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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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은 약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의미했다. 토요일이면 피로에 찌든 몸이, 곧장 침대로 쓰러지거나, 허겁지겁 당분을 섭취하기에 바빴는데, 지난 토요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피곤을 예상하고 아무런 일정도 계획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는 이들에게 단체톡을 보냈지만 2시간 동안 누구도 답톡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 일일이 전화를 걸자,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쩐지 의도적으로 소외받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려던 순간, 다행히 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고, 연속해 답톡들이 달렸다. 그 순간 나는 불안감이 점차 고조될까 두려워, 아무데로나 가고 있었고, 그 아무데는 결국 물건이며 사람이며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운 대형마트였고, 대형마트에 들어서는 입구에서 갑자기 돌연 이래도 되나 싶게'무의미'해졌다. 나는 결국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생각에 휩싸여 그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 차로 돌아왔을 때, 뒷자리에는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벗어놓은 자켓 아래에 하얀 모서리를 내밀고 있었다. 띠지에는 쿤데라의 흑백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고, 어쩐지 나는 쿤데라를 그 어떤 작가의 얼굴보다 뚜렷하게 기억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같은 사진, 확대된 사진, 흑백 사진, 그리고 체코, 프라하, 여성, 섹스에 대한 그의 거침없는 글을 몇 번 본 것이 더욱 그를 잘 안다는 착각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잘 안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착각의 소지가 있었다.

 

 

라몽, 다르델로, 알랭(아마도 그럴 것이다, 읽고 바로 지인에게 빌려주었으므로 미처 인물 이름을 재확인할 겨를도 없었다)은 뤽상부르 공원을 각자의 사연으로 돌고 있다. 처음과 끝인 뤽상부르 공원, 이 장소는 상징적으로 재현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연극 무대를 위해 급조된 흔한 공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급히 설계된 배경은 무슨 역사성인가 띠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에 대한 역사인지 잘 알아보지 못하게끔 이중 설계되어 있어, 사실 읽는 이의 입장에서 그저 '무대'이상으로 보이지 않곤 했다. 그러니까 이 '무대'라는 느낌과 작중 인물들의 '대사'적인 대화는 소설을 '연극 대본' 혹은 '허구의 것'으로 의도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실제로 인물들은 자신들이 고안해낸 파키스탄어(라고 되어 있지만 결코 파키스탄어가 아닌 언어)로 이야기를 하고, 다르델로의 삶과 죽음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자신들만의 희한한 연극을 지속한다. 대체로 어이가 없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은 촌철살인을 나눈다. 우리가 무의미해져야 하는 이유를 열변한다. 우리의 보호막이 되어주곤하던 신비로움, 의미를 부여하는 장난스러운 행위들은 이제 그 장난의 행위자들에게도 지겹고 지루한 것이 되어버렸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의미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리고 그 쓸모없음의 기분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이다. 가만 보면 작가는 그 '쓸모없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수중에 책은 없지만 단 한 장 찍어놓은 페이지가 증거로 남아있다)

 

 

 

 

 

 

 

쿤데라는 종종 그랬듯이 이번에도 작가 그 자신으로 소설에 불쑥 등장하고, 이걸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변사'라고 할텐데, 좀 다른 면이 있다면 쿤데라는 자신의 서술을 반복하고, 자신의 이 반복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면서 능청을 떤다. 만약 쿤데라의 소설을 처음 보는 이라면 '당황'할 테고, 여러 번 보는 이라면 '친근'하고, 없으면 허전할 테다다. 서술에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그것이 장난 정도로 비춰지지 않고 '문학성'으로 인정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쿤데라는 다른 작가들과 좀 다른 위치에 놓이게 된다.(아마도 그 위치는 수직적이라기보다 수평적 범위에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의미의 축제>의 인물들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격이다. 너무 짧아서, 몇 안 되는 인물일지라도 너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칼리닌이다. 스탈린의 연민을 '회복'하는 존재. 잦은 요의로 초라해진 존재. 그러니까 왕족(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귀족)으로서 고귀한 위치에 놓여있어, 대중 앞에 곧잘 나서는 존재였다.(원하든 원치않든) 그가 대중 연설 같은 걸 하면 도중에 수 차례 화장실을 들락날락 해야 해서, 연단에 들고 날 때마다 대중의 만세 외침을 받아야 했다. 나중에는 그 주기가 짧아져 대중의 외침이 무슨 축제의 환호성처럼 들리며, 결국 대중들이 떠들썩한 흥분에 휩싸여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게 한, (요의를)참을 수 없는 존재였다.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44)

