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들어본 우리 가요중에서 최고의 음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음악으로 듣는 영화<화양연화>같아요.

음반 컨셉도 화양연화에서 많이 따온 것 같구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화양연화.....

늦봄에 들으면 더욱 멋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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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04-19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심란할때는 브루크너가 딱이다.특히 후기 교향곡 7.8.9번의 느린 악장들은 복잡한 심정의 안정제이다.음악을 듣다가 지루해질 쯤 불교관련된 책을 읽는다.법구경의 한장을 펴서 읽어보거나 숫파니타니 또는 한산이 지은 시를 한 편 읽는다.그럼 세상에 대한 측은지심이 동한다.그리고 심란한 마음의 한 구석도 소리 없이 사라진다. 브루크너 음반은 명반이 많다만 그중에서 즐겨듣는 것은 이렇다.

브루크너 7번 /  카라얀-비인필(DG)/ 시노폴리-드레스덴(DG)

브루크너 8번/  첼리비다케-뮌헨필(EMI)/퀸터 반트-베를린필

브루크너 9번/ 줄리니-비인필(DG)

 

 


첼리비다케 브루크너8번
줄리니의 브루크너 9번


드팀전 2004-04-19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렌굴드는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입니다.라이브를 싫어하고 스튜디오 녹음을 선호한 피아니스트이죠.그의 라이브 기피는  실력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스튜디오 녹음만이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형태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는 그의 기벽적인 미학관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특히 바흐의 연주에서 독보적인 음반을 많이 남겼는데요.루바토를 사용하지 않는 그의 명징한 연주는 아직도 많은 그의 추종자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음반은 그의 바흐 연주를 비롯해 조용한 곡들을 주로 담고 있는데요.특히 반가운 곡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피아노 소나타 입니다.이 곡은 다른 음반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곡인데 서정적인 멜로디에 아주 아름다운 곡입니다.


드팀전 2004-04-19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하드밥 재즈를 좋아한다.

하지만 비오는 밤 조용하게 빗소리를 들으며 듣기에 하드밥은 너무 복잡하고 쿵쾅거린다.

이런땐 찰리 헤이든을 듣는다.

찰리 헤이든은 아주 오랜 경력을 가진 베이시스트이다.자코 파스토리우스 같은  화려한 테크닉은 아니지만 그의 작곡 능력과 조용한 곡에서의 서정성은 이미 많은 팬들을 열광케 한다.

그의 음악은 그의 정치적 신념과 같이 진보적이기도 하다.

비오는 밤,조용하지만 식상하지 않은 음반을 듣고 싶다면 찰리 헤이든과 루벤 곤잘레스가 함께 한 <녹턴> 을 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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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소년들은 누구나  무인도로의 탐험을 꿈꾼다.어린이 명작동화에 포함되어 있는 <15소년 표류기>,<보물섬>,<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작품들은 소년들의 맘을 태평양 이름 모를 섬으로 이끌어갔다.원시적 삶이 주는 자연미와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설레임은 소년을 섬에 대한 낭만으로 가득채우기 충분했다.또 사춘기 시절 본 영화<라군>은 무인도의 은밀함에 대한 성적인 상상력을 배가 시켰다. 당시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브룩쉴즈가 아무도 없는 밤에 누드로 수영하던 장면은 아직도 그 섬의 풍광과 어울려 기억된다. 이렇듯 낭만과 은밀함으로 가득한 소설 속 무인도에 대한 상상이 깨진것은 아마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서 였던 것 같다. 윌리엄 골딩은 그의 소설에서 무인도라는 한계상황에서 생기는 권력과 위계의 폭력에 대해 말했다. 자연으로 비유되던 낭만의 섬은 인간이 발을 들여놓음에 따라 또 다른 세계의 한구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태평양의 끝> 역시 섬에 대한 낭만이나 무인도에 갖힌 자의 탈출을 위한 투지같은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 <로빈슨 크로소>를 패러디한 이 작품은 시작하자 마자 곧이어 합리적 가치관의 소유자 주인공 로빈슨의 표류로 시작된다. 주인공 로빈슨은 섬에 표류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마자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만들려 시도한다.그가 만들려는 질서는 표류전 그가 받아들여왔던 서구의 과학적 합리적 사고의 세계였다. 로빈슨은 이성적 세계의 건설을 위해 나름대로 법을 만들고 나름대로 도량형을 제정한다.또 무인도안에서 신석기 혁명을 몰고 오듯이 가축을 사육하고 잉여생산물을 축적한다. 자연의 사물을 이성적 인간중심으로 재편하는 것.바로 이성적 인간이 숭고히 여기는 가치관이다.로빈슨은 이에 따라 태평양의 그 무인도를 '스페란차'라는 자신의 왕국으로 꾸며간다.

