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지음 / 그린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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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브로델과 폴라니를 기반으로 월러스틴과 아리기를 살펴보고, 이들 세계체계분석 이론가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대변되는 현대자본주의사회를 분석한다.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삼독은 해야겠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같은 독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지 친절하게도 각 장 마지막 페이지마다 요약정리가 되어있다.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인 것 같다.

1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1)물질문명, (2)시장경제, (3)자본주의라는 세 가지 층으로 도식화해서 설명한다. 브로델의 삼층도식이 특이한 점은 시장경제를 곧 자본주의로 보지 않지 않고, 물질문명과 시장경제를 억누르고 그 위에 상부구조로서 존재하는 것을 자본주의로 본다는 점이다. 1층에 놓인 ‘물질문명’이 폴라니가 말한 호혜와 분배의 경제, 즉 자본주의를 지탱하면서도 자본주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의 경제라면, 2층의 시장경제는 대자본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그러니까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형태의 경제에 해당한다. 제일 위에 존재하는 자본주의는 독점이 이루어지는 경제다. 독점으로서의 자본주의는 반드시 국가를 매개로 해서만 형성된다. 국가의 지원 없이 경제 스스로의 논리에 의해 독점 자본주의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브로델의 삼층도식이 함의하는 내용은 크게 다음과 같다. (1)맑스는 생산양식의 이행과정이 문명의 자연스런 내적 발달과정인 듯이 얘기했지만, 사실상 유럽의 자본주의는 유럽 내적인 논리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유럽의 자본주의는 오리엔트에서 오는 물품을 독점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오리엔트라는 외부 요소와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2)자본주의는 국가간에 계서제를 만들어낸다. (3)자본주의사회는 정치와 경제가 융합되어 있다. 강한 국가 없이 독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4)자본주의는 변신성, 유연성이 뛰어나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어떤 영역이든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독점을 낳는 영역을 향해 계속적으로 변신한다. 자본의 변신은 상업자본주의(유통)→ 산업자본주의(생산)→ 독점자본주의(금융)의 단계를 밟으면서 순환을 되풀이한다. 특정 지역이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역으로 부상했다가 쇠퇴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유통→산업→금융으로 차근차근 자본의 축적구조가 바뀌면서 진행되는데, 이러한 순환이 한바탕 끝나고 나면 세계경제의 집중점은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고, 이 지역이 또 다시 신흥 헤게모니 국가가 되는 것.

2 월러스틴과 아리기라는 두 학자를 주축으로 한 세계체계분석이 규정하는 근대는, 근대를 구성하는 요소와 요인 및 특성들을 열거함으로서 근대를 규정하는 요소론적 접근방식을 버리고, 대신 근대를 관계론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적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까 근대와 근대가 아닌 것으로 나누는 분할, 그 분할선 자체를 근대적 특성으로 생각해보는 것. 이렇게 접근하게 되면, 근대라는 시대의 규정은 이전과는 매우 달라진다. 즉, 근대는 “서구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로 세계를 분할하여 인종적인 방식들에 의해 끊임없이 분할선을 나누는 하나의 시대”이며 “그 사이에서 대립축들이 형성하는 관계”로서 규정된다.

근대와 근대 아닌 것의 구분선에 주목하여 근대를 그 둘의 관계와 구조 속에서 살피게 되면 근대의 새로운 특징들이 드러난다. (1)자본주의의 장기지속이 자본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간체계를 통해 형성되어왔다는 것. (2)국가간체계는 중심과 주변의 끊임없는 공간적 분할과 재생산 속에서 작동해 왔다는 것. (3)또한 근대세계체계는 자유주의적인 정치주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체계의 재생산을 이루어 왔다는 것. (4)세계적 차원의 분할구조는 체계 전체에 걸쳐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고유하게 재생산하는 논리를 확장시켜왔다는 것.

