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서동진 지음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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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지난 20년간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에서 형성된 권력의 주체화의 논리, 즉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형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기존의 규율사회를 비판하고 자유를 꿈꾸는 주체의 자기형성의 논리와 겹쳐져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계발에의 의지라는 것은 결국, 보다 나은 자기가 되고픈 인간 본연의 소망, 그리고 비상과 해방에 대한 인간의 본연적 욕구와 같은 것들이 권력의 자장 속에서 마름질 당하고 가공된 형태라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진보적 희망과 자유에의 소망이 매번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변질되고 마는 것이라면, 차라리 애초에 그런 꿈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자유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 매번 날카롭게 질문해야 한다. 질문은 사유이고, 사유는 곧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이다. 새로운 자유란 어떤 자유인가. 그것은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관리되는 자유, 순응적으로 변질된 자유, 기껏 자기계발의 자유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관계로부터의 호명이 불가능한 자유, 관리되고 대상화되기를 거부하는 자유, 외부를 사유하는 자유, 탈주하는 자유다.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을 꿈 꿀 것! 이 책이 마지막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가슴벅찬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조언은 사실상 환자한테 불치병 선고 해놓고 미안해서 보약 한 첩 다려주는 거랑 다를 게 뭔가. 저자의 제안에 따라 아무리 세계의 자명성에 질문을 던지고, 해방된 자유, 탈주하는 자유를 열심히 사유해봤자 그가 쓴 책 전체를 관류하는 푸코식 통치이론의 논리에 따르면 그 또한 결국에는 통치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너무나 단정한 모습으로 그리고 또한 너무나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형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것이 권력의 역학 관계를 벗어날 길 없는 개체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수유너머가 기성의 체제와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 역시 그러한 한 전형은 아닐까. 예를 들어 수유너머의 일시적 구성원이었던 나의 경우, 수유너머를 늘 남산에 있는 무릉도원 쯤으로 여기곤 하지 않았던가. 가슴이 턱 막힐 때마다 무릉도원에 잠깐 다녀가 오금이 저려오는 온갖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로 목을 축이고 나서, 자극적인 관념들로 샤워를 하고 나서, 다시 속세로 귀환해서는 마치 별세계에서 한바탕 꿈꾸다 돌아온 듯 이전과 다름 없는 태도로 일상을 살아가지 않았던가.

그곳에서의 공부는 나의 구체적인 삶을 전혀 바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나의 공부는, 배움을 주셨던 선생님들의 기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에게는 그저 출구 없는 일상에 작은 위안을 주는, 그런 신기루 같은 공부였지 않았나. 그렇다면 함부로 말해서 나 같은 이들에게 자기위안용 혹은 자기장식용 지식을 판매하는 것이 결국에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수유너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역시 그곳 선생님들의 기대(내지는 최초에 그곳 선생님들이 꿈꾸었던 자유의 정치학)와는 전혀 상관없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 책 비롯, 푸코의 통치권력이론의 영향을 받아 씌어진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공황장애에라도 빠진 듯한 기분이 된다. 끔찍할 정도로 조화롭고 치밀한 자기 완결적 시스템. 거기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도, 불순한 종자들의 혁명도, 우연의 장난질도, 그 어떤 우발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푸코가 그려내는 세계는 마치 한치의 허점이나 틈새도 보이지 않는, 영원히 붕괴되지 않는, 견고한 성채 같다.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도저한 슬픔이다. 푸코가 말년에 주창한 자기윤리라는 것은, 결국에는 어찌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비루한 자구책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얼마나 경악하고 얼마나 절망한 끝에야 비로소 호쾌하게 웃는 능동적 니힐리스트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이 견고한 성채 안에서 우리는 과연 냉소를 멈출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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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서동진 지음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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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주체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으로 여겨진다.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성실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주체의 계보를 파헤치는 일은 하나의 자명한 풍경에 대한 의문이자 도전일 것이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계보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사회 담론의 지형을 탐구하고 있는 이 책은, 푸코주의적 지역학 연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곳곳에 푸코의 사유가 깊이 베어있다. 푸코는 자신의 사유를 ‘연장통’으로 써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 저자는 푸코에게서 얻은 연장통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절단하고 해부하는 날카로운 무기를 벼리어낸 셈이다. 박사논문을 다듬은 것이어서 그런지 다소 딱딱하게 읽히고, 학문적 배경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개념의 이해가 미흡한 부분도 있고 용어의 혼란이 일어난 대목도 있을 테지만 내 수준에서 되는대로 정리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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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담론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었다고 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새롭게 재편된 담론의 질서란 곧 ‘지식기반경제’라는 개념으로 압축된다. 한국 자본주의를 재현하는 방식으로서의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은 결코 경제라는 국지적 영역에 머물지 않으며, 경제 외적인 사회적 현실까지도 하나의 경제적 실재로서 재현한다. 즉 ‘지식기반경제’는 사회적 삶 전반에서 행해지는 행위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푸코의 개념으로 말하면 ‘에피스테메’와도 유사한 것(혹은 담론의 질서를 주도적으로 조직해 내는 역량을 지닌 무엇)이 된다.

