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세간을 떠들썩 하게 만든 '진주 운석' 사건,그로인해 우리나라에서도 운석에 대한 것들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한동안 진주는 운석사냥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그런가하면 운석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또한 이목을 끌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우주에서 떨어진 스톤로또에 대한 사람들이 기대치가 운석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떨어지는 운석에 그것도 자신의 욕실에서 머리에 맞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물론 운석을 발견할 확률보다 더 불가능한 확률일 것이며 이런 경우가 정말 존재할까 싶은 그런일이 소설 속에 그려진다.

 

욕실 천장을 뚫고 날아든 운석을 맞기 전에는 '알렉스 우즈'는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그렇지 않다면 평범하지 않은 소년이었다. 이목이 그렇다는 것이다.그의 엄마는 영혼에서 보내는 메세지를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타로점을 보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며 혼자 힘으로 우즈를 키우고 있다.그에겐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거론된 적이 없기도 하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그는 고양이 루시퍼를 언니처럼 여기고 살고 있고 집안에서 생식이 가능한 것은 고양이 루시뿐이다.그 속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소년이 열 살에 욕실천정을 뚫고 날아든 운석에 맞으면서 그의 삶은 180도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이주일여 코마 상태에 빠져 있던 그는 천국인지 현세인지 모를 세상을 향해 눈을 뜬다.그것이 운석을 머리에 맞고 이주일이 지나고 난 후이기도 하지만 그의 머리엔 영광의 상흔이 남게 되었다.그로 인해 간질을 앓게 되고 학교에서는 왕따아닌 왕따와 같은 삶을 살게 되기도 하고 간질로 인해 학교를 쉬게 되면서 책과 친하게 되고 과학과 의학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러다 다시 학교에 가게 되지만 그의 무력함은 나아지지 않고 축구부 친구들에게 늘 표적이 되어 힘겨운 학교생활을 이어가던 중에 짖꿎은 축구부친구들의 장난에 피터슨이라는 사람의 온실에 숨어들게 되고 월남전 참전용사이며 숨어 살 듯 하는 피터슨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그래,뇌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한테 그 사람만의 우주를 만들어주지. 우리가 아는 것, 보고 만지는 것, 느끼고 기억하는 것 모두가 뇌 안에 담겨 있어.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한테 만들어준 거야. 뇌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무섭다고 하지.하지만 오히려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까."

 

머리에 운석을 맞고도 살아 남았으니 우즈는 그야말로 지역의 명물중에 주요인물이라 할 수 있다. 외톨이 생활을 하는 피터슨마져 '알렉스 우즈'를 알 정도로 지역에서 그의 사고는 유명세를 타고도 남았다.그런 그가 피터슨의 온실에 뛰어들어 유리도 깨고 온실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발뺌을 한다. 이 소년의 말을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우즈의 엄마는 피터슨에게 우즈의 도덕적이 교육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켜달라고 한다.용서의 의미에서 말이다.그렇게 하여 피터슨과 우즈의 만남은 우연이 필연인 것처럼 연결고리가 이어지게 되었다. 피터슨으로 말할것 같으면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그에게 수렴한듯이 인생 자체가 불행과 같은 사나이다. 아내도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자식도 없다. 월남전으로 입은 피해로 인해 한쪽 다리마져 정상이 아니다.그런 그는 <커트 보네거트>라는 작가를 좋아해서 그가 유기견센터에서 데려 온 개의 이름마져 '커트'다. 커트가 유일한 그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처지에 우즈가 그의 삶에 끼어 든 것이다.월남전에 참전했기 때문에 그는 평화주의자이며 그의 힘이 필요한 곳에 편지를 써서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피터슨이 괴팍한 은둔자라고 한다면 우즈는 운석에 맞고 뇌수술을 거친 후에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모자란 듯이 바라본다.하지만 가끔 잠깐씩 일어나는 간질증세만 빼고 그는 지극히 정상적이며 또래보다 조금 높은 독서열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운석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운석이 아니었다면 과학과 우주 의학에 관심이 생겼을까.평범한 십대처럼 그도 평범한 십대로서의 관심에 이끌렸을 것이다.그런 그가 운둔자 피터슨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은 많이 변하게 되고 그도 <커트 보네거트>라는 작가에 빠져 '커트 보네거트 세습 교회'라는 독서회도 만들게 되고 불치병에 결려 '자살' 혹은 '안락사'를 하려는 피터슨을 도와 그의 안락사를 도와주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미 비포 유>라는 소설을 생각나게 했다.그 소설 또한 평범한 삶을 살던 젊은 사업가가 뜻 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전신마비가 되면서 안락사를 선택하지만 가족의 반대에 부딪히지만 그를 도와준 간호조무사를 통해 안락사를 하게 된다. 자신의 삶이고 죽음인데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안락사를 옹호하는 소설처럼 비취질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이나 <미 비포 유>나 읽다보면 당사자의 선택을 받아 들이고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운석이 집 천장을 부수고 들어오는 건 날마다 있는 일은 아니지."

