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자각하게 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도록 장려한다. 처음엔 퍽 즐거웠던 것 같다. 직장에서나 어디서나 섹슈얼리티를 부각시킬 기회도 없고 나이듦에 따라 점점 무성인간이 되어가는 판국에 탱고판에 오면 모두가 나의 성적 매력을 높이 평가하고 관심가져주니까. 여기 오면 비로소 제대로 된 한 마리 암컷이 된다. 회춘한 거 같다. 근데 여기의 존나(라고 안 할 수가 없다) 바보 같은 점은 모든 여자를 오로지 여자로밖에 안 본다는 것이다. (이건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자로 봐줘서 즐거웠는데 이제는 여자로밖에 안 보니까 지겹고 징그럽다.

 

이 무슨 고약한 변덕인가 싶지만 그럼에도 한 인간이 그가 지닌 생물학적 특질로밖에 규정되고 인식되지 않는다는 건 이곳의 너무나 큰 한계이자 염증나는 지점이라고. 난 여성의 육체를 가졌지만, 그 사실이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거나 자아상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인 것은 아니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특정 상황에서 관건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저 생물학적으로 내가 처해 있는 조건일 뿐이라고. 내게 가슴이 있다고 해서 내 본질이 가슴 그 자체는 아니잖아. 근데 탱고판에 있다보면 점점 그렇게 되어간다. 내가 가슴이 되어간다고-_- 애당초 '나는 가슴이고, 가슴인 나 자신이 만족스럽다'고 여긴다면 하등의 문제가 없겠지만, 나로서는 이제 좀 질린다. 탱고판의 공허한 화려함도 부질없고 수동적인 땅게라 역할에도 한계가 느껴진다. 여러 면으로 정체기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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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헨틴 탱고의 정석. 완벽하다. 이래서 다들 아차발 아차발 하는구나. 이런 걸 보면 역시 내 춤은 더럽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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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롱가에 가려면 예뻐야 한다. 이것은 정언명령이다. 예쁘지 않으면 밀롱가 사회 내부의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어긋난다. 페로몬이 걸음마다 후두둑 후두둑 떨어져야 된다. 달디 달아 속이 니글거리도록 여성여성해야 한다. 가슴과 엉덩이를 부각시키고 장신구 의상 자세 제스처 말투까지 타자의 욕망을 완벽하게 구현할 것- 어찌보면 참으로 쓰잘머리 없고 번거롭고 귀찮은 짓이지만 밀롱가에 갈 때 만큼은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일랑 잠시 괄호 쳐두자.

모처럼 어려운 책을 독파해나갈 때 단 한 문장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매의 눈을 하듯이, 그런 날카로운 자세로 신중을 기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드웨어를 완벽하게 셋팅할 필요가 있다. 어딜 가든 그곳에서만 취할 수 있는 향락을 온전히 누리려면 일단 그곳에 어울리는 자세와 태도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결과, 집에서는 건어물이고 직장에선 노동8호지만 밀롱가에 갈때면 비로소 유성생식기능을 보유한 생물체가 되는 것 같다. 번거로워도 육체가 더 시들기 전에 해볼 만한 일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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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밀롱가 갔더니 심봉사 된 기분. 심심할 때 생각나면 가끔 추러 가고 그러면 좋을텐데 이 춤은 참 그게 안 된다. 탱고를 추기 위한 몸 상태가, 신체 감각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유지되어야 춰진다. 항상 연습을 해야 되고 잠시라도 느슨하면 한순간에 찐따가 되어버리니. 감이 돌아오려면 쁘락이랑 걷안 수업 다시 시작하고 약 한 달은 걸릴 것 같다. 왜 이 춤은 올인을 해야만 겨우 즐길 수 있는 걸까. 요구하는 게 너무 많다 이 춤은. 그렇게 열심히 해가지고 무슨 대단한 걸 이루려는가 이 춤이라는 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인가 이거야말로 참으로 허망한 유희가 아닌가 하는 회의가 자꾸 드는데

그럼 안 추면 되는 거지 무슨 욕심이 나서 내일 또 갑자기 빗속을 뚫고 마담 피봇 슈즈 사러 홍대에 가려는 거냐. 나도 나를 모르겠다. 이 춤을 열심히 하면 존재의 고유성을 획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고유의 춤맛으로 기억되는 땅게라가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럼에도 춤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노력에 비해서 고유성을 부여받는 그런 영광이 매우 일시적이라는 데 있다. 글은 쓰면 남아있기라도 하지 춤은 추고 나서 집에 가면 흔적도 없다. 무슨 그런 일이 있었나 싶다. 그런데도 거지 같은 춤을 추고는 싶지 않다는 자존심과 묘한 경쟁심이 뒤섞여 난데없이 탱고슈즈를 사러 가기로. 이것도 장비병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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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랬다. 잘 추는 로하고 추고 싶다. 영혼을 정화하고 심신의 평안을 얻으려면 주종을 막론하고 두주불사할 것이 아니라 귀하고 독한 술을 자기 전에 소량 마시는 편이 낫듯이 여러 명과 질 낮은 춤을 추기보다는 좋은 로와 깊고 강렬한 한 딴다를 추고 싶다. 좋은 로를 만나서 정신을 극도로 집중해서 오늘 하루 남은 기력을 다 바쳐 정성을 다해 출 수 있다면 단 한 딴다만 추고 가더라도 밀롱가에 온 의미가 생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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