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2,3월을 보내고 4월은 피폐하게 보내고 있다. 얼마만에 영화를 보는지.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빼앗겨보면 안다고. 무리해서라도 서울아트시네마에 에릭 로메르전을 보러갈까 했으나 심신이 만신창이라 네이버 영화 다운으로 만족을.

2차 세계대전 독일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컴퓨터의 할아버지격을 모델링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삶을 다룬 영화이다. 천재의 삶은 하나의 관심사로 수렴되는 삶이라 일반인의 눈에는 썩 행복하진 않다. 긴급한 전시에 튜링의 집념을 학창시절과 교차편집되어 있다. 튜링은 왜 기계에 크리스토프란 이름을 붙였고 애정을 쏟나.

기계는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람도 각자 다르게 생각한다. 다른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학교폭력의 희생자였던 튜링한테 크리스토프란 친구가 생긴다. 언어 혹은 대화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암호이다. 튜링과 크리스토프 사이에는 일반 언어대신 암호로 대화를 한다. 언어로 이루어진 대화는 여러 사람이 비슷하게 해독을 하지만 암호는 내부자 사이에서만 같게 해독을 한다. 은밀해서 사랑의 언어로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튜링은 일종의 너드고 크리스토프는 결핵으로 시한부이다. 암호화는 자연스럽고 암호해독 놀이로 사랑이 싹튼다. 사실,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모호하게 처리하고 살짝만 다뤘다. 튜링이 동성애자로 나중에 화학적 거세를 당하는 이야기까지 나아가지만 요점은 이게 아니다.

그리고 튜링의 삶에 한때 약혼자지만 평생의 여자친구 조안이 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여자가 수학자인걸 인정하지 않아 조안이 일을 하는 걸 돕기 위해 튜링은 청혼을 한다. 조안은 튜링의 성정체성을 나중에 알고도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평범하지 않아서 좋아요. 사건은 일상적인 곳이 아닌 낯선 곳에서, 늘 행동하던 방식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고 과학적 발견이나 돌파구도 예외는 아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실험실이 아니라 욕조에 앉아 "유레카"를 외쳤듯이.

튜링은 표면적으로는 불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학창시절 그의 다른 사고방식을 이해한 친구가 있었고, 전시에는 그의 연구를 지지한 조안을 만났다. 그리고 AI의 전신 크리스토프에 튜링은 자신의 영혼을 건다. 무언가에 영혼을 걸 수 있는 게 오늘 매력적으로 보인다. 보편적 시선으로는 불행해보일지라도 정작 튜링은 몰입할 연구를 할 수 없을 때만 불행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목숨을 끊었을 거고.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영혼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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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요일에 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한 영화인데 평일인데 거의 만석이라 깜짝 놀랐다. <내셔널 갤러리>만이 아니라 앞 영화 <루이 14세의 죽음>도 거의 만석. MBC가 이사 온 후광일까? 평일 영화 애호인구가 이렇게 많다는 게, 그리고 연령층이 비교적 높다는 게, 그리고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내셔널 갤러리>는 상영 시간이 180분인 다큐멘터리인데도 모두 열청하는데 살짝 감동받았다. 영사기사도 아니건만ㅋ

 

2.

런던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가 운영되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회화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회화를 둘러싸고 확장되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갤러리에는 운영자도 있고, 큐레이터들, 도슨트, 복원자도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람자들. 각자의 입장을 조금씩 다 담는다. 운영 관련자들은 그림을 보존하는 방법, 유화의 경우 원본은 어떤 식으로 그려졌는지 유추하고 사적 자료를 추적한다. 유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투명해진단다. 그래서 밑에 그렸다가 위에 덧그림으로 덮인 그림이 시간이 흐르면 나타난다고. 또 물감이 차창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깨져서 원래의 빛을 표현하지 못하고 뭉개지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현대 복원사들이 원본의 빛을 찾기 위해 손을 대기도 하고.

