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뭔가를 쓰려고 노력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의무적으로 독후감을 쓴 학창시절 이후로는 애써 시간을 내어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았다. 알라딘을 이용해 책을 사고, 읽고, 다른 분들의 리뷰며, 페이퍼를 읽게 되면서, 시간을 쪼개 끙끙거리며 짧은 글을 완성하고 자족하는 요즘이 그래서 무척 행복하다. 그러다보니 예전에 읽고 쌓아둔 책들을 보면 별점은커녕 감상 한 줄 못 남긴 게 미안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도 그런 경우다. 술술 읽히는 재미에 한 권씩 사 모았지만 이렇다할 코멘트 하나 달아주지 못했다. 거기다 얼마 전에 조카아이에게 안겨버렸으니 아무리 말 못하는 책일지라도 서운할 테다. 요즘엔 좀 덜하지만, 어떤 책이 좋으면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20대의 그런 치기와 열정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30대에 들어서며 퇴색하였다. 읽고 난 책에 연연하지 않고 빌려주고, 나눠주고 돌려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 되었다. 무엇이든 많이 소유할수록 삶의 무게가 나간다. 굳이 욕심을 부려 손에 얻은들, 그 즐거움도 잠시고 지키기에 급급하니, 비어있는 마음만 못하다는 뜬금없는 생각........ 요컨대, <로마인 이야기>가 있던 책장의 빈자리가 쓸쓸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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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2-20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네요. 일년에 한권씩 완성한다는 시오노 나나미에 보조를 맞추어 읽어볼까 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5권이후로는 손에 잡히지 않아서 읽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겨울 2004-12-2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 10권 정도 읽었는데, 건성건성 꾸역꾸역 이었어요. 처음 몇권은 신나고 재밌었는데 점점 의무감에 읽히더라구요. 덥썩 보따리를 싸서 넘긴 걸 봐도 그다지 애착을 느끼지 않는 책인 모양입니다.
 

겨울, 그리고 연말의 스산함이 아침과 낮, 저녁 내내 꼬리를 드리운다. 늘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삶이라 계절이 혹은 해가 바뀐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지만, 바쁘게 주변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안부인사에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다가 풀어졌다가 한다. 남의 일에 유난히 관심을 가지고 참견하는 사람을 두고 오지랖도 넓다고 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따뜻한 말 한마디도 적절한 때가 있다.

새해에는 조금만 더 밝고, 건강하고, 따뜻하기를 소망한다. 내가 알고,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도 나쁜 일 보다는 좋은 일이 많았으면 한다. 아무리 혹독한 현실일 지라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고 낙관하는 여유가 아주 조금 있었으면 한다. 남의 행복을 시샘하지도 말고, 내 불행을 비관하지도 말고 사는 건 다 그래라고 웃는 가난하지만 소박한 마음이 풍성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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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2-17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딱 님처럼 빌고싶네요...^^*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마태우스 2004-12-17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가 바뀌면 많은 게 바뀔 것 같지만, 일상은 그대로고, 나쁜 사람은 여전히 나쁘더군요. 그런 세월들이 쌓이면서 이젠 해가 가는 것에 대해 점점 더 무덤덤하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님의 말씀에 딴지를 걸어서요...

겨울 2004-12-17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라니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

 

 

........ 죽음을 앞에 둔 중위는 묘한 도취를 맛보았다. 이제부터 자신이 시작하는 것은, 일찍이 아내에게 한번도 보인 적이 없는 군인으로서의 공적인 행위였다. 전쟁터에서의 결전과 똑같은 결의가 필요한, 전쟁터에서의 죽음과 동등동질한 죽음이었다. 자신은 지금 전쟁터의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잠깐 동안 중위를 알 수 없는 환상 속으로 이끌었다. 전쟁터의 고독과 죽음과 눈앞의 아름다운 아내, 이 두 가지 차원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도 없는 둘의 공존을 구현하며 지금 자신이 죽으려고 하고 있다는 이 감각에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미로운 것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었다. 아내의 아름다운 눈이 자신의 죽음 한순간 한순간을 시중들어 주는 것은, 향기 짙은 미풍을 맞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무엇인가가 허락되어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남모르는 경지에서,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경지가 허락되어 있는 것이었다. 중위는 눈앞에 있는 새색시처럼 아름다운 군기와, 그것들 모두가 화려하게 미화된 환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들은 눈앞의 신부와 마찬가지였으며, 어디에서라도, 아무리 먼 곳에서라도, 끊임없이 맑은 눈빛을 발하며 자신을 주시해 줄 존재였다. 레이꼬도 또한,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남편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 이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군복이 잘 어울리는 중위는 그 늠름한 눈썹, 그 꾹 다문 입술과 함께,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아마도 남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리라.