 물론 원천적으로 소통의 대상이 없었던 로빈슨의 세계건설에 장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가장 큰 장애는 로빈슨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회의적 사고 였다. 미셀 투르니에는 진흙탕이라는 회의의 블랙홀을 만들어내었다.주인공 로빈슨은 수시로 진흙탕으로 추락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눌러야만한다. 하지만 로빈슨의 타나토스는 섬과의 육체적 합치라는 조금은 기이한 방식의 결합을 통해 극복된다. 그리고 프라이데이-방드르디의 출현을 맞게 된다.

로빈슨은 방드르디를 노예로 삼는다.기본적으로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당연시 여기던 당시의 서구적 가치관에 비추어 로빈슨의 인종주의적 가치는 자연스럽다.로빈슨은 방드르디를 교육하고 발전시키려하지만 그다지 쉽지 않다.오히려 자연과 동화되는 방드르디에게 묘한 질투를 느끼게 된다.작가는 로빈슨과 방드르디를 통해  이성적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주의를 대칭시키고 있다.관리하고 계획하고 통제하는 이성과 전체를 거스르지 않으며 동화되는 자연의 대립이다.

결국 로빈슨은 자연에 동화되고 만다. 자신을 무인도로 부터 탈출시켜줄 배가 왔음에도 로빈슨은 섬에 남기로 결정한다.이미 로빈슨의 사고와 인식의 범위는 과거의 로빈슨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를 두고 자연에 대한 이성의 패배라고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그러한 양분론자체가 이성적 사고가 만들어 놓는 패러독스이기 때문이다.작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의 문화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있다.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만든 모든 기획과 역사와 문화가 부질없는 것이라는 뜻은 아닐게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는 것이고 고여있는 것은 썩기마련이다. 특히 식민지 근대를 경험하고 개발독재의 드라이브를 몸속 깊숙이 반도체칲으로 내장해 온 우리에게 과학적 사고와 이를 바탕으로 한 발전 이데올로기는 질문이 필요없는 정언명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가끔은 발전이란 이름의 몰상식과 비이성조차도 이성과 합리의 이름으로 남용되고 있다. 이제는 이러한 사고에 메스를 대야만 할 때이다. 모든 사상이나 생각은 당시에는 절대적 가치로 보일 수 있으나 긴 역사 속에 잠깐 등장하고 또 바톤을 넘겨주는 것이다.우리가 믿는 이 과학적 합리성의 세계 역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면 또 퇴장할 것이다.이러한 때에 작가는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대기처럼 우리의식과 행동의 공기가 되고 있는 서구적 합리성, 인간중심적 사고, 자연에 대한 배제 등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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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후회는 없다 - 에베레스트에서 사라진 맬러리를 찾아서
피터 퍼스트브룩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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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대에 대한 모험은 언제나 휴먼다큐멘터리의 주요소재였다.거기에는 환경과의 사투속에 인간 일반이 보여줄 수 있는 선과 악,용기와 무능이 동시에 들어있다.모험기는 한편의 잘짜여진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한 드라마 창고이다. 이 책 역시 에베레스트 산에 도전하고 실패했던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는 영국 BBC 방송의 의미있는 기획으로 시작되었다.그들은 1920년대 최초로 세계 최고의 산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실종된 멜러리와 어빈을 찾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그 래서 이 책은 두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책의 전반부는 주인공인 멜러리의 에베레스트 등정과 그에 부수된 이야기들로 이루어진다.그리고 멜러리의 실종과 함께 시작되는 후반부는 방송제작팀이 전설을 역사로 만들기 위한 여정으로 그려진다.