어떻게 일개 경제적인 가상이 한 사회의 담론의 지형을 재편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폴라니의 표현을 빌면, 인류의 역사상 ‘경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사회관계들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독특하게도 이 ‘경제’라는 것이 사회의 전면으로 불쑥 튀어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는 마치 저 혼자 과도하게 자라난 거대세포와도 같아서, 사회적 관계와 과정들의 여러 측면들이 경제에 종속된다. 이 때문에 경제는 담론의 질서를 조정하는 결정적 심급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가상’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내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접한 ‘경제적 가상’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과 제일 가까워 보인다. 에피스테메는 한 주어진 시대에서 인식 가능하고 공식화된 체계들을 발생시키는 담론적 실천들을 묶어줄 수 있는 관계들의 집합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각각의 담론적 실천들의 측면적 관계이자 관계들의 장(場)이다.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에피스테메를 일컬어 “한 주어진 시대에 있어서, 과학들 사이에서, 그들의 담론적 형성의 수준에서 분석할 때 발견할 수 있는 관계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지식기반경제’라는 새로운 ‘경제적 가상’(가상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곧 담론적 현실, 즉 담론의 대상이 되는 실재의 지위를 얻는다) 속에서 기존에 자본주의 분석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경제적 사실이나 각종 지표 및 측정방식, 계산의 논리, 평가의 테크닉 등이 전면적으로 재배치되고 재분절된다(경제적 현실을 재현하는 언표와 체계의 변화). 기존에 경제적인 행위 혹은 경제적인 삶으로서 여겨지지 않았거나 분절되지 않았던 대상들은 새롭게 경제적인 실재로서 자격을 얻게 된다(새로운 경제적 언표군의 탄생). 또한 새로운 경제적 실재를 재현하는 각종 정책과 규범, 제도, 실천들이 생산되며(새로운 권력 장치의 생산), 이와 더불어 새로운 노동주체의 주체성을 재현하고 지배하는 담론들이 형성된다.

새롭게 형성된 ‘경제적 가상’에 대응하여 새로운 노동자의 주체성이 생산되는 과정은 이중적으로 일어난다. 즉 (1)‘노동주체를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가시화하는 담론’은 (2)‘노동주체가 자기를 지배할 수 있도록 가시화하는 담론’, 다시 말해 ‘자기-통치’의 담론과 함께 출현한다. (1)‘국민 만들기’와 (2)‘행복한 자기self 되기’라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담론은 각기 자율적이면서도 서로를 상호 규정하면서 교호적으로 강화된다.

