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이야기
폴린 레아주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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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발표된 화제작이자 문제작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작품인데, 어찌 보면 당대의 시각에서 오늘날의 야설로 여겨졌을 것이다. 야설과의 차이점은 성적 행위에 적나라한 직접 묘사가 덜하다는 점과, 심리묘사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성기를 지칭하는 묘사가 중립적이거나 완곡하다는 점이 더욱 그러하다.

 

현대 에로티시즘 문학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O 이야기>의 주된 성적 행위는 사도-마조히즘이 차지한다. O는 애인 르네를 따라 루아시로 들어가고 그 일원이 되며, 스티븐 경에게 양도된다. 루아시와 스티븐 경이 주창하는 성적 판타지는 무조건적 강간, 채찍질로 대표되는 고문, 항문 성교 등이다. O는 여기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오히려 쾌감을 느낀다. 또한 O와 자클린 간 여성 동성애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이 작품에서 소개되고 묘사되는 여러 성적 행위의 실제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 자신의 의견처럼 연인에게 보내는 연애 편지’”로 이해하는 게 온당하다. 현실 세계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당대나 현대 모두 쉽지 않은 일이며 현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개연성도 충분하다. 사랑하는 남성에게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싶어 하는 한 여성의 성적 환상이라면 그 무엇을 꿈꾸어도 비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관점에서 이 작품을 가타부타하는 건 실체 없는 허상에 대한 논평이라 생각한다.

 

무수한 음란물에 노출되고 있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소설의 내용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성적 묘사보다는 성 심리 자체가 더욱 흥미롭다. O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가학적 행동에 관대하며 오히려 감미로움과 흐뭇함을 느낀다. 전형적인 피학적 속성이다.

 

지금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벗어난 의지에 내맡겨진 적이 없었고, 지금보다 완벽한 노예상태에 빠진 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렇게 된 것 자체를 지금만큼 행복하게 받아들인 적 또한 없었다. (P.84)

 

아무리 능욕을 당한다지만, 아니 오히려 능욕을 당하고 있기에, 바로 그 능욕을 통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오는 일종의 감미로움이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굴복을 자처하기에 느끼는 기쁨, 자신을 순순히 개방함으로써 얻는 즐거움 같은 것 말이다. (P.114)

 

소설 속에서 되풀이하여 표현되는 O의 피학적 성향은 그녀가 단지 독특한 성적 취향을 지녔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O는 애인 르네를 극도로 사랑한다. 사랑의 정도가 매우 깊기에 그녀는 르네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려고 한다. 그녀에겐 고통보다 복종의 행복이 더 큰 것이다. 스티븐 경에게 양도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르네가 원하기에 O는 이를 따랐을 뿐이었고, 나중에는 스티븐 경에게서 더욱 철저한 주인-노예 관계를 터득하였다.

 

O는 죽고 싶지 않았지만, 애인의 사랑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치러야 할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감수하는 자신을 애인이 그저 흐뭇하게 여겨주기만을 바랐다. 오로지 그의 곁으로 데려다 주기만을 말없이 얌전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P.41)

 

르네,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사랑해...... 나를 가지고 얼마든지 당신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아...... 다만, 나를 버리진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나를 버리지 마......” (P.133)

 

작가는 성적 노예화에 빠지는 O의 모습을 뜻밖에도 장엄하게 묘사한다. 그녀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고 타락한 게 아니다. 그녀는 자기 헌신과 복종을 통해 오히려 정신적으로 승화되는 것처럼 비친다. 고대 신전의 무녀와 여사제가 그러한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말이다. 자아를 전적으로 바치면 순전한 이타가 되고 영혼은 순결해진다고 보는 것일까. 작가의 펜에서 O는 성녀(聖女)로 화한다.