세계체계분석이라는 새로운 분석틀은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내기도 한다. 일례로 월러스틴은 부르주아혁명이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계급 대립이었다는 기존의 역사 해석을 뒤집는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부르주아혁명은 역사의 진보주의 신화에 불과하다.부르주아지는 소생산자가 자본을 축적해서 새롭게 등장한 계층이 아니라 원래부터 귀족들이었다. 즉, 부르주아지 혁명은 여전히 토지에 얽매인 귀족계급과 산업자본가로 변신한 귀족계급 사이에 이해관계 대립이 발생하면서 불거진 갈등으로, 부르주아지의 등장은 사실상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주류 그룹의 물갈이로 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곧, 부시 정권 하에서 금융자본가와 (아직 다음 단계 자본의 축적방식으로 이행하지 못한) 제조업자본가 사이에서 이해관계 대립이 일어날 수 있는 이치와도 비슷하다.

이렇게 세계체계분석은 기존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새롭게 보는 창이 된다. 세계체계분석의 틀을 적용하게 되면 제3세계의 상황은 더 이상 개별사회 내의 낡고 전통적인 요인들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게 된다. 제3세계는 오히려 세계경제의 공간적 비대칭성으로 나타나는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 된다. 자본주의 발생을 사회의 내적 동력에 의한 역사적 필연으로 보는 맑스식 역사관 또한 파기된다. 구조와 관계의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탄생을 살펴보게 되면, 그것은 결코 역사적 진보가 아니라, 당시 유럽의 정세적인 구조 변화(영주제 위기, 국가 위기, 교화 위기, 몽골의 몰락)에 의해 우연적으로 요청된 새로운 시스템일 뿐이다.

3 월러스틴은 근대세계체계의 역사를 네 시기로 구분한다. (1)네덜란드가 주도하는 장기 16세기: 자본주의 첫 등장 (2)영국과 프랑스가 네덜란드와 경합하기 위해 영토적 토대를 다지는 중상주의 시대: 보호주의 정책 속에서 자본주의가 내실을 다지는 시기 (3)영국이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는 장기 19세기: 자본주의가 세계로 팽창하는 산업 자본주의 시기 (4)산업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공고화 시기. 영국은 중상주의 시대에는 스미스식 자유주의 경제이론을 채택하지 않다가, 세계 헤게모니로 올라선 이후에는 스미스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일단 보호주의로 일관하며 내적으로 체력을 기른 다음에 강해지고 난 뒤에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는 것. 일단 사다리를 타고 고지로 올라간 국가는 모두 이와 같은 전략을 취하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한미FTA라는 것도 한국의 자본주의가 성장한 데 따른 결과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의 개발독재시기를 영국과 프랑스가 영토적 토대를 다지던 중상주의 시대와 마찬가지의 상황으로 본다면, 오늘날 한국의 경제적 상황을 (3)번 시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정황이 미국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져 이루어진 협약이 FTA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이 책 이후 읽게 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당대, 2005)에서 잘못되었다는 게 드러난다.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한국을 브라질 및 인도와 더불어 반주변부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은 (2)번 시기와 (3)번 시기의 중간쯤 되는 시기로, 보호주의정책을 가장 공격적으로 펼쳐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미 FTA는 시기상조였던 셈일까.) 월러스틴은 근대세계체계에서 국가는 서로 조밀하게 맞물려 국가간체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간체계 내의 어떤 개별국가도 국가간체계를 규정짓는 전체의 원리에서 이탈해 자율적인 개체로 존립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FTA가 불가피했던 까닭일 것이다.

