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 3집 - The 3rd Cliche [2CD] [재발매]
윤상 노래 / 새한(km culture)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절판되었다가 작년에 재발매된 음반. 절판 당시 희귀음반이었을 때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는데(내가 직접 그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목도했음) 그때 각혈하며 중고음반 샀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음반에 들어있는 곡들은 벌써 나온지가 십 년이나 지났지만 요즘 나오는 노래들에 견주어도 하나도 꿀리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세련되게 느껴진다. 흔히 윤상 노래를 두고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도회적 감수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 생각엔 아무래도 특유의 목소리가 큰 몫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사람 목소리는 확실히 들으면 들을수록 심수봉만큼이나 사람을 후벼 파는 무언가가 있다. 뭐랄까, 마치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고매한 뜻을 이루지 못한 어느 재야 지식인의 애환이 담긴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애상이 진하게 묻어나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애써 절제하고 추스르려는 목소리다. 의지로 감정을 단속하려는 사람 특유의 고상한 결벽이 느껴진다. 그래서 언뜻 들으면 무심하고 차갑고 건조한 음색이지만 자꾸 들어보고 있으면 정한이 느껴지고 계속해서 들어보고 있으면 이건 뭐 세상 다 산 사람 목소리로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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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10-12-21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SS 구독자입니다. 덕분에 이런 희소식도 접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수양 2010-12-2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소식을 들려드리게 되서 저도 좋네요^^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타리크 알리 지음, 정연복 옮김, 필 에반스 그림 / 책벌레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1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맑스의 이론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혁명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변종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러시아 혁명은 인식이 현실을 변용하는 역사적인 예였다는 점에서 중요해 보인다. 혁명 당시 러시아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는 맑스가 하나의 참조할 만한 이론이 아니라 교리였다는 사실, 그러니까 강력한 자기이행적 예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놀랍게 느껴진다. 사상과 문학 모두 인간 욕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동색이지만 사상이 문학보다 훨씬 더 무서운 까닭은 그것이 결코 가정법을 쓰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사상을 통해 ‘희망’하거나 ‘상상’하지 않고 ‘인식’한다. 가정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 사상이야말로 욕망이 가장 무자비하고 강력한 형태로 관철되는 형식인 것 같다.   

2 이 책은 다소 난삽하다. 트로츠키 소개서임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라는 사람을 정말로 알고 싶어서 읽어보려는 사람에게는 그닥 도움이 못 된다. 트로츠키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볼셰비키나 멘셰비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을 리 만무한데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와 관련해서 이 책에 나오는 두 정당에 대한 설명은 너무도 간소하다. “오늘날에도 이 대회는 새로 출범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을 레닌이 지도하는 볼셰비키파(다수당)와 마르토프와 그 외의 사람들이 주도한 멘셰비키파(소수파)의 두 분파로 갈라놓은 정치적 논쟁으로 유명하다. 머지않아 이 두 분파는 혁명에 관해 상반된 입장을 보이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두 정당으로 굳어진다.” 으응?

3 삽화가 많이 들어있으니 한 두 시간 정도면 훑어보고 트로츠키가 누군지 대충 아는 척은 할 수 있겠구만 싶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네이버 검색도 모자라 러시아혁명에 관한 MBC 5부작 다큐까지 구해봐야 했다. 이런 경우에 당면할 때마다 김경욱의 단편 <위험한 독서>에 나오는 독서치료사처럼 내게도 독서 가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사업은 정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책이 또 다른 책을 소개해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지적인 멘토도 없고 학문기관의 덕을 입지도 못하는 내 독서활동은 마치 근본도 모르고 정처도 없이 그저 어디 먹을 만 한 게 없나 이곳 저곳 들쑤셔가며 하루를 근근이 면하는 게으른 도둑고양이의 삶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 어디에도 구애됨 없이 자유롭지만 대체로 깊이와 품위가 없고 때로는 주변의 딱한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4 이 책 몇 부분은 MBC 러시아혁명 다큐에서 본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다. 이 책 69쪽에는 단순히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 장군과 결탁해 소비에트를 전복하려고 했다고 나오고 있지만, 다큐에서는 케렌스키가 처음에는 극좌파의 쿠테타를 염려해서 코르닐로프 군대를 수도로 이동시켰다가 나중에서야 코르닐로프의 쿠테타 가능성을 의심하고 그를 총사령관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나온다. 해임을 수락하지 않고 수도로 진입하는 코르닐로프의 반혁명군대를 제압한 것은 볼셰비키당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노동자들이었다. 쿠테타가 실패하자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와 음모를 꾸민 우파 반혁명세력으로 낙인찍혀 몰락하고 만다. 소비에트 좌파와 대중들은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와 함께 공모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그와 단절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어쩌면 케렌스키로서는 억울한 오해였는지도 모른다. 155쪽에 나오는 키로프 암살 부분 역시 다큐의 내용과는 상이하다. 이 책에는 스탈린이 키로프의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나오고 있지만, 다큐에 나오는 여러 학자들은 실제로 스탈린이 키로프를 암살했을 가능성은 희박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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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225페이지에는 자신이 얼마나 문학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리서치 문항이 들어있다. 저자가 심심해서 작성해본 것이라고. 
 