여기서 전자, 즉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에 조응하는 통치의 담론으로 생산된 것이 바로 ‘인적자원담론’이다. 인적자원담론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출범, 7차 교육개혁안 개정, 인적자원개발기본법 제정 등의 국가적 권력 장치를 통해 그 담론적 실천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정부, 기업, 개인은 각각 지식정부, 지식경영, 지식근로자로서 새롭게 객체화 된다. 경제개발계획 담론이 지배적이던 사회에서 개인들에 대한 권력의 통치 논리가 ‘주민’이나 ‘인구’라는 개념으로 구성되었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에서 주체는 ‘생애능력’, ‘인적자원’ 등등의 언표를 통해 통치대상으로서 대상화된다. 이와 같이 인적자원 담론은 수많은 주체성에 관한 언표들을 새로운 규칙에 따라 정렬하고 접합함으로써 그 안에서 각각의 언표들 사이의 관계를 재배치하고 하나의 새로운 담론의 질서, 담론의 공간을 형성한다.     

한편, ‘자기-통치’라고 하는, 노동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을 변형하고 개조하는 주관적인 실천으로 주체화되는 과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자기계발’에의 의지로 구체화된다. ‘자기계발’은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에 포섭된 주체의 자기 미학화의 테크닉이자 자기 윤리이다. ‘자기계발하는 시민’이란 곧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과 결합된 새로운 주체성이다. 투철한 반공정신, 국가에 대한 충성, 민족에 대한 사랑을 미덕으로 여겼던 과거 반공독재개발국가의 ‘국민’들은, 신자유주의시대의 새로운 담론의 장(場) 속에서 이제는 너도나도 내 인생의 CEO를 자처하며 끊임없이 자기주도적으로 삶의 능력을 계발하고 혁신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주체화하는 ‘시민’이 된다. 새로운 윤리적 주체가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인적자원담론이 국가권력의 통치전략이라면, 자기계발 담론은 지배가 이루어지는 공간적인 배치 속에서 지배 받는 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권력의 메커니즘을 실행함으로써 생겨난 담론으로, 그 역시 또 하나의 권력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3장에서는 앞서의 국가권력과 국민(시민) 간의 구도가 자본권력과 노동자의 구도로 치환된다. 자본과 노동자의 권력관계에서 생겨나는 여러 담론들 역시 국가와 시민 간의 권력관계에서와 같이 상호적이고 교호적으로 발전되고 강화된다. 마찬가지로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관리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생산해내는 각종 담론적 기획들은 곧 노동자의 노동정체성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기제가 된다.

푸코가 익히 분석했듯 권력은 외적인 강제, 폭력, 종속만을 통해서는 지배를 지속할 수 없다. 오히려 훈육과 규범화, 내면화 등의 방식처럼 개인들이 스스로 권력의 장을 형성함으로써 강제적 통제 없는 강제를 실현하는 것이 권력이다. 이를 위해 권력은 '강탈-폭력'이 아닌 '부드러움-생산-이익'이라는 원칙을 채택한다. 금지나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형태로 행사되는 권력은, 개개인을 특정한 능력과 특성 및 지식을 가진 주체,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주체로 생산해 낸다. 이러한 권력의 전략은 한국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자 간의 권력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저자는 인재 담론, 경영 담론, 역량 담론, 경영기법과 전략, 비전, 인적자원관리기술 등 오늘날 국내 시장경제에 흘러넘치는 각종 언표와 담론들을 분석함으로써 이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지식기반경제가 출현하면서 자본은 새로운 권력의 장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재편해내기 시작한다. 즉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아프리오리 속에서 근대 권력은 이제 주체성 자체를 새로운 버전으로 갱신한다. 경제개발시대에 자기계발 담론을 구성하던 언표들이 규칙적인 일과의 엄수, 근면, 성실, 절조, 금욕 등등이었다면 신자유주의시대에는 1인기업, 기업가정신, 時테크, 자기경영, 자기혁신 등의 언표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새롭게 주체화된 개인들은 더 이상 고용주와 적대하는 산업혁명기의 노동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일터와 가정을 구분하지 않고 언제나 열정적으로 자신의 기업가적 역량을 키우고, 자기관리, 자기혁신, 전략적 자기경영에 상시적으로 매진하는 기업가적 주체다. 기업의 전략과 일치된 주체로서 자신을 계발하고 향상시키는, 기업가적 에토스로 무장한 새로운 노동주체인 것이다.  

