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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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혁신과 전복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미술사는 철저히 좌파의 역사다. 보수적인 것들은 반드시 몰락한다. 미술사에서 가치있게 기록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전례 없는 시도를 감행한 혁명적인 것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이 책을 볼 때마다 가장 뭉클하게 여기는 작품은 아래 두 가지다. 이 작품들이 지닌 혁명적 요소는 아주 사소한 곳에 있다.

<전사의 작별>이라고 불리는 이 화병은 그리스인들이 만든 것으로, 가운데 서 있는 남자의 왼쪽 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 곰브리치는 “기원전 500년 조금 전에 미술 역사상 최초로 발을 정면에서 본 것을 그리는 시도를 감행했을 때 그것은 미술 역사상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화병이 제작되기 이전의 그리스인들은 사람의 발을 저렇게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문명의 초창기 시절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의 화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모든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인다고 여겨졌던 형태”로 그렸다고 한다. 가령 물고기가 헤엄치는 연못을 그린다고 했을 때, 그들은 아마도 물고기는 아가미가 보이는 옆모습으로, 연못은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그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발 또한 언제나 측면에서 관찰된 형태로만 그려 넣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화병의 제작자는 최초로, “더 이상 모든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인다고 여겨졌던 형태로 그림 속에 담으려고 시도하지 않고 대신 그가 대상을 바라본 각도를 참작하여” 발 그림을 그려 넣는다. 이 화병을 만든 그리스의 어느 이름모를 도자기 장인은, 자신이 그동안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을 최초로 발견함으로써 미술사적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회화기법에서의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은 수세기를 지나 14세기 조토의 그림(아래)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만 한 것은 예수 앞에 쪼그리고 앉아 화면 한 가운데를 가리고 있는 녹색 옷의 남자다. 조토 이전의 중세 화가들은 천 년의 세월 내내 공간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순전히 평면적인 그림들만 그려왔다. 조토는 과감히 화면 중앙의 등장인물들을 겹쳐서 배치함으로써 천 년여간을 지속해온 평면적 화풍에 최초로 공간감과 깊이감을 불어넣었다. 조토가 벌인 초유의 실험은 이후 원근법으로 발전하여 르네상스 미술이 꽃피는데 결정적으로 일조하게 된다. 

분명 조토는 기존의 방식에 답답함을 느끼고 무언가 새롭고 효과적인 회화기법을 시도하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조토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르네상스 시기 이후 발달했던 근대적 회화기법의 개념 자체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그토록 머리를 쥐어짜며 시도하려던 것이 원근법적 기술이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 그러나 그는 결국 해냈다. 원근법의 맹아를 보여주는 이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그는 또 한 번의 혁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아는 대로 그린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술사는, 특히 회화의 역사는 인류의 인식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인의 화병과 조토의 프레스코 벽화가 말해주듯이, 후대의 인류에게는 너무나 쉽고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는 '무언가'가 현재의 우리에게는 감지하기조차 불가능한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런 '무언가'들이 이미 세계 도처에 넘쳐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주 먼 훗날, 그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그토록 못 보고 있었는지, 그러나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자명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폭소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무나 말도 안 되고 기가 막혀서! 바라보는 방식의 일대 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런 것들은 우리 눈에 절대로 안 보일 테지만, 만약 우리에게도 기적적으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곧 인류 역사를 장식하게 될 새로운 혁명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오랜만에 다시 펼쳐보게 된 것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당대, 2005)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사적 동학에 근거하여 근대세계체제의 종말을 전망하고 있는데, 사실상 그가 예견하는 근대체제의 종말이란, 기존에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 갖고 있던 모든 확고한 인식의 틀이 붕괴하지 않고서는, 그리하여 이전의 세대가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줄 아는 새로운 인류가 출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새로운 주체의 출현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미술사적 사례 가운데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위의 두 작품들이었다. 오랜만에 곰곰이, 한참을 바라봤다. 인식의 혁명을 이루어냄으로써 각각 그리스미술과 르네상스미술의 맹아가 된 저 기적같은 두 작품을.

