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번스타인 좋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물론 말러 매니아들에게야 예외겠지만 말이다.

번스타인의 오호가 갈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다재다능함에 기인한다.번스타인은 20세기에 태어난 다빈치 같은  사람이다.

너무 다재다능해서 자신의 끼를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하나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의 쇼맨십이나 상업적 성향때문에 고개를 젓는다.뭐 어떤 음악평론가는 그를 번오공으로 묘사하더라.번쩍 번쩍 뛰어다니며 세인의 눈을 끌지만 내공은 절대지존들의 손바닥만큼 밖에 안된다는.....이름만 대면 알만한 음악평론가다.무슨 음악판이 무림판인지 아나보다.마치 잔챙이 댄스가수들이 나댈때 서태지가 돌아와서 잔챙이들을 평정해주었으면 하는 그런 마인드겠지.절대고수에 대한 그 노예적 근성은 언제쯤이나 사라질런지.

어쨋거나 그 이야길 하려고 한 건 아니데...딴길로 갔네.

이 음반은 내가 클래식을 조금씩 듣기 시작할때 구입했다.뭐 음반가게 가니까 모르는 이름들은 무지 많은데 뭘 골라야지 알 수가 있나.^^  카라얀은 어찌 되었든 이름이 너무 난 사람이라서 괜히 팅겼고 나머진 잘 모르겠고....에라 ...번스타인은 이름은 좀 들어봤으니까 본전은 하겠지 하는 맘이었다.거기다 노란 레이블 끝에 꺽쇠도 있고 (디지털) ^^

이 연주는 보편적인 '비창'과는 사뭇다르다.므라빈스키의 건조하면서도 포효하는 연주도 아니고 말끔하고 탁월한 합주력을 보여주는 카라얀의 연주와도 달랐다.우선 무지하게 느리다.얼마나 느린지는 첫 악장 시작할 때부터 감지된다.좀 성질 급한 사람들은 이거 시작은 한거야 하는 생각이 들정도다.첼리비다케식의 느림과는 또 다른 거의 변태적인 느림이다. 하지만 느리면서도 사람을 끌고 가는 힘은 잊지를 않는다.싸늘하게 느껴지는 금관은 격정정 울림과 서늘함을 동시에 느끼게해준다. 후에 다른 음반들과 런닝 타임을 비교해봤는데 진짜 차이 많이 나더라.

보통 '비창"하면 므라빈스키나 카랴얀,또는 미하일 프레트레프를 많이 듣는 듯하다.뭐 워낙 유명하고 자주 연주되는 곡이라 해석도 아마 거의 평정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그럴때 바로 이음반을 들어 주는거다. 참 희안하네 하면서도 끝까지 듣게 된다.그리고 나름대로 만족감도 크다.내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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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06-24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양반 좋아합니다. 몰아치기에 선생만큼 능한 사람도 없지 싶어서요. 말러야 말할 것도 없고요. 무엇보다 글렌 굴드와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듣고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특유의 달변과 위트로 지휘자와 협연자의 관계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기도 하고, '나 자신이 굴드의 해석에 동의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 매력을 거부할 수 없어, 이 연주의 주도권을 굴드에게 완전히 넘겨주었다'며 보기 드문 지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좋아할 수밖에 없네요. 요즘 염가반으로 이런저런 전집 나와서 더 기쁘기도 하구요.
 

덥다.벌써 이렇게 더워서야 어찌 여름을 날까 걱정이 앞선다.

가끔 내가 왜 책을 읽고 여기에 글을 쓰는지 의구심이 생길 때가 있다.

손은 익숙해진 대로 자판을 오고가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에 글을 쓸까?

첫번째 글쓰기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인 듯하다.근육도 쓰지 않으면 굳어버린다는데

자판을 누르는 손 근육과 주름잡힌 뇌운동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다지 쌓인 것도 없는데 뭘 잊는다는 건 지 얄팍한 기우라는 느낌도 든다.

둘째는 책을 책장에만 보관한 소유욕도 모자라서 흔적을 남겨 보관하고 싶은 욕심때문이다.

가끔 책장에 쌓여있는 책을 보며 슬그머니 웃음짓는 자기만족감.그 천박함에 한 술 더 얹기 위한 짓이다.

아직까진 내 욕심의 냄새가 나를 지독히 괴롭힐 정도는 아니다.하지만 그 욕심의 냄새가  노인방에서

나는 꽤꽤함에 이르러 나를 지겹게 한다면 없애야 할 것이다.그게 책이든 잡문이든...