저자는 지난 20년간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에서 형성된 권력의 주체화의 논리, 즉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형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기존의 규율사회를 비판하고 자유를 꿈꾸는 주체의 자기형성의 논리와 겹쳐져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자기계발에의 의지라는 것은, 보다 나은 자기가 되고픈 인간 본연의 소망, 비상과 해방에 대한 인간의 본연적 욕구와 같은 것들이 권력의 자장 속에서 마름질 당하고 가공된 형태인 것이다. 인간 본연의 진보적 희망과 자유에의 소망이 매번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변질되고 마는 것이라면, 차라리 애초에 그런 꿈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자기계발 같은 거 아예 다 때려치우란 말인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일부러 꼴등을 향해 경쟁하는 엉터리 경기라도 펼쳐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자유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 매번 날카롭게 질문해야 한다. 질문은 사유이고, 사유는 곧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이다. 새로운 자유란 어떤 자유인가. 그것은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관리되는 자유, 순응적으로 변질된 자유, 기껏 자기계발의 자유 따위가 아니다. 권력관계로부터의 호명이 불가능한 자유, 관리되고 대상화되기를 거부하는 자유, 외부를 사유하는 자유, 탈주하는 자유일 것이다.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을 꿈 꿀 것! 이 책이 마지막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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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2-10-0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책이다. 책도 멋지고 속표지에 실린 저자 사진도 멋지다.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우아그녀 2011-02-07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양님의 후기도 멋집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려워서 검색하던 중 이 글을 읽게 되었어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속표지 저자사진 멋짐에 한표요^^

수양 2011-02-07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지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꼭꼭 씹어 읽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동적이고 멋지고 온갖 찬사를 다 갖다 붙여도 될 만한 훌륭한 책인 것 같아요!!!

수양 2011-02-07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정말 서동진 선생님도 넘흐 잘생겼어요 ㅎㅎㅎ

석류 2011-03-2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후기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정말 충격과 전율에 휩싸였어요. 자기계발서를 뒤적거리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새로운 자유란 어떤 것이어야하는 지 문제-... 분명 출구는 있을거라 믿어요!

수양 2011-03-2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석류님 반갑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저도 똑같은 충격과 전율을 느꼈기에... 저도 정말이지 이 책이야말로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정말이지 돈만 많았으면 서점가를 돌아다니면서 이 책 사재기했을 거에요ㅜ_ㅜ
 
권력에의 의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수남 옮김 / 청하 / 198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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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든 도덕적 가치에 대해 회의하고, 기독교적 세계의 허위성에 대해 구토를 일으키기 시작할 때- 니힐리즘이라는 징후가 시작된다. 인간이 절대 가치를 회의하고 구토하게 되는 사태로까지 나아가는 힘, 니체는 그것을 “성실성”이라고 말한다. 성실성은 도덕(도덕적 가치판단- 문명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해 계발된 덕목)이 양육한 힘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여물어서(?) 자기를 양육한 도덕에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철저한 니힐리즘이란 (...) <성실성>이 양육되어 온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덕을 믿는 일의 결과이기도 하다.”(31)

물론,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인간에게 나름의 이익이 있었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의 흐름 가운데 처해 있는 인간의 비소성(卑小性)이나 우연성과는 반대로, 인간에게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인간은 그리스도교적 피안의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재난이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그 자신을 인간으로서 경멸하지 않도록, 사는 것을 적대시하지 않도록, 인식하는 일에 절망하지 않도록 지탱시켜 주었다.” 이는 하나의 “보존수단”이었다.(32)
 
