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 동문선 현대신서 104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박형섭 옮김 / 동문선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02 한-일 월드컵의 추억...가끔 그 당시의 화면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쿵쿵 거린다.시청앞 광장은 물론이고 남한 전체를 가득 메운 붉은 악마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대..한..민..국. 87년 6월항쟁때 보다 더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남녀노소,정치색을 뒤로 하고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 라는 옷을 차려입었다.우리 언론들은 이 단결된 힘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몰아서 우리 민족이 다시 뛰는 계기를 만들자고 김치국 마시는 보도를 해댔다.그때 난 방 한 구석에서 TV를 보며 두 가지 감상에 젖어들었다.한가지는 붉은 물결이 일렁이는 희열이었으며 또 한가지는 그 다수의 군중이 한목소리를 내는데오 오는 위협감이었다.만약 이들이 반성하지 못하는 하나의 힘이고 이를 누군가 교묘하게 잘 이용한다면..공허한 상상이다.하지만 불과 100년 안되는 시간 전에 히틀러와 독일 국민 다수가 그랬다.21세기엔 불가능하겠지.하지만 그 형태를 바꾸어도 그렇게 낙관할 수 있을까?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는 다수의 군중성이 가지고 있는 위협에 대한 이야기이다.좀 더 역사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파시즘에 대한 희곡이다.코뿔소는 파시즘화된 개인이고 파시즘 전체이다.이성과 합리주의의 승리를 믿어왔던 유럽은 2차대전후 본격적인 성찰에 들어간다.믿었던 유럽의 지성과 건강한 사람들이 파시즘을 양산하고 기계적으로 파시스트들이 되었갔다.이에 대한 충격과 반성.전후 실존철학이나 반이성주의철학이 힘을 얻기 시작한 계기이다.아도르노가 이야기한 '도구적 이성'이란 것도 이러한 이성 지상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결과이다. 이오네스코 역시 파시즘의 역사를 겪으며 인간의 군중성과 맹목적 이성이 어떤 폭력적 결과를 가지고 오는 지 성찰하게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코뿔소>를 내세워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파시스트가 되어가는지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파시즘의 허상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대신 작가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진해서 코뿔소가 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민중들의 자발적 동의를 필요로 한다.또 한가지 지식의 역할이 중요하다.푸코는 <감시와 처벌>을 비롯한 뛰어난 저작에서 지식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명백하게 밝혔다.이오네스코 역시 그의 인물들을 통해 파시즘에 대한 지식의 봉사를 형상화한다.

그의 주요인물이었던 논리학자,보타르등은 지식과 논리가 어떤식으로 파괴적 폭력에 동의해가는지를 보여준다.가치관이 배제된 지식과 논리는 허울좋은 이성의 이름을 쓰고 비인간적 폭력의 동원대상이 됨을 지적하고 있다. 주인공 베랑제의 친구 장 역시 마찬가지이다.속물적 지성으로 세계의 중심인척 자처하지마 그 역시 독자에게 멋진(?) 변신쇼를 보여주며 하나의 폭력으로 변한다.

이념과 가치의 상대성이란 허울도 이오네스코의 통찰아래 후피동물로 변하고 만다.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만나는 케이스인데 등장인물중에는 뒤다르가 그 역을 맡는다.뒤다르는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상대주의적 입장으로 코뿔소를 바라본다.오히려 베랑제의 걱정을 신경증으로 파악하며 자제를 요구한다.하지만 뒤다르 역시 힘에 대한 동경,폭력적 다수에 대한 동경을 피하지 못한다.코뿔소에 대한 주인공의 혐오도 이쯤 되면 바뀌게 된다.모두가 코뿔소로 살아가며 행복한데 나 혼자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다.가장 위험한 생각이며 가장 현실적 생각이다.하지만 주인공은 단호히 인간의 길을 선택한다. 이 과정이 너무 짧게 표현된 것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희망으로 끝내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었으리라...

다수는 개인에게 힘과 안정감을 준다.적어도 실책에 대한 면피라도 마련해준다.그게 대세였다는 식으로..그래서 가치관이고 뭐고 현실적 대세에 편승하려는 욕망이 생긴다.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에겐 대세편승론과 보신주의가 인에 박혀있다.서정주같은 시인은 자신의 친일을 변호하며 '종천순일파'-하늘의 뜻을 따라 일본을 따랐다.-라고 명했단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역시 '코뿔소'되기 보단 '인간'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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