 써보겠다고 마음을 따로 먹지는 않는 편이다.
막연히 생각나는 것은 '버려진 상태'에 대해서이다. 누군가는 버려져서 어떤 곳에 허름하게 놓여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공교롭게도 독일 대사관에서 한국 작가를 대상으로 독일 문화 체험 비슷한 사업을 하는데, 나에게 전화가 왔다. 독일 시골로 가서 3개월 살다 오라는 것이다. 무턱대고 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대사관에 갔더니 수표 500만원 어치의 유로화를 주면서 생활을 하고 주소와 연락처를 주었다. 밤베르크였다.
17세기 대저택에 무지 넓은 집이었다. 정원, 분수, 조각상, 싱글침대. 천정은 어찌나 높은지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는 일이란 아침 먹고 설거지, 점심 먹고 설거지, 저녁 먹고 설거지였다. 그러다가 문득 누워서 생각했다.
17세기에 지어진 집이라면 많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하고. 그 중에서 한두명은 자살도 했을 것이고, 배신당하기도 하고 도망도 쳤을 것이다.
온갖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온갖 생각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찾아왔다. 독일어를 모르는 관계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더라. 자기네들끼리 한참 웃다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알아듣기만 했다면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뭘 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쓸 이유가 생긴 것이다.
라운지 소설(끝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소설)을 생각했다. 즉 이 이야기 쓰고, 저 이야기 듣고 하는 거다. 처음부터 의도는 이야기를 있는 대로 털어내보자는 거였다.
쓰다 보면서 고민한 것은 어떻게 이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나는 장편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숭고한 경외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포만감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감화 있지 않은가. 소설에서 장편의 장치가 필요했다.
심심해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미술관에 찾아갔다. 원래 무엇이든 처음부터 살피는 성격이라 처음 부분에 너무 공력을 많이 들였나 보다. 얼마 못가 지쳐서 소파에 길게 누워버렸다.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맞은편에 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그보다 '가판대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나를 자극시키는 그 무언가는 '누드사진'이었다. 옛날에 아버지가 보던 설악산 입체사진이 기억이 나는데 그거랑 비슷했다. 그 사진이 마음을 계속 끌었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한 것이 내 성격이다. 좀 설렁설렁한 편이어서, 이 사람 이야기도 옳아 보이고, 저 사람 이야기도 옳아 보인다. 이것을 한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 사진을 보고 당시의 고민이 '드디어' 해결됐다. 입체사진을 보는 순간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서로 합쳐야만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소도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것이 나의 첫 문장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그 사진이 남양(南洋) 군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카우치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세상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가장자리가 불에 그슬린 사진이었다.”(예의 맨 처음 문장)
참고로 말하자면 이것은 후일담 소설이 전혀 아니다. 개인적 경험이 전혀 없다. 특히 백병원에서 기식한 적은 절대 없다. (웃음, 본문 제17장(131~140쪽 참조))
<김연수 작가가 자신의 신작 소설 중 일부를 낭독하고 있다 >
나의 소설속의 인물들은 절대고립에서 환상을 찾아 기어나왔다
94년도 등단작품은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이다. 신작을 쓸 당시 그 시절로 돌아가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간다’라는 것은 착시현상에 불과하며 지금 이 순간에서 그 당시를 회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이 시점, 이런 사람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므로 현재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사실 그때의 시점에서 그런 시선은 갖기가 어려웠다. 프락치 교육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이 소설의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존재의 고립된 순간에 대한 체험이다. 성인들은 그때 순간을 본다. 그때 모든 변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마귀를 보았고, 부처님은 마구미를 보았다. 다들 환상을 많이 보고 세상으로 되돌아온다. 모든 사람들이 사실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한번쯤은 전적으로 고립된 후의 세상을 맞닥뜨렸을 대 그때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가 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세상의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경험을 한 사람에 대해서만 써보자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런 종류의 경험을 가지게 된다.
두 개의 사진, 아니 두 개의 포개진 사진
이 소설은 두 개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입체 누드 사진, ②노을 사진
강시우 프락치가 탈출해서 죽으려 했을 때 노을을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죽으려 하는데, 노을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소설은 두 개의 사진을 놓고 시작한다.