셋째는 눈치보며 딴 짓거리하는 즐거움일것이다.

내가 글을 쓰거나 뭔가 잡소릴 할 때는 대개 사무실에서다.부장은 바둑두고 선배는 오락하고 나도 뭔가 헛짓을 하나 해야 조화가 맞지 않겠는가.^^

바둑을 두면 급수가 올라가고 오락을 열심히 하면 스트레스가 잊혀지는데 그에 비하면 이짓은 별 영양가가 없다.그래도 눈치봐가며 딴짓거리 하는 조그만 쾌감은 있으니 당분간은 더 할 것 같다.

잡아두고 쌓아두고 모아두고 세워두고 기록하고 남겨두고 ......그러지 않는 것이 모든것을 참으로 얻는 것인데 아직도 그 짓을 한다. 나의 언행불일치는 내 의식의 미숙함의 증거이며 내 불성실한 육체의 간사함이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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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구입한 음반이다.

이젠 포디움에서 떠난 그리고 곧 더멀리 떠날 위대한 지휘자 카를로스 마리아 줄리니의 4장짜리 버젯이다.줄리니의 9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EMI에서 70년대 그의 시카고심포니 수석 객원지휘자 시절의 녹을을 수록했다.

우선 반가운 것은 오랜만에 줄리니의 음반을 만난다는 것이었고 노란 딱지가 아닌 빨간딱지여서 반가왔다.작년인가 줄리니와 빈필의 브람스 교향곡집을 구입하고 너무 큰 기대로 조금은 실망했었는데..'.과연 이 음반을 어떨가 ?'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줄리니는 어디 한군데 소속되지 않고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돌아다녔다.지휘계의 방랑자인셈인데 그의 명성에 비해 조금 이색적인행적이다.말년에 가서 로스엔젤레스 필의 수장이 되어 클래식 불모지인 LA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말이다.....

우선 가장 관심이 가는 연주는 브루크너 9번이었다.왜냐하면 80년대 DG에서 나온 음반이 워낙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명반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카고 사운드와 줄리니 스타일의 중용적인 조합이라고 말할 수있다. 1악장의 아련한 도입부 부터 DG녹음과 근 윤기가 다름을 직감할 수 있다.빈필의 연주를 금속성에 비한다면 시카고와의 연주는 나무의 향기가 난다.물론 이는 오케스트라의 차이일 수도 있고 디지털 초기 녹음의 건조성과 아날로그 말기의 원숙성의 차이일 수도 있다. 두 연주가 공히 느리고 여유있는 템포를 취한다.한가지  줄리니의 느림은 첼리비다케나 말년의 번스타인 류의 극단적 느림은 아니라는 것이다.오히려 여유있음 느긋함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다른 말로 하면 몰아부치는 힘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 법하다.

2악장의 금관군과 현악의 트리오 연주는 두 음반공히 압권이다. DG녹음이 각 파트가 선명하게 구분되고  현악이 날렵하게 질주하는데 비해 이 음반에서는 금관군이 훨씬 젊은 소리로 포효한다.원래 프리치 라이너와 솔티를 거티며 포효하는 시카고의 금관은 유명한 것은 사실이다.줄리니 역시 이러한 특징을 완전히 걷어내진 않는다.단 앞선 지휘자들보다는 조금 절제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해석의 차이를 느끼려면 조금더 많이 들어봐야 알것 같고 우선 두 오케스트라의 특성이 나름대로 묻어나서 즐거운 음악듣기 였다.

그외에도 말러 교향곡1번과 브람스4번,베토벤 7번등이 시카고 심포니와의 연주로 들어있다.개인적으로 브람스 4번은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는다.젊은 연주자들의 연주에 익숙해져서 인가 아님 독일지휘자들과 유럽오케스타라의 음색에 익숙해져서인가 잘 모르겠다.

그외에도 줄리니가 연주하는 스트라빈스키의 곡이 최초로 수록되어있다.그러고 보니 줄리니의  녹음 목록에서 스트라빈스키는 한번도 본적이 없고 또 명반코너등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연주자로 줄리니를 꼽은 경우도 본적이 없는 듯하다.아직 이 CD까진 듣지 않았는데 ...조만간 들어야쥐...