 

처음엔 운석에 맞은 평범한 십대 소년의 이야기가 그려져서 평범한 아니 환상문학인가 했는데 심오한 뜻을 가진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것에 놀랐다.그런가하면 진주운석 사건이 있었기에 좀더 이야기에 더 빠져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소년 또한 자신에 머리에 떨어진 '금속돌'을 팔았다면 로또를 맞은 것처럼 거금을 손에 쥐어 현재의 삶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하지만 소년은 자신의 운석이 놓여야 할 자리를 잘 알고 박물관에 기증을 한다.자신만의 운석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운석에 맞아 뇌수술을 받고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그는 그만의 긍정의 힘으로 독서에 빠져들게 되고 그의 삶은 우물안과 같은 지구가 아닌 우주를 생각하게 되고 삶과 죽음이 그 끝을 알 수는 없지만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고 시작된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인간의 삶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우주의 삶에서 탄생이 있고 그 끝이 있다. 그렇게 하여 운석이 자신에게 왔듯이 은둔자 피터슨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별 볼일 없는 삶일지 모르지만 그에게 맞는 삶이 있고 죽음이 있음을 죽음을 겪어 본 소년은 알게 된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한 뜻하지 않은 생과 사의 진정성에 피터슨이 선택한 죽음 또한 옳다고 보는 소년 우즈,그의 삶과 우주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저자 때문에 알지 못했던 작가를 한 명 또 알게 되어 그의 작품을 검색해 보고 다음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커트 보네거트> 소설속에서처럼 그의 작품을 가지고 독서회 정도는 가지 않겠지만 한번 읽는다면 우즈처럼 빠져들게 될까? 어떻게 보면 우즈의 엄마가 보는 타로점처럼 우연처럼 뽑아 든 카드가 마법의 세계로 이끌 듯 빠져들며 소설에 집중하게 만든다. 처음 뽑아 든 카드게 불행이었지만 그 끝은 결코 불행이라 할 수 없는 심오한 감동과 여운을 안겨주면서 저자를 기억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과 <미 비포 유>를 함께 읽어보면 더 좋겠고 안락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터슨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생은 책임질 수 없지만 죽음이란 그와는 달라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을 읽으며 한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던 시간을 뒤로 하며 갑자기 내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고 내 삶은 바른 길로 잘 가고 있는 것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대문 외인구단 - 곧 죽어도 풀스윙, 힘 없어도 돌직구
류미 지음 / 생각학교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흔히 야구를 인생과 같다고 한다. 9회말 2아웃에야 비로소 다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야구,인생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무언가 다 끝난 듯 하다가고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게 인생이기도 하다. 끝나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야구도 인생도 정말 결과를 미리 짐작할 수 없다. 그렇다고 청소년기 그야말로 사고를 치고 문제아 취급을 받는 아이들을 끝까지 문제아로 낙인을 찍어야 할까.아직 9회말 2아웃이 오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들을 어른들의 잣대로 그냥 열외시킬 것인가.감독도 아이들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저자도 나름의 아픔을 간직한 '외인구단'이다. 그들의 희망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애들한테 더 좋지 않을까요. 각기 다양한 사연을 가진 학생들이 참여하거든요. 선생님도 이런 아픔이 있는데 너희들을 만나기 위해 멀리서 온다. 이러면 우리 친구들도 더 좋아할 것 같은데요."

 

야구에 한번쯤 빠져 보았던 이들이 많을 것이고 지금도 야구 시즌에는 여기저기서 한동안 출렁출렁한다.나 또한 여고시절에는 '고교야구'에 빠졌었고 그리고 프로야구에 한참 빠져 들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렇다고 무척이나 야구에 대하여 모든 것을 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배트에 공이 맞으며 나는 '딱' 하는 소리가 좋아서 그냥 야구에 빠져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친구들과 동대문 야구장을 가게 되었고 그 느낌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 기억의 편린 속에서 야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어느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한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은 야구가 아니라 인생이야. 내가 야구를 시작한 게 중학생 때야. 프로야구 선수 중에 중학생 때 시작해서 프로 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 내가 말하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야구에서 그런 근성을 배우란 말이야. 근성을 배우는 데 야구만 한 게 없어. 나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야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야구 하면서 다 같이 어울리는 법도 배우게 되지. 학생도..."