<전사의 작별>, 기원전 510-500년경. 에우티미데스의 서명이 있는 적회식 도자기, 뮌헨 고대 미술관
<그리스도를 애도함>, 조토, 1305년경. 파도바의 델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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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8 0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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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2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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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총서 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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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철학자들>에서 하일브로너는 복지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국가가 경쟁에서 도태되고 희생된 자들을 구휼함으로써 시장을 견제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국가와 시장이 결코 상호대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둘은 보완적 관계를 이루어 자본주의체제를 견고하게 만든다. 월러스틴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역할은 경쟁에서 배제된 자들이 완전히 도태되어 시장 활동 자체를 못하게 되지 않도록 그들을 적당히 구휼하고 또 이를 통해 사회적 불안을 해소해서 장기적으로는 노동공급 확보와 유효수효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칠게 말하면, 시장은 공동체 사회를 파탄내면서 거기서 생명과 활력을 얻고, 이렇게 시장이 파탄낸 공동체 사회를 국가가 다시 어느 정도 시장의 구미에 맞게 재정비해 놓으면 시장이 또 다시 파탄내고 하는 이러한 일련의 반복적 과정이 곧 자본주의체제인 셈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는 이렇게 국가와 시장의 쌍끌이작용(?)과 더불어 헤게모니 국가의 지속적인 교체(네덜란드-영국-미국) 속에서 돌아간다. 그런데 왜 헤게모니국가는 지속적으로 교체되어야 하는 걸까. 일단 헤게모니지위를 차지한 국가는 후발주자국가들의 성장으로 인해 점차 생산에 대한 독점력이 줄어들고 헤게모니 지위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지금의 미국의 경우와 같이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월러스틴은 이런 식으로 조만간 망하는 게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고 본다. 자본주의세계체제 그 자체도 종언을 고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적으로 생산비용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임금(노동력을 착취할 제3세계 지역이 점차 전세계적으로 줄어들어가고 있음- 더 이상 공장이전할 곳이 없음), 생산재료비(생산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환경오염처리비용이 가면 갈수록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늘어남, 자연자원은 고갈되고 폐기물 매립지는 점차 줄어듦. 이 모든 난관이 결과적으로 생산비 상승을 불러일으킴), 세금 내야 할 비용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 수지가 맞으려면 판매 가격이라도 올라야 하는데, 이마저도 더 이상 오르기 힘들다. 자본주의체제가 발달할수록 모든 나라의 생산력이 향상되어 너도나도 생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생산의 과점적 조건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는 와중에 체제에서 도태되고 약자가 된 집단들의 투쟁은 격화된다. 문명, 민족, 종교, 인종 기타 등등 사이에서 갈등과 투쟁은 첨예화되고 사회는 점점 더 카오스 상태로 되어간다.

