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비 / 함기석
삭발머리 소년 로꾸거가 뒤로 걷는다
찰방찰방 빗길을 걷는다
구두 가게로 들어간다
구두를 벗어주고 돈을 받아 나온다
이발소 뒷문으로 들어간다
머리를 길게 길러서 앞문으로 나온다
죽음이 웃는다 죽음은
카페 창가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체크무늬 넥타이를 매고 있다
횡단보도 앞에서 소년이 묻는다
아저씨 거기서 뭐 하세요?
죽음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도 네 아빠처럼 샐러리맨이야
오늘 밤 아들에게 살해될 한 노인을 기다리는 중이야
요즘은 일이 많아 매일매일 야근이란다
소년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신호가 바뀌자 차들이 일제히 뒤로 달린다
빗방울은 하늘로 떨어지고
달랑달랑 불알을 흔들며 저녁이 온다
담배가 점점 길어진다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감아서 들으면 피가 모자라다는 악마의 소리가 나온다고 떠들썩했던 때가 있었다. 혹시 시인은 거기서 무슨 시적 모티브라도 얻은 것일까. ‘나른한 비’라는 제목처럼 이 시에서 소년은 시간을 되감는 나른한 환각 속에서 멸(滅)하는 것들과 대면한다. 빗방울이 하늘로 떨어지고 차들이 일제히 뒤로 달릴 때, 죽음은 카페 창가에 앉아 고독하게 술을 마시고 저녁은 "달랑달랑 불알을 흔들며" 선정적으로 다가온다. 모든 것이 뒤로 가는 시간 속에서 현실적인 것은 오로지 이 둘 뿐이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을 크레바스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이 시는 크레바스의 시간대에 대한 기록 쯤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걸 기록할 만한 능력은 오로지 소년 ‘로꾸거’에게만 있겠다. 우리는 기록으로서의 시를 읽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