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0
소스타인 베블런 지음, 홍기빈 옮김 / 책세상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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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베블런은 자본의 착취가 노동자의 잉여노동 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 전체의 생산력까지도 아우르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사회 공동체 전체의 생산력이란, 공동체가 오랜 세월에 거쳐 누적해온 지식과 기술로부터 비롯하는 능력을 말한다. 최첨단 기술이나 기계도 사실상 개인의 독창적 발명품이 아니라 공동체가 수세기에 걸쳐 누적해온 기술과 지식과 사고능력과 창조력의 총화가 빚어낸 성과물인 것. 이러한 역사적 성과물을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소유하여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로 전유한다는 것은 공동체 전체가 지닌 무형자산을 일방적으로 갈취하는 것과 다름 없다.(베블런이야말로 인지노동 담론의 원조인 듯. 베블런의 논리에 따르면 특허권이나 저작권 같은 권리도 사실상 권리로서 주장하기 어려운 종류가 될 것 같다.)

 

베블런의 사상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구별되는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산업자본주의를 분석했다면, 베블런이 분석한 것은 자본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금융자본주의였다. 베블런은 ‘자본이 생산을 지배하는 구조’ 위에 ‘금융이 자본을 지배하는 구조’를 하나 더 올려놓는다. 수탈구조가 이중적으로 일어나는 셈인데, 이런 구조 속에서는 '재화시장에서 시장을 지배하는 자본가들의 움직임'과 '금융시장에서 자본을 운용하는 금융거물의 움직임' 사이에 흥미로운 유비가 가능해진다. 

금융시장에 하나의 상품으로서 투입된 기업자본은 이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데 사활을 걸게 된다. 기업자본의 상품 가치를 매기는 것은 금융시장의 행위자들, 즉 금융거물들이다. 그들은 “기업이 앞으로 창출할 수익의 흐름을 현재 가치로 환산한 것”을 기초로 하여 그 기업의 가치를 매긴다. 이것은 사실상 “그 기업이 앞으로 경제적 과정을 둘러싼 사회 전체에 대하여 얼마만큼의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나 다름없다.

기업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용을 최대한 유연하게 하고 장기성과를 내는 투자는 가급적 억제하려고 한다. 앞서 유비가 가능해진다고 했듯이, 자본시장에서의 기업을 재화시장에서의 노동자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면, 기업의 이러한 전략을 꼭 이윤추구에 사활을 건 탐욕스런 행동이라고 볼 수만도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것은 금융시장에서 착취(?)당하면서도 어떻게든 자기가치를 높여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기업 나름의 필사적인 발버둥이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필사적인 발버둥의 최종적 희생양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라는 점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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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최일붕 지음 / 책갈피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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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월 혁명은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일으킨 무력정변이었는가 아니면 민중의 자발적인 역량이 일구어낸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나. 이 책의 저자는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10월 혁명이 소규모 음모 집단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볼셰비키가 대중정당이었다는 사실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또한 그 당이 노동자 권력을 위한 조건들을 혼자 힘으로는 창출할 수 없었다는 점도 무시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10월 혁명이 복잡한 사회경제적 격변과 정치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대중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각성하여 이루어낸 혁명이었으며, 결코 볼셰비키가 대중의 불만이나 혁명적 감정을 조장한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저자는 1917년 러시아 노동자 국가와 스탈린 치하의 관료 획일체 사이에 완전한 단절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스탈린 정권 이후 혁명의 정신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는 저자의 이러한 관점을 내가 신뢰하기 어려운 까닭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억 때문이다. 

책날개에는 이 책의 저자가 현재 ‘다함께’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나와 있다. 나는 신문 읽을 때에도 정치면을 읽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일 정도로 정치 쪽으로는 영 까막눈이지만 ‘다함께’라는 정치조직에 대해서라면 한 가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게 있다. 지난 촛불 정국 때 집회에 몇 번 참가했던 일이 있는데, 거기서 목격한 ‘다함께’의 활동 모습은 지금 생각해 봐도 퍽 인상적이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은 대중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집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선각자적 나르시시즘과 권위주의에 젖어서 대중을 지도하고 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전형적인 선동꾼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정치적 이념이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대중과 접촉하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상당히 문제가 많은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정치적 이념에 대해 호의를 품었던 사람들조차도 반감을 느끼고 죄다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하물며 요즘은 신제품 광고도 그렇게는 안 하는데.     