 

몸을 함부로 내돌림으로써 존엄해진다는 것은 분명 놀랄 현상이나, 거기 존엄한 무언가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어떤 광채를 일으켜 빛나는 듯했다. 모든 거동에서 침착함이 배어났고,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고요함과 더불어 은자들의 눈빛에서나 떠오를 법한 내면의 미소가 은은하게 번지는 것이었다. (P.66)

 

사실 그녀의 입을 범했던 모든 입들, 젖가슴과 음부를 유린했던 모든 손들, 아랫도리를 쑤시면서 그 창녀성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었던 모든 성기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녀를 신성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도 르네가 보기에 스티븐 경이 증명해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O가 스티븐 경의 품을 벗어나올 때마다 르네는 그녀에게서 신의 흔적을 찾았다. (P.157)

 

우리는 새로 얻은 링과 인두자국이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P.238) O의 심리에 대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그토록 피학적인 O가 도리어 자클린과의 관계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맡는 것 자체로 보아서도 O의 성향을 일면 화하기 어렵다. 차라리 적당히 이성애와 동성애를 넘나들며 쾌락을 즐기되, 소위 변태적 성적 행위에는 거리를 두려 하는 자클린의 태도가 일반인의 정서에는 더 가깝다.

 

이 소설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적당히 잘 쓴 야설이라도 결국 야설일 뿐이며, 누군가의 판타지를 반영한 글에 불과하다. 현실과 환상은 다르다. 엄격한 종교 윤리 기준으로 보면 성적 환상도 죄악에 속하지만, 그렇다면 대부분 현대인은 모두 죄인일 것이다. 요즘 추세는 오히려 감추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발로를 권장하고 있으므로 읽지 않으면 몰라도 읽는다면 예전의 야설은 이렇구나 하고 가벼운 흥미로 넘어가면 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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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스 박사의 비극 영국 르네상스 극문학선 9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이성일 옮김 / 소명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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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가 원체 유명하다 보니 그의 순전한 창작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엄연히 독일의 민간 설화가 원전이다. 문학 작품화로 따지면 말로의 이 작품이 괴테를 2백 년이나 앞선다. 괴테도 분명 이 작품의 존재를 알았고 의식했을 것이다. 둘 다 시곡 형태를 취한다. 괴테의 작품을 먼저 읽은 독자가 이 희곡을 접하면 성근 느낌을 갖는데, 그만큼 괴테가 설화를 정교하고 치밀하게 엮고 확대하였음이며 오히려 이 작품이 원전에 가까운 고졸한 맛이 있다.

 

줄거리는 대동소이하다. 지식의 극한을 추구한 포스터스 박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을 추구하고자 한다. 인력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악마와 거래를 하는데,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신의 권능을 획득하려는 것. 이후 온갖 모험 후에 그의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희곡 전반을 흐르는 기조는 지극히 기독교적이다. 인간으로서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는 신과 기독교 관점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다. 작품 내내 선한 정령악한 정령이 등장하여 포스터스의 행동과 결정에 대해서 촌평과 조언을 하는데 물론 그는 이를 알 수 없다. 외적인 존재로 보자면 천사와 악마일 것이고, 내적인 존재로 치면 양심, 도덕 vs 비양심, 비도덕이라고 하겠다.

 

(선한 정령) 정다운 포스터스,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생각하게.

(악한 정령) 아니야, 포스터스, 영예와 부를 생각해. (P.44, 5)

 

말로는 루시퍼와의 거래 후 포스터스의 행적을 좇는다.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가를 묻거나 세상과 만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명성을 누리기도 하지만, 벨제버브의 일곱 가지 죄악을 보고, 교황의 따귀를 때리거나 말 장수를 저급한 마법으로 속이는 등 온당치 않은 행동도 자행한다. 무엇보다 트로이의 헬렌을 욕망하여 그녀, 실은 그녀로 분한 마녀와 동침하는 죄악을 범한다. 이로써 포스터는 되돌릴 길 없는 타락의 길 끝에 다다른다.

 

(노인) , 저주받은 포스터스, 비참한 것, / 네 영혼으로부터 하늘의 은총을 몰아내고, / 하느님의 심판 자리의 왕좌를 피하는구나! (P.110, 13)

 

이쯤에서 상기해야 할 대목은 포스터스와 악마 간 계약은 누구의 강요도 없는 자발적 행위였다는 점이다. 메피스토필리스를 불러내서 루시퍼와 영혼 거래 계약을 제안한 건 어디까지나 포스터스이다. 선한 정령의 속삭임 또는 양심의 발로에 의해서든 포스터스는 신에게 과오를 빌고 회개의 길로 돌아올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선택하지 않는다.

