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225페이지에는 자신이 얼마나 문학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리서치 문항이 들어있다. 저자가 심심해서 작성해본 것이라고. 
 
1. 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씩 문학 분야의 책을 읽는다: 날마다는 아니어도 한 달에 총 30페이지 이상은 읽는다.
2. 홀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무언가 메모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내 핸드폰은 메모장이나 다름없다. 문자의 9할이 스팸인 걸 보면.
3. 문득 얼마나 오랫동안 시를 읽지 않았는지 깨달아질 때가 있다: 시는 틈틈이 읽는 편.  
4. 서점에 가면(책을 살 것도 아니면서) 문학코너를 꼭 둘러본다: 가끔 충동구매를 하기도.
5. ‘백석’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백석’이라는 발음 자체가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 같다. 옛날에 백석의 시에 대해 몇 자 적어본 게 있다.
6. 아무런 이유 없이 포털 사이트를 통해 시인과 소설가의 이름을 검색해본 적이 있다: 나는 한때 아무개 시인의 중증 스토커였다(지금은 고쳤다).  
7. 시인이나 소설가의 블로그나 홈피 방명록에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김소연 시인의 블로그에 글을 남긴 적이 있다.
8.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누군가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하다: 습관적으로 표지를 확인하고 괜찮은 경우 얼굴도 확인한다.
9. 신문의 책 광고나 서평 기사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신문을 잘 안 읽어서 패스.
10. 문학전문 출판사 이름을 세 개 이상 알고 있다: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
11. 최근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모름.
12. 문학잡지를 다섯 차례 이상 사본 적이 있다: 자랑하는 건데, 계간 창비에 독후 소감을 보낸 게 당첨되어 일 년 구독권을 선물 받았다.      
13. 자신에게 문학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권위에의 호소를 하자면 사주 봐준 아저씨가 그렇다고 했다.
14. 경제와 정치, 스포츠에 휘둘리는 삶에 자주 염증을 느낀다: 음. 그런 것 같다.
15.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신인 공모에 응모해본 적이 있다: 있다. 다 떨어졌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나는 ‘현저하게 문학적 자의식을 가진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이다. 15문항 모두 예스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문학병 말기 환자' 평가를 받을 뻔 했다. 나는 문학을 사랑하지만, 삶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될 수 있으면 문학을 멀리하고 싶다. 이것은 그러니까, 너무 멋진 남자를 일부러 외면할 때의 심리와도 비슷하다. 물론 이런 말을 한다는 건 퍽이나 가소로운 일이겠다. 내 모든 방면의 독서가 그러하듯 나는 아직 문학의 숲에 깊숙이 진입하지도 못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문학이 그것이 발산하는 매력에 비해서 너무나 연약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종교와 예술(문학)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역시 너무나 연약하다. 연약하고 무력하다.  

앞으로 책 읽을 시간이 나면 되도록 사회과학서적을 읽어보자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 건, 그런 책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딱딱하기 때문이다. 딱딱한 책이 좋다. 나를 딱딱하게 만들어 주니까. 내가 좀 더 딱딱한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구조가 딱딱 나누어지고 논리가 딱딱 서서 전달할 말만 딱딱 했으면 좋겠다. 정한과 회한과 감상에 젖어 쓸데없이 수다스러워지고 싶지 않다. 그런 식의 유약하고 낭만적인 태도는 실생활에 장애가 되면 되었지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문학적 정취에 잠긴 생활을 견제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맑스는 처절하게 분노했지만 자본론을 남겼다. 나는 그것이 분노를 표출하는 우아하고 고차원적인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선언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문학적 자의식을 가진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이라니,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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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헤는밤 2010-12-2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님 안녕하세요 ^^ 처음 뵙습니다.
알라딘 서재를 즐겨찾기 해놓고 가끔 들르던 유령독자입니다. ^^
오늘 글 읽으면서 수양님의 위트 덕에 함박 웃으며 저는 어떤 독자인지 나름 질문들에 답해보았네요.ㅎ
저로서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걸쳐있는 -어느 쪽도 아닌- 책을 보고 있다보니, 문학적 자의식을 지니신 수양님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

blackpearls.tistory.com 까만진주씨

수양 2010-12-2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서치에 참여해주신 점 제가 작가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 또 함박 웃으시라고 나름 위트를 구사해 본 건데 웃어주시길 바래요. 큭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