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침묵 - Into Great 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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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나니..." 

1. 시적 감상 

도를 수행하는 것 또는 신의 제자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는 행위다. 사계라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추우면 추운데로 더우면 더운데로 순응하는 자세다. 춥다고 거위털이나 밍크털로 내 몸을 두르려고 동물을 대량으로 길러 죽이지도 않고 덥다고 에어컨을 가동해서 온실가스를 집이나 사무실 밖으로 내뿜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진 일부를 포기한 거 일 수 있다. 아주 사소하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힘들다.  

수도원은 물질적 욕구를 모두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만물을 살핀다는 신의 교리대로 따르기도 약속한 공간이다. 물질적 삶의 간소함은 일부일 뿐이고 정신적으로 신을 향한 하나의 생각만을 남기도 온갖 욕망과 시기를 버리기로 하는 일이다. 최소한의 가구가 있는 독방에서 지내면서 주로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필사하면서 지낸다. 다 같이 예배를 드리는 의식 속에서도 대화는 거세되고 신을 찬양하는 나지막한 노래를 합창한다.  

그들의 소박하고 절제된 일상은 번잡한 내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종교활동을 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필요할 때만 믿는 내 눈에도 그들의 삶은, 한편으로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수도사들은 철저하게 비우는 삶을 지향한다. 한 끼 식사조차도 눈과 혀의 즐거움을 금지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고립된 수도원에서 신을 위해 기도만 하는 게 과연 신이 원하는 삶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눈이 쌓인 수도원 산길에서 수도사들이 미끄럼을 타면서 천진한 어린 아이들처럼 즐거워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금욕적 생활 속에서도 작은 즐거움은 누려하는 게 인간 아닐까..하는 처연함도.

2. 영화적 감상 

영화가 늘 새롭고 흥미로운 이유는, 플롯 때문이 아니다. 플롯은 영화를 이루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일 뿐이다. 영화 속 화면에는 현실에서는 잡아둘 수 없는 빛에 관한 기록이 있고 시간을 가둬둘 수 있어서 언제든지 되감아서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찰라의 빛과 시간에 관한 기록이다. 찰라를 모아 놓으면 세월이 되고 매일의 똑같은 일상이 이를 수 있는 곳을 암시한다.  

수도원은 양면적 가치를 가진 곳이다.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서는 수도원은 성스러운 곳이 더 이상 아니었다.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에서처럼 수도원은 부패와 악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고 또 피터 뮬란 감독이 만든 <막달레나 시스터즈>에서는 인권을 말살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수도원의 일상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수도원에서 무엇을 하는지 대체로 모른 채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는 책과 영화들을 봐왔다. 픽션이고 부조리한 부분만을 확대해서 가공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다큐로 일체의 인공조명을 안 쓰고 촬영했고 실제 수도사들의 삶을 담았다. 그러나 이것도 일부일 뿐이다. 수도사들의 묵상과 기도할 때 기록했다. 그들의 기도 내용이나 마음의 동요 혹은 평온은 카메라로 담을 수 없다. 감독은 씬과 씬을 원하는대로 배치해서 카메라가 담지 못한 생각을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이름이 "위대한 침묵 속으로"이고. 우리는 카메라가 말해준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수도사들이 들어간 침묵 속으로는 아쉽게도 들어갈 수는 없다.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수레 바퀴소리, 돌 바닥에 신발이 부딪치는 소리, 심지어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에도 청각이 반응을 한다.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는 음악같다. 신을 믿는 의식 중 하나가 기도문이나 찬송가다. 기도문이나 찬송가로 신심을 엿보는 건 비신자한테는 조금 힘들고 아름다운 의식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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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풍경 - Landscape in the 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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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거듭할수록 시간에 대한 감각도 없고 계획이나 희망에 대한 설렘도 없다. 2009년도 2010년도 비슷한 생활 주기곡선이 있을거라는 걸 직감한다.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독서를 취미로 삼고 있는데 내 나이쯤 되면 책을 통해 정체성이나 가치관을 정립하기 보다는 오히려 가치관 혼란을 가져온다. 삶의 반경은 책이 말하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고 편안함이 보장되면 적당히 타협하는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지만 계속 움직이고 있는" 그런 적당한 삶이 올해도 이어질 것이다. 한 친구가 올해 목표가 뭐냐고 물어서 객관적으로 그럴듯한 사항을 얼렁뚱땅 만들어내서 입 밖으로 말하고 정말 내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궁금했다. 목표를 이루려면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내게 그런 다부진 의지의 불꽃이 남아있는지 의문이다. 문득 정신차려보니 1월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다. 내가 따라가든 말든 상관치않고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있다.  