 

(포스터스) , 포스터스, 너는 무엇이란 말이냐? / 결국에는 죽을 운명인 인간일밖에- / 네 운명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 절망은 내 상념을 불신으로 채우는구나. (P.94, 11)

 

참회하면 용서받을 줄 알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포스터스 자신도, 악한 정령도 모두 알고 있다. 그것을 포스터스의 무지와 교만이라고 칭해도 좋다. 따라서 그의 지옥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음이다. 그가 메피스토필리스를 탓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마지막 순간에 후회와 갈등으로 번민하는 포스터스를 메피스토필리스가 악마의 권세로 위협하자 그는 즉시 사죄하고 악마에게 충성을 다짐한다. 이 장면만 보더라도 그에게 신과 악마의 권능 격차는 명확하다.

 

파우스트 설화는 성경의 에덴동산 이야기와 유사성을 지닌다. 지극히 순수하고 깨끗한 존재인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킨 뱀의 유혹은 인간에게 내재한 악의 속성에 다름없다. 선악과는 영어로는 지식 나무의 열매라고 하니 그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판단할 수 있고 모든 지식을 깨우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전지적 존재가 되면 신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지식을 추구하는 파우스트는 독일 민간 버전 화한 에덴동산 전설이다.

 

(포스터스) 정령들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오게 만들고, / 아리송한 의문에 대해 속 시원히 대답해 주도록 하고, / 내가 바라는 기막힌 위업을 이룩하도록 할 것인가? (P.20, 1)

 

말로가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을 극화한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르네상스 정신이 가져온 인간 중심 관점은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에 대한 경고로 독해할 수 있다. 또는 인간의 본성 자체는 제아무리 신이 가로막고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앎에의 욕구를 막을 수 없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포스터스는 종교적 양심과 구원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 길이 비록 일신의 비극과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질지라도 우주와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를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르네상스 정신이 지향하는 인간 본위 사고의 근간을 다루는 동시에 나아가 먼 훗날 무한한 지식욕이 가져오는 현대 사회의 윤리적 문제점마저 예지한다고 볼 수 있다.

 

프롤로그와 15개의 장,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된 작품이다. 주제 자체가 워낙 무겁다 보니 작가는 4장과 8장에 가벼운 소극(笑劇)을 삽입하고 있다. 분위기 전환 목적과 함께 포스터스가 어렵게 쟁취한 마법이 하찮은 의미밖에 지니지 못함을 풍자한다. 이는 11장에서 포스터스와 말 장수 간 일화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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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우현주 옮김, 김상근 해제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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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는 비교적 짤막한 작품이다. 이 책에서도 본문은 90면이 미처 되지 않는다. 김상근 교수의 해제가 50면을 차지하니 깊이 있는 해제를 기대할 만하다. 시중에 나와 있는 유이한 번역본 중 유일한 이탈리아어 원전 번역이다.

 

카스트루초는 14세기 피사와 루카의 영웅 군주다. 마키아벨리보다 2백 년 전의 인물이며, 게다가 조국 피렌체의 적국 출신을 마키아벨리는 무슨 까닭으로 주인공 삼아 글을 썼을까? 이 작품은 그가 루카로 협상 갔던 시절에 썼다고 하는데,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체류하던 시절 비로소 그의 존재를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카스트루초의 생애를 다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 속에서 비르투와 포르투나에 관한 훌륭한 본보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P.11, 들어가는 말)

 

비르투와 포르투나라면 <군주론>에서 자주 접했던 용어다. 거기서 마키아벨리는 전형적인 인물로 체사레 보르자의 사례를 들었다. 자신의 비르투로 영광과 성공의 절정기에 오르려는 찰나 포르투나의 시샘으로 물거품이 되고만. 카스트루초 역시 체사레와 비슷한 본보기라고 마키아벨리는 제시한다. 미천한 출신, 자신의 역량만으로 루카와 피사의 군주가 되고, 토스카나 지역의 패권을 놓고 피렌체와 자웅을 겨루었던 인물. 피렌체 연합군을 대파하고 필생의 꿈을 목전에 둔 찰나. 어이없게 병마로 쓰러진 영웅.

