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제목 : 소설가의 일, 2014

지음 : 김연수

펴냄 : 문학동네

작성 : 2014.12.16.

  

“내게는 처음 하는 일은 다 재미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늘 고생이다. p.32”

-책 안에서-

  

  오랜만에 편지를 받았다. 제법 두툼했다. 우편엽서를 연상시키는 봉투에는 ‘소설가의 일’이라고 적혀있다. 누가 보낸 것일까? 보내는 이의 주소와 이름이 생략된 우편물을 찬찬히 살펴보자. 우표는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2013’의 표지를 축소시켜 300원이 표시되어져있다. 그리고 작가로부터의 직접배송임을 말하는 소인이 인상적이다. 11월 5일에 발송되어 한 달 만에 도착한, 기나긴 여정을 경험한 편지였다. 봉투로 다 덮지 못한 짙푸른 알맹이가 빼꼼 인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바쁜 일정도 끝났겠다, 하얀 속살을 펼쳐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건 뭘까? 작법서 같으면서도 일기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했는데, 이상하게 작가의 일상도 함께 펼쳐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릎을 탁 쳐볼 수 있었고, 낯설지만 평범한 느낌의 일상에 키득거려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표를 만나서면서 잠시 멍~한 기분에 피자를 오물거려본다. 식은 피자도 나름 괜찮기는 하지만, 도대체 난 무엇을 맛본 것이란 말인가?

  

  소설가의 일.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소설가란 어떤 직업일까? 아니, 직업이기는 할까? 막연한 기분이 들 때면 보편적 지식의 보고인 사전을 펼쳐본다. 소설이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으로,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 사상, 심리 따위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분량에 따라 장편, 중편, 단편으로, 내용에 따라 과학 소설, 역사 소설, 추리 소설 따위로 구분할 수 있으며, 옛날의 설화나 서사시 따위의 전통을 이어받아 근대에 와서 발달한 문학 양식이라고 나온다. 비슷한 말로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리고 소설가란 소설 쓰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통칭 작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편지를 보낸 작가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한 나름의 공식과 인생경험? 아니면 작가로의 삶에 대한 단상? 그것도 아니라면 이름 모를 누군가를 향한 하소연? 전에는 시를 썼다는 작가이기에,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을 잠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감상기록자의 감을 깨우기 위해 우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손가락의 춤을 이어본다.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있었다. 열정, 동기, 핍진성을 말하는 1부. 플롯과 캐릭터의 2부. 문장과 시점의 3부. 그런데 ‘핍진성’이 뭐였지? 작가가 만든 새로운 단어인가 싶어 확인해보니 사전에도 나와 있다. 하지만 뜻풀이가 어려워 작가의 말을 빌리니 한글로도 어렵고, 한자로도 어렵고, 영어로도 어려운, 그 말만으로도 반항적인 젊은 학생들을 괴롭히고 제압하기 좋은 단어라고 되어있다. 그러면서 풀어놓은 의미가 ‘반박할 부분이 한곳도 없는 완벽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너무나도 완벽한 알리바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동안 범죄 수사물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 인가 보다. 아무튼, 일상과 작법이 한 덩어리로 되어 그 둘을 따로 생각하기에는 힘드니, 궁금한 사람이 직접 이 편지글을 읽고 감상과 생각의 시간을 가져보기를 바랄뿐이다.

  

  나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글쓰기를 즐긴다. 그럼 나는 소설가인가? 작가는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주인공도, 이야기의 흐름도, 그렇다고 어떤 사건이 있는 글도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맛보고 그것에 대한 느낌을 기록할 뿐이다. 그런 것을 과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말하고 있는 ‘나’를 1인칭 시점의 주인공으로 두고, 비록 주절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논리적으로 흐름을 가지며, 어떤 한 작품을 보고 생각한 것을 통해 인생을 재조명하는 것이 사건이라면, 그것은 소설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모르겠다. 감상문을 보고 객관적이지 않고 너무 주관적이라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입장에서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한 기준이 없어 보인다. 이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작가가 말하는 소설 작법의 요소 중 ‘욕망’이 있었다. 그렇다면 감상문을 소설로 생각했을 때, ‘나’가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과연 무엇일까? 2000회가 넘어가는 나의 감상문을 보자. 초기에는 ‘분명 나도 본 영화인데 왜 안보고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무시하는가?’라는 반발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어서는 ‘난 이런 작품도 봤어. 혼자 알고 있기 미안해서 미리니름은 빼고 알려줄게’와 같은 자랑심리도 있었다. 그밖에도 하루에 한 편 감상문 쓰기와 같은 ‘혼자 하는 기네스북’, 상금이나 상품 같은 대가를 취하기 위한 ‘욕심’, 결국 괴로움으로 변해버렸던 ‘습관화된 기록행위’, 작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것을 통한 ‘자아발견의 일기’ 등 다양한 심리적 변화, 즉 욕망을 담아왔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소설과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나의 무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기회가 되는 대로 소설에 대한 공부를 해봐야겠다.

  

  글쓰기에 대한 공부라고 하니 다독, 다작, 다상량이 떠오른다. 즉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말이다. 작가는 이 세 가지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는데, 사전조사를 하는 것인지 글쓰기 싫어서 웹서핑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면 애당초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속편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일기는 편안한 마음으로 몇 장이고 쓸 수 있지만, 서술식 시험지는 어떻게 내용을 채워야할지 고민을 거듭하다보니 항상 시간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치기 위해서라도 일단 쓰고 보자. 구토기가 올라올 정도로 퇴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다리고 있지만 말이다.

  

  제목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번에는 ‘감상기록자’로서의 ‘나’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위에서 적은 몇 가지-시점, 흐름, 이야기-말고도 심심찮게 듣는 질문은 ‘그래, 감상문 많이 써서 돈 많이 벌었냐?’가 있다. 여기서 프로와 아마추어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어떤 이는 ‘인내와 그것을 통한 성공 유무’라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직업의 유무’로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목적과 과정으로서의 돈’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이 셋은 틀리고 맞는 게 아닌 입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인내의 결실로 직업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함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둘 중에 무엇일까? 이상의 논리로 보면 글 쓰는 행위에 있어서의 나는 아마추어이다. 인내의 마음이 있는 것도, 직업적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돈을 목적보다 결과의 부산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연찮은 기회에 프로의 세계에 들어설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아마추어의 영역에서 도를 닦고 있을까 한다.

  

  그럼 편지글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으로, ‘호기심 많은 어떤 감상기록자의 이야기’를 마쳐볼까 한다. 나에게 소설에 대해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한 작가이니만큼, 그의 작품을 만나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TEXT No.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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