 

 

  예전처럼 모두 여기 있는데, 칼리닌만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끔찍한 요의에 쫓겨 크렘린 궁 복도들을 헤매고 다녀보지만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결국 밖으로 나가 거리를 달린다.(128)

 

 

 

150페이지, 여백이 많은 이 소설은 다음 날, 약속 시간이 미뤄져 혼자 남게 된 카페에서 다 읽었다. 사실 책을 좀 읽으려고 한 시간 일찍 나간 자리였는데 한 시간이 더 늦춰져, 두 시간을 혼자 보내야했다. 두 개의 서점을 돌고, 잡화점을 구경하고, 물을 사 먹고 요거트를 사먹고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있어도 시간은 남았다. 그리고 나는 몇 쪽 남지 않은 책을 찬찬히 다 읽었고, 돌아오는 길에 그 날 만난 사람들 중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을 건네줬다.(이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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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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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인가 읽으려 하다 못 읽은 작가들이 많다. 심지어 책을 사두고 몇 년씩 책장에 묵혀 둔 채 한 장도 넘기지 못한 작가들도 있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작가들 중에는 故최인호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읽지 못했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건 저러건 아무도 신경 안 쓸 일이라도, 생전에 읽지 않은 게으름이 한심했다. 언제부터인가 소설만 읽으면 몸이 아프고, 괜한 마음이 발동해 노트북 앞에 앉아 몇 자 쓰면, 또 몸이 아팠다. 그렇게 나는 아픈 것이 무서워서, 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않았고 그 주변을 지분거리기만 했다. 사실 알라딘 신간 평가단에 지원할 적마다 소설 분야에 지원했는데, 매번 떨어졌다. 그러다 마침 마음이 소설 바깥으로 기울어 갈 때 지원한 에세이 분야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쁘면서도 어쩌면 어떻게도 나는 소설과는 연이 안 닿는 것 같아 서운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이번 신간 평가단을 통해 소설가의 에세이를 많이 접했다. 마지막 책 역시 그랬다. 故최인호의 유고집인 <눈물>은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그의 신앙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신앙심이 없는 내게 그리 까탈스러운 독서가 아니었다. 늘 '주님'이라는 분을 생각하는 투병 중이 작가를 떠올리며 아픈 것이 무서워 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내가 하고자 한 것을 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는 동안, 누군가는 손톱이 빠진 자리에 골무를 끼워 글을 쓰며 하고자 하는 것을 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원해 그것을 하더라도, 이 작가의 열정에 비하면 진정도 없고 깊이도 없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2011년 네 번째 항암 치료를 끝으로 더 이상 항암 치료는 물론 CT, PET 그 어떤 검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받은 치료라면 목에 패인 상처에 안연고를 바르는 일이었습니다. 점점 끓어오르는 가래를 뱉을 힘이 없습니다. 서서도, 앉아서도 가래를 뱉을 수 없습니다. 바닥에 무뤂을 꿇고 엎드려 있는 힘을 다해 겨우 가래를 뱉으면 이미 내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됩니다. 가래 때문에 숨을 쉴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침이 나오지 않아 늘 물병을 달고 삽니다. 이제 먹는 것도 두렵습니다. 사레가 들려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새 영양실조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익숙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폐렴이 찾아오는 것도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눈을 뜨려고 해도 자꾸만 눈이 감깁니다.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참을 수 없는 절망감입니다. 하지만 나는 쓰고 싶습니다. 반드시 이 고통 속에서, 내게 주님을 찬양하는 글을 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성체가 너무나 고픕니다.(37)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다른 이들로부터 노골적인 평가를 자주 받는 편이었다. 너는 이러이러하다, 라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올 때 물론 의도는 그들이 느낀 나에 대한 호감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 중에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말은 감화가 잘 된다, 감수성이 좋다는, 그 말대로 좋다면 좋은 말들이었다. 특히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했고, 그런 성향이 남들과 다른 것을 포착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고, 거기서 묘한 우월감도 있었고, 그런 우월감에 젖은 사람들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사람 대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도 알게 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뭔가를 읽고, 또 구상하면, 당시에는 그것이 늘 좋지 않은 방향으로, 건강한 삶의 대척으로 향했고, 감수성이 좋은 나, 뭔가를 읽으면 읽은 대로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기분이 요동치던 나는 더 이상 쓰지도 읽지도 말자는 고민에 방점을 찍었다. 오히려 등단이나 그런 작가적인 명예를 쓰지 못한 것이 능력의 한계이자, 다행이 되어버렸다. 