 

카스트루초의 극적인 삶은 자체라도 매우 감동적이며 흥미진진하다. 마키아벨리는 길지 않은 글을 통해서도 독자에게 카스트루초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확연히 각인시킨다. 그 역시 카스트루초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은 그의 조국이 루카임을 아쉬워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압권은 카스트루초의 유언에 있다. 해제의 김상근교수 말마따나 이는 마키아벨리 자신의 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포르투나는, 내가 먼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충분한 판단력을 주기는커녕,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P.71)

 

그러므로 너는 너의 지략과 내가 행했던 비르투에 대한 기억, 그리고 현재의 승리가 너에게 가져다주는 명성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지 말거라. (P.73-74)

 

여기서 카스트루초는 포르투나의 무정함을 한탄하면서도, 비르투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말 것을 당부한다. 포르투나는 예측할 수 없기에 말 그대로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데 포르투나에 기대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비르투를 통해 쟁취하라는 것을. 카스트루초의 삶의 역정이 그러하였듯이.

 

이 책의 특색은 본문 못지않은 해제의 비중이다. 해제가 없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작품 전개를 같이 따라가면서 그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꺼내놓는 솜씨는 확실히 전문가답다. 김상근 교수는 특히 인간 일반을 강조한다. ‘인간 일반이란 보편적인 인간성을 뜻하는 걸로 이해된다. 거기서 제아무리 뛰어난 비르투를 지닌 인물도 결국은 포르투나의 변덕에 스러질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는 새 시대에 적합한 새 인간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옛 시대새 시대를 초월해서, 항상 존재하고 있는 인간 일반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P.104-105)

 

너무 비관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나는 <군주론>에서 인간성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문장을 찾지 못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인생철학에는 관심 없다. 그는 현실 정치가다. 그는 당면한 이탈리아 정치 체제의 해법을 제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자신의 주장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현실 정치와 사회가 부정적이어서이다. 그는 세상 사람이 모두 선하다면 그는 자신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단서를 덧붙이지 않았던가.

 

들어가는 글카스트루초의 유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결국 마키아벨리의 진의다. 인간은 포르투나의 한계가 있음에도 비르투에 의지하여 인생을 영위해 나가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특히 영웅과 군주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자질이다. 카스트루초의 죽음이 단순히 비극으로 비치지 않고 장엄함을 풍기는 까닭이 그러하다.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는 조작되었거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었다. 카스트루초의 신비로운 출생 이야기부터 조작된 것이다. (P.127)

 

이 작품은 전기물이 아니라 전기소설이다. 마키아벨리는 사료에 충실하지 않다. 사실과 허구, 조작, 날조를 꺼리지 않고 과감하게 손대어서 이 작품을 썼다. 그는 무슨 이유로 무리수를 두었던가. 자기가 필요한 인물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의 행위로 우리는 미지의 잊혀진 영웅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실상을 눈앞에서 더욱 생생하게 알게 되었고 체사레 보르자처럼 카스트루초도 역시 불멸의 인물로 거듭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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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벌레인 대왕 2부
크리스토퍼 말로우 지음, 김성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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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탬벌레인이 페르시아, 튀르크, 이집트를 정복하는 승승장구의 여정을 그렸다. 사실 역사적 사실로만 보자면 1부에서 전부 다루었기에 2부는 불필요하다. 1부가 비교적 역사에 근거하였다면, 2부의 이야기는 작가의 순전한 상상과 역사의 자유로운 편집에 기반한다. 2막에서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와 나톨리아의 왕 오르카네스의 동맹과 배신이 그러하다. 오르카네스는 자신이 마치 훗날 술레이만 대제인 것처럼 발언한다.

