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평점 :
두번째 접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이다. 일본 소설에 입문 한 뒤로 한 명 한 명 작가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가네시로 가즈키, 무라카미 하루끼, 오쿠다 히데오, 야마다 에이미, 츠지 히토나리를 거쳐서 이번엔 요시모토 바나나다. 가장 최근작 <불륜과 남미>를 읽은 이후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감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이전작들이 너무나도 호평을 받고 있어서 그 한권만으로 그녀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 끝에 이번에 몇 권을 더 구입했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녀의 많은 작품들 중에 언제쯤 내놓은 것인지 모른다. 기왕이면 집필 시기를 알 수 있어서 그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혹은 역순으로 읽어나가는 재미를 누리고 싶었지만 불친절하게도(?) 그녀의 책 어디에도 그 순차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읽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거쳐왔던 세월의 흔적들, 생각의 흔적들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이 책을 접했을 때 무슨 과학책인줄 알았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의학관련, 과학관련 대중서인줄 알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의 이름만 기재되어있지 않다면, 이 책을 소설책으로 분류할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일전에 어떤 책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을 찾는데 철학분야에 끼워져있지 않고 다른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도서관 사서들이 제목만 보고서 다른 곳으로 분류해놓은 것이다. 그럴 때면 아 뭐 실수할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런데 사서들은 이 많은 책들을 어떻게 제자리에 분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졌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짧은 여러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초록반지, 보트, 지는 해, 검정 호랑나비, 조그만 물고기, 적당함 등등의 여러 단편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담고 있다. 그 주제를 풀어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다른 여자와 또 만나 데이트를 하며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때 그 장소로 나의 발길이 향할 때, 나보다 내 몸이 먼저 자연스럽게 행동하는구나, 하는 걸 느낀다. 바로 어제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즐거웠던 시간들이 오늘, 그리고 내일, 혹은 한달 뒤 까맣게 잊혀지고 말지 모른다.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지워지고 흔적조차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또 알게 되기도 한다. 역자 김난주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런 때, 시간은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순간에 지금이 먼 옛날이 되고 또 먼 과거의 시간이 오늘에 되살아날 수도 있는 것을, 하고 말이죠."
함께 했던 그 행복했던 시간은 기억을 통해 영원히 '행복'으로 남을 것만 같지만, 언젠가는 기억 저장고에서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그때 내가 했던 말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는 비록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내 몸에 습관으로 배어있다. 단지 그걸 인지하지 못할 뿐.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돌아왔을 때 나는 안다. 익숙한 나의 몸짓에, 한 마디 말에,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인거 같은데, 언젠가 내가 했던 행동인 거 같은데... 나는 잊었지만 내 몸은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옛 이야기를 내 몸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p51, 검정호랑나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