 

이런 말이 있다. 복원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복원 작업이 과연 원본 작가들이 의도한 것인가? 하는. 그림의 최종 소비자(?)는 관람객이다. 그림도 다른 공산품처럼 어쩌면 여러 사람들이 실은 의도대로 봐야하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사람들의 입장을 담아서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점에서 미술이 아니라 '미술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3.

한 미술사가는 그림은 감상자와 관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아-멘. 그림은 그린 이의 손을 떠나 미술관에 걸리면 보는 이와 각각의 관계를 맺는다고. 또 한 큐레이터는 예술은 모든 학문을 다 포함한다고 말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과학, 수학, 철학, 역사 등등을 직접 작품에 담지는 않지만 그 모든 응용 원리들이 예술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예술이 흥미롭다. 예술작품을 보다 보면 인접한 학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지점이 있다.

 

4.

특히 이 영화로 푸생의 특징을 알게 되었다. 푸생은 조각의 특징을 회화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푸생 시절에는 조각이 더 영구적으로 유통된다는 관념이 있어서 회화보다 조각이 약간 더 우월한 입장이었나 보다. 푸생은 그런 당시의 관점에 위배되는 시선을 택해서 회화에 조각 기법으로. 그래서 인물들의 몸이 우람(?)하고 무엇보다 잔근육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실 지금 보면 디게 비현실적이고 뭐가 아름답나, 싶은 게 사실인데 미술사에서 푸생의 위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이해가 잘 안 갔었는데 푸생의 위치는, 바로 이 저항 정신에 있었던 거다.

 

5.

한국도 전시 호시절이다. 하지만 이는 부모들이 아이들한테 문화 계급에 대한 욕망을 투사한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전시도 방학 중에 주로 열리고 비교적 익숙한 테마로 반복해서 열리곤 한다. 그래서 전시장에 가면 북적이는 인파로 몹시 지친다. 어떤 경우에는 오디오 가이들을 듣느라 줄이 안 움직이고 설명이 없는 작품에는 사람이 없는 현상이 발생한다. 누군가의 가이드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작품과 보는 이 사이에 상호작용은 일어날 수 없다. 물론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탐욕적 관람이 양적으로 팽창한 후에는 질적으로도 관람의 질이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미술관 운영프로그램이 주로 아이들을 위한 것인데 반해 이 영화는 주로 어른들, 아마도 취미 삼아 하는 어른들이 직접 데생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아이들한테 문화 계급을 물려주려는 욕망으로 미술관이 북적거리는 우리와 한참 다른 지점에 있어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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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현실이 너무 버라이어티해서 <마스터>의 내용은 전혀 영화같지도 않고 현실에서 비일비재한일을 지켜보고 있는 느낌. 사회의 제도는 무력하다는 걸 번번이 목격하고 있다. 탄핵을 해도 권한대행자가 그에 준하는 악덕한 사람이고 대행자가 없어져도 악의 고리는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을 거라 사실 그닥 희망이 없어 보인다. 새누리는 선거를 위한 이미지를 분당 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다시 합당을 할 거란 전망도 나오고. 거물급이라고 거론되는 사람들은 다 정치권에서 물러나야할 사람들인데 혼란을 틈타 또 등장하는 거 보면, 사람들은 또 잊고 새누리에 표를 던지는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감마저 든다.

 

2.

제도는 무력해서 특히 약자를 보호해 줄 수 없다. 제도에 취약한 평범한 사람을 지켜주는 건 어쩌면 개인이라는 생각 쪽으로 요즘은 생각이 기운다. 공공의 선과 공공의 악은 한 몸인지도 모른다. <마스터>에 세 명의 천재가 등장한다.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경찰, 공공의 악을 추구하는 사기꾼, 그리고 금융사기프로그램을 어디다 써야할지 갈팡질팡하는 평범한 프로그래머. 평범한 사람은 절대 악과 선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종종 선과 악을 오가면서 혼동스러워한다. 자신의 경험치에 근거해서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있다.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다.