 

그리고 때맞추어 나온 영화 '외인구단' 을 보러 친구와 함께 극장을 찾았다. 그때는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정말 극장이라 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외인구단이라는 영화를 보며 후끈한 열기 속에서 한동안 친구와 '까치와 엄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그래서였을까 저자가 풀어내는 야구 이야기는 쉽고 그리고 점점 '푸르미르야구단'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의사인 저자는 아이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아이들은 그런 것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어른들의 잣대로 아이들을 평가하고 어른들의 틀에 아이들을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어제까지의 일들은 전부 괜찮단다.모든 것을 해도 다 괜찮아.다만 자신을 죽이지만 말아."

 

왜 이 책을 읽으며 '주홍글씨'가 생각이 났을까? 스스로 가슴에 찍은 낙인을 떼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홍글씨를 달아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이들은 야구로 하나가 되어 점점 성장을 하고 변화를 하여 나간다.그것이 비단 아이들의 변화뿐일까? 아무것도 모르고 서로 어쩌면 서로 각자의 개성이 뛰어나 하나로 뭉쳐질 것 같지 않던 아이들이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책을 읽는 순간에도 야구장의 함성은 전파를 타고 나오고 야구의 계절이 돌아 왔음을 실감하며  한번 야구장을 찾아 봐야겠다는 옆지기의 말을 좀더 현실감 있게 받아 들이게 된다. 구회말 투 아웃,아직 그 순간이 아이들에게는 오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미래를 미리 어른들의 잣대로 낙인 찍듯이 결정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아직 해야할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하나가 될 수 있을까에서 우리도 뭉치면 하나가 될 수 있다.아니 희망을 일구어낼 수 있다는,그들의 희망을 읽은 듯 하여 기분이 좋다. 우리집은 중학교가 고등학교가 앞 뒤로 있다. 저녁시간이면 중학교 빈 운동장에 고등학생들이 저녁을 얼른 먹고 모여 힘차게 축구를 한다. 그 젊음이 좋아 난 한참동안 창을 열고 그들의 모습을 내려다 볼 때가 있다. 경쟁을 벗어 버리고 모두가 축구라는 운동 하나로 뭉쳐 열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뛰는 모습을 보면 참 좋다. 승부라기 보다는 그들은 운동장 안에서 교실안에서 배우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충전하고 있는 듯 하여 뿌듯하기도 하다.야구하나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아이들,그들에게서 희망을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리플 패키지 - 성공의 세 가지 유전자
에이미 추아.제드 러벤펠드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성공의 세 가지 유전자'라는 부제로 에이미 추아와 제드 러벤펠드가 쓴 '트리플 패키지',어떤 사람들이 성공을 할까? 성공의 결정적 비밀이 무엇인지 부부가 20여년간 연구로 밝혀낸 글이라 하는데 '성공'이란 정의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의 기준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개개인의 차가 있겠지만 어느 특정 집단이 전체 미국인 평균에 비해 엄청난 성공을 구가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한 것을 예로 든 듯 하다. 인도계 미국인은 평균보다 2배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으며, 이란계, 레바논계, 중국계 역시 고수입을 올리고 있고 지난 30년간 모르몬교는 재계를 주름잡는 리더들을 수없이 배출했다고 한다.유대인의 뛰어난 성취는 잘 알려져 있고 그들은 미국 인구의 2퍼센트지만,대법원 판사의 3분의 1, 토니상 수상자의 3분의 2, 노벨상 수상자의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한다.에미미 추아와 제드 러벤펠드는 부모의 경제력 교육수준,지능,제도 등과 무관하게 높은 학업성취와 물질적 성공을 거두는 그룹들을 분석하여 트리플 패키지를 추출했다.