1. 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씩 문학 분야의 책을 읽는다: 날마다는 아니어도 한 달에 총 30페이지 이상은 읽는다.
2. 홀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무언가 메모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내 핸드폰은 메모장이나 다름없다. 문자의 9할이 스팸인 걸 보면.
3. 문득 얼마나 오랫동안 시를 읽지 않았는지 깨달아질 때가 있다: 시는 틈틈이 읽는 편.  
4. 서점에 가면(책을 살 것도 아니면서) 문학코너를 꼭 둘러본다: 가끔 충동구매를 하기도.
5. ‘백석’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백석’이라는 발음 자체가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 같다. 옛날에 백석의 시에 대해 몇 자 적어본 게 있다.
6. 아무런 이유 없이 포털 사이트를 통해 시인과 소설가의 이름을 검색해본 적이 있다: 나는 한때 아무개 시인의 중증 스토커였다(지금은 고쳤다).  
7. 시인이나 소설가의 블로그나 홈피 방명록에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김소연 시인의 블로그에 글을 남긴 적이 있다.
8.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누군가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하다: 습관적으로 표지를 확인하고 괜찮은 경우 얼굴도 확인한다.
9. 신문의 책 광고나 서평 기사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신문을 잘 안 읽어서 패스.
10. 문학전문 출판사 이름을 세 개 이상 알고 있다: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
11. 최근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모름.
12. 문학잡지를 다섯 차례 이상 사본 적이 있다: 자랑하는 건데, 계간 창비에 독후 소감을 보낸 게 당첨되어 일 년 구독권을 선물 받았다.      
13. 자신에게 문학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권위에의 호소를 하자면 사주 봐준 아저씨가 그렇다고 했다.
14. 경제와 정치, 스포츠에 휘둘리는 삶에 자주 염증을 느낀다: 음. 그런 것 같다.
15.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신인 공모에 응모해본 적이 있다: 있다. 다 떨어졌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나는 ‘현저하게 문학적 자의식을 가진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이다. 15문항 모두 예스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문학병 말기 환자' 평가를 받을 뻔 했다. 나는 문학을 사랑하지만, 삶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될 수 있으면 문학을 멀리하고 싶다. 이것은 그러니까, 너무 멋진 남자를 일부러 외면할 때의 심리와도 비슷하다. 물론 이런 말을 한다는 건 퍽이나 가소로운 일이겠다. 내 모든 방면의 독서가 그러하듯 나는 아직 문학의 숲에 깊숙이 진입하지도 못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문학이 그것이 발산하는 매력에 비해서 너무나 연약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종교와 예술(문학)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역시 너무나 연약하다. 연약하고 무력하다.  

앞으로 책 읽을 시간이 나면 되도록 사회과학서적을 읽어보자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 건, 그런 책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딱딱하기 때문이다. 딱딱한 책이 좋다. 나를 딱딱하게 만들어 주니까. 내가 좀 더 딱딱한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구조가 딱딱 나누어지고 논리가 딱딱 서서 전달할 말만 딱딱 했으면 좋겠다. 정한과 회한과 감상에 젖어 쓸데없이 수다스러워지고 싶지 않다. 그런 식의 유약하고 낭만적인 태도는 실생활에 장애가 되면 되었지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문학적 정취에 잠긴 생활을 견제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맑스는 처절하게 분노했지만 자본론을 남겼다. 나는 그것이 분노를 표출하는 우아하고 고차원적인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선언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문학적 자의식을 가진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이라니,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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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헤는밤 2010-12-2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님 안녕하세요 ^^ 처음 뵙습니다.
알라딘 서재를 즐겨찾기 해놓고 가끔 들르던 유령독자입니다. ^^
오늘 글 읽으면서 수양님의 위트 덕에 함박 웃으며 저는 어떤 독자인지 나름 질문들에 답해보았네요.ㅎ
저로서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걸쳐있는 -어느 쪽도 아닌- 책을 보고 있다보니, 문학적 자의식을 지니신 수양님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

