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타리크 알리 지음, 정연복 옮김, 필 에반스 그림 / 책벌레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1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맑스의 이론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혁명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변종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러시아 혁명은 인식이 현실을 변용하는 역사적인 예였다는 점에서 중요해 보인다. 혁명 당시 러시아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는 맑스가 하나의 참조할 만한 이론이 아니라 교리였다는 사실, 그러니까 강력한 자기이행적 예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놀랍게 느껴진다. 사상과 문학 모두 인간 욕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동색이지만 사상이 문학보다 훨씬 더 무서운 까닭은 그것이 결코 가정법을 쓰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사상을 통해 ‘희망’하거나 ‘상상’하지 않고 ‘인식’한다. 가정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 사상이야말로 욕망이 가장 무자비하고 강력한 형태로 관철되는 형식인 것 같다.   

2 이 책은 다소 난삽하다. 트로츠키 소개서임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라는 사람을 정말로 알고 싶어서 읽어보려는 사람에게는 그닥 도움이 못 된다. 트로츠키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볼셰비키나 멘셰비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을 리 만무한데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와 관련해서 이 책에 나오는 두 정당에 대한 설명은 너무도 간소하다. “오늘날에도 이 대회는 새로 출범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을 레닌이 지도하는 볼셰비키파(다수당)와 마르토프와 그 외의 사람들이 주도한 멘셰비키파(소수파)의 두 분파로 갈라놓은 정치적 논쟁으로 유명하다. 머지않아 이 두 분파는 혁명에 관해 상반된 입장을 보이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두 정당으로 굳어진다.” 으응?

3 삽화가 많이 들어있으니 한 두 시간 정도면 훑어보고 트로츠키가 누군지 대충 아는 척은 할 수 있겠구만 싶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네이버 검색도 모자라 러시아혁명에 관한 MBC 5부작 다큐까지 구해봐야 했다. 이런 경우에 당면할 때마다 김경욱의 단편 <위험한 독서>에 나오는 독서치료사처럼 내게도 독서 가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사업은 정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책이 또 다른 책을 소개해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지적인 멘토도 없고 학문기관의 덕을 입지도 못하는 내 독서활동은 마치 근본도 모르고 정처도 없이 그저 어디 먹을 만 한 게 없나 이곳 저곳 들쑤셔가며 하루를 근근이 면하는 게으른 도둑고양이의 삶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 어디에도 구애됨 없이 자유롭지만 대체로 깊이와 품위가 없고 때로는 주변의 딱한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4 이 책 몇 부분은 MBC 러시아혁명 다큐에서 본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다. 이 책 69쪽에는 단순히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 장군과 결탁해 소비에트를 전복하려고 했다고 나오고 있지만, 다큐에서는 케렌스키가 처음에는 극좌파의 쿠테타를 염려해서 코르닐로프 군대를 수도로 이동시켰다가 나중에서야 코르닐로프의 쿠테타 가능성을 의심하고 그를 총사령관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나온다. 해임을 수락하지 않고 수도로 진입하는 코르닐로프의 반혁명군대를 제압한 것은 볼셰비키당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노동자들이었다. 쿠테타가 실패하자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와 음모를 꾸민 우파 반혁명세력으로 낙인찍혀 몰락하고 만다. 소비에트 좌파와 대중들은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와 함께 공모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그와 단절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어쩌면 케렌스키로서는 억울한 오해였는지도 모른다. 155쪽에 나오는 키로프 암살 부분 역시 다큐의 내용과는 상이하다. 이 책에는 스탈린이 키로프의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나오고 있지만, 다큐에 나오는 여러 학자들은 실제로 스탈린이 키로프를 암살했을 가능성은 희박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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