오랜만에 줄리니를 들으니 LP박스에 들어가 있는 줄리니와 로스엔젤레스필의 베토벤 '전원'을 꺼내 듣고 싶다.며칠 비온뒤에 오랜만에 날도 개는 구나.하늘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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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06-22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듣어보진 않았지만 가격대 성능비 최상급의 음반이더군요. 주말에 살까 하다가 다른 거 지르느라 일단 재껴놓았는데요(나중에라도 살 수 있는 음반이라는 계산에) 정명훈씨 사부님의 말러 1번은 어떤지요?

드팀전 2004-06-23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평범하다는 말 밖에....말러랑은 별로 안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브루크너 8번 음반들이다.

다들 한 브루크너 하는 사람들이라 음반 평을 한다는 것은 내 능력밖인 듯 하다.

음색이 선명하고 선율선이 가장 분명한 것은 카라얀의 연주였다.빈필의 금관 연주 역시 벨벳의 부드러움과 은근함을 품고 있다.너무나 감미로운 아다지오 악장은 브루크너의 경건성에 파스텔톤 물감을 들인 섹시함을 보여준다.그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연주할 수 잇는 지휘자도 카라얀 말고는 드물다.

줄리니의 연주는 그의 스타일 답게 유려한 연주인데 개인적으로 7번이 더 나았던 것 같다.

첼리비다케는 앨범 자켓인 일본 료안지 (맞나? 갔다왔는데 가물가물하다) 의 선돌처럼 유유자적하다.아주 느린 템포로 한걸음 한걸음 브루크너를 잡아간다.그 느린 템포와 쉼표를 듣다보면 다음에 과연 어떤 진행이 이루어질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일류에서는 2%부족한 뮌헨필을 데리고 장엄한 브루크너를 만드는데 브루크너의 종교적 엄숙함이 가장 묻어나는 연주이다.

칼 뵘의 연주는 이중 가장 최근에 산 음반이다.칼뵘은 아주 솔직하고 당당하게 연주한다.머뭇거려야 할땐 확실히 머뭇거리고 달려나가야할때는 확실히 질주한다.음반평론가들이 뭐라 말할지 모르지만 교과서적이면서도 열정이 묻어있는 연주같다.금관의 그르렁 거림도 카랴얀의 말끔한 연주와달리 매력적이다.

마지막으로 로린 마젤의 연주인데....로린 마젤이 국내에도 그다지 인기 있는 연주자가 아니고 그의 브루크너도 낯설기때문에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음반은 아니다.하지만 베를린 필의 둔중한 현악과 조금은 어두운 금관의 조화가 브루크너 8번의 정곡을 짚어내는 듯 하다.(그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내가 브루크너가 아닌데 어찌 알겠나?) 베를린필은 빈필에 비해 훨씬 중후한 맛을 준다.거기에 아직 젊은(?)로린 만젤이 패기를 보탠다.느린 악장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튼실한 연주이다.가격대비로 본다면 더더욱 뛰어나다. 카라얀 사후 로린마젤이 베를린 필의 수장으로 오르내리기도 했었는데 만약 아바도 대신 로린 마젤이 베를린 필을 잡았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개인적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팬이긴 하지만 장난삼아 한번쯤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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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인 (구) 문지 스펙트럼 4
로베르트 무질 지음, 강명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얇다.그래서 금방 보려니 생각했다.하지만 왠걸.... 마지막 장을 덮는데 열흘도 넘게 걸렸다.책이 어려워서 그랬나? 사실 그건 아닌 듯하다.가끔 이 핑계 저 핑계가 책장 넘기는 속도를 줄일때가 있다.그럴땐 갑갑증이 발동한다.갑갑증이 발동한다고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일상의 번잡한 대소사를 처리하다 보니 잠시도 혼자 있을수 있는 절대시간이 부족했다.오로지 화장실에 갔을때만 자유로왔으니 화장실은 나의 도량이다.그나마 변비도 없는 건강한 상태로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로베르트 무질에겐 무지하게 미안한 일이지만 책을 너무 쪼개서 본 듯하다.안그래도 나이가 들며 단기기억 장애의 증상이 나오려는 즈음 '쪼개어 읽기'는 책의 감동을 느끼는데 치명적이다.볼때 마다 앞 페이지를 넘겨야만 하기 때문이다.물론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귀찮아지기 마련.알듯 말듯한 상황에서도 그냥 접혀있는 장부터 보고 말았다.그래서 책을 본 느낌은 책의 배경 만큼이나 희끄무리하다.마치 습기 가득한 자동차 앞유리창 같다.^^