blackpearls.tistory.com 까만진주씨

수양 2010-12-2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서치에 참여해주신 점 제가 작가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 또 함박 웃으시라고 나름 위트를 구사해 본 건데 웃어주시길 바래요. 큭큭
 

나른한 비 / 함기석

삭발머리 소년 로꾸거가 뒤로 걷는다
찰방찰방 빗길을 걷는다
구두 가게로 들어간다
구두를 벗어주고 돈을 받아 나온다
이발소 뒷문으로 들어간다
머리를 길게 길러서 앞문으로 나온다
죽음이 웃는다 죽음은
카페 창가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체크무늬 넥타이를 매고 있다
횡단보도 앞에서 소년이 묻는다
아저씨 거기서 뭐 하세요?
죽음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도 네 아빠처럼 샐러리맨이야
오늘 밤 아들에게 살해될 한 노인을 기다리는 중이야
요즘은 일이 많아 매일매일 야근이란다
소년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신호가 바뀌자 차들이 일제히 뒤로 달린다
빗방울은 하늘로 떨어지고
달랑달랑 불알을 흔들며 저녁이 온다
담배가 점점 길어진다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감아서 들으면 피가 모자라다는 악마의 소리가 나온다고 떠들썩했던 때가 있었다. 혹시 시인은 거기서 무슨 시적 모티브라도 얻은 것일까. ‘나른한 비’라는 제목처럼 이 시에서 소년은 시간을 되감는 나른한 환각 속에서 멸(滅)하는 것들과 대면한다. 빗방울이 하늘로 떨어지고 차들이 일제히 뒤로 달릴 때, 죽음은 카페 창가에 앉아 고독하게 술을 마시고 저녁은 "달랑달랑 불알을 흔들며" 선정적으로 다가온다. 모든 것이 뒤로 가는 시간 속에서 현실적인 것은 오로지 이 둘 뿐이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을 크레바스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이 시는 크레바스의 시간대에 대한 기록 쯤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걸 기록할 만한 능력은 오로지 소년 ‘로꾸거’에게만 있겠다. 우리는 기록으로서의 시를 읽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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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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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도언이 2004년에서 2009년 사이에 쓴 일기. 김도언의 일기여서 재미있는 건지 남의 일기여서 재미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남의 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 같은 이들을 겨냥한 책인 것 같다. 그러나 ‘소설가의 일기’라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 말의 조합인가.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자신의 인생마저 소설처럼 만들어버린 소설가들 몇몇을 알고 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가게 간판 밑을 회의 없이 지나간다. 회의하지 않을 때 사태는 더욱 멀리 달아난다. 나는 회의하지 않는 이들과 무엇 하나 나눌 게 없다고 생각한다. 회의는 사태의 세포를 분열시킨다. 회의는 누룩 속에 피는 곰팡이처럼 시간의 엷은 막에서 태어나 맹렬하게 사태의 형질을 전환시킨다. 그것은 내가 죽어가는 생물이라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다. 회의에 기대하고 회의에 의존하는 방식, 이것은 뚜렷하게 비극적이다. 뚜렷하게 비극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대체로 비극처럼 보이지 않는다.  -2009.5.6. 수요일의 일기 中에서
  
그에게 ‘사태’란, 회의하지 않으면 달아나 버리고 회의하면 분열해서 형질이 변해버리는 어떤 것이다. 그는 사태를 회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태에 대해서 ‘회의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황’마저 회의하고 있는 것 같다. 굉장한 회의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일기라고 하기에는 수상쩍고, 소설이라 하기에는 정직하고, 잠언이라 하기에는 노골적인 이 책은 바로 그 회의주의의 산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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