4 역사적 자본주의는 특정 지역(국가) 내에서 발생하는 (1)체계적 축적순환(내적 시스템)과, 그 지역을 둘러싸고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2)국가간체계(외적, 관계적 시스템)가 하나의 틀로 엮여서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전개된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같은 하나의 헤게모니가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은 헤게모니 국가가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 어떤 독특한 축적구조를 가지기 때문인데, 그런 축적구조가 순환하면서 세계헤게모니가 교체되어 온다는 게 (1)의 논리. 세계적규모의 축적체계는 세계체계 전체에서 동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하는 헤게모니 국가 내에서부터 형성되어 확장되기 시작했고, 그래서 새로운 축적체제의 요소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세계적 규모의 축적체제가 되는 건 아니다. 상대적 우위가 있더라도 그 축적체제가 세계적 규모로 확장되려면 어떤 매개가 있어야 한다. 이 매개라는 것이 바로 (2)국가간체계이다. (1)과 (2)가 만나 새로운 체계적 축적순환을 기반으로 한 세계체제의 전면적 재편 과정은 필연적인 역사의 발전도식이 아니다. 이것은 다분히 우연적으로 여러 조건들이 서로 잘 맞아 떨어져야지만 가능하게 되는 어떤 상황이다.

5 아이러니 했던 대목: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특징 중 하나는 전세계적으로 연금과 기금을 매개로 한 기관투자자가 중요한 금융화의 동력이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굉장히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국가가 노후를 보장 안 해주니까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연금과 기금을 적립하면, 기관투자가들은 연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그 돈을 또 주식시장에 투자하는데, 이들은 투자 대상 기업의 시장가치를 올리기 위해 기업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하게 된다. 결국,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돈을 부었던 노동자들이 그 돈 때문에 결국 목이 잘리게 되는 셈이다.
 
6 영국의 체계적 축적순환구조는 '전지구적 상업 네트워크에 기반한 영토제국주의'로서, 산업자본주의적 생산방식, 해외 식민지 건설과 해외 팽창, 자유주의 무역질서에 기반한 세계 무역망 등의 특성을 가졌다. 여러 정세적 변화로 인해 영국이 헤게모니의 지위에서 내려오고 이후 영국에 이어 새롭게 헤게모니 국가가 된 미국은 '법인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축적구조를 기반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법인자본주의는 안정적인 축적구조의 확산을 위해 정부개입과 고도금융 통제를 필요로 했고, 뉴딜체제가 이를 뒷받침해 주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 점유 기간은 이전의 경우보다 훨씬 더 짧아서, 베트남 전쟁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퇴조하기 시작한다. 70년대 이후부터 미국은, 헤게모니 국가가 쇠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유의 특징인 고도금융화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특히 80년대에 미국은 국내 실질이자율을 높이는 정책을 쓰는데, 이때부터 미국에 세계의 유휴 자본이 흘러들기 시작한다.

미국이 새로운 생산의 기반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고 경상수지 적자도 엄청나면서 안정적인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러한 자본의 집중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부단히 자본이 유입되어 미국의 소비구조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원래 금융의 성격이란 것이 생산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한쪽이 지니고 있는 부를 빼앗아 이전하는 방식의 축적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곧 강탈에 의한 축적이나 다를 바 없다(이런 맥락에서 미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강탈 구조는 꽤 안정적이다. 이미 세계 주요 국가들이 한 번씩 금융위기를 겪고 IMF식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미국의 금융적 축적 시스템에 효과적으로 맞물릴 수 있도록 내부 체제가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용불안정성 커지는 대신 대미 수출 지속적으로 증가함으로써 경기가 유지되고 국내 노동자들의 소득과 소비수준이 지탱되는 상황으로 저마다의 국내 환경이 어느정도 정리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러한 축적체계가 앞으로도 계속 지속적으로 기능하리라 장담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다.