단순히 인물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거다.
그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 수 있지만 저 사람도 역시 나처럼 즐거운 순간이 있을 거고 그런 관점을 살려서 소설을 썼다.
회고담 듣는 게 나는 제일 좋다. 그들은 지금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결국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나아진다. 그게 이야기의 효능이다.
<강연회가 끝난 후 즉석 사인회를 가졌다>
[작가 인터뷰]프로소설가라고? 나는 너무 착한 소설가이다, 그게 싫다.
소설 쓸 때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 갈팡질팡할 때는 재능이라는 말을 믿는데, 재능을 확인해보려 하는 확인욕이 나에게도 있었다.
당시 직장은 공기업에서 운영하는 곳이어서 6시에 퇴근을 하고 11월에는 5시에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하면 7~8시가 되는데, 그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1시까지 자고, 일어나 2시까지 소설을 썼다.
내가 자발적으로 쓴 소설은 단 두 작품이다.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였다.
청탁없이 쓴 소설이다.
규칙적으로 계속 글을 쓰는데, 쓸쓸했다. 귀신이 나타나 잡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귀신 환상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3시간에 15매 정도 쓰면 아무 문제가 없이 너무 해피했다. 15매 프린트하고 다음날 야외 벤치에 앉아서 1시간 동안 계속 고친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타이핑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 줄 안다. 계속 고치면 20매로 불어난다. 나의 행복도 불어난다.
중요한 것은 계속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상을 받거나 독자들이 많이 읽어주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독자들이야 이해하든 말든, 30대 초반에는 건방지게 많이 썼다. 나도 사전 찾아가면서 썼는데, 독자들도 사전 찾아가면서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소설의 인물들과 다툰 적이 있나? 주인공을 내놓으라든지 쓸데없이 인생에 간섭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인물들이 시비를 걸어온 적은 없었나?
-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나 스스로와 다툰 적이 있다. 그려놓은 인물이 맘에 들지 않은 것이다. 이번 소설만 해도 강시우를 몹쓸 녀석으로 그릴 생각이었는데, 결국 그 녀석에게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쁜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 점이 몹시 아쉽다. 그런 점에서는 프로소설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꼭 '프로소설가가 되어' 악당을 그리고 악당과 한판 멋지게 다퉈보고 싶다.
'프로소설가'라던데?
- 취중인터뷰를 했는데 그 기자가 그렇게 썼더라. 내가 그 말을 한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프로소설가라는 게 있다면 ‘함께 읽는’ 소설가가 프로가 아닐까.
지금은 약간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에 중점을 두는 소설을 쓸 계획이다.
소설가를 꿈꾸는 소녀에게?
- 글쓰기는 ‘순간의 문제’이다. 20대 초반에 나는 엄청난 열망이 있었다. 심지어 출판사로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때 무턱대고 원고를 건네받은 사람이 장석남이다. 등단하는 날 통화를 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열망을 품고 있을 때는 백전백패다. 백전백패해도 열망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가. 그것이면 되는 거다.
원형을 재현한다는 구상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 유령작가를 쓸 때만 해도 나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진실을 담지 못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상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와 플로베르의 차이점이 있다.
플로베르가 있던 시절에는 정확한 작품으로 재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었다. 그러기에 리얼리즘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서 우리 세대가 직면한 현실은 재현할 수 없는 일종의 판타지와 같다. 각자가 갖고 있는 비현실적인 세계. 현재의 소설세계도 판타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정점에 있는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결국 ‘원본’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 때 나한테 세미나를 해준 선배들은 ‘진리가 있다’고 나를 세뇌시켰다. 물론 ‘맑스의 진리’였다. 1,2년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매트릭스처럼 잠이 깨면 완전한 세계와 닿을 것만 같았다. 존재와 이미지가 분리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세상도 있고 나도 있고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진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나의 소설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는 비루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진리에 대해서 부역하지 않으니까.
밝히려고 해도 밝혀지지 않는 진리란 없고 남는 것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의 글쓰기는 구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