최인호의 유고집이 주님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도, 쓴다는 것 앞에 무력해지는 한 사람으로서 이 글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썼다'는 자체로 이미 유의미하다. 제대로 써본 사람은, 쓰는 과정이 결코 1에서 10까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테다. 1에서 3을 쓰다가 2를 채우고 10으로 비약하고 다시 10을 지우고 8과 9의 무게를 재고 8을 위해 9를 희생하는 과정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쓴다는 것, 평생 쓴다는 것은 그 과정의 인내이기도 하지만 운명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조건이 악할수록 열망이 커지는 사람을 보는 건 소름돋는 일이다. 주보에 실렸다는 이 글들은 쓰고 싶다는 열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깨끗함마저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책이 끝날 즈음 나온 질문 하나가 故최인호 작가의 삶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열정은 삶에 대한 집착과는 어떻게 다른 겁니까?(340)


돌아보면 항상 부러운 이는 자기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더 부러운 건 그것을 조용하고 또 확실히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작가 최인호가 부러웠다. 누군가 이것이 올바른 감정이 아니라고 야단치더라도, 지금 내 안에서 쏟아지는 감정은 동경이나 존경이 아니라 부러움이다. 그리고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최인호 작가님, 마지막까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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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다 하지 못한 - 김광석 에세이
김광석 지음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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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되고 깨달은 것은, 서른이 됐을 때 누군가는 서른을 믿지만, 누군가는 서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물 아홉까지 멀쩡하다가 스물 아홉의 12월 31일이 지난 그 시점부터 어리광도 자학도 아닌, 약간의 죄책감을 동반한 푸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우리가 벌써 서른이야'라는 고조된 목소리는 그 이후 우리에게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새된 목소리로 짧은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 한숨을 쉬는 남자들이 있었고, 바쁜데 무슨 나이 타령이냐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스물 아홉부터 벌써 서른이라고 생각해서,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서른이라고 대답할 만큼, 체념할 대로 체념했다. 긍정적으로 보면 '서른'에 대한 면연력을 기르며, 막상 서른이 왔을 때는 아쉬운 것도 기대한 것도 하나 없는 상태였다. 누가 그랬던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그래, 그건 김광석이었지, 하고 문득 떠올린 순간, 그 서른 두 해의 짧은 삶이 뒤따라 머리 속을 스쳤다. 어쩌면 서른을 만든 것은 그가 아닌가. 이렇게 절실하게 만든 것은 그가 아닌가. '30'이라는 수치를 책임질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짊어져야 하는 서른을 만든 것은 김광석이 아닌가, 기타를 둘러 멘 젊은 그를 보면서 마음이 애잔한 한편, 마흔이 되면 할리 데이비슨을 사서 유럽 아가씨를 뒤에 태우고 달리겠다던, 수많은 메모 속에 '사랑'을 쓰고 금색 펜으로 '사랑'을 쓰면서 사랑을 금색으로 쓰니 사랑이 아닌 듯 하다고 말하던 그가 귀여웠다.