먼저, 금융 축적구조의 안정화를 위해 전세계에 군사적 개입하고 전쟁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미국의 재정적자 늘어나는 점. 금융적 축적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전쟁도 일으키고 해서 체계의 질서를 꾸준히 유지 관리해야 하는데 여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음. 반면에 미국을 추격해오는 후발주자들은 미국 만큼의 체계유지비용을 내지 않고서, 그러니까 무임승차 하고서, 미국과의 경합에 참여하게 되므로, 미국으로서는 울며 겨자먹는 식으로 굉장히 비생산적 투자를 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로, 배제된 지역에서 일어나는 불만과 저항.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은 노동력이 너무나 싼 곳으로는 오히려 이동하지 않는다. 그런 곳은 아예 자본의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배제된 지역이 된다. 이렇게 배제되고 이탈된 지역들이 궁극적으로는 미국 헤게모니의 안정적 구도를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만약 이와 같은 불안 요인으로 미국 헤게모니의 우위가 약화되면 어떻게 될까. 아리기는 헤게모니 지위를 계승하기 위해 여러 경합자들이 유동 자본을 놓고 상호경합을 벌이게 되면서 기존축적구조 자체가 붕괴하고 국가간체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카오스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쟁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이 시기에 미국을 잇는 헤게모니 국가가 새롭게 부상하지 않으면, 더 이상 자본주의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재생산되기 힘든 상태, 즉 자본주의 자체가 몰락하는 국면에 놓이게 될 것이다.

7 시장은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교환에 의해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장에 적합한 주체들이 지배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야지만 시장은 비로소 그 존립이 가능해진다. 시장에 적합한 주체란 곧 근대적 노동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근대적 노동주체라는 것은, 경작하던 땅에서 쫓겨나 자생력을 잃고 기아의 규율에 의해 공장노동자로 전락한, 상품화된 주체에 다름 아니다. 근대적 주체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민주주의의 주체라는 테제 역시 이데올로기적 환상일 뿐이다. 근대적 주체란 사실상 선거권이라는 제도를 통해 오로지 국가를 통해서만 조직되고 통일되는, 한없이 파편화되고 분산된 주체일 뿐이다. 19세기에 발달한 자유주의 이념은, 사회가 이러한 주체들을 지속적으로 길러내기 위해 필요로 했던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폴라니)  

근대적 노동주체 형성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자 처우 개선이나 임금 상승 등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 운동이 사실상 '제 값 받기 위한 운동'과 다를 바 없으며, 그것은 이미 체제 안에 포섭되어 체제로부터 관리되는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다 근본적인 노동자 운동은 차라리 상품화를 제어하는 운동, 시장이 요구하는 상품화된 주체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운동,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적 차이를 상상해 내는 운동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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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0-11-2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이거 군대에서 읽었어요. 서문에 지인의 이름이 등장해서 깜놀했던 기억이ㅎㅎ 근데 이런식의 세계체제(체계?)론의 가장 큰 문제는 독자를 너무 보잘것 없게 만들어버린다는거...;;;근데 지금와 하는 얘기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한개도 기억안나네요ㅠㅠ

수양 2010-11-25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아무런 배경지식도 사전정보도 없이 그냥 제목이랑 표지가 멋있어서 샀다가 워낙 금융이나 경제 쪽은 아는 게 없다보니 정말 눈빠지도록 읽었어요 세계체계분석이 뭔지도 여기서 첨 알았고요. 그래도 항상 골치 아프고 경원하게만 느꼈던 분야였는데 이 책 읽고 나니까 세상 돌아가는 게 이렇구나 하고 끄덕끄덕하게 되네요. 자본주의가 정말이지 뭔가 생명체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근데 저도 뭐 다음 달이면 구체적인 내용은 한 개도 기억 안 날 거라서 이렇게 정리해 놓는 거에요^^
 

역사적 외상은 끊임없이 기억됨으로써 보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상 자체가 전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는 건 일종의 부작용이다.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증오와 적개심이 아닐까. 원한감정이야말로 지난 시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외상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것까지 유산으로 전수받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빨리 떨쳐버려야 한다. 원한의 정서(소화불량에 걸린 감정)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엔 신경증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어도 신경증자는 결코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정말 자유로운 사람은 분열증자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적개심이나 원한감정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그는 자신을 어떤 것과 대항하는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창조해낸 환상적인 세계에 근거해 자신을 규정한다. 그는 진정한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포섭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도 정신분석이 제일 어려운 사람이 분열증자라고 했다. 분열증자에겐 자유와 해방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이미 그가 펼치는 즐거운 망상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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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무려 시 시, 시 같은 걸(편의상 시라고 해두자) 끼적여 보게 된 건 전적으로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슬픈 시는 병균과도 같아서 사람을 한없이 쇠약하게 만든다. 이 시집을 읽고 나서 며칠을 끙끙 앓았다. 당연히, 내가 처음으로 썼던 시는 심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시였다. 나는 내 시가 몹시 훌륭하다고 믿었으므로 그것을 심 시인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한동안 심 시인의 이메일을 추적하느라 인터넷을 이 잡듯이 뒤졌던 것인데, 그러다가 알게 되었던 것이다, 시인의 약력을