 

(오르카네스) 잠깐, 지기스문트, 그대는 내가 / 마치 거대한 지구가 / 대포로 천상의 축을 중심으로 흔들리듯 / 비엔나의 성벽을 뒤흔들어 / 대지 위에 무너뜨린 바로 그자였다는 사실을 잊었단 말이오? (P.16-17/11)

 

오르카네스를 주축으로 한 튀르크의 왕들은 힘을 모아 다시금 탬벌레인에게 도전하지만 처참하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마차를 끄는 인간 말 신세로 전락한다. 탬벌레인의 세 부하, 테켈레스, 우섬카사네, 테리다마스는 각각 페즈, 모로코, 알제리의 왕이 되는데, 이들은 자신의 왕국에서 다시금 정복사업을 벌여 스페인, 아프리카 전역, 우크라이나까지 정복했다고 탬벌레인에게 보고한다. 모두가 허구다. 탬벌레인의 마지막 정복이 바빌론이라는 것조차도.

 

자 그러면 작가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탬벌레인이 허황한 세계 정벌을 계속하도록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예정에 없던 2부를 불가피하게 집필하다 보니 억지로라도 즉,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탬벌레인이 계속 전쟁을 벌이게끔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부가 1부와 다른 대목은 사랑하는 아내 제노크라테와 맏아들 칼리파스를 연달아 잃는 데 있다. 항상 전진과 승리만 거둔 탬벌레인으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상실이자 아픔이다. 특히 1부에서 제노크라테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을 보였던 만큼 그녀의 죽음은 탬벌레인에게 치명적이었으리라. 그는 아내의 죽음에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신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탬벌레인) 구름보다 더 높게 진지를 쌓아 올려라. / 그리고 대포로 하늘의 성벽을 부수고, / 빛나는 태양 궁전을 난타해서, / 뭇별들이 빛나는 창공을 두려움에 떨게 하라. / 음탕한 제우스 신이 그녀를 천상의 여왕으로 삼고자, / 나의 사랑을 여기서 낚아채 가 버렸으니 말이다. (P.71, 24)

 

이에 반해 장남의 죽음은 비교적 가볍게 다루어진다. 일국의 군주이자 영웅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잇지 못할 아들을 스스로 죽인다. 비정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탬벌레인을 탓하기 어렵다. 칼리파스가 극 중에서 보여 준 행동과 대사를 보면 분명 나약할뿐더러 비겁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전리품이 될 적국의 후궁을 취할 생각을 하고, 군막에 누워서 자신은 후계자이므로 몸을 소중하게 보전해야 한다는 발언을 본다면 확실히 동생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칼리파스) 내가 나가서, 아무런 손해나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해도, / 내가 해를 입을 수 있다. 아바마마의 왕위를 이어 / 내가 갖게 될 모든 재산으로도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말이다. / 카드놀이나 해야겠다. 페르디카스! (P.127, 41)

 

말로는 이 희곡에서 종교와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우선 탬벌레인을 반튀르크, 친기독교적으로 간주하는 당대의 인식을 수용한다. 이 점은 1부와 2부 모두 동일하다는 점에서 튀르크 세력에 대한 크고 뿌리 깊은 적개심을 확인할 수 있다. 5막에서 시민이 바빌론의 총독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시민) 여기에는 아직도 그루지야의 기독교도가 있고, / [탬벌레인]가 그들의 상황을 항상 불쌍히 여기고 구해 준즉, / 각하께서 그들을 보내시면, 그도 용서해 줄 것입니다. (P.163, 51)

 

지기스문트는 오르카네스와 동맹을 맺지만, 오르카네스가 탬벌레인과 맞서기 위해 후방이 약해지자 신에게 한 맹세를 저버리고 후방을 급습한다. 배신에 대한 오르카네스의 분노와 저주는 참다운 기독교인이라면 뼈저릴 정도다. 결국 소수의 병력으로 맞선 오르카네스에게 참패하고 지기스문트는 전사하고 마는데, 양자 모두 신의 응징이라고 해석한다.

 

(오르카네스) 기독교도들이 그렇게 교활할 수가, / 아니, 존귀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 인간의 심장이 그렇게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렇다면 만일 기독교도들이 말하듯, 그리스도가 있다 한들, / 그들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P.56, 22)

 

압권은 탬벌레인이 바빌론을 점령한 후 마호메트를 향한 신성모독을 행하는 장면이다. 그는 코란과 이슬람 신전에서 발견한 모든 책을 불살라 버리고, 마호메트에게 도전하고 모욕한다. 이 대목만 보면 마치 탬벌레인은 독실한 기독교도처럼 여겨질 정도다.

