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보른은 아내와 함께 영국으로 갔다
1933년 4월 초에 독일 정부는 유대인 조부모를 둔 사람으로 정의되는 유대인은 과학원이나 대학을 포함해서 어떤 공직에도 몸담을 수 없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독일의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14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60명의 교수 중 26명이 피신해야 했다.
당연한 결과로, 독일을 비롯한 국가들의 파시즘에서 벗어난 아인슈타인, 에드워드 텔러, 빅토르 바이스코프, 한스 베테, 리제 마이트너,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니, 오토 슈테른, 유진 위그너, 레오 실라르드 같은 망명자들은 나치가 아니라 연합국이 먼저 원자탄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막스 플랑크는 반유대 정책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심지어 개인적으로 히틀러에게 호소했다.
히틀러는 “우리의 국가 정책은 과학자들의 경우에도 폐지하거나 수정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벼락처럼 소리쳤다.
“만약 유대인 과학자들을 퇴직시킨 것이 현대 독일 과학의 소멸을 뜻한다면 우리는 몇 년 동안 과학 없이 살아갈 것이다!”
그 후 플랑크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항의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 아니라고 다른 과학자들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에게 편지를 보냈다.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저는 선생님이 예전의 우정으로 저를 반겨주시고, 엄청난 압박조차도 저희의 상호관계를 흐리게 만들지 못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 오랜 아름다움과 순수함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나치의 숙청을 피해 망명한 과학자들 중에서 막스 보른은 아내 헤드비히와 함께 영국으로 갔다.
보른은 모든 것을 잘 견뎌냈으며,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혈통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답장에 적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지난 몇 달 동안 처음으로 우리가 유대인 혹은 비아리아인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도 결코 특별히 유대인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제 저는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억압과 부당한 조치가 저에게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인슈타인과 마리치 모두의 친구였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프로이센의 분위기를 좋아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을 위해 독가스를 개발함으로써 독일인이 되었다고 생각한 프리츠하버의 경우, 새로운 법이 시행되면서 그마저도 연금을 수령하기 직전인 예순네 살의 나이에 베를린 대학과 과학원에서 밀려났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설립하도록 도와준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 하버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하버는 그곳으로 가던 중 바젤에서 심장에 탈이 나 사망했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의 오페라하우스 앞에 4만 명에 가까운 독일인들이 모여들었다.
횃불을 들고 나치휘장을 착용한 학생과 맥줏집 폭력배들이 줄을 서서 거대한 불더미 속에 책을 던져 넣었다.
일반 시민들도 도서관과 가정집에서 훔쳐온 책들을 들고 모여들었다.
분노한 표정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연단에 서서 “유대인의 이지주의는 죽었다. 독일의 영혼이 다시 발현될 것이다”라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