노선을 잃었다 / 버스 노선과 정치적 노선 / 둘 다 // 멸망하는 세계가 나보다 명랑하다 / 휴일과 섹스는 빼고 // 버스 맨 뒤에 앉아 버스 맨 앞을 노려본다 / 지금 건너는 다리는 소실점까지 길게 난 흉터 같다 / 그래서 좋다 // 차창에 기대 노루잠에 빠진다 / 치어 떼처럼 망막 위를 헤엄치는 빛의 산란 / 꿈속에서조차 나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 숨 꾹 참고 강바닥을 걸어 도강(渡江)한다 // 뒤돌아보면 / 강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옛 애인 / 기적처럼 일어났던 사랑을 잃었다 / 꿈과 현실 / 둘 다 // 같은 고백을 여러 번 통과하며 / 형형색색 분광하는 생 / 지루함은 나의 무지개 / 내 그림자는 빛의 정반대 / 내 언어는 정반대의 정반대 // 버스는 갈팡질팡 달린다 / 그래도 좋다   -<미망Bus> 전문

가장 먼저 등 돌리데 / 가장 그리운 것들 / 기억을 향해 총을 겨눴지 / 꼼짝 마라, 잡것들아 / 살고 싶으면 차라리 죽어라 / 역겨워, 지겨워, 왜 / 영원하다는 것들은 다 그 모양이야 / 십장생 중에 아홉 마릴 잡아 죽였어 / 남은 한 마리가 뭔지 생각 안 나 / 옛 애인이던가, 전처던가 / 그미들 옆에 쪼르르 난 내 발자국이던가 / 가장 먼저 사라지데 / 가장 사랑하던 것들 / 추억을 뒤집으니 그냥 시커멓데 // 나는 갈수록 추해진다 / 나쁜 냄새가 난다 / 발자국을 짓밟으며 나는 미래로 간다 / 강변 살자, 부르튼 발들아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 전문 

이런 시를 썼던 사람이, 어떻게, 아니 어떻게, 세상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난생 처음 써본, 시이자 팬레터를 끝내 발송하지 못한 까닭은 전적으로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온통 실패와 좌절과 굴욕과 오욕과 비애로 점철된 생애를 살아온 것만 같은 시적 화자와 달리 시인의 약력은 너무나 화려했던 것이다. 당초 시인과 시적 화자를 분리하여 헤아리지 못한 내 무지 탓이겠지만 그럼에도 그때 받은 충격은 실로 상당했다. 시집으로 추정컨대 그는, 삶의 기구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알콜중독자나 금치산자를 능가하는 인물로, 남들한테 인간 말종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한없이 처절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야 했는데, 약력이 말해주는 그는 소위 엄친아였다

나는 분개했다. 시집을 읽은 뒤 한동안 시달렸던 정신적 몸살이 마치 사기를 당한 것처럼, 그래서 보상을 받아야 할 어떤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당한 비극을 누군가 또 다시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 한 가지 경고를 남겨둔다. 만약 당신이, 삶의 곳곳에는 무수한 비밀들이 숨어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의 총체적인 모습은 대개 이력으로 압축된다고 여기는 독자라면, 또 시적 화자가 시인이고 시인이 곧 시라고 믿는 독자라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시집을 읽고 나서 얼굴이 시집 껍데기 만큼이나 샛노래지면서 한동안 끙끙 앓게 된다면, 이후로 절대 팬레터 따위를 보낸다고 스토커처럼 시인의 신상을 추적하지 말지니. 괜한 방정을 부렸다가는 배신감에 몸을 떨게 될 것이다

