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황동규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밫 창 조금 열어 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도 없이.

- 이 시를 좋아하는 건, 내 남편씨가 '나 모르는 새에 설거지를 해치워 주기를' 바래서는 절대 아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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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2007-09-30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반가워요~ ^^

김샘 2007-11-1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버클리라면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있는 곳을 말하는건가? 거기가 겨울에 비가 많이 오긴해요....지중해성 기후라...^^ 아~~ 그 거리를 다시 걷고 싶어졌어요.

알맹이 2007-11-15 12:10   좋아요 0 | URL
역시 지리 선생님. ㅋㅋ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황인숙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비오는 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고 싶은 시. 이미지가 넘쳐나거나 상상력을 달리게 하는 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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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7-09-20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햇빛이 넘 쨍쨍해서리 비가 왔으면 좋겟더라구요!!!ㅜㅜ

알맹이 2007-09-2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희 동네는 엄청 흐려요~ 요즘 정말 날씨 이상하죠. 열대야에 비에..
 

연애 - 강기원

네가 목도리였으면 좋겠어
양말이라도 좋아
아니, 도마뱀이어도 좋아
아침마다 먹는 사과
혹은 진공 청소기
안경도 멋있을 거야

네 눈으로 내가 보는 거
널 칭칭 감고 다니는 거
하루 종일 널 신고 사뿐사뿐
내 목을 은근히 조르기
내 마음대로 키우는 거
갈아 먹어도 시원찮을 너지만
먼지처럼 무게 없이
네 속에 웅크리는 거

아무래도 좋아
어디나 넌데
무어든 난데
그런데
연애할 시간이
없네

twinpix님 서재http://blog.aladin.co.kr/twinpix에서 퍼오다. 나는 이렇게 단순한 시가 좋다. 이거, 가요로 만들어도 꽤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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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床錄 - 김관식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肝, 心, 脾, 肺, 腎……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 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 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 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보다.

결코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내 어린 시절. 나는 늘상 주눅들어 있는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난을 노래하나 결코 구차해 보이지 않는 시인의 기백이 느껴지는 멋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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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사진 출처: http://blog.empas.com/jix777/read.html?a=15305498

정말이지, 이 세상 무엇으로도 내 마음 속의 외로움을 몰아내지 못할 것 같은 날이 있다. 나이를 자꾸 먹으면서 깨달아가는 것은, 그 외로움은 결국 내 심장이 멎고, 내 감은 두 눈이 다시는 떠지지 못하는 그 날까지 나와 함께 해야 할 내 친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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