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세 모금에 담배를 다 피워버렸다




1932년 여름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암울해졌다. 계속해서 득표율이 늘어나던 나치가 전국 선거에서 패배하자 여든 살의 피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시원치 않은 프란츠 폰 파펜을 총리로 선택했고, 그는 군사력을 이용해 지배하려고 했다.
그해 여름에 필리프 프랑크가 카푸트를 방문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나는 군사정권이 다가오는 국민사회당(나치) 혁명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한탄했다.

1932년 12월에 독일을 떠난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자신이 독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예감이라도 한 듯 엘자에게 “잘 보아두세요.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증기선 오클랜드 호에는 3개월 동안의 여행에 필요한 것보다는 훨씬 많은 30개의 짐이 실려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패서디나에서 독일-미국 우호를 기념하기 위한 연설을 하기로 했던 것은 어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칼텍의 밀리컨 소장은 아인슈타인이 칼텍에 머무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과의 문화교류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오버랜드 신탁으로부터 7천 달러의 후원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이 “독일과 미국의 관계에 도움이 될 방송”을 하는 것이 유일한 조건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도착한 직후 밀리컨은 아인슈타인이 “독일과 미국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고 밝혔다.
그런 견해는 30개의 짐을 가져온 아인슈타인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밀리컨은 NBC 라디오를 통해 방송될 강연을 통해 7천 달러의 오버랜드 후원금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애서니움에서 개최될 정장 만찬에서 많은 후원금도 요청해두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인기는 대단해서 표를 사려는 대기자 목록을 만들어야만 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 중에는 뉴욕 출신의 부유한 의약품 제조업자 리언 워터스도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지루해하는 것을 눈치 챈 그는 옆에 앉아 있던 여성을 건너서 담배를 권했고, 아인슈타인은 세 모금에 담배를 다 피워버렸다.
그 후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훗날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에서 뉴욕을 방문할 때는 5번가에 있던 워터스의 아파트에 머물렀다.

만찬이 끝났을 때 아인슈타인과 다른 손님들은 수천 명의 청중이 그의 연설을 들으려고 기다리던 패서디나 시민회관으로 갔다.
그의 원고는 친구가 변역해주었고 그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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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히틀러 때문에 독일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이 패서디나에서 안전하게 머물고 있던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신임 총리로 정권을 잡았다.
처음에 아인슈타인은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2월의 첫 주에 그는 자신이 4월에 예정대로 귀국하면 봉급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베를린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2월 말에 독일 의회가 불타버리고 나치들이 유대인의 집을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훨씬 더 분명해졌다.
아인슈타인은 어느 여자친구에게 “나는 히틀러 때문에 감히 독일 땅에 발을 딛을 수 없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다.

3월 10일 오후에 나치는 엘자의 딸 마르고트가 안에 움츠리고 있던 베를린의 아파트를 두 번이나 급습했다.
그녀의 남편 디미트리 마리아노프는 일을 보러 나갔다가 떠돌이 폭도에게 거의 체포될 뻔했다.
그는 마르고트에게 아인슈타인의 서류를 프랑스 대사관으로 옮긴 후 파리에서 만나자고 연락했다.
그녀는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냈다.
일제의 남편 루돌프 카이저도 네덜란드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이틀 동안에 베를린 아파트는 세 차례나 더 약탈당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서류는 안전했다.

칼텍에서 동부로 기차를 타고 오던 아인슈타인은 쉰네 번째 생일 날 시카고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독일에서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평화주의 주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청년평화위원회의 집회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그가 그런 주장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인상을 받고 떠났다.

며칠 뒤 아인슈타인은 뉴욕에서 열린 평화주의에 대한 자신의 글을 모은 『반전 투쟁 The Fight against War』의 출판기념회에서 독일의 비참한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세계가 나치를 도덕적으로 비난해야 한다고 했지만 독일인들을 악마로 취급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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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아인슈타인의 별장을 급습했다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의 친구이자 주 뉴욕 독일 영사 파울 슈바르츠가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 독일로 돌아가지 말 것을 설득했다.
그는 “그들이 선생의 머리채를 잡고 거리로 끌고 다닐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인슈타인은 1933년 3월 중순에 배를 타고 벨기에로 갔다.
그는 다음 해에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에 고등연구소가 문을 열면 매년 4~5개월을 그곳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출항 하루 전에 그와 엘자는 프린스턴으로 가서 그들이 구입할지 모를 집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는 동안에 아인슈타인은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의 무기은닉처를 찾는다는 핑계로 그의 별장을 급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기은닉처란 있지도 않았다.
훗날 그들은 되돌아와서 밀수에 사용될 수도 있다는 핑계로 그가 좋아한 보트를 압수했다.
카푸트 별장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으로 아인슈타인과 조국 독일의 관계는 결정되었다.
그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33년 3월 28일 그의 배가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직후 그는 차를 타고 브뤼셀에 있는 독일 영사관으로 가서 자신의 여권을 반납하고 자신의 독일 국적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항해 중에 작성한 사직서를 우편으로 프로이센 과학원으로 발송했다.