물론, 싱거운 농담이다. 시인의 화려한 이력을 알고 나서 잠시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 되긴 했지만, 내가 한때 시 같은 것이라도 끼적여본 경험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심 시인의 덕분이니 지금도 나는 그에게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다그런데 왜 나의 시작(詩作) 활동이 한때가 되어버렸는가 하면, 당연히 붙을 줄로만 알았던 신춘문예에 떡 하니 떨어지고 나서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는 현실을 통렬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나는 지금도 신춘문예에 자만 들어도 가슴이 미어진다

이천명의 다리가 떠오른다. 신문사 앞에서, 혹은 우체국 앞에서 주저하는 다리들. 검은색 갈색 구두들. 이천 명의 손도 떠오른다. 다방에서, 빈 강의실에서, 방바닥에서, 스탠드만 켜놓은 책상 위에서 원고지 위를 방황하는, 원고지를 거칠게 찢어버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수천 개의 손들. 느닷없이 뭉크의 그림이 연상된다. 크리스마스가 그리고 올 것이다. 남들은 술집에서, 교회에서, 혹은 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동안 이들은 일찍 귀가하리라. 신문사에서 보낸 전보가 없느냐고,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느냐고, 이들은 불안스럽게 가족들의 얼굴을 살펴볼 것이다. 어떤 사람은 1231일까지도 전보를 기다리리라. 11일자 신문을 펼쳐보는 떨리는 손들, 찌푸린 눈들, 신문을 집어던지는 성난, 혹은 맥빠진 동작들이 보인다. 자신의 친구가 응모했는데 당선자가 누군지 알고 싶다며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오는 본인도 있으리라.   -기형도 전집 p.276 <어떤 신춘문예> 중에서 

이 꽁트가 하나도 웃기지 않고 하염없이 슬프기만 한 까닭은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후로 나는 한동안 정말로 열심히 한국시를 읽어댔다. 시 아닌 모든 텍스트들이 더없이 시끄럽고 천하고 불결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읽기도 열심히 읽었지만 쓰기도 많이 썼다. 완성된 시는 내가 봐도 가히 한국시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을 파천황의 명작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당연하게도 그 시들을 모두 신춘문예에 출품하기로 결정을 했다단 한 편의 중복투고도 없이 오로지 메이저 신문사만 골라서. 어디까지나 내가 틀림없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리라는 근거없는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인의 궁기를 음식과 질병으로 표현한 시가 인상깊었다는 문태준 시인의 예심평을 읽었을 땐, 아무래도 당선소감을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웬걸, 믿을 수 없게도(물론 주위에서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모든 신문사에서 떨어졌다. 내 예상치 못한 낙방은 심보선 시인의 약력을 알게 된 것보다 훨씬 더 극심한 분노를 몰고 왔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하나같이 꾀죄죄하고 다들 나보다 훨씬 못 쓴 것 같았으므로 더욱 더 통분할 일이었다. 성질이 나서 그 길로 시 나부랭이 끼적이는 일을 때려치워버리기로 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자칫하다 내 꼴이 기형도의 꽁트에 나오는, 20년 넘게 신춘문예에 응모 중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릴까 염려되어 초장에 재빨리 나의 문학적 자질 없음을 인정하고 시작(詩作)에 대한 일체의 열망을 황급히 폐기해버렸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간혹 요즘의 한국시는 더 이상 대중에게 먹히지 않는다느니 재미가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여대는 건 아마도 원한 감정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역시 쓴 글은 얼마간 묵혀뒀다 봐야 제대로 보이는 법인가. 몇 개월 후 낙방의 충격에서 겨우 벗어나 신춘문예에 보냈던 시들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이런 게 붙을 리가 있나. 한때 나름의 시혼을 불태워가며 밤새워 적었던 시였건만, 다시 읽어보니 이럴 수가, 흡사 간밤에 서리를 맞아 시들어버린 꽃들처럼 죄다 상태가 처참하였다. 순간 나는 그 모든 시들을 한 톨의 미련도 없이 휴지통에 처넣어 영구 삭제해버리고 말았다. 며느리도 봐서는 안 되는 괴문서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기 때문에. 심 시인을 향한 순정어린 팬레터였던 내 첫 번째 시 역시 그렇게 다른 시들과 함께 일거에 몰살당하고 만 것인데, 지나고 보니 가끔은 그 시 하나만이라도 살려둘 걸 그랬지 싶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느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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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1-20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연히 이력을 먼저 보고 시를 읽기 시작해서 그 정도의 '배신감'은 느끼지 않았지만, 그 느낌이 어떠셨을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이력이라는 게 얼마나 그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가 생각해보면, 결국 그 사람의 일부분에 대한 정보뿐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력에 나타나지 않은 이력은 오히려 저렇게 시인의 입을 통해 쏟아내는 시 속에 더 잘 드러나지 않을까 해요.
저도 심 보선의 시, 참 좋아합니다. ^^