 

 

얼마 전 엄청난 메모광이던 김광석의 메모를 엮은 <미쳐 다 하지 못한>이 출간되었고, 조울증처럼 서른의 혼란과 평온을 격일로 반복하는 내게 그 책은 조용히 찾아왔다. 이 짓푸른(도저히 남색이라 할 수 없고 파랑이라 할 수도 없는) 색 하드커버에 둘러쌓인 메모들은, 유투브에서 찾아본 그의 수줍은 모습을 다시금 생각나게 했고, 특히 밤 중에 스탠드 아래서 페이지를 넘길 때면, 자조를 쏟아내게 하는 지난 날 내 부끄러운 모습이 돌연 떠올라, 함께 부끄러워지고, 그 와중 이상한 용기가 솟아 큭큭 웃게 했다. 그러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김광석의 메모를 당당히 훔쳐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이 주체할 수 없는 서른을 절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된다 다짐했다. 김광석은 미처 다 하지 못했지만, 나는 미쳐 다 하지 못한 거야, 또 한 번 키득거리며, 이 촌스러운 생각이 이불 위로 쏟아져 빛나는 것을 나는 막지 않았다.

 

 

나도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이십 대가 가졌던 기대나 가능성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없어지고, 삶에 대한 근본적인 허무가 몰려왔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서른은 인생의 전환점이자 처음으로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100)

 

 

어른다운 말도 하지만

 

 

어두운 밤이었나 보다

그냥 어둡기만 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하고 싶었는데

무척이나

그냥 밤은 깊어만 가고 있다

사실 내 속에 웃지도 울지도 못해 하고 있다.

사랑은 이렇듯 쉽게 왔다 쉽게 가고 있지만

남은 꿈들은 어렵게 조금씩 흐른다.

오늘도 혼자였던 나를 돌아보며 하루를 정리하는 양

촛불 앞에 앉았다.(132)

 

 

'무척이나' 할 때 무언가 하고 싶던 당시 열망이 안타깝게 피어나, 다시 스러진다. 어른 이면에 아이도 어른도 아닌 존재가 외다리로 서 있고, 한 발 더 땅에 붙이기 힘들어 휘청이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코 즐기지 않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고, 또 느끼려고 더 버둥거린다. 스무 살에 부정했던 이 흔들리는 삶이, 결국 삶이나 보다, 깨닫는 것도 아니고 체념하는 것도 아닌 채 서른이 되면서 그저 수긍하게 되었다. 깨닫을 시간도 체념할 시간도 없는 생활이 계속 되는 것이, 차리라 안심이 되는 날도 있다.

 

 

'움직임 당신의 움직임 당신이 불쌍해'(142)

 

 

어느 시인의 글귀를 적은 메모에서도, 그는 삶을 원하고, 향기를 원하고, 그것은 여지없이 또 '사랑'이라는 단어로 계속 계속 표현된다. 여느 발라드 가수의 소몰이 사랑 타령이 아니라, 아...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사랑'이라는 단어를 나직이 읊조린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그 유명한 가사만큼이나, 김광석은 사랑에 아파한다. 딸 서연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낄 때 괴로워하고, 그래도 사랑할 수 밖에 없고 사랑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해 쓴다. 병원에서 출근 전인 의사대신 딸을 받아낸 아빠이니만큼 딸에게 각별할 테고, 이미 사랑에 대해 각별할 대로 각별한 사람이니, 딸에 대한 사랑이 다른 사랑보다 깊게 느껴지는 것이 착각은 아니리라.

 

 

내 딸이 태어날 때 처음 본 얼굴은 의사가 아니라 나였다. 내가 딸을 직접 받아냈기 때문이다. 의사는 출근 전이었고 간호사는 무슨 준비 하러 간다고 나간 사이에 내가 아이를 받아냈다. 아주 놀라웠다. 아! 사람이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그 놀라운 광경은 괴기영화보다 더했다. 참 신기했다. 사람이 태어난다는 게.