 

경찰청장, 천재의 두뇌를 가진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대표적 인물이다. 경찰청장은 선이라고 믿는 것을 추구하다가도 문득 자신이 속한 제도 내에서 선은 더 이상 선이 아니라는 걸을 인식할 때마다 올바른 길인지 의심을 한다. 나라를 뒤흔들 수도 있는 일은 선이 아니라는 가치판단에 시달린다. 프로그래머 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꾼을 돕다가 무일푼이 되고 사채없자한테 협박을 당하는 바닥을 친 후에 (어쩌면) 개인적 복수를 위해 경찰을 돕는다. 피해자를 구원하는 대의명분은 그의 관심 밖이다.

 

다른 두 천재는 절대 선과 악을 추구한다. 둘은 쌍둥이같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절대 선이나 악에 대한 부동의 믿음은 강한 추진력을 만든다. 경찰은 사기꾼 하나를 잡는 게 아니라 부패의 네트워크를 잡으려는 거시적 목표가 있다. 사기꾼은 이미 많은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부라는 게 뭔가. 부는 가져본 사람만이 실체화할 수 있는 것이다. 100억이 추상적으로 다가오는 일반인한테 1조는 화성에서 생물이 발견됐다는 뉴스 같은 추상성이 있다. 하지만 사기꾼한테 구체적 숫자로 다가오고 어떤 목표 지점을 발견한다. 날아가는 과녁을 맞추면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천재 둘, 경찰과 사기꾼은 자신의 믿음과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데 절대 선 역시 절대 악마큼 피해자를 생산한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든다. 절대 선을 포기해야하나? 다수는 다행히 절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 극소수만이 '절대'에 대한 기준이 있고 이들은 보통 사람들을 능가하는 머리가 수행력이 있다. 선은 당장은 피해자가 있어도 결과는 다른 지점에 가 있을 수 있다. 가령, 영화 마지막에 사기꾼은 결국 잡힌다. 하지만 제도의 메커니즘상 사기꾼의 돈을 국고에 환수해서 1년간 보관하고 피해자에게 주는 절차 동안 피해자는 고통을 받는다면서 단독으로 피해자의 계좌에 입급해서 영화를 판타지로 만든다. 마지막 장면 빼고는 영화는 극사실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찌됏건 소수의 절대 선을 추구하는 개인이 없다면 제도는 악의 뫼비우스띠다. 제도가 아무것도 보장하지 못하는 나라는 후진국아닌가ㅜㅜ

 

3.

사실 미디어는 현상의 나열에 불과하고 앎의 권리를 충족시키기는 한다. 그래서 어떤 극적인 순간을 위해 사람들이 움직이게 하지만 청문회를 보면(사실 홧병날 거 같아 나는 청문회를 거의 안 본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과연 있기나 한가, 하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4.

이 영화에 이병헌 싸가지가 나온다. 이병헌은 역시 절대 직업주의 정신을 가진 비범한 인물이다. 그는 사적 영역에서는 도덕적 문란함으로 욕을 먹지만 공적 영역으로 넘어오면 장인이다. 영화 속에서 필리핀 영어를 구사하는데 그 완벽함이라니. 어딘가 헛점이 있겠지하고 귀를 쫑긋세우고 들었지만 이 인간은 아마 필리핀인한테 대사를 녹음해서 그걸 그대로 흉내내는 연습을 했구나, 하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5.

