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나름의 김장의 미학이 있겠지만 우리 집도 별나다. 시골에서는 대개 아들, 딸, 손자, 며느리를 불러 모아서 날을 잡기 마련이다. 누구네 집에는 누가 와서 얼마나 했다더라 하는 식이다. 그리하여 올 해도 어김없이 서울 오빠며 동생들과 함께 주말에 모여 들었고 천장 낮은 시골집은 복작복작, 간만에 본 할머니는 증손녀, 손자 얼굴 보는 재미로 싱글벙글 환하다. 일요일 새벽 세시 경, 낮부터 절인 배추를 행구기 시작해서 다섯 시에 끝났다. 뜨끈한 온돌방으로 기어들어가 한숨 자고 일어나니 아침 일곱 시, 먼저 일어나신 할머니가 끓인 배추된장국을 서둘러 먹고, 미리 썰고 다져 놓은 부재료를 커다란 고무 다라에 섞는 일이 본격적인 김장의 시작이다. 고춧가루, 찹쌀 끓인 것, 새우젓, 쪽파, 무, 갓, 멸치액젓, 마늘, 생강, 기타 등등 두 개의 고무 다라 가득 넣고 버무리는 일은 요령 좋은 작은 엄마의 손맛이 최고다. 




여자들이 김치 속을 만드는 동안 아빠와 아이들은 마당 한가운데에 장작불을 피운다. 간밤에 내린 서리가 하얗게 가라앉은 아침은 제법 춥지만, 만장일치로 일거리도 줄일 겸해서 마당에서 김장을 하기로 합의했다. 들마루 위에 척척 걸쳐놓은 절인 배추를 작은 그릇에 옮겨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아 각자 재주껏 속을 넣은 김치를 역시 각자 가져온 김치 통에 예쁘게 담아내는 게 어설픈 우리들의 일인 것이다.




김장 하는 날이라고 특별히 맞춘 시루떡이 배달되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떡을 막 바른 배춧잎에 싸서 먹으니 별미다. 아이들의 간식은 호일에 싸서 장작불에 구운 고구마다. 평소에 하나도 먹지 않던 고구마를 세 개나 먹어치울 정도. 배춧잎을 뜯어 내밀면 덥석 잘도 받아먹는 네 살짜리 막내 지솔이 단연 인기다. 일하는 제 엄마에게 칭얼대는 법도 없이 언니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잘도 논다. 너른 마당에 탁 트인 산과 들을 배경으로 별다른 장난감도 없이 뛰노는 아이들이 정겹다. 그러면서 드는,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나가있다는 생각. 아이들은 점점 시골에서 멀어져갈 것이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따라 정신없는 삶을 복잡한 도시 속에다 뿌리내릴 것이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김장을 하는 오늘 같은 날이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까.




김장이 얼추 끝나가자, 오빠는 벌써부터 불꽃이 사그라진 숯 위에 석쇠를 걸고 삼겹살을 굽는다. 아이들 입에 잘 구워진 고기 한점씩 넣어주고 좋아서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정답다. 겨울이 시작되는 길목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거운 굴레로 목을 조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 훨씬 많았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다툼 없이 지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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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2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님의 김장은 정말로 정겹고 즐거운 행사군요.. 시루떡을 막 버무린 김장김치에 싸서 먹는 맛이라.. 침이 싸악 돕니다요~ >.<

겨울 2004-11-2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노동과 놀이가 적당히 버무려진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온몸이 근육통과 감기기운으로 내내 시달린 우울한 월요일이 되었지만요.ㅠㅠ

잉크냄새 2004-11-30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느껴보는 어릴적 고향풍경이네요....아늑합니다...

갈대 2004-11-3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치에 고구마에 시루떡에 삼겹살까지!! 침 꼴딱~^^

겨울 2004-12-0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김장은 하셨나요?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가 다시 기분 좋게 잠이 든 것은 좋았는데, 나갈 시간이 되도록 계속해서 내리고 있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초겨울의 비 내리는 이런 날에 집을 나서기는 정말 죽도록 싫다. 현관문을 여니 마당 가득 쌓인 나뭇잎, 하늘을 보니 온통 잿빛, 덩달아 아래로 쳐지는 어깨, 우,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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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2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오고 흐린날은 집에서 꼼짝 안합니다.. 나가야 할 일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밍기적 거려요~

겨울 2004-11-2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날엔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부러워요. 마음속으로 내내 '곰이 되고 싶어요' 한다는...
 

 

퇴근길에 샛노랗게 익은 모과 두 알을 주웠다. 이게 어인 횡재냐면, 모과나무집 주인이 모과를 따다가 떨어뜨린 모양인데 불행히도 함몰된 갈색 상처를 입어 버려진 것. 가방에 고이 담아 와, 현관 입구의 신발장 위에 나란히 눕혀놓으니, 그 진한 향이 달디 달다. 할머니가 계실 적에는, 동네에서 적잖은 모과를 얻어다 냉장고며 방이며 가을 멋을 냈는데. 올 해는 이렇게 모과 향을 맡는다. 어지간히도 양분이 모자랐는지 크기가 내 주먹보다도 작으나, 그 향기만은 누구한테 질세라 짙고도 깊을 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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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1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 안 모과나무에 모과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하나 따고 싶지만 차마 따지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습니다..ㅡ.ㅜ 언젠가 경비 아저씨 안보시면 하나 슬쩍 따올까봐요.. 갑자기 모과향이 넘 그립군요..