수양 2010-11-21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의 여운을 제대로 간직하기 위해선 제멋대로의 상상 속에서 자라난 시인을 그저 그대로 신비롭게 내버려둘 필요가 있는데, 저의 쓸데없이 과도한 스토커짓이 그걸 훼손해버린 셈이니 배신감도 뭐 다 제 탓이지요. 그러나 정말 이력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길기까지 했어요. 거의 120년은 사신 분 같았어요-_- 어찌나 놀랐던지;;;

자운 2011-09-10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음에 닿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심시인의 시를 저도 좋아합니다.
 
언니에게 민음의 시 165
이영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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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밤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밖에서 안으로,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차가운 칼날 같은 손잡이를 떼 낸다. 손잡이가 있으면 한 번쯤 돌려 보고 배꼽을 눌러 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볼 수 있을 텐데. 어머니가 방바닥에 늘어놓은 축축한 냄새들.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버섯들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면 어머니는 버섯 머리를 과도로 똑똑 따고 있었다. 손잡이를 어디에 붙여야 할까. 너는 아래쪽에 서 있다. 몸속이 어두워질 때마다 울음을 터트리는 이상한 반동. 축축하게 썩어 들어가는 안쪽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너는 봉긋하게 솟은 버섯 같은 자신의 심장에 손잡이를 대고 안쪽을 열어 본다. 거꾸로 자라나는 버섯들이 잠에서 깨어 어머니의 머리를 똑똑 따 내고 있다. 네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바깥에 두고 온 손잡이를 어두워서 찾지 못할 때, 아무도 없는 안쪽이 버섯 모양으로 뒤집어질 때, 너는 성에 낀 202호 창문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언니에게> 전문

슬픔은 상상력을 만나 유희가 된다. 그러나 그 유희에 동참하기에는, 내겐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시집이었다. 빈한한 시적 상상력을 탓할 뿐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시집이지만,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언니에게>라는 시만큼은 애틋하고 애틋해서 자꾸 읽어보게 된다. 그러게, 손잡이는 어쩜 버섯같이 생겼을까. 손잡이-버섯-심장-축축한 냄새... 언어는 또 다른 언어를 상상하고, 다정하게 부르고, 불러온 혹은 불어온 언어들이 서로 찰지게 아귀가 맞아서, 서로 다정하게 이어져서, 낭창낭창한 시 한 벌이 되었다. 나에게는 이 시가 곧 "손잡이"와도 같아서, 이 시를 "돌려보고 배꼽을 눌러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보고" 하다보면 문득, 내 가장 축축하고 어두운 안쪽에 버섯처럼 피어있는, 모든 언니같은 것들을 왠지 가만히 불러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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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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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살률은 흔히 실업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안녕과 건강의 정도를 대변하는 척도인 것처럼 얘기된다. 그러나 자살을 사회의 보살핌 속에서 예방되어야 할 정신 질환 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책에 따르면, 아테네에서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독약의 공급을 행정장관이 관리했는데, 죽고 싶은 사람은 그 이유를 원로원에다 진술해서 공식 허가를 받기만 하면 되었다고 한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인의 방침은 이렇게나 쿨하다.