파스칼이 말했다. "피레네 이쪽에서는 선이 피레네 저쪽에서는 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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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울에 우연히 마주친 두 남녀. 서너 번 우연히 마주치고 봄에 두 사람은 밀당을 한다. 여름에 본격적 데이트를 하면서 사랑이 깊어진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겨울에는 헤어진다. 시간의 흐름으로 배치를 했는데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데 이유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배우의 꿈을 안고 라라랜드(헐리우드가 있는 곳을 이렇게 부른단다)에 입성한 여자는 카페에서 일을 하면서 수 많은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만 번번이 낙방. 배우로서 자신의 재능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터벅터벅 걸어갈 때 한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피아노 소리에 끌려 들어간다. 재즈 피아니스트인 남자는 인기없는 재즈를 연주해서 막 짤리던 참이다. 타이밍이 안 좋았고 남자는 여자가 눈에 들어올리 없지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되고 더구나 자신의 음악을 아는 여자라니..호감도가 급상승한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막을 수 없다. 이미 남자친구가 있고 그 남자친구와 형과의 저녁 식사자리에서 나와 <이유없는 반항>을 같이 보기로한 남자한테 달려간다.

 

두 사람은 꿈을 꾸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서로의 꿈을 지지해주는 지원자가 된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가 엄마랑 통화하는 내용에서 오해를 한다. 안정된 수입이 없는 재즈 피아니스트라니, 안정된 수입을 위해 재즈를 버리고 유행음악을 하는 밴드에 들어간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했지만 여자가 원하는 것은 남자가 재즈 피아니스트로 남아 자신만을 클럽을 여는 꿈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오해로 연인은 헤어지고 여자는 자비로 모노드라마를 공연했는데 좌절감만 느낀다. 결국 가을에 그들은 헤어지지만 남자는 여자를 캐스팅하는 오디션 전화를 받고 여자의 고향으로 찾아간다. 여자가 흘려말했던 사소한 정보, 집 앞에 도서관이 있다는 말로 그녀의 집을 찾아내는 정성과 오디션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여자를 끌어내 꿈을 찾아준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했다, 하면 진부한 영화일 것이다.

 

영화는 5년 후 겨울로 시간을 이동한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딸을 가진 엄마가 되어 있고, 커리어도 쌓아 제법 이름있는 배우가 되었다. 라라랜드에 돌아온 여자와 재즈 피아니스트의 뜻밖의 재회. 남자는 자신만의 클럽을 열고 여자와 함께 설계했던 꿈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의 곡을 남자가 연주하는 동안 영화는 라라랜드로 잠시 돌아간다. 환상이 펼쳐지고 두 사람이 결혼했더라면 하는 장면을 비디오 촬영화면으로, 마치 실제인 양 보여준다. 연주가 끝나면 상상도 끝이 난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고 서로의 삶에 응원의 미소를 지으며 헤어지는 영화. 나는 연인이 헤에지는 영화가 왜 이렇게 좋은지-.-

 

2.

<위플래시> 감독의 영화여서 그닥 안 좋아하는 장르인 로맨스 영화라도 봤는데 이 감독은 내 정서랑은 안 맞는 연출법을 구사하신다. 영화가 몹시 과잉으로 넘치는 느낌이다. 재즈 음악 자체만으로도 감각은 깨어나고 충분히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데 이 감독은 음악을 카메라 움직임의 현란함을 더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연주자를 담을 때 쓸데없이 줌인 줌아웃을 빈번하게 사용해서 초조하게 만든다. 카메라 앵글을 고정시키면 뭔가 불안한 것처럼 위45도 아래에서 45도 이런 식으로 계속 움직여서 아주 산만하다. 그래서 오히려 음악이 자꾸 카메라 움직임에 묻히는 경향이 있다. <위플래시>에서도 드럼 연주장면을 아주 스펙터클하게 묘사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스펙터클하다 못해 경박한 느낌도 든다.

 

또 하나, 뮤지컬 장르고 색감이 원색적인데 이렇게 눈과 귀를 피로하게 만드는 연출법이라니. 사실 두 사람의 이야기의 감정선이 이런 효과들에 의해서 다 파묻히는 느낌도 있다. 초반에는 그래서 엄청 집중 안되고 지루하기까지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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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가결 기념으로, 백만년 만에 극장에 갔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다. 벨기에에 다르덴 형제가 있다면 영국에는 켄 로치가 있다. 한국에는? 우린 미국식 영화를 만드는 거 같기도 하고. 리얼리즘에 기반한 영화를 주류 감독은 거의 안 만드는 거 같다.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주로 다루는 주제인데 독립영화로 넘어가면 어두운 톤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있는 거 같기도. 아무튼.