<안개 속의 풍경>은 1월에 보기에 근사하면서도 어두운 영화다. 안개 속 멀리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두터운 안개를 뚫고 힘겹게 남매는 한발씩 내딛는다. 아빠가 있을 거라는 독일을 향해. 안개 속에 비도 내리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말라는 차가운 어른, 도움에는 공짜란 없다는 나쁜 어른 세계를 보고 경험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처음, 아빠를 찾아 떠난 길은 이제 짙은 안개에 갇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걸음을 멈출 수 없다. 계속 가다보니 안개 너머에 도착했다. 안개 뒤에 목적지처럼 보였던 한 그루의 나무는 반갑지만 종착지가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이다. 나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나무 뒤에는 여전히 두터운 안개가 자리잡고 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가운 대기 속을 달리는 기차에 쭈그리고 앉아 잠을 자거나 적막한 차도에 덩그러니 남겨진 어린 남매의 모습은, 어른 세계에 있는 희박한 희망을 비춘다. 그들이 자라도 많은 절망을 이겨야고 이따금의 선과 환희를 등대삼아 전진해야하는 인생살이.   

감독의 정치적 우의가 어떻든, 녹록치않은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영화다. 삶에 대한 즐거움을 기록하는 것과 절망을 기록한 것 중 희망을 주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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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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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이트에서 아바타가 처음 나왔을 때다. 어느날 갑자기 아바타란 이름의 사람 그림이 나와서 나 인척하고 있었다. 아바타가 태어나서 다음 사용자에게 나눠진 상태는 속옷차림이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왠 그림?했지만 계속 보다보니 내가 올리는 까페에 올리는 글(당시 난 까페 운영자였다), 메일에 속옷차림의 여자가 함께 따라다니니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마치 내 사진이기라고 한 것처럼 속옷차림의 여자 그림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하고 결국엔 옷을 사서 입혔다. 그리고는 떳떳하게 아바타를 데리고 다녔다. 사진이나 각종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링크할 수 있게 되면서 아바타는 쇠퇴했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잡생각을 했다.  

긴 런닝타임은 멀미가 났다. 3D안경을 쓰고  한 시간동안은, 오-신기한데, 했다. 한 시간이 경과하자 눈이 아프기 시작하고 두 시간이 지나서는 안경을 벗었다. 하일라이트 전쟁신은 안경을 벗은 채 눈을 감았다 뜨곤했다. 눈을 뜨면 그림들은 몇 겹으로 보이는 아주 지루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캡슐에 들어가 실제 인물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유전자로 태어난 아바타가 새를 타고 날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아바타와 실제 자신 사이에서 정체성을 혼동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관객은 입구에서 현실과 스크린을 혼동할 매개체, 검은 안경을 받고 스크린과 검은 안경 뒤에서 실제와 영화를 혼동하기로 동의한 채 배정받은 의자에 앉아있다. 꽃잎이 눈 앞에 떨어지고, 익룡같은 새를 타고 하늘을 활주하고, 떨어지는 불꽃을 맞는 거 같은 착각을 즐기면서. 영화의 결말대로 미래에 언젠가 모두 검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안경없는 세상은 지루하다며 안경이 가져다주는 착시와 환각에 의존할지도.. 

이런 잡생각을 했는데도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2시간이었으면 좋았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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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르와 아스마르 - Azur And As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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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봐도 설레는 애니메이션이다. 먼저 색의 향연이다. 주로 원색을 사용한 배경은 아름답고역동성을 더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달리 액션이 크지 않지만 배경이 황홀해서 눈이 아주 즐겁다. 정교한 타일문양의 집은 한 폭의 그림같기도 하고  사진같기도 하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를 모델로 삼았다는데 꺄-악하고 소리지를 정도로 비슷하다. 사자는 갈색이 아니라 붉은 색이다. 붉은 사자가 달릴 때 불새같다. 싸움장면의 최소화, 배경의 최대화, 아주 좋다. 음악 또한 귀를 사로잡는다. 사라센인으로 나오는 유모의 자장가를 들으면 정말 스르르 잠들거 같다.  