책의 전반부는 영국의 에베레스트 도전 약사이다.이부분에는 개인적으로 불만이 좀 있다.모든 것이 지극히 영국인의 시각에 입각하여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다시말해 제국주의 역사관 그대로이다.이 책은 영국인들이 20세기 초 지리학적 이유(?)로 인도와 네팔,티벳등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이 작업이 마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열망때문인 듯 그려진다.하지만 이는 지극히 정치적인 작업이었다.어느 나라가 식민국을 건설하고 침략하려는데 지도도 없이 시작하겠는가? 이 지도 제작 과정에 물론 현지인들이 이용된다.지은이는 이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어설픈 휴머니즘적 입장을 취한다.하지만 목숨을 버려가며 간첩활동을 하며 지도를 만든 현지인들은 사실 제국주의 영국에 이용당한 것 뿐이다.어쨋거나 이러한 지도 제작 과정에 세계 최고봉이 발견된다.영국인들은 여기에 인도에서 지도제작을 담당했던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붙인다.그래서 지금도 에베레스트라 불린다.하지만 이미 그 봉우리는 각 인접국 마다 나름대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백두산을 마운튼 화이트헤드 라고 부르면 좋을까?

어찌되었건 1920년을 넘어서며 영국은 에베레스트에 대한 도전을 시작한다.그리고 이 팀에 좌충우돌형 산악인 멜러리가 있었다.이 책에 나오는 멜러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쳐가면서도 직관적 산행을 감행하는 무모함,툭하면 잊고 다니는 덜렁거림,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우유부단함.바로 멜러리의 특징이다.그는 이론이나 경험보다 직관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산을 오르는 방법을 비롯해서 교사로서의 교육관 역시 그러했다.이런 사람은 사실 조직적으로 움직여야하는 산악팀에서는 골치아픈 존재이다.하지만 그의 직관이 가져다 주는 노련함과 열정은 에베레스트 팀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에서 마지막 정상정복조로 멜러리가 뽑힌다.지독한 추위와 강한 바람,인간의 의지를 꺽는 고산환경이 모든 대원을 낙오시킨 것이다.멜러리 역시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그 밖에 없었다.그리고 젊은 공학도 어빈과 함께 산에 오른다.그리고 실종된다.그가 과연 정상에 올랐을까? 이 책은 다시 책의 시발점이었던 문제제기로 돌아간다.

1999년 멜러리-어빈 촬영팀은 눈속에서 발견한 멜러리를 보고 이를 확신한 듯 하다.지은이는 퍼즐을 맞추 듯 유추해간다.그리고 멜러리의 정상 정복에 대해 긍정적인 결론을 낸다.같은 영국인이었기 때문일까?아니면 에베레스트와 하나된 멜러리가 보여준 강한 인상때문이었을까?