모든 발생하는 사건의 배후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무언가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는 것, 세계에는 여하한 진리도 부재하며, 사물의 여하한 절대적 성질도, 여하한 물 자체도 없다는 것을 통찰한 인간이 돌파구로 마련하는 것은 세계를 미망(迷妄)으로 판결하는 일이다. 그리고 생존의 성격을 참이 아니라 거짓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공(空)으로 여기는 일이다. 그러나 참-거짓의 분별 또한 단순화된 세계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설정해낸 가상적 가치일 뿐이다. “무가치성에의 신앙”을 보여주는 이러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이며, 하나의 중간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36)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된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생에 관해서는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무든 종류의 원망(願望)의 무엇인가를 간파했기 때문이다.”(39) 즉, 그것은 생 자체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절대적 X, 대타자, 원대하고 심오한 모든 가치들, 이상, 초인간적인 권위에 의하여 세워지는 불변하는 가치, 우리가 위안으로 삼고, 순응하고, 복종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정신적으로 매달리는 모든 가치들에 대한 환멸이다. 그것은 세계의 무도덕성, 무목적성, 무의미성을 간파한 자가, 오로지 힘의 작용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통찰한 자가 가질 수 있는 환멸이다.

이렇게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의 해석(모든 도덕적 가치판단,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철저하게 몰락한다. “하지만 그것은 해석 그 자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까닭에, 마치 생존 가운데에서는 여하한 의미도 전혀 없기라도 한 양, 마치 모든 것이 헛수고이기라도 한 듯이 여겨지는 것이다.”(59)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절망적인 ‘헛수고’는 아니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기는 있는가? 니체는 이에 대해 “이 사상(니힐리즘)을 그 가장 두려워해야 할 형식으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말하자면 의미나 목표는 없으나, 그러나 무(無) 가운데로의 하나의 종국을 갖는 일도 없이 불가피적으로 회귀를 계속하고 있는 그대로의 생존, 즉 <영원회귀>. 이것이 니힐리즘의 극한적 형식이다. 즉, 무(無, 무의미한 것)가 영원히!” 

니체가 무(無, 무의미)의 영원성을 말했을 때, 그것은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적 영원성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어떤 궁극의 지향점도 파기해버렸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성이란, 주름과 표피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면적 현상의 영원성이다. 거기에는 삶을 초월하는 그 어떤 절대 가치나 목표도 없이, 그저 끊임없는 현상으로서의 연기(緣起)와 유전(流轉)만이 있을 뿐이다. 끝없는 우연과 변화, 생멸이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그것은 유희다. 호쾌하게 웃으며 언제든 뛰어들 만한, 대단한 유희다. 유희에는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다. 그 과정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얻을 뿐이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과정으로부터 목적 표상을 제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긍정할 것인가? 이 일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 과정 내에서 어떤 것이 이 과정의 순간마다 매번 달성되고 게다가 항상 대등한 것인 경우이리라.” 

니힐리즘은 기본적으로 데카당스의 징후이다. 그러나 “퇴폐, 퇴락, 폐물이, 그 자체로 단죄 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증대의 한 가지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데카당스 현상은, 삶의 무언가의 상승이나 전진과 동일하게 필연적이다. (...) 사회가 정력적으로 대담하게 전진하면 할수록, 사회는 더더욱 실패나 기형아로 가득차고, 더욱더 쇠퇴에 가까워진다. (...) 데카당스 자체는 배격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그러나 니힐리즘은 이의적이게도 퇴락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하다. 초월적 가치나 신앙을 파기해버리고도 생존한다는 것, 즉 일체의 무게중심 없이도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강함인 것이다. (그런 가치들- 철학이니 도덕이니 종교니 하는 모든 지고의 가치에 의존하여 정신의 안정을 구하는 인간이야말로 "정신의 허약자, 정신병자, 신경쇠약자"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약함’을 인간의 전반적인 성질로 본다; “사람은 약함을 욕구한다. 왜? 대체로, 사람은 필연적으로 약해지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을 약함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사람은 약함을 극복함에 있어서, 강장한 방식에 의하여 하려고는 않고, 일종의 시인이나 도덕화에 의하여, 바꾸어 말하면, 해석에 의하여 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강장한 방식이란? 그것은 억제나 극기, 금욕이 아니다. 무반응과 무관심과 무시다! “우행(愚行)을 예방하기 위한 처방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데카당스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에서 더욱더 더 나아가, 즉 더욱더 철저히 몰락하여, 궁극적으로는 몰락의 극단으로 치달아 파국을 맞이해야 한다. “철저한 몰락은, 파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의 철저한 자기 몰락으로서, 본능적 도태로서 나타난다. (...) 훨씬 깊숙한 본능의, 자기 파괴나 무(無)에의 의지의 본능의 의지로서의 파괴에의 의지.”(61) “우리가 극단적 몰락으로 치달을수록 곤궁이 커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62) 몰락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화”다. 철저한 몰락 속에서 맞이하는 철저한 부정. 그리고 오는 광명. 능동적 니힐리즘. 최후의 니힐리즘은 능동적 니힐리즘이다. 그것은 “절반은 파괴적, 절반은 반어적인, 정신의 가장 강력한, 더할 나위 없이 풍요한 삶의 이상으로서의 니힐리즘”이다.