내용도 훌륭하다. 권선징악이란 식상한 도식에서 벗어나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화해를 담는다. 요정 진의 궁전에 모인 사람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나이도 어린 꼬마 공주에서부터 공주의 스승인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누가 요정과 결혼할 지 결정해야는 과제를 두고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한다. 마지막 조언자로 불려나온 사람은 파란 눈을 가졌지만 사라센에서 거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요정과 왕자급 결혼을 결정하는데 거지의 의견을 묻자는 노스승의 제안은, 계급의 경계를 허무는 발언이다. 결국 짝은 각자가 정한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운명이나 미신이 아닌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만든 영화답다. 유색인 진은 백인 아주르를 택하고 백인 엘프는 유색인 아스마르를 택해서 사랑의 화살표는 마무리되면서 인종간의 화합을 내포하고 있다.  

디비디 사야겠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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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 The House M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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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김기영 감독의 영화다. 50년이 지난 지금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국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를 다시 본 이유는,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다는 기사를 보고 녹슨 기억장치에 기름을 바르고 싶었다. 이 영화가 단순 불륜영화가 아닌데도 기사는 '불륜'에 초점을 맞추고 임상수 감독이라는 이름을 듣고, 불륜에만 조점을 맞춘건 아닐까, 조바심도 든다. 임상수 감독은 의미심장한 소재를 통속화하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 거 같다. 아직 덜 숙성한 정신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상업영화 감독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의 손을 거치면 생각이란 걸 걸러내고 자극이란 장치에 더 정성을 들이는 거 같다.

1. 미장센 

이 영화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미장센이다. 영화가 전개되는 곳은 이층양옥집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인라는 걸 감안하면 영화 속 집은 요즘, 김지운 감독 영화의 탐미적 때깔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층은 베란다로 방과 방이 이어지고 벽은 청담동에 있는 한 까페처럼 벽지가 아니고 액자와 조각품이 눈높이에 장식되어 있다. 스릴러물에서 필수인 실내공간은, 계단, 주방, 안방으로 분리된다. 계단은 상승과 하강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스릴의 샘이라고 할 수 있다.  

2. 인물

아내-음악선생(김진규)-하녀의 러브 트라이앵글이다. 세 인물 모두 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흥미롭다. 아내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소비사회의 충실한 시민이다. 그녀가 행복지수는 이층집, 피아노, 텔레비전 등등 지름신의 강림에 충실히 봉사하면서 생긴다. 이 모든 것을 사기위해 그녀는 밤낮으로 재봉틀질을 한다. 남편이 죽어갈 때조차 재봉틀질을 한다.  

남편은 이런 아내가 못마땅하지만 아내의 경제적 능력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가부장적이지는 않지만 수동적이다. 하녀가 그를 유혹할 때도 그는 저항하는 척하고 아내의 말에도 그는 수긍하지는 않지만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일자리를 잃어버릴까 두려움에 떨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무능하다. 자신의 감정에도 솔직하지 못하고 책임감만을 갖고 있다.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자 그는, 아내를 질책하는 말을 한다. 왜 집을 짓자고 했냐고. 단칸방에 그냥 있었으면 별 일 없었을텐데..하고. 그의 발언은,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게 버겁다는 걸 고백하는 거 같다. 정작 사건의 발단은 자신의 우유부단함인데도.

하녀는 가장 현대적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있고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남자의 아내도 재봉틀을 매개로 꿈을 현실로 이루는 행동파지만 순종적 여인상이다. 하녀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살인을 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한 사회랑 맞짱 뜨는 잔다르크적 정신도 갖고 있는 거 같다. 결국 죽음을 택하는 그녀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의연하고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려고 발버둥친다.   

3. 이데올로기 

영화는 부부가 사회면 신문기사를 읽고 담소를 나누면서 시작하고 끝이 난다.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의 유혹에 맞닥뜨릴 때, 남자의 본능을 비웃으면서 끝이난다. 찰라의 쾌락을 쫒는 21세기에, 20세기의 비웃음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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