전형적인 선동꾼의 면모를 보여주던 정치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러시아 10월 혁명의 의의를 민중의 자발적인 역량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매우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결과적으로 나로 하여금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오히려 러시아 혁명이 과연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볼셰비키는 부르주아들과는 또 다른 통치전략을 가지는 권력집단에 불과한 게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는 1917년의 소비에트 국가가 20년대 초에 일당국가로 대체되어버린 까닭을 결코 레닌 개인의 권력의지 때문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무능과 더불어 자본주의 열강의 위협이 극에 달했던 국제 정세의 불가피성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지만, 이런 논리는 설득력 있게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위험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논리대로라면 과거 우리나라 독재정권의 정당성도 얼마든지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볼셰비키는 얼마나 대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당이었을까. 만약 볼셰비키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었다면(그런 정당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거의 국가 폭력이나 다름없던 곡물징발정책과 크론스타트 봉기에 대한 잔학무도한 진압은 어떻게 해명되어야 하는가. 특히 크론스타트 사건과 관련해서는, 트로츠키의 언급처럼 진압이 비록 '비극적 필요'였을지라도, 이 책의 저자가 볼셰비키를 두둔하기 위해 꺼내들고 있는 변명들(크론스타트 수병들이 유대인을 혐오하는 구시대적 집단이었다거나, 정치위원이라는 트로츠키의 직책상 그에게 군사적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는 주장)은 뭔가 옹색해 보인다.  

러시아 혁명의 세부 사정을 알아갈수록 10월 혁명이 결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었다는 자율주의자들의 의견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혁명’이라는 용어 자체가 굉장히 신중을 기해서 사용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 용어는 신중함을 넘어서 가급적이면 지양되어야 할 용어인 것 같다. 혁명은 모든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무화시키고, 반동의 반동을 낳으며, 이성이 마비된 극단적 유혈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진리의 관철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 살인과 파괴와 폭력이 수반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움베르트 에코의 말이 유용할 것 같다.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혁명은 결코 낭만적인 구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최악의 카드다. 더 이상 아무런 카드도 남아있지 않을 때 절망적으로 꺼내들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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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Beloved Shostakovich - Great Composers Series
쇼스타코비치 (Dmitry Shostakovich) 작곡 / 이엠아이(EMI)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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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를 알게 된 것은 영화 삽입곡으로 유명한 왈츠 2번 때문이었지만, 음반을 들어보니 정작 이 왈츠곡은 쇼스타코비치만의 특색이 그다지 두드러지지는 않은 곡 같다. 작곡가 베스트 시리즈라는 이 음반, 특히 첫 번째 CD를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한없이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정서다. 심지어는 1917년이라는 제목이 붙은 교향곡 12번에서조차 이런 정서가 느껴진다. 영광과 기쁨을 구현하는 음악 속에서도 어찌할 수 없이 드러나는 긴장과 불안을 어찌할 것인가. 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기묘한 정서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날카로운 눈빛을 두리번거리며 어디 전투라도 하러 떠나야 할 것 같은 심정이 된다. 그러나 긴장이 과하면 피곤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선 사람을 혹사시키는 음악 같기도 하다. 혁명 당시 구소련의 분위기란 대체로 이런 것이었을까. 씩씩하고 진취적이고 거침없으나 내심으로는 항상 뭔가 의심스럽고 불안하며 그리하여 종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로감마저 몰려오는 이런 기분이 오늘날 그닥 낯설거나 생급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까닭은 또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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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때 이 여자들이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각을 달리 해보게 되었다. 표백된 일상을 전시한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악취와 비린내가 진동하는 삶의 비밀에 대해 함구할 줄 안다는 얘기일 텐데. 수치스럽고 남루한 것을 조용히 묻어둘 줄 안다는 것, 이건 아마도 어른들의 세계에서의 기본적인 양식인지도 모른다. 덮거나 가린다고 해서 악취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은 그것을 애써 견디고 있는 것이리라. 참고 견디되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사력을 다해 아폴론적 포즈를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녀들은 마치 발레리나 같다. 발레리나처럼 우아하다. '어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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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1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클리퍼드 하퍼 그림,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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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처음 읽는 청소년에게 권하는 책'이라지만, 성인이 읽기에도 충분히 유익한 책이다. 네안데르탈인이 등장했던 시기부터 공산체제가 붕괴되기까지의 역사를 저자의 자상한 설명을 따라 부담없이 훑어볼 수 있다. (그러나 곰브리치 세계사는 사실상 1차세계대전까지를 그 완결된 형태로 봐야 할 것 같다. 이후의 서술은 곰브리치 자신이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인지 객관성이 좀 떨어지고 내용도 다소 허술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를 독자로 상정하고 쓰여진 책이라서 저자가 가급적이면 복잡한 용어들을 안 쓰려고 많이 노력한 것 같다. 어린 독자들이 따분해 할까봐 본문 곳곳에 위트와 유머를 적당히 배치해 둔 것도 이 책의 묘미라면 묘미겠다. 다만, 웬만한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보다도 더 심하게 유럽 편향적이기 때문에 세계사라기보다는 차라리 유럽사라고 하는 편이 양심적일 것 같다. 세계사 입문서로도 좋지만 서구 유럽 역사의 큰 줄기를 개관해 보기에도 적당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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