 

놀라가지고 멍청하게 있다가 밖에 나갔는데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도 쉽게 안 보였다. 잘생겼건, 못생겼건, 있는 자건, 없는 자건, 다 그렇게들 태어나는구나. 좀 없는 사람이다 싶으면 슬쩍 무시하고 좀 있는 사람이다 싶으면 괜히 쩔쩔매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다 똑같구나, 모든 사람이 다 똑같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만든 노래가 <자유롭게>이다.(126)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다. 사람이 살면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일어나고, 김광석은 아파하면서도 덤덤하게, 단순하게, 또 한편으로는 유쾌하게 해석한다. 의외다. 철학적이지 않지만, 생각이 많고, 진하게 살아내려하지만 격렬하지 않다. 균형이 있고, 사랑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읽고 또 읽어도 지겹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유투브로 김광석을 찾아보면서 노래만큼이나, 풀어놓는 여담이 진실하게 느껴졌다.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기타에 몸을 기댄 채 말하는 모습에서 미소가 지어졌다. 가수가 자신이 부른 노래처럼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해서 한 동안 <거리에서>를 부르고 다니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도 관객도 천진하게 웃었다. 이상한 것은, 그 이후의 일들을 알고 있더라도, 그 순간에는 같이 웃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김광석세대도 아니고, 동시대의 아픔을 알 수 없어서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랑은 사랑이고 아픈 건 아픈 거고 웃는 건 웃는 것, 이렇게 생각하자. 

 

 

 

 

 

내가 의도함으로 뚫려버린 가슴속의 구멍은 그대로 두련다.(49)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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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어 - 세상 사람들이 뽑은 가장 소중한 단어 50
정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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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설문으로 추린 '인생의 목적어' 50개는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가족, 사랑, 나, 엄마, 꿈, 친구, 행복, 우리, 돈, 여행. 작가는 이 평범한 단어들을 다시 곱씹는다. 카피라이터'답게' 간결하고 함축적이다. 독자는 편하고 아마, 작가는 치열했을 테다. 하지만 즐거웠던 것 같다. '치열'은 '고통'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즐겁고도 치열한 삶. 누군가 부러워야 한다면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책장을 가볍게 넘겨가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해질 때가 있었다. 특히 '밥' 이야기를 할 때, 울지는 않았지만 울컥한 순간이 있었다. 독서 중에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는 경우는 많지만, 훅, 하고 치고 들어온 적은 별로 없으니,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김밥 사세요!"
"김밥 사세요!"

그의 말은 쩌렁쩌렁 여의도를 흔든다. 사세요, 라고 말을 올리고 있지만 그건 선배사원이 신입사원에게 하는 존경심 없는 존댓말처럼 들린다..(중략)..

"천 원입니다!"
"천 원입니다!"

이 한 마디만 반복해서 외친다. 오랫동안 김밥을 팔아 와 가격만큼 경쟁력 있는 메시지가 없다는 것을 터득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 가격에도 사지 않으면 너희가 손해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이번에도, 다음에 사지요, 하며 그냥 지나친다. 할머니 바로 뒤엔 아주머니 한 분, 그녀는 아직 김밥 파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듯 수줍게 외친다.

"저희 집에서 방금 싼 김밥입니다."
"제 딸아이랑 금방 싼 김밥입니다."

달랐다. 다르게 들렸다. 분명 김밥 사세요!랑 같은 말인데 그 말을 들은 내 귀는 금세 따뜻해졌다.(209,210)