켄 로치 감독의 초기작들은 지독한 사실적 묘사로 서늘하고 영국의 차가운 공기(실은 잘 모르지만)를 화면 속에서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다. <빵과 장미>같은 판타지 보다는 이런 서늘한 시선이 켄 로치 감독의 장기이다. 남의 나라나 우리나라나 암울하기는 마찬가지-.-;

영화는 꽤 긴 암전으로 시작한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만 들린다. 여자가 묻는다. 두 팔이 상의 주머니까지 올라가느냐. 짜증난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심장에 문제가 있지 다른데는 문제가 없다고. 뭐지...하는데 영국의 각종 보조금을 지불하는 관료주의적 방식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시작한다. 명목상 직장을 구할 동안 주는 구직보조금, 아파서 일을 할 수 없을 때질병보조금 등등의 제도를 가지고 있는 사회. 그 사회에서 보조금 수혜자에 대한 원칙만을 고수하는 기관 직원과 정말 보조금이 절실한 한 개인의 시선이 충돌한다. 제도는 허울 뿐이고 가스비와 전기료를 낼 돈이 없을 정도로 절박한 한 성실한 노인이 겪어야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1시간 가량의 자동연결음을 듣다 어렵게 통화가 된 직원은 절차대로 해야한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약속 없이 왔으니 돌아라가...인터넷에 나와있다. 돋보기를 끼고 마우스 사용법과 인터넷 신청서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배우는데 몇 일. 결국 옆집 청년의 도움으로 간신히 질병보조금 수당 탈락에 대한 항고서를 제출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블레이크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도 한정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기계의 편리함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행정절차의 편리함을 내세워 절실한 사람들을 차단시키려는 목적은 아닌지. 이건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들 경험한 바가 있을 것이다.

블레이크는 보조금 신청 기관에 가서 무작정 기다리다 런던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이사 온 싱글맘을 만나게 된다. 블레이크보다도 보조금이 더 절실해보이는 가족. 쉼터에 좁은 방에서 어린 아들이 산만한 행동을 보여 큰 공간을 위해 월세가 싼 지방으로 이사했지만 당장 저녁거리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 아날로그 세대인 블레이크는 어린 아이들을 손주처럼 대하고 독거 노인과 한부모 가정은 정서적 유대와 안정감을 주고 받는다.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또래들한테 놀림받지 않으려면 밑창이 제대로 달린 신발도 필요하고 성장을 위해 신선한 과일도 필요하다. 전기도 연결 못하고 인스턴트 스파게티 소스도 아껴야하고 생리대 살 돈도 없는 싱글맘은 겉으로는 의연한 거 같지만 매일 반복되는 허기에 지쳐있다. 일자리 찾기도 쉽지 않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원시 시대 정글같은 곳에 두 사람은 떨어진 거 같다.

블레이크는 공공기관과 씨름하느라 매일 초긴장상태로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이다.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는 영혼의 급이 있는 사람이다. 평생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기관 직원들은 원칙을 들먹이며 증빙 지료가 불충분해서 제제를 받을 수 있고, 제제시 보조금이 없는 상황으로 협박을 한다. 블레이크의 인격은 심사대상이 아니라 블레이크가 낯선 디지털 시대의 자료를 보충할 것을 종용한다. 어찌어찌해서 블레이크는 결국 항고에서 승리할 직전에 왔다. 하지만 그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 블레이크가 뛰어다닌 시간은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보조금 수령을 앞두고 그는 심장은 다시 한번 폭발한다. 영원히.

남의 일 같지도 않고 영화같지도 않다. 내 일이고 현실일 수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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