겨울 2004-11-1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밤에 나가서 몰래 따오세요^^

잉크냄새 2004-11-1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모과향 맡은지 꽤 오래된것 같네요. 그 진한 향기가 그립습니다.

stella.K 2004-11-19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과차 먹어 본지가 언젠지 모르겠네요. 그 향기 그립네요.^^

겨울 2004-11-2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동네엔 유난히 모과나무가 많아요. 노점에서 파는 푸릇한 게 아닌 샛노란 모과가 참 탐스럽답니다.^^
 

 

아침, 가로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콧노래가 절로 난다. 노란 은행잎이 이불처럼 깔린 길에 빗자루가 지나간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던지. 매일 아침마다 청소를 하시던 분끼리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있었던 걸까. 소복소복 쌓인 은행잎을 보는 일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거, 모른다면 바보지. 동네 어귀뿐만이 아니다. 낡은 주공아파트를 둘러싼 넙적한 플라타너스나무도 오색의 이파리를 마구마구 흩뿌리는데 비에 젖어 촉촉한 그것이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모양이 그지없이 좋다. 계절의 색과 냄새와 형태를 만끽하며 일터로 가는 이런 날들은 비록 종교는 없지만 신의 축복 같다.


오늘은 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준비성은 철저해서 두툼한 스웨터를 꺼내 입고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서니 차가움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얇은 옷을 입고 파랗게 질린 여학생들을 보니 잔소리가 마구 쏟아지려 했다. 아이들을 보고 옷 좀 따뜻하게 입으라는 말을 무심코 하다보면 꼭 엄마가 된 것 같아서 무안할 때가 있다. 확실히 십대들은 무엇에서건 겁이 없다. 아주 기본적인 예의, 고운 말씨, 웃어른에 대한 공경 따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듣기에도 생경한 욕설을 거침없이 뱉는 걸 보면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절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나무라는 방법도 쿨하게, 직설화법으로 한 방에 쏴야한다. 자라고, 배우고, 느끼고, 모방하고 결론내리는 속도도 엄청나게 빠른 요즘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거기에 내 자리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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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1-13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제가 있는 곳도 은행잎을 치우지 않아서 꽤 기분이 좋았답니다. 예전에는 미리 작대기로 털어서까지 치워버리곤 했는데...

겨울 2004-11-13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치우지말자는 약속을 한 것 같죠? 언뜻 어수선한 느낌도 나지만 이리저리 날리는 잎새들의 정취가 한가롭고, 찬바람이 던지는 스산함을 덮어주네요. 그리고 저희집 마당에도 감나무잎이 아우성을 칩니다. 마당 안의 것은 상관이 없는데 대문 밖으로 날리는 것들은 앞집이나 옆집에 민폐라서 밤마다 비질을 합니다^^
 

 

일본식 전통 술을 빚는 양조장집 딸내미 나츠코의 파란만장한 분투기를 그린 이 만화에서 내 혼을 빼앗아 간 건 술에 관한 집념이나 애정이 아닌 농사꾼들의 농사짓는 이야기다. 전통 술의 원료인 쌀에서부터 최고의 술이 만들어진다는 신념아래 나츠코가 배워가는 농사짓는 법과 농부의 마음, 결국에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은 바로 이 시대의 내가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인 것이다. 먼 미래의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인 비옥한 땅을 과도한 농약살포로 산성화시켜 황폐케 하는 현재의 농사법의 부조리함을 성토하는 만화속의 인물을 통해서 가슴 먹먹한 비애에 빠져들었다. 물론 일부에서 유기농을 실현하고 있으나 아직도 멀었다. 농업에 미래는 없다는 패배주의적 사고가 팽배했을 뿐이다. 2차 쌀 시장 개방을 앞두고 연일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누구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사용하고 있는 농약을 폐기처분하고 땅을 살리자고, 그 땅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적은 양이라도 인간에게 이로운 건강한 쌀을 생산하면 높은 가격에 수매하겠다는 약속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런 생각에 젖는 나는 어쩔 수 없는 농사꾼의 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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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1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을 빚기 위해 쌀부터 재배하는 나츠코의 집념과 노력이 대단했던 작품이죠.. 나츠코의 할머니가 주인공인 명가의 술 2부도 있습니다. 보셨나요?

저는 저 책을 본 후로 전통주만 찾아서 먹기도 했습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맛을 음미해가며요..ㅎㅎ

변화란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기농을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거기에 따라 점점 농약 사용이 줄어들고.. 깨달음이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뿐입니다..


겨울 2004-11-1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2부는 읽지 못했지만,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유기농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만하고 화만 낼 뿐 무엇하나 능동적으로 개선할 의지가 없는 나부터 문제가 큽니다. 돌아가 살 곳은 거기라고 생각은 하지만 농사를 짓겠다는 각오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