나는 몇 번인가, 이런 이야기에 감동받은 자신을 부끄러워 하는 일들이 생기곤 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에 대해 숨기는 경향이 있다. 왠지 감동받았어, 라고 말하면 겨우 그런 이야기에 감동하다니, 라는 뉘앙스의 침묵이 따라온다. 나 역시 침묵으로 대응하지만, 그렇다고 상처받지 않은 건 아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따져보면 이런 이야기에 언제나 귀를 열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아마 내가 이 에피소드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이 김밥 파는 아주머니가 수줍게 외친 목소리의 따뜻한 온도, 그런 것을 기대하고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이 책의 부작용이라 한다면 잊고 지내던 소중한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는 것이다. 부작용은 엄연히 말해, 부수적인 작용이지 다른 불순한 뜻이 아니라는 걸 먼저 말해야겠다.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을 떠올랐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이에 가까웠던 10년 전 부모님, 밤낮으로 주구장창 컴퓨터로 음악을 서치하던 스무 살, 헤어진 사람의 자상했던 순간들, 남자친구의 돌고래 같은 웃음소리, 오빠를 따라 하루 종일 게임에 빠져들었던 어린 시절, 오후 5시 쯤이었나 천사소녀 네티를 보다가 학원에 가야해서 아쉬워 하던 순간 같은 것이 계속 떠올랐다. 상을 받거나, 좋은 성적을 받거나, 비싼 선물을 받거나 하는 그럴 듯한 일들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누구나 거쳐가는 그런 종류의 기억들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독자는, 예민하건 그렇지 않건, 책을 통해 작가의 생활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파악하게 될 것 같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 걸어온 길에 대한 이야기, 주변 친구에 대한 이야기 등 모든 글은 작가의 삶에서 시작한다. 작가의 삶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다는 느낌도 없다. 하지만 그가 삶을 대하는 방식에서 아,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구나 싶은 팁들이 종종 보인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를 꼽으라면 나는 워너브라더스행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던 그 1년을 꼽는다. 지금도 그 1년은 내 경력에서 지워지고 없다. 그 회사에서 뭐 했어?라고 누가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어서다. 분명히 1년을 열심히 달렸는데 무엇을 했는지 나조차 설명할 수 없어서다. 기차는 내가 내린 후에도 조금 더 달렸다. 멈추지 못해 움직이는 그런 꼴이었다.(330)

나를 성토한 놈들 줄줄이 다 엮겠다는 복수열전 같은 생각이 글 하나를 낳았다. 물론 억지스러운 글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어제 하루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너무 거창한 생각만을 생각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내게 필요한 정보의 80%는 내 주위에 몰려 있다고 한다. 생각할 재료도 그렇다. 작은 것, 사소한 것, 가까운 것부터 생각한다면 생각의 빈곤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처음부터 노벨상을 가져오겠다는 생각이나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생각을 방해하는 짐이 된다.(341)


책을 읽기 전까지 저자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지금도 별 정보는 없지만 분명한 건 이 책 하나에 '정철'이라는 작가의 '글'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글'이란 참 솔직하다. 글쓴이의 이력은 중요치 않고, 쓰여있는 글만으로 마음에 들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까. 글에서는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한 순간이라도 얼마나 치열했느냐, 그것이 중요해진다. 좋은 작가들은 치열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글 쓰는 대상의 이면을 꿰뚫 수 없을 테니까. 그 뜨거운 관찰력이, 그들에게 반하고 또 반하는 까닭이다.

 

이 책을 읽었다면 한 번쯤은 물어볼 것 같다. 내 인생의 목적어는 무엇인지. 그리고 문득 깨달은 것은,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 질문이 어마무시하게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답이 안 나왔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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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위하여 -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김형경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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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여자 동창과 수다 떨던 중에 유난히 허물없이 지낼 수 있으면서도, 단 둘이 있으면 묘하게 연애하는 느낌을 주는 남자아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각자 이야기하고 보니 그 대상이 같은 사람이었다. '역시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하는 약간의 실망감을 안긴 채 그 이야기는 어느덧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남자 동창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들끼리 수군대던 그 묘한 남자아이가 남자 동창들 사이에서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걔는 여자랑 있을 때만 인간인 척 해." 왜 그 한마디에 이유도 없이 '아!'하는 깨달음이 찾아왔을까.