<우국>은 미시마  유키오가 어떤 인물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단편이다.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동료들과 더불어 죽기를 결심한 다께야마 신지 중위는, 그의 어린 아내에게 자신의 할복을 지켜볼 것과 그 후, 더불어 자결할 것을 권한다. 이것은 그들이 죽음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과장도 가식도 없이 이성적이며 냉정하게 묘사한 글이다. 죽음을, 할복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각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무섭도록 잔인하다 싶으면서도, 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 편의 소설로써는 정말이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강렬하여 충격을 던진다. 아내 앞에서 배를 가르는 남편과, 그것을 흔들림 없이 지켜보며 극한의 고통에 다다른 남편에게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는 아내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나는 한 때, 그들의 식민지였던 과거의 역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 같은 일본의 다른 얼굴에 대해 무조건 경계한다. 그들 나라의 영웅에 대해서도 괴물을 연상한다. 물론, 애국지사라는 이름의 괴물은 어디에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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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2-1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에서는 자살을 죽음의 미학으로 승화하기까지 한다고 하더군요. 자살에 대한 인식과 현실 사이의 괴리와 모순이 가장 짙게 남아있는 곳이 일본이라고 합니다.

겨울 2004-12-1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 안에서의 자살에는 중독성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휩쓸립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글은 특히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아름답네요.
 

 


선입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아주 미약하다. 이런 책, 이런 만화 절대 안 읽어 라며 고집을 피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오늘 그 싫다는 만화를 읽고 헤벌쭉 웃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간사한 마음이다. A가 추천하며 설명을 할 때엔 괜히 딴청을 피우다가 B가 좋다고 하니 그러냐? 하며 당장에 읽어치우는 고약함이라니. 도대체 나는 언제나 철이 들려나. 




오늘부터 우리는!!! 날라리가 되자고 결심한 순간 제일먼저 하는 일은? 미장원에 달려가 번쩍이는 금발로 염색을 하는 것? 혹은 밤송이처럼 머리를 세우는 것? 그리고 시작되는 좌충우돌 고교일기는 그야말로 폭소열전. 일본 만화 속에 학원 폭력물은 흔하디 흔한 소재다. 그런데 그 흔한 소재를 가지고 이 작가는 맛깔스럽게도 버무렸다. 영웅주의도 비장미도 없이 남들보다 튀어보자는 일념 하에 험난한 날라리의 길에 들어선 두 주인공의 행태는 순전히 웃어보자는 의도 외에 아무것도 없다. 눈물나도록 얄팍한 의리와 우정이 구현되는 순간조차도 허무하게 웃기다. 귀여운 건지 순진한 건지 모자란 건지 도통 헷갈리지만 그들이 나아가는 길에 졸렬한 속임수는 있을지언정 패배란 없다. 묵사발이 되도록 두들겨 맞아도 그만큼의 복수열전이 기다리고 있다. 정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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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2-0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아니고 페이퍼에 올리셨군요..^^ 별점을 몇개나 주셨을까가 궁금합니다..

저도 선입관 때문에 안 읽고 있는 책입니다. 웬지 바보같은 느낌이라서..

한데, 님이 재밌다고 하시니 생각이 달라지는군요.. 저도 선입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와져 볼까요? ^^

겨울 2004-12-0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셔요, 꼭.^^ 전 당연히 날개님은 보셨으리라 생각했어요. 별 다섯은 무난합니다. 사실 애장판으로 이제 겨우 두 권을 읽은 상태라 리뷰까지는.... 아마 읽어갈 수록 감탄사를 쏟아낼 듯 합니다. 엄청 기대하고 있지요.^^
 

 

불 꺼진 마루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무릎이 시리지만 커피의 뜨거움에 자족하며 어둠 가운데 내내 앉아 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 머물다 간 사람을 생각한다. 사는 것의 고달픔에 대해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얘기를 나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다고 믿었다. 외로운 존재라는 의미와는 별개로 섬의 ‘고독’을 동경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고립은 불행이라고 가르친다. 타인과 어울려 손을 잡아주거나 내밀지 않으면 안 된다. 언뜻 스친 대화 중에는 둘은 정상이나 혼자는 비정상이라는 말이 있었다. 각기 다른 얼굴과 성향의 사람들이 태어나 죽는 과정에서 필연처럼 거치는 ‘결혼’의 의무, 권리를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다. 집단 보다는 개인을 존중하고 무리보다는 고립을 갈구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도 실제로 보았고 둘이 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도 역시 보았다. 나는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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