 

(탬벌레인) , 병사들아, 마호메트는 지옥에 있다. / 그는 탬벌레인의 말을 듣지 못한다. / 그러니 경배할 다른 신을 찾아보아라. / 만약 있다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 그분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그분 외에는 없으니라. (P.175, 51)

 

역사적 사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티무르는 신실한 무슬림이었다고 한다. 그가 튀르크를 정복한 이유는 종교와 무관하다. 작가가 이런 무리수를 둔 이유는 그만큼 튀르크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감이 강력하다는 반증이다. 유럽의 존망을 위협하던 튀르크를 무찔렀으니 그야말로 기독교도로 삼고 싶을 정도가 아니겠는가.

 

작품해설에 따르면 1부를 탬벌레인의 상승, 2부를 그의 추락으로 해석한다. 2부에서 아내, 아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항상 행운만 충만하던 1부에 비하면 2부에서 탬벌레인은 여러 불행에 맞닥뜨린다. 하지만 이를 그의 추락이라고 간주하는 게 적정할지 의문이다. 군사적인 면에서 그는 여전히 막강하다. 오르카네스의 도전, 바자제스의 아들 캘러파인의 재도전, 바빌론의 정복 등 그의 앞에는 오로지 승전뿐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든든한 후계자가 있다. 임종을 앞두고 탬벌레인은 차남 아미라스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못다 이룬 세계 정복을 과업을 성취하길 기대한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전진과 정복이라는 야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탬벌레인) 나는 태양처럼 황금빛 갑옷을 입고 마차를 타고 / 정복한 왕들 무리를 이끌고 거리를 누빌 것이다. / 내 투구는 다이아몬드로 반짝이며, / 하늘에 춤추는 세 겹의 깃털을 꽂아서, / 내가 셋으로 나뉜 온 천하의 황제임을 알리도록 하겠다. (P.155, 43)

 

탬벌레인의 진면목은 자신이 신의 징벌이자 대리인으로 세계를 정복하지만, 신에게 맹종하는 처지가 아니라 신 앞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는 세상의 지배자를 선포함에 있다. 탬벌레인의 신은 하나가 아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자신이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제우스 신에게 도전한다. 그에게 제우스 신은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다. 여차하면 자신이 제우스 신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호메트를 무시하고, 제우스 신과 대등하며, 하나님과 제우스 신을 동일시하는 탬벌레인.

 

르네상스가 무엇인가. 종교로부터의 자유, 고전으로의 회귀가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때 탬벌레인만큼 르네상스 정신을 체현한 인물이 달리 있는가. 이 작품을 탬벌레인이라는 허황한 인물의 상승과 추락이라는 비극으로 해석하는 건 온당치 않다. 신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의 무한한 힘과 자신감,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탬벌레인은 인간성 그 자체를 한치의 가감 없이 오롯이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전형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죽음조차도 그의 욕망을 꺾을 수 없고 아들들을 통해서 계속 전진하기를 바라는 인간적 영웅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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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8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운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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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이 이렇게나 흥미진진한 책인 줄 알았다면 진작 읽었을 텐데. 솔직히 부정적인 논란도 많고 오래된 고전이라는 선입견으로 꽤나 따분할 줄 알았다. 마키아벨리는 진부한 정치이론가가 아니다. 그는 당대에 외교관으로서 종사하고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현실 정치의 실상을 꿰뚫어 보았다. 참고로 이 책은 이탈리아어 원전 완역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정 옹호론자가 아니다. 사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공화정이다. 그가 피렌체 공화정부에서 내내 활동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도 자유롭게 사는 데 익숙한 곳’(P.19)이라고 공화정 체제를 풀이한다. 인민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정치체제라면 긍정적으로 옹호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 마키아벨리는 하필 <군주론>이라는, 자신의 정치이념과 배치되는 책을 썼단 말인가.

 

마키아벨리는 공화정 체제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당대 이탈리아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여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외세도 반복적으로 개입하여 정치적 혼란을 가중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정치적 이상은 통일된 이탈리아 나라였는데, 공화정은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장점이 있지만 이탈리아 통일의 이상 실현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서 국력을 발전시키고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여 정치와 전쟁의 수단을 통해 이탈리아를 통일시키는 게 현실 가능한 방안이라고 마키아벨리는 판단한다. 그래서 이 책을 쓰고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였으리라.