최후의 능동적 니힐리스트, 그는 의도도 의미도 목표도 없이 그저 우연과 변화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영원한 생존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줄 아는 자”다. “여하한 신앙개조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 우연이나 무의미의 대부분을 그저 용서하기만 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 인간에 관해서는 그 가치를 상당히 할인하여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일에 의해 비소해지고 약화되는 일이 없는 자이다. 즉, 대개의 불운에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성장에 도달하고, 이 때문에 불운을 그다지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건강에 가장 부한 자- 스스로의 권력에 확신을 가지고, 인간의 달성된 힘을 의식적으로 과시하면서 대표하는 인간.”(63) 

니체는 생에 대해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절망했던 자였으면서 또한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무한한 생의 환희를 느끼고 박장대소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과 도덕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이 극단의 페시미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나의 <비극의 탄생>의 여기저기에서 번져 나오고 있듯이), 나는 정반대의 것을 스스로를 위하여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인간만이 웃는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아닐까.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고뇌하는 것이다. 가장 불행한 가장 우울한 동물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장 쾌활한 동물이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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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모든 물체(things)는 어떤 점에서 합치한다”(에티카, 정리13의 보조정리2)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모든 사물에 공통적이며 부분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 동등한 것은 개별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에티카, 정리 37)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합치하는가.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으면서도 개체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나 동등한 ‘그것’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이를 ‘공통개념’으로 정의한다. 올덴부르크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이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가령 림프와 카일(당시 혈액의 구성성분으로 알려진 것들) 등등이 각각의 형태와 크기에 따라 비례를 이루어 결합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면, 그것들은 이런 측면에서 피의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피 안에 피의 입자들인 림프와 카일을 서로 구분할 수 있고, 그 입자들이 서로 만나 밀쳐내기도 하고 자기 운동의 일부를 전달하기도 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작은 벌레가 살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작은 벌레는, 우리가 우주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듯이, 피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피의 각 입자를 부분이 아닌 전체(각각 하나의 온전하고 고유한 전체)로서 생각할 것입니다. 그 벌레는 어떻게 모든 부분들이 피의 일반 본성에 의해 변양되고 서로 적합하게 되도록 강제되는지 결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는 각 신체가 특수한 방식으로 변양되어 실존하는 한에서, 전체 우주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전체와 일치하고 있다고,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과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주의 본성은, 피처럼 제한된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무한하므로, 그 부분들은 이 무한한 능력의 본성에 의해 무한히 변용되고, 무한한 변이를 수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체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나는 각 부분이 전체와 아주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피 속에 사는 벌레는 피를 구성하는 하나의 입자로서 이미 피의 흐름을 타고 있지만, 벌레는 피 자체를 외부의 개별적인 대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벌레의 인식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벌레는 림프와 카일이라는 외부의 대상이 제각각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서 저마다의 운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벌레와 림프와 카일에게 공통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의 흐름이다. 벌레와 림프와 카일은 피의 흐름을 함께 타고 있다. 그들은 피의 일부로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 어울려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또한 그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다. 리듬이 사람들 각각의 특이적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리듬은 춤추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분유하고 있는 어떤 속성이다. 속성을 분유하고 있지 못한 개체는, 그러니까 리듬을 타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떤 춤동작도 시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리듬을 타기 시작한 사람은 그 리듬에 맞추어 다양한 동작들을 만들어내고, 사람들과 더불어 춤출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 리듬이 고정불변한 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개체가 리듬에 참여하게 되면, 리듬은 그 개체로 인해 변화한다. 마치 새로 온 사람이 모임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듯이.