저자가 제시한 객관적 추론 역시 추론일 뿐이다.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왠지 멜러리가 정상을 정복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졌다.전설을 역사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속성때문인지 아니면 비극적 죽음에 영웅성을 부각하고 싶어하는 속성때문인지는 모르겠다.하지만 때론 인간적 한계에서 나오는 무모함이 성공을 거두는 것이 세상일이다.그런 이변 또는 예측불허가 없다면 세상은 훨씬 지루한 무언가가 될 것이다.언젠가는 퍼즐의 나머지 조각이 될 젊은 어빈의 시신도 발견될 것이다.그러면 좀 더 많이 알려지겠지만 그때까지는 에베레스트의 돈키호테의 성공을 믿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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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 동문선 현대신서 104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박형섭 옮김 / 동문선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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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의 추억...가끔 그 당시의 화면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쿵쿵 거린다.시청앞 광장은 물론이고 남한 전체를 가득 메운 붉은 악마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대..한..민..국. 87년 6월항쟁때 보다 더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남녀노소,정치색을 뒤로 하고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 라는 옷을 차려입었다.우리 언론들은 이 단결된 힘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몰아서 우리 민족이 다시 뛰는 계기를 만들자고 김치국 마시는 보도를 해댔다.그때 난 방 한 구석에서 TV를 보며 두 가지 감상에 젖어들었다.한가지는 붉은 물결이 일렁이는 희열이었으며 또 한가지는 그 다수의 군중이 한목소리를 내는데오 오는 위협감이었다.만약 이들이 반성하지 못하는 하나의 힘이고 이를 누군가 교묘하게 잘 이용한다면..공허한 상상이다.하지만 불과 100년 안되는 시간 전에 히틀러와 독일 국민 다수가 그랬다.21세기엔 불가능하겠지.하지만 그 형태를 바꾸어도 그렇게 낙관할 수 있을까?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는 다수의 군중성이 가지고 있는 위협에 대한 이야기이다.좀 더 역사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파시즘에 대한 희곡이다.코뿔소는 파시즘화된 개인이고 파시즘 전체이다.이성과 합리주의의 승리를 믿어왔던 유럽은 2차대전후 본격적인 성찰에 들어간다.믿었던 유럽의 지성과 건강한 사람들이 파시즘을 양산하고 기계적으로 파시스트들이 되었갔다.이에 대한 충격과 반성.전후 실존철학이나 반이성주의철학이 힘을 얻기 시작한 계기이다.아도르노가 이야기한 '도구적 이성'이란 것도 이러한 이성 지상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결과이다. 이오네스코 역시 파시즘의 역사를 겪으며 인간의 군중성과 맹목적 이성이 어떤 폭력적 결과를 가지고 오는 지 성찰하게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코뿔소>를 내세워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파시스트가 되어가는지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파시즘의 허상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대신 작가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진해서 코뿔소가 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민중들의 자발적 동의를 필요로 한다.또 한가지 지식의 역할이 중요하다.푸코는 <감시와 처벌>을 비롯한 뛰어난 저작에서 지식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명백하게 밝혔다.이오네스코 역시 그의 인물들을 통해 파시즘에 대한 지식의 봉사를 형상화한다.

그의 주요인물이었던 논리학자,보타르등은 지식과 논리가 어떤식으로 파괴적 폭력에 동의해가는지를 보여준다.가치관이 배제된 지식과 논리는 허울좋은 이성의 이름을 쓰고 비인간적 폭력의 동원대상이 됨을 지적하고 있다. 주인공 베랑제의 친구 장 역시 마찬가지이다.속물적 지성으로 세계의 중심인척 자처하지마 그 역시 독자에게 멋진(?) 변신쇼를 보여주며 하나의 폭력으로 변한다.

이념과 가치의 상대성이란 허울도 이오네스코의 통찰아래 후피동물로 변하고 만다.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만나는 케이스인데 등장인물중에는 뒤다르가 그 역을 맡는다.뒤다르는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상대주의적 입장으로 코뿔소를 바라본다.오히려 베랑제의 걱정을 신경증으로 파악하며 자제를 요구한다.하지만 뒤다르 역시 힘에 대한 동경,폭력적 다수에 대한 동경을 피하지 못한다.코뿔소에 대한 주인공의 혐오도 이쯤 되면 바뀌게 된다.모두가 코뿔소로 살아가며 행복한데 나 혼자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다.가장 위험한 생각이며 가장 현실적 생각이다.하지만 주인공은 단호히 인간의 길을 선택한다. 이 과정이 너무 짧게 표현된 것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희망으로 끝내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었으리라...

다수는 개인에게 힘과 안정감을 준다.적어도 실책에 대한 면피라도 마련해준다.그게 대세였다는 식으로..그래서 가치관이고 뭐고 현실적 대세에 편승하려는 욕망이 생긴다.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에겐 대세편승론과 보신주의가 인에 박혀있다.서정주같은 시인은 자신의 친일을 변호하며 '종천순일파'-하늘의 뜻을 따라 일본을 따랐다.-라고 명했단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역시 '코뿔소'되기 보단 '인간'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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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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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문학의 재번역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몇몇 출판사에서 주도적으로 그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듯 하다.무척 반가운 일이다.새로운 감성에 가독성을 높인 번역은 새로운 독자층에게 어필하는 최선책이다.거기에 또 한가지 반가운 일은 이러한 작업에 힘입어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지만 훌륭한 작품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다.까사레스의 <러시아 인형>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가오싱젠의 <버스정류장> 막스 플리쉬의 <호모 파버>등등. 후안 롤포의 <뻬드로 빠라모> 역시 최근의 흐름속에 돋보이는 작품이 아닐까한다.하지만 이 책은 약간의인내를 요구한다.지루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특이함때문이다.