 

성공을 거두는 그룹에서 찾은 성공 요인으로 '성공한 집단의 세 가지 문화의 힘'을 들고 있다. 그 첫번째로는 '우월 콤플렉스' , 트리플 패키지에서 정의 내리기가 가장 수월한 요소로서, 집단의 특별함, 혹은 우월성에 깊이 내면화된 믿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믿음의 근원은 아주 다양하다.모르몬교도의 경우처럼 민족의 장엄한 역사와 문명에서 비롯된 믿음일 수도 있다.두번째로는 '불안감'을 들고 있는데 불안감은 일종의 불만이라 할 수 있다. 사회에서 자신이 어떤 가지를 지니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초조함,자신이나 자신이 한 일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근본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이나 근심이다.불안감은 멸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위험하다는 인식,미진한 느낌,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띨 수 있다. 세번째로는 '충동 조절', 우리가 생각하는 충동 조절의 의미는 유혹,특히 시련이나 어려운 과제 앞에서 포기하고픈 유혹을 이겨내는 능력이다. 충동 조절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는 없다. 프로이트의 생각대로,문명은 성적이고 공격적인 원시적 본능을 억누르는 것으로 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그렇지만 비교적 관대한 미국이라는 배경에 맞지 않게 어떤 집단들은 유달리 충동 조절을 강조한다.

 

저자 제드 러벤펠드는 <살인의 해석>이란 소설로 재밌게 만났는데 이런 책에서 만나니 반갑기는 한데 이 책이 문제시 된 것은 특정 집단이나 특정 유전자에 국한하였기 때문인 듯 하다. 성공의 요인을 갖춘 특정 유전자나 특정 집단이 있다고 보진 않는다. 성공을 향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가 더 중요하지 어느 집단이나 유전자로 성공을 논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는 듯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우월 콤플렉스,불안감,충동 조절' 등은 특정인으로 한정하기 보다는 평범한 우리네 삶 속에서도 부딪힐 수 있는 요인들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왜 특정 민족,특정 집단이 더 우수한가?' 라는 그 현상을 파헤쳐 찬반양론으로 들끓게 한 책이라지만 읽어보면 재밌는 부분들도 있고 책의 반 정도가 '주석' 으로 채워져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뭔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책이다.

 

우리는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잘되었다고 하면 성공했다고 한다. 어느 관점에서 성공이라고 해야할까? 부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얼마만큼의 양적 질적 충족을 이루었을 때 성공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성공이란 동전의 양면성과 같은 두얼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분명 성공이란 이름을 얻었을 그 이면에는 내가 이루지 못한 '실패'라는 다른 얼굴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프로이트이 '가보지 못한 길'처럼 내가 가지 않은 길은 실패라고 볼 수 있고 부모의 욕심으로 채워지거나 부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물려 받거나 부모에 의한 성공은 성공이라기 보다는 강요라고 보고 싶다. 자신의 꿈이 없는 성공을 그대로 자신의 것인양 자신에게 걸치고 있는 성공은 글쎄.어릴 때부터 경쟁속에서 일등을 강요받고 성장한 우리 아이들이 '충동 조절'이 부족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과는 다를 것이고 미국사회와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에 무겁게 읽기 보다는 이런 방법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구나 하고 읽었다.

 

생각해보니 우린 누구나 오늘이라는 시간을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은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그날의 성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불행한 것도 아니고 오늘 채우지 못한 것을 내일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는 내일을 보내게 될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 받거나 유전적인 요인으로 쉽게 성공을 거머쥐기 보다는 자신의 노력으로 값지게 얻은 성공이야말로 더 값지고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쉽게 이룬 것은 의미가 없다. 좀더 힘들고 험난한 과정을 거친 것이야말로 진짜 자신의 성공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특정 집단이나 특정 민족으로 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노벨상을 받거나 아이비리그에 가야만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값진 삶이 얼마나 많은가.나눔을 실천하면서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이들도 많기 때문에 '트리플 패키지'는 성공하고 싶은 이들이 한번쯤 참고로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고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까만 펜과 비밀 쪽지 라임 어린이 문학 2
엘렌 리스 지음, 이세진 옮김, 앙투안 데프레 그림 / 라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학 온 학생은 설레이게 마련인데 오는 첫날부터 짝꿍과 오해가 있어 서로 오해로 멀어지게 된다면? 그런 오해가 서서히 풀리면서 서로 간에 우정도 쌓게 되고 친구의 아픔을 속시원하게 해결은 해주지 못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처방을 해주며 우정을 돈돈하게 해나가는 어린 친구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가끔 두껍고 어려운 책보다 이런 책이 정말 깊고 큰 울림을 줄 때가 있다.아이들 책이라 얕볼것이 아니라 기회가 되면 읽어보길 권하고 싶기도 하다.