19년 전 그를 과학원으로 초빙한 막스 플랑크는 안도했다.
플랑크는 “선생의 그런 생각이 선생이 과학원과의 관계를 명예롭게 단절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라면서 “우리의 정치적 의견을 갈라놓은 깊은 바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우호적인 관계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라는 너그러운 말도 덧붙였다.
플랑크는 과학원의 간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공식적인 추방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내게 가장 심한 양심의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정치적 문제에서는 깊은 바다가 그와 나 사이를 갈라놓고 있지만, 나는 앞으로 수백 년 동안의 역사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과학원을 빛낸 가장 밝은 별 중 하나로 찬양될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나치는 공개적으로 신문에 크게 알리면서 국적과 과학원 회원 자격을 포기한 아인슈타인의 행동에 분노를 표시했다.
나치에 동조하는 과학원 간사는 나치를 대신해서 성명을 발표했다.
그 성명은 매우 신중했던 미국에서의 발언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인용하면서 아인슈타인이 “잔악한 일당에 참여”하고 “외국에서 선동가로 활동한 것”을 비난하며,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사퇴에 대해서 유감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인슈타인의 오랜 적이었던 노벨상 수상자 필리프 레나르트는 나치 신문에 “자연을 연구하는 데 끼친 유대인들의 위험한 영향을 증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예가 바로 아인슈타인 씨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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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보른은 아내와 함께 영국으로 갔다




1933년 4월 초에 독일 정부는 유대인 조부모를 둔 사람으로 정의되는 유대인은 과학원이나 대학을 포함해서 어떤 공직에도 몸담을 수 없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독일의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14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60명의 교수 중 26명이 피신해야 했다.
당연한 결과로, 독일을 비롯한 국가들의 파시즘에서 벗어난 아인슈타인, 에드워드 텔러, 빅토르 바이스코프, 한스 베테, 리제 마이트너,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니, 오토 슈테른, 유진 위그너, 레오 실라르드 같은 망명자들은 나치가 아니라 연합국이 먼저 원자탄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막스 플랑크는 반유대 정책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심지어 개인적으로 히틀러에게 호소했다.
히틀러는 “우리의 국가 정책은 과학자들의 경우에도 폐지하거나 수정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벼락처럼 소리쳤다.
만약 유대인 과학자들을 퇴직시킨 것이 현대 독일 과학의 소멸을 뜻한다면 우리는 몇 년 동안 과학 없이 살아갈 것이다!
그 후 플랑크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항의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 아니라고 다른 과학자들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에게 편지를 보냈다.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저는 선생님이 예전의 우정으로 저를 반겨주시고, 엄청난 압박조차도 저희의 상호관계를 흐리게 만들지 못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 오랜 아름다움과 순수함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나치의 숙청을 피해 망명한 과학자들 중에서 막스 보른은 아내 헤드비히와 함께 영국으로 갔다.
보른은 모든 것을 잘 견뎌냈으며,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혈통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답장에 적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지난 몇 달 동안 처음으로 우리가 유대인 혹은 비아리아인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도 결코 특별히 유대인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제 저는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억압과 부당한 조치가 저에게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인슈타인과 마리치 모두의 친구였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프로이센의 분위기를 좋아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을 위해 독가스를 개발함으로써 독일인이 되었다고 생각한 프리츠하버의 경우, 새로운 법이 시행되면서 그마저도 연금을 수령하기 직전인 예순네 살의 나이에 베를린 대학과 과학원에서 밀려났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설립하도록 도와준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 하버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하버는 그곳으로 가던 중 바젤에서 심장에 탈이 나 사망했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의 오페라하우스 앞에 4만 명에 가까운 독일인들이 모여들었다.
횃불을 들고 나치휘장을 착용한 학생과 맥줏집 폭력배들이 줄을 서서 거대한 불더미 속에 책을 던져 넣었다.
일반 시민들도 도서관과 가정집에서 훔쳐온 책들을 들고 모여들었다.
분노한 표정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연단에 서서 “유대인의 이지주의는 죽었다. 독일의 영혼이 다시 발현될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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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줄 몰랐어!”



원양 정기선의 항로 문제로 벨기에에 남게 된 아인슈타인과 엘자, 헬렌 듀카스, 발터 마이어를 포함한 측근들은 벨기에에 임치거처를 마련했다.
아인슈타인은 오스탕 부근의 휴양지인 르코크 수메르의 모래언덕에 집을 임대했다.
신문들은 그의 이름이 암살대상자 명단에 들어있고 그의 머리에 5천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고 보도했다.
그 소식을 들은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내 머리가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줄 몰랐어!”라고 유쾌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벨기에 사람들은 그런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두 명의 뚱뚱한 경찰관이 집 앞에 경계를 섰다.

그해 여름 프라하에서 아인슈타인의 예 자리와 사무실을 지키던 필리프 프랑크가 우연히 오스탕을 자나다가 갑작스럽게 그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 주민들에게 어떻게 아인슈타인을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런 정보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바로 모래언덕 사이에 있는 집으로 안내되었다.
훗날 프랑크는 “두 남자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몸을 던져 나를 붙잡았다”고 술회했다.

아인슈타인이 자유계약자가 되자 유럽 전체에서 제안이 쏟아져 들어왔다.
제안들이 매력적이었고 그가 우쭐해졌던 이유도 있었으나 조수 발터 마이어에게 더 나은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부분적인 이유였다.
더욱이 그런 제안들은 독일 학자들이 대하는 나치의 정책에 대한 그와 여러 대학들의 저항이기도 했다.

4월에는 그가 마드리드의 자리를 수락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스페인 장관, 물리학자의 교수직 수락 발표”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프린스턴의 일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플렉스너에게 마이어를 새 연구소의 부교수가 아니라 정교수로 채용해주지 않으면 영향이 있을 수고 있다고 경고했다.
플렉스너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4페이지에 이르는 편지에서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한 사람의 조수에게 너무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일이 나쁘게 진행될 경우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런 후 그는 마이어의 직함은 부교수로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종신 교수직을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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