<뻬드로 빠라모>를 만나는 동안 참 난감했다. 어렵다기 보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말 '난감'한 읽기를 했다.하지만 손을 때기도 어려웠다.우선 스토리는 의외로 단순했다.

주인공이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나선다.아버지의 고향마을 근처에서 몇몇 사람을 만난다.그리고 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고집세고 총명하며 세속적인 아버지-그가 뻬드로 빠라모이다-는정략결혼을 서슴지 않는 비정함을 가진 한편 또 한 여인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이다. 뻬드로 빠라모는 한 여인의 사랑을 결국 얻지 못하고 타살된다.

이 정도가 이 소설의 전부다.별로 난감한 이야기는 아니다.그런데 이걸 작가가 어떻게 분해하고 어떻게 배치해버리는지 혀를 찰 정도이다.남미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황당함을 좋아하고 또 익숙해있던 나에게도 낯선 구조였다.아마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리게 한 힘은 그 난해한 구조에서 나온  듯 하다.더 쉬운 말로 하면 '도대체 어떻게 일이 풀려가는거야.뜬금없이 나타난 이 사람은 도대체 뭐야? ' 하는 조금은 황당함에 대한 의구심이 날 끌고 갔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책을 읽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영화'식스센스'를 떠올릴만한 장면을 만난다.주인공이 아버지의 마을 '꼬말라'에서 처음 누군가를 만난다.(작품 후미에 그는 또 등장한다.)그리고 같이 마차를 타고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그리고 헤어진다.잠시후 어머니를 안다는 여자를 만난다.그녀는 주인공이 만났던 그 마부는 오래전 죽은 사람이라고 말해준다.첫번째 황당함.그래도 여기까지만 해도 '그래 영화[식스센스]에서도 그랬는데 뭘..' 이렇게 생각했다.그런데 다음 장에서 주인공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난다.그 사람은 또 이러는 것이다.'당신이 말한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아직도 혼령이 떠돌아다니는 구먼' 그렇다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이정도 이르면 누구 죽은 사람이고 누가 산 사람인지 구분이 안간다. 주인공도 결국 이렇게 묻는다.'지금 나와 이야기 나눈 사람은 진짜 사람이요 혼령이오.'

작품의 배경이된 마을 '꼬말라'는 그렇게 산 자와 죽은 자가 혼재한 공간으로 설정된다.그리고 몇번의 황당함과 몇번의 배신을 겪으며 소설적 상황에 대해 인정하고 주인공의 가족사에 얽힌 소설적 전개를 기대할쯤..아.....또 작가에게 배신 당하고 만다. 갑자기 주인공이 이유도 없이 죽어버린다.그리고 무덤안 땅 속에서 먼저 그 자리에 묻힌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이정도면 두 손 두 발 다들어야 한다. 이제는 어설픈 상상은 포기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이제부터는후안 롤포와 주인공을 따라가기만 해야하는 것이다.

'꼬말라'라는 마을의 현재와 죽음의 혼재만이 낯선 것은 아니다.책을 보다 보면 도대체 누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정신이 없을  때가 있다.분명 처음에는 1인칭이다가 어느 순간 3인칭으로 바뀌는 문장.마치 컬트영화를 보는 듯 하다.이 난감함을 뚫고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정신이 얼얼하다.그러면서도 경탄을 금할 수 없다.시간의 혼재,공간의 얽힘,화자의 중첩,현실과 환상의 교환. 무채색의 이야기를 이러한 붓들과 염료를 섞어서 색채판에 없는 탈세계의 색을 만든 후안롤포의 상상력과 그의 천재성에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이다.새로운 소설을 필요로 하는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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