 

한여름 무덥던 날 얼굴이 북극에서 온 것처럼 새하얀 아니 하얗다기 보다는 투명하여 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인 여자친구가 전학을 왔다.그런데 이친구는 말을 하지도 못하지만 함께 짝꿍이 된 남자친구의 책상 위에 있는 '까만 펜'을 가리키며 남자친구의 까만 피부색을 지적하듯 한다. 자신의 피부가 까맣다고 하는 줄 알고 오해를 하게 된 친구, 그런데 그 친구는 원래 말을 못하는 것인지? 아님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인지.에리파를 파트릭만 어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도 어려워한다.왜일까? 그녀가 말을 안해서일까?

 

그런데 파트릭이 집에 가서 책을 펼치다보니 '비밀 쪽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탱크도 있고 불을 뿜는 대포도 있고...이런 그림들이 왜 자신의 가방에 들어가게 됬고 누가 넣은 것일까? 짝꿍인 에리파가 넣은 것인줄 알게 되고 기다리게 되는데 에리파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녀가 말을 못하게 되었고 악몽에 시달리는 것일까? 에리파는 전쟁이 있던 체첸에서 오게 되었고 전쟁으로 인해 악몽에 시달리고 말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파트릭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고 그녀의 마니또가 되기로 한다.

 

처음엔 까만 펜을 가리키며 자신의 피부색을 가지고 무어라 하는줄 알았는데 에리파가 간직하고 있는 아픔을 알게 된 후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자신이 악몽을 꾸면 엄마는 그 악몽을 그려보라고 한 후 그 그림들을 태웠다.그렇게 하면 악몽에서 헤어날 수 있다고 믿는 파트릭은 에리파에게도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그만의 비법을 실행하기로 한다.하지만 그가 학교에서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선생님의 눈에 띄게 되고 급기야 교장선생님 앞에 에리파와 담임선생님까지 불려가게 된다.친구를 위한 행동이 모두를 난처하게 했던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잘못이 없음을 이야기 하는 파트릭,하지만 교장선생님은 그런 파트릭에게 벌을 주려고 하자 에리파는 잃었던 말을 하게 된다.친구를 돕기 위하여.그렇게 하여 그들은 진정한 친구로 거듭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체
이규진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본 영화 <역린>에서는 정조가 즉위하고 그를 암살하려던 하루 24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역린'은 '임금의 분노'인데 영화에서는 다른 누구를 믿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던 그를 만날 수 있다.스스로 몸도 단련하고 잘못된 일은 찾아 벌하는 일까지 그가 도맡아서 한다.누구를 시킬 수 없었던 시대,스스로 단단해지기 위하여 선왕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만 했다.그런 왕의 분노를 역린에서 보았다면 이 작품은 '수원화성'과 '천주교박해'라고 들 수 있을 것이다. 수원화성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하여 지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의 제목처럼 '파체'란 '슬픔을 기쁨으로 돌리어 생각함' 이란 뜻처럼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슬픔이었지만 수원화성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바뀌길 바란것은 아닐까.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강하거나, 약하거나, 잘 났거나, 못났거나, 그 어떤 이라 해도 이 성안에 다 살게 하라. 복되게 살게 하라."

 

그런데 소설은 슬프다고 해야하나.슬픔이 기쁨으로가 아닌 슬픔으로 끝난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한기만 했다. 작가 이규진은 습작만 하다가 이번에 <파체>로 처음 책을 냈다고 하는데 이런 역사소설 정말 좋아하는데 그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질 정도로 빠져들며 읽었다. 정조에 대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는 정말 많이 있는데 이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는 좀 특이하지 않았나싶다. 여자이면서 남자로 살아야 했던 '정빈'이나 왕의 자손이면서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고 노비로 산 '유겸' 이란 인물은 어쩌면 그시대를 잘 나타내주는 인물들이지 않을까. 자신들의 신분을 속이며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슬픈 인생인가.그렇다고 그것이 행복한 삶도 아니고 슬픔으로 끝나서 더 슬프고 먹먹한 작품이었는데 그래도 참 재밌게 읽었다.역사소설은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무궁무진한 듯 하다.