 

이 책의 내용은 실용적이다. 군주국의 유형을 세습군주국, 새 군주국, 혼합군주국 등등 나열하고 국체의 차이에 따른 특성을 밝힌 후 해당 영토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 방책을 제시한다.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여 프랑스 루이 왕의 전략이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던 원인까지도 제시한다. 자신의 정치 기술에 가장 부합하는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예시한다.

 

공작[체사레 보르자]의 행위를 종합해보면 저는 그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무력과 행운으로 통치권을 얻은 사람에게 모방할 만한 표본으로 제시할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커다란 뜻과 야망을 품은 그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획을 가로막은 것은 단지 알렉산데르의 짧은 삶과 자신의 병이었습니다. (P.64, 7)

 

마지막 장에서도 메디치 가문에 앞서 이탈리아를 구원할 기회가 있었으나 행운이 마지막에 그를 거부했다고 애석해할 정도다.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에게 매우 우호적인 이유는 그가 현실적으로 최고의 군주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다. 뛰어난 군주는 정치를 할 때 도덕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지만 도덕에 얽매이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악덕을 피하는 게 당연히 좋겠지만, 악덕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크다면 과감하게 악덕을 행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유명한 여우와 사자 전략이 등장한다.

 

군주는 짐승의 방법을 쓸 줄 알아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여우와 사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 신중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신의를 약속한 이유가 사라졌을 때, 신의를 지킬 수 없을뿐더러 지켜서도 안 됩니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착하다면 이런 권고는 바람직하지 않을 테지만, 사람들을 사악할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신도 그들에게 신의를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P.125, 18)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은 성악설에 가깝고, X 이론에 해당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면 군주도 도덕과 윤리에 기초한 정치를 해야겠지만 현실이 그러하지 않다면 군주 홀로 송양지인(宋襄之仁)을 베푼다면 망국의 지름길이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오늘날 정치학뿐만 아니라 경영학이나 처세술에서도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잘 활용할 줄 알아야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국가 차원은 물론 사회와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대체로 감사할 줄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위험을 피하려 하고, 탐욕스럽게 이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P.119, 17)

 

군주가 권력과 영토를 획득하고 지위와 명예를 누리는 데 가장 큰 자질은 역량과 행운이다. 책 속에서 역량은 미덕, 능력과 같은 내부요인의 개념이며, 행운은 운명 또는 환경 요인의 개념에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내내 강조하는 것은 결국 역량의 중요성과 필요성이다. 행운은 일시적이며 변하기 쉽기에 한때의 성공은 가능하나 지속 가능하지 못하기에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중의 지지, 용병과 지원군의 원조 모두 행운에 가깝다.

 

훌륭하고 확실하며 지속적인 유일한 방어책은 바로 자신과 자신의 역량에 의존하는 것뿐입니다. (P.166, 24)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루고 행동에 모범적이고 인재를 귀중하게 여기며 유능한 신하를 거느릴 수 있다면 어떤 민중도 군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현실을 상기한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천년 넘게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작은 이익과 갈등에 집착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고스란히 민중의 피해로 전가되는 불행한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를 어떤 둑도 없고 제방도 없는 벌판”(P.168)으로 비유한다. 마지막 장의 그는 절실하다. ‘전하의 탁월한 가문이라는 표현을 되풀이하면서 이탈리아의 혼란과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존재가 메디치 가문임을 강조하며, 통일을 향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기를 열렬히 요청하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지극한 아부가 아닐 정도로 과한 인상이 있지만, 단순히 개인의 영달 차원을 넘어서 당대의 이탈리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겠는가.

 

마키아벨리즘은 부정적 명칭의 대명사 격이다. 정치적 기회주의,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용기. 민중의 본성은 변하기 쉽다는 설파. 공화국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공화정을 파멸시켜라. 이런 주장 등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비난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피식 웃고 말리라. 세상과 정치의 속성을 알지 못하는 순진한 책상물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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