 

 

그렇게 직관적으로 깨달음이 왔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어릴 적에는 다들 똑같이 순진한 얼굴로 시작했던 여자애들이 화장을 하고 스커트를 입으면서, 좋아하는 남자를 하나씩 찜해서(어쩜 그렇게 공평히 나눴는지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연애 작전에 돌입할 때, 나는 남자에 대한 아무런 도전의식도 느끼지 않았고, 남자나 여자나 같은 인간이라며 인류평등적으로 생각했으며, 나의 친구들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치장하고 돈을 쓰는 것이 헛된 소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이런 나야말로 연애가 거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별 건가, 인연이 되면 만나는 거야, 하는 무위자연 연애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나았던 점이 있다면 결코 남자의 '조건'을 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남자를 그저 개개의 인격으로 보았고, '남자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관념이 없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만난 적도, 나쁜 사람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남자는 인간이기에 앞서, 남자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말하자면, 연애에 목을 매는 여자 친구들이나, 초탈한 척 했던 나나 결국 만나는 것은, 만나고 싶은 것은 '남자'였다는 것.(단순히 말하더라도 일단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특별히 '남자'에 대한 책을 찾아 읽는 편이 아니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 하는 책은 '어딘지 간지러운'책이라고 낙인찍는 버릇이 있는지라 이번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성별을 구분 짓는, 그런 류의 책을 읽는 것은 내 생에 처음인 것 같았다.(냉정과 열정 사이를 로쏘와 블루로 나눠 읽었으니 처음은 아닌 건가?) 저자가 심리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몇몇 책을 훑어보면서 확인한 적 있었다. 이 책은 그런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상이 '남자'이고, 그들에 대한 '심리학'이 주 내용이었다. 아, 사실, 나는 심리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남성 심리학에 대해서는 뭔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있었다. 대학시절에 문학비평 수업 도중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상징적 개념으로 남근이 등장했다. 두 시간 수업 동안 그 단어는 이 사람 저 사람 입을 통해 약 오십 번 정도 반복되었던 것 같았다. 서슴없이 그 단어를 입에 담는 학생들이 경외스러웠다. 그 동안 내 안면은 홍조를 띈 채, 머릿 속으로는 '이건 학문 용어야'하며 주문을 외웠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시작된 그 상징적 개념은 그 후로, 중요한 거 같긴 한데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 아카데믹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내 인생의 언덕 너머로 던져버렸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책을 두 손에 부여잡고 그 땐 그랬지, 하며 쓸쓸한 회상에 젖어 들었다.

 

 

다행히 이 책에 그 직접적인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않았던 것 같다. 나왔다 하더라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잠깐이었던 건 틀림없다!) 오히려 이 책은 거부감 없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그렇지만 남성 심리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밋밋한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주요인이라는 건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저자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여자들이 생각하는 '남성다운 남성'의 근저를 이루는 심리적 성질을 조목조목 사례와 해설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라는 제목에 딱 어울리기도 하다. 만약 누구도 보여주지 않았던 남자의 밑바닥을 기대했다면, 그 기대치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는 여성들도 때로는 남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이지, 하고 투덜거릴 때 '이 모양'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라고 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을 오직 '남자'에 대한 심리로 보기에는 아까운 면이 있다. 책에서 심리학을 끌어들인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 대상이 남성이기에 해당되는 이야기라기보다, 자기애가 강한 인간이기에 나타나는 현상들처럼 보였다. 이 책을 통해, 사랑 받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여러 심리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거의 자명하다고 느껴질 즈음 여자들 역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착각하고, 남자들 못지 않게 코스매틱이나 패션에 대한 콜렉터를 자처하며, 섹시한 남자 연예인의 몸에 감탄하고, 부모에 대한 영향으로 자기 인생이 결정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건 너무 자연스러운, 그냥 인간의 삶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와의 애착관계에서 제대로 분리되지 못한 어른이 자기 정체성 정립의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어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한 인간이 얼마나 있는지 의심하게 했다. 특히 어려운 일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이직하는 젊은이들을 심리학적 시선으로 '자기 정체성' 결여로 판단내리는 것은 너무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사실 이 책이 종종 불편한 느낌을 주었다면 바로 그 '주관성'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타인에 대해 심리학적 잣대로 이야기하는 부류들이 한편으로는 인기가 좋고, 한편으로는 비판 당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삶이 천차만별, 그만큼 형성된 주관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내가 살아온 삶을, 가치관을, 저것이 사람의 마음에 대한 학문이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똑같은 모양으로 줄 세울 수 있는가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오직 '남자'에 대해서만 알고 싶은 여자들은, 어쩌면 남자에 대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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