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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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소년들은 누구나  무인도로의 탐험을 꿈꾼다.어린이 명작동화에 포함되어 있는 <15소년 표류기>,<보물섬>,<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작품들은 소년들의 맘을 태평양 이름 모를 섬으로 이끌어갔다.원시적 삶이 주는 자연미와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설레임은 소년을 섬에 대한 낭만으로 가득채우기 충분했다.또 사춘기 시절 본 영화<라군>은 무인도의 은밀함에 대한 성적인 상상력을 배가 시켰다. 당시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브룩쉴즈가 아무도 없는 밤에 누드로 수영하던 장면은 아직도 그 섬의 풍광과 어울려 기억된다. 이렇듯 낭만과 은밀함으로 가득한 소설 속 무인도에 대한 상상이 깨진것은 아마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서 였던 것 같다. 윌리엄 골딩은 그의 소설에서 무인도라는 한계상황에서 생기는 권력과 위계의 폭력에 대해 말했다. 자연으로 비유되던 낭만의 섬은 인간이 발을 들여놓음에 따라 또 다른 세계의 한구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태평양의 끝> 역시 섬에 대한 낭만이나 무인도에 갖힌 자의 탈출을 위한 투지같은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 <로빈슨 크로소>를 패러디한 이 작품은 시작하자 마자 곧이어 합리적 가치관의 소유자 주인공 로빈슨의 표류로 시작된다. 주인공 로빈슨은 섬에 표류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마자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만들려 시도한다.그가 만들려는 질서는 표류전 그가 받아들여왔던 서구의 과학적 합리적 사고의 세계였다. 로빈슨은 이성적 세계의 건설을 위해 나름대로 법을 만들고 나름대로 도량형을 제정한다.또 무인도안에서 신석기 혁명을 몰고 오듯이 가축을 사육하고 잉여생산물을 축적한다. 자연의 사물을 이성적 인간중심으로 재편하는 것.바로 이성적 인간이 숭고히 여기는 가치관이다.로빈슨은 이에 따라 태평양의 그 무인도를 '스페란차'라는 자신의 왕국으로 꾸며간다.

 물론 원천적으로 소통의 대상이 없었던 로빈슨의 세계건설에 장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가장 큰 장애는 로빈슨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회의적 사고 였다. 미셀 투르니에는 진흙탕이라는 회의의 블랙홀을 만들어내었다.주인공 로빈슨은 수시로 진흙탕으로 추락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눌러야만한다. 하지만 로빈슨의 타나토스는 섬과의 육체적 합치라는 조금은 기이한 방식의 결합을 통해 극복된다. 그리고 프라이데이-방드르디의 출현을 맞게 된다.

로빈슨은 방드르디를 노예로 삼는다.기본적으로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당연시 여기던 당시의 서구적 가치관에 비추어 로빈슨의 인종주의적 가치는 자연스럽다.로빈슨은 방드르디를 교육하고 발전시키려하지만 그다지 쉽지 않다.오히려 자연과 동화되는 방드르디에게 묘한 질투를 느끼게 된다.작가는 로빈슨과 방드르디를 통해  이성적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주의를 대칭시키고 있다.관리하고 계획하고 통제하는 이성과 전체를 거스르지 않으며 동화되는 자연의 대립이다.

결국 로빈슨은 자연에 동화되고 만다. 자신을 무인도로 부터 탈출시켜줄 배가 왔음에도 로빈슨은 섬에 남기로 결정한다.이미 로빈슨의 사고와 인식의 범위는 과거의 로빈슨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를 두고 자연에 대한 이성의 패배라고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그러한 양분론자체가 이성적 사고가 만들어 놓는 패러독스이기 때문이다.작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의 문화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있다.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만든 모든 기획과 역사와 문화가 부질없는 것이라는 뜻은 아닐게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는 것이고 고여있는 것은 썩기마련이다. 특히 식민지 근대를 경험하고 개발독재의 드라이브를 몸속 깊숙이 반도체칲으로 내장해 온 우리에게 과학적 사고와 이를 바탕으로 한 발전 이데올로기는 질문이 필요없는 정언명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가끔은 발전이란 이름의 몰상식과 비이성조차도 이성과 합리의 이름으로 남용되고 있다. 이제는 이러한 사고에 메스를 대야만 할 때이다. 모든 사상이나 생각은 당시에는 절대적 가치로 보일 수 있으나 긴 역사 속에 잠깐 등장하고 또 바톤을 넘겨주는 것이다.우리가 믿는 이 과학적 합리성의 세계 역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면 또 퇴장할 것이다.이러한 때에 작가는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대기처럼 우리의식과 행동의 공기가 되고 있는 서구적 합리성, 인간중심적 사고, 자연에 대한 배제 등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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