(신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인식 수준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을 비롯한 여러 개체들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 내는 총체적인 리듬과 하모니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개체적 수준에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그것을 이미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것에 맞추어, 그것에 몸을 맡기어, 그것을 한없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신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이미 신의 일부로서 신을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림프와 카일이 피의 입자로서 피의 흐름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어떤 리듬의 장(場)에 참여해서 그 안에서 리듬을 타면서 동시에 그 리듬을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원자 물리학의 아이러니와도 비슷하다. 원자 물리학에서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원자라는 관찰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대상이 관찰되는 과정의 연쇄에서 관찰자가 그러한 연쇄의 마지막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시물리학에서는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반드시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우리가 원자를 터럭 끝까지 파고들면 우리는 원자와 하나가 되어버린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원자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상을 아원자 수준까지 파고들면, 개체로서의 대상은 휘발해 버리고 타아개념 또한 무의미해져 버린다. 존재는 없고, 가능성(확률)과 관계만이 남는다.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개념과 미시물리학 이론(‘미시’라는 것도 사실상 인간 개체의 수준에서 봤을 때의 ‘미시’가 아닌가. 우주적 관점에서는 내가 살아가는 일상현실야말로 ‘미시적’인 종류일 것이다. 어쩌면 아원자 입자의 내부 세계와 내가 부딪히는 일상의 현실, 그리고 별의 운행과 은하의 생멸을 포함하는 우주적 사건들- 인간 개체의 수준으로 분류해 볼 수 있는 이러한 각각의 차원의 장(場)에 어쩌면 프랙탈 모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어떤 동일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을 내가 사는 현실세계에 응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실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내 앞에 무자비하게 던져진, 불변의 운명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내가 그것에 개입함으로써 극적으로 변화한다. 내가 현실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개입하여 새롭게 창조해낸 현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아상(我想)이라고 부를 것이다. 스피노자라면 그것을 '우리 신체에서 생산된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고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다만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낸 변용, 즉 이미지일 뿐이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아상을 허망한 것으로 본 반면에, 스피노자는 우리가 만들어낸 그 모든 환상, 상상, 착각, 환각, 즉 ‘이미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의 모든 착각에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 수는 없는, 그러나 신의 섭리라고 할 만한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그에게 인간 정신의 상상하는(내지는 착각하는) 능력이란, 의지가 이성을 방해하여 생긴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덕(능력, virtu)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근본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낸 착각이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하라지는 대상이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것 자체마저 착각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감각이 인식하고 마음이 해석해낸 것들 모두는 의식 안에서 시공으로 확장되어 나타난 것이며, 지각된 대상을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착각 때문에 대상화된 것입니다. 모든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이 전체적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하라지는 참된 앎을 위해 우리의 관점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사물을 분리된 마음인 개체적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보라고, 근원으로부터 보라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근원'이다.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는 그 근원으로부터 보는 것입니다. 그때, 오직 그때에만 전체적인 인식, 바른 봄과 이해가 있게 됩니다." 근원으로부터 보는 것이란 어떻게 보는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근원으로부터 볼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나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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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요리도 젬병인데 잘 됐다. 요리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해 평소 일말의 죄책감을 갖고 있던 사람에게 생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는 단연 희소식이다.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싸그리 사라졌다. 생으로 먹으면 되고, 그게 어려우면 끓이거나 삶거나 쪄먹으면 된다. 사과를 예쁘게 깎을 필요도 없다. 껍질채 먹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원시인처럼 살겠다는 내 포부를 들은 동생이 원시인의 평균 수명을 넌지시 알려줬다. 10세 전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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