월러스틴의 이론대로 생각해 봤을 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가 다음 주기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미국식 축적시스템(법인기업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축적시스템이 생겨나야 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국가간체계 또한 재조직되어야 한다. 과연, 인류는 현재의 자본주의체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축적시스템을 개발해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네덜란드-영국-미국의 계보를 잇는 다음 주자를 탄생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인류는 몇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체제 그 자체를 뛰어넘어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구축해낼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세계체제 이후의 어떤 체제를 상상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인류 전체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에 대한 상상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인류 정신의 대격변이었듯이, 체제 자체의 전환이라는 것 역시 정신의 개벽일 것이다. 사회제도나 경제체제는 물론이고 생활양식, 풍습, 가치관, 예술사조 등 각 방면에서 근본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인식의 틀을 가진 주체가 도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과연 인류는 또 한 번 정신적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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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영원한 /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결정적인 순간 인생을 방관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에게 배신자가 된다. 뒤늦게 모반이니 전복이니 운운해보지만 그런 계획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모반을 막기 위해 모반을 궁리하고 전복되지 않기 위해 전복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복종하고 순응해야 할 대상이 없으면 나는 무너질 것이다. 그런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을 꿈꾸는 일이 바로 내 삶의 운동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니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어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도 나는 영원히 그럴 수 없으리라. 끊임없이 갈망하기 위해서는 갈망을 낳는 이 구조가 결코 전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알라딘 서재라는 것도 말하자면 일종의 갈망의 제스처(약간의 허영기가 가미된)를 보여주는 공간이 아닐까. 가장 그리운 것들은 가장 먼저 등 돌린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사실 그리운 것들을 가장 먼저 배신하는 것이 나인지 모른다. 그런 혐의로부터 죽을 때까지 떳떳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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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가계’로 상정하는데, 이 가계의 수입원은 꼭 임금만이 전부가 아니다. 특히 제3세계의 경우, 자급생산에서 얻는 수입이나 소상품생산으로 인한 수입 등 하나의 가계 안에 여러 가지 수입원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 월러스틴은 임금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수입원을 가지는 가계를 반(半)프롤레타리아 가계로, 임금이 가계 수입의 절대적 비율을 차지하는 가계를 프롤레타리아 가계로 지칭하고, 자본가가 프롤레타리아 가계보다 오히려 반프롤레타리아 가계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화(化)가 덜 된 반프롤레타리아들을 고용하는 편이 좀 더 효율적인 착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최저 임금선보다 임금을 더 적게 줘버리면 노동력 재생산이 불가능해지므로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반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최저 임금선보다 임금을 적게 주어도 부수적인 수입원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노동력 재생산이 가능하다. 임금 외 수입원 때문에 근근이 생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반프롤레타리아 가계가 많은 사회에서는 고용주가 반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절대적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할 수 있게 되고, 노동자는 자신이 이전시키고 있는 잉여가치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고용주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주워듣기로는, 실제로 산업발전 시기 남미에서는 노동자가 가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노동력마저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자의 초과착취가 일어났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가 무리 없이 잘 돌아갔던 까닭인즉, 노동자들 사이의 호혜적 관계에 바탕을 둔 증여경제(앞서 월러스틴이 말했던 자급생산이나 소상품생산이 유통되는 경제)가 당시 첨예했던 시장경제의 모순을 훌륭하게 보완해 주었다는 것이다. 가계 내의 자급생산이나 소상품생산,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호혜적 증여 경제’- 이것은 곧 시장경제 체제 안에 존재하는 비-시장경제적 부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시장경제적 부문이란, 곧 체제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외부’다. 말하자면, 체제 안에 존속하는 외부가 체제의 균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수단으로 소용된 셈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을까. 착실한 양분으로 공급되는 ‘외부’가 아니라, 곰팡이처럼 혹은 종양처럼 자라나는 발칙한 ‘외부’를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증여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기생하는 방법, 화폐의 운동으로 돌아가는 경제에 화폐 개념 없는 경제가 기막히게 편승하는 방법, 가난한 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화폐가 별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의 경제가 시장경제체제의 잉여를 효과적으로 향유하는 방법을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의식구조가 탈자본주의적으로 전환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물질에 대한 도착적 욕망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방법이야 무수하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길(금욕이 아니라 해탈)이 참으로 요원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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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니에 따르면 인간의 생산 활동의 동기는 종교적 신념, 정치적 충성, 법적 책임감, 공동체적 계율, 이념과 사상, 명예와 자부심, 용기, 권력욕 등 실로 다양한 원천에서 비롯한다. 경제학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때로는 비합리적이기까지 한 미묘한 심리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이 이익추구라는 경제적 동기에 의해 활동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하나의 물리적 현상으로 패턴화하고 과학화한다.

굉장히 실사구시적인 학문인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경제학에서는 인문학에서 맡아볼 수 있는 향취가 전혀 나지 않는다. 까닭은 이 학문이 처음부터 뭔가 완전히 탈색되어 버린, 박제되어버린, 흡사 레고인간 같은 주체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점이야말로 경제학의 태생적 오류이자 난센스가 아닐까. 존재론적 비합리성 속에서 부단히 합리성을 추구하며 그 학문적 날을 벼리어 나가는 경제학의 세계에서는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의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합리주의와 과학정신이라는 근대적 감수성이 낳은 가장 근대스러운, 근대다운, 근대적인 학문이 아마도 '경제학' 같다. 어쩌면 우리는 먼 훗날에, 마치 지금의 우리가 고대의 점성술을 바라보는 태도로 이 학문을 인류학적으로 흥미롭게 탐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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