로베르트 무질이란 작가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걸 안건 남진우의 평론때문이다.남진우가 김영하의 <검은꽃> 서평에 인용한 무질의 <통카> 한 구절때문에 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프루스트에 비견될 만한 작가라고 한다.푸....웃. 프루스트 안다.이름만.<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다.그것 말고 내가 프루스트에 대해 무얼안다는 말인가.그 소설이 유명한 무었이라하여 서점에서 찾아보았다.방대한 량에 질려서 1권도 꺼내보지 못했다.언젠가는 읽기되려나.....  프루스트 만큼 유명하다는데 비교대상도 잘 모르니 그의 진가를 알기는 아직 어려운 듯 하다.거기에 로베르트 무질의 책이 번역된 것도 그다지 많지 않다.독한 마음 먹고 오기로 달려들지 않는 한 무질과 얼마나 가까와 질 수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책<세 여인>은 초기 무질의 단편 세편이 수록되어있다. 소설의 배경은 전부 다 몽환적이다.그렇다고 반지의 제왕 시절은 아니다.과거나 현재에 있는 듯 하면서도 언제인지 알수 없는 시절이다.이 몽환적 배경은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좌우한다.무미건조하게 서술되는 사건의 진행조차 비오느 듯 뿌연 환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등장인물들 역시 구체성을 갖는 개인들이라 보긴 힘들다.전통적인 내러티브 측면에서 보자면 지루하기 짝이없다.앙겔로풀로스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 같다.그렇게 연관 지어가다보니 소설의 배경 역시 그 감독들이 만들었던 미장센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든다.철학적이라고 ...물론 철학적이고 지루하다.

소설은 여성성에 대한 좀 진부한 담론을 답습한다. 첫 소설에 나오는 그라지아나 포르투갈에서온 그 여인그리고 백치미가 넘치는 통카까지 신비화된 여성의 이미지가 존재한다.그나마 상대적으로 외지인들에게 눈길을 흘리는 <그라지아>의 여인들이 좀 덜할 뿐이다.그래도 그들의 감정은 배제되어있고 관음만이 존재할 뿐이다.소설의 대상이자 소설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여인들은 감성과 자연이라는 상대적 이분법에 의해 묘사되어진다.남자들이 합리와 정복,보수적 합리성을 나타내는데 비해 여성은 창조와 상생을 상징한다.그런데 이러한 도식은 사실 지나치게 전통적이다. 언제부터 이러한 도식이 존재했을까? 근대학문은 원시공동체에서 여성이 갖는 다산과 생성의 이미지를 자연의 순화과 병치시켰다. 그러면서 사적인 축적이 이루어지는 투쟁과정에서 여성은 그러한 이미지로 배제되고 이상향의 근원으로 높은 곳에 자리잡는다.하지만 실제 생활 영역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이와는 정 반대였을것이다. 굳이 여성이란 말로 정치사회화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여성성'이란 말로 대체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페르시아의 여인은 존재론적 불안과 타인에 대한 안정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이의 욕망추구역시 흐르는 물이 땅으로 사라지듯 세상의 안정을 위해 녹아 없어진다. 목적론적인 세상에 대한 완충으로 여성성의 유연함에 기대는 것.이건 또 얼마나 진부한가.통카는 이를 더 극단적으로 형상화한다.여기 보이는 신비한 여인 통카는 이성과 합리의 이름으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지극히 순응적이고 탈이성적이다.북치고 장구치고 도랑치고 가재잡는 일은 남자의 몫일 뿐이다.통카에 대한 불신으로 그녀을 보낸 주인공은 통카의 진정성과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 선의지에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듯 눈이 번쩍뜨이는 계기를 갖게된다. 나는 이러한 지독히 관음적인 여성성에 대한 응시가 과연 항구적 변화의 길이 될는지 의문이다.신비주의적 관점이 주는 현실성에 대한 깨우침은 결국 순간의 감동내지는 작심삼일형의 해탈 아닐까 싶다.

로베르트 무질이 대단한 사람이라 내가 그의 속내를 다 읽어내기엔 내공이 부족하다.그의 단편집 하나만으로는 더욱 그렇다.그의 서술방식과 설정이 기존 형식과 차별성을 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하지만 내게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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