   
  누구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자로 원로원에 나아가 그 사유를 진술하여, 허가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일이다. 삶이 혐오스러우면 죽어라. 비운에 사로잡혔을 땐 독약을 마셔라. 비탄에 빠지면 목숨을 버려라. 불행한 자는 자신의 불행을 상세히 열거하고 행정장관은 그 치료법을 제공할진저, 그러면 그의 불행이 끝나게 되리라. -p.92  
   

그리스인들에게 자살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책이었다면, 로마인들에게 자살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영예(노예는 자살할 수도 없었다고)이자 뛰어난 의지를 보여주는 영웅적인 행위였다. 그들에게 자살은 용감하고 고상하게 죽을 수 있는 최상의 길이었다. 초기 기독교 시절에도 자살은 덕행이었는데, 그 시절 대표적인 자살행위였던 순교는 천국으로 직행하는 열쇠였으므로 언제나 동경과 찬미의 대상이었다. 자살이 본격적으로 심한 도덕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이후의 일이다. 죄악이고 범죄였던 자살은, 뒤르켐의 <자살론> 이후 사회적 분석대상이 된다. 프로이트는 자살을 질병으로 만들었다.

유사 이래 자살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이토록 다양한 까닭은 자살의 동기나 경위가 몹시 개별적이고 복잡난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폐쇄된 자기논리 속에서 자살을 감행한다. 예를 들어 이 책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실비아 플라스라는 여류시인은 생의 감각을 극도로 일깨우기 위해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자해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주기적으로 자살을 감행하고 또 용케도 살아난다. (물론 그녀는 불사신이 아니었다. 3회차에 죽었다.) 그녀의 자살 시도는 구조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 행위였다. 마치 원시 부족의 소년들이 맹수 사냥에 성공하여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그녀는 자기를 파멸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고 또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생의 감각을 회복했던 것이다.

예전에 어머니가 근무하시던 한 중학교에서 한창 목조르기 놀이라는 게 유행했었다. 어머니는 학생의 안전을 책임진 교사로서 이 듣보잡의 세기말적 유희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학생들 사이에서 이 놀이의 명성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숨이 막혀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서로의 목을 졸라주거나 또는 자기 목을 조르는 이 놀이는, 일시적인 산소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별의 별 자살의 경위가 다 있음을 실감케 하는 놀이가 아닐 수 없다. 

자살에 대한 내 생각은 그리스인의 그것과 비슷하다. 영웅적이기까지는 아니어도, 자살은 자기 삶을 불의의 습격에 방치하지 않고 스스로 적절한 순간에 완결 짓는 나름의 합리적인 행위가 아닐까. 자살은, 만약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성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한 종류라면, 길 가다 차에 치여 죽거나 건물에 깔려 죽느니보다 훨씬 더 품위 있고 위엄 있는 죽음의 한 방식일 것 같다. 이때의 자살은, 그 어떤 죽음의 경로 가운데서도 인간의 존엄이 가장 잘 유지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딜레마는 이와 같은 이성적인 자살이 다분히 ‘이상적인 자살’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수양이 잘 되어 자살의 그 냉혹한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현대인으로서 그같이 수련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괴물과 같은 존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자살이 실제로 논리적일 경우, 그것은 논리적인 만큼이나 또한 비현실적인 것이 되기 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탈리아 작가 파베제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자살을 왜 하느냐고? 왜 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살에의 충동은 동시에 끊임없이 살 이유를 생각하고 실존적 의문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확실히 생에 유익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정신의 피폐를 보여주는 증상이라고 일축할 일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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