 

서출이라 재주도 많고 학식을 갖추고 있어도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던 태윤,그런 태윤의 광대노름을 보고는 그런 인재를 쓰기위한 시험이 있고 태윤은 잘못되긴 했지만 정조의 눈에 들어 수원화성 공사를 맡게 된다.화성에는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염원도 담겨 있지만 사학이라 하는 천주교가 곳곳에 담겨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천주교는 사학이라 하여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그와 관계된 것을 믿거나 가지고 있어도 안되던 시대,하지만 태윤과 유겸 뿐만이 아니라 왕도 사학에 관한 책을 읽었음을 시사한다.그만큼 쉬쉬하면서도 많은 이들속에 존재하던 신앙이지 않았나 생각되며 뜻 하지 않은 무원당의 사고로 인해 정연을 구하러 연못에 빠졌던 정빈이 죽고 정연만 살아 남았던 것을 아버지 차원일은 가문을 살리기 위하여 딸을 아들로 키우며 정빈을 딸도 아닌 아들로 아닌 괴물처럼 키우면서도 그녀의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런 정빈을 옆에서 달래는 것은 이집 무원당에 오게된 노비 유겸,그의 과거는 드러난 것이 없다.부모가 다 죽었다는 것 밖에.그는 풀과 꽃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선한 사람인데 정빈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를 달래주는 인물로 정빈과 함께 한다.

 

궁인이 자신의 아이를 배임하지만 궁에서는 진실을 밝힐 수 없었던 정조, 아버지를 위해 건설한 화성은 자신의 아들인 유겸과도 천국을 거닐 듯 조우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어떻게 보면 그곳에서 자신의 자손이 살아갈 수 있는 밑바탕을 건설한 것이기도 했다.모두가 평화롭기를 바랐던 왕이었고 그런 곳으로 화성을 건설하였는데 어떻게 보면 그곳은 사학을 눈감아 준 곳이기며 드러내기도 한 장소라 볼 수 있다.왕도 자신을 모두 드러내고 살지 못했지만 어떻게 보면 백성들도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을 백프로 드러내 놓고 살지 못했던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딸을 아들로 만들어야 했던 차원일도 그의 딸이며 아들로 살고 있는 정빈도 그렇고 유겸이나 정빈의 아내로 들어왔던 영신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면서라도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고 유겸의 어머니 자운향 또한 자신의 드러낼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모두가 자신들을 성에 가두고 살아가는 인물들처럼 자신들을 둘러 싸고 있는 성이 무너진 날에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그야말로 슬픔이 넘쳐 흐르지만 정빈과 유겸의 죽음처럼 죽음후 그들의 이루지 못함이 더 가슴아프고 구구절절함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지.

 

"혹 파체破涕라는 말을 아느냐."

"어려운 말은 모르옵니다."

"눈물을 거두란 뜻이다.슬픔을 이기고 기쁨을 얻으란 뜻이니 내 오늘 너에게서 그 말의 뜻을 알겠다."

"......

"제게도 한 뜻이 떠올랐나이다."

"오 그러한가.무슨 뜻이련고?"

"먼 데 나라말로 그것은 평화를 부르는 말 이라고 합니다.그 나라사람들은 마음이 곤고할 때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소원을 빈다고 합니다.도나 노비스 파쳄.도나 노비스 파쳄."

 

엉킨 실타래처럼 모두가 매듭을 풀지 못한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 맺힌 매듭이 하나 둘 풀리면서 그들이 천국에 이르렀는지 모르지만 '모두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이란 기도를 해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만약에 정빈이 자신이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고 당당히 밝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삶이 정빈이 누렸던 것만큼의 힘을 얻는 삶을 살았을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삶 속에서 살아야했던 어떻게 보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자보다는 남자와 같은 힘이 필요했던 시대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힘도 권력도 다 필요없다는 것을.인생에 어떻게 기쁨만 있을까,슬픔도 있고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탄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것이 인생인데 모두가 평화롭기를 기원한 곳이 어떻게 보면 서학이라는 것으로 평화가 한순간 깨져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화성 또한 인간의 삶처럼 그렇게 세월을 이겨내며 견디어낸 것은 아닐까.그곳에 가면 이제 태윤이나 유겸 정빈등의 이야기가 생각날 듯 하다.그들이 다 이루지 못하고 남겨 놓은 삶이 어딘선가 헤매이고 있을 것만 같은.영화 <역린>에 이은 이야기처럼 연결되어 '역린'후의 이야기를 읽은 느낌이 든다.문화부흥기였던 정조,이야기도 많고 회자되는 이야기도 많은데 모두 특색이고 그나름 다 재밌는 듯 하다.정조가 아버지를 위하여 화성을 건설하였다면 소설은 더 나아가 그 다음 아들로 이어져서 좀더 폭넓은 화성과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나싶다.

 

 

 

*한우리 북카페에서 받은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