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셔츠 Yellow shirt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노란 셔츠”는 1919년에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한 선수를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최초에 이 셔츠를 입은 사람은 유명한 유젠느 크리스토프 ― 프랑스의 자전거경기 선수, 1885~1975년)
이 일은 노랑의 가치를 올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사실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서양문명에서 노랑의 상징적 가치는 오랫동안 아주 낮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노랑이 사회생활과 종교적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높이 평가되었다(특히 주황이 아닌 노랑).
그러나 중세에 이르자 그 가치는 대폭 하락되었다.
우선 노랑은 허위, 비열, 군주에 대한 배반, 비열한 행위를 나타내는 색이 되었다.
노랑이 유다의 색, 무훈시(武勳詩)32나 원탁기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배반자들(“로랑의 노래”의 간느롱, “원탁 이야기”의 반역 기사들)의 색이 된 것이다.
그것은 또 노란별이나 노란 스카프, 노란 집처럼 특정 지역에서는 이미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나 배척당한 사람들(유대인, 이슬람교도, 나병환자, 유랑자 등)을 뜻하는 색이 되었다.
또 노랑에 녹색을 섞거나 녹색을 띠게 하면 무질서와 광기를 나타내기도 했다.
중세 사람들의 감각으로 보았을 때 좋은 노랑은 단 하나, 오직 금(gold)이었다.
근대에 이르자 노랑은 그 성향이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병(때로는 죽음), 질투에 사로잡힌 남편, 바람피우는 남편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정치적인 밀고나 배신과 연결되었다.
특히 노동자의 세계에서 이 색은 자기가 속한 집단을 배신하는 자(동맹파업의 이탈자, 시위 참가를 거부하는 노동자, 혁명적 노동자의 “붉은” 조합에 대항하여 사용자측에서 결성한 “노란” 조합)를 뜻했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유럽에서 행해진 여론조사에서 노랑은 서양문화의 기본 6색(백, 흑, 적, 청, 녹, 황) 가운데 득표율이 가장 낮은 색이었다.
검정보다 노랑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적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변함없다.
그렇다면 투르 드 프랑스 경기에서 구간 선두 선수를 나타내기 위해 왜 이 노랑을 사용했는가.
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투르 드 프랑스의 주최자였던 신문 『오토』의 종이가 노랑이었기 때문이다.
그 신문지의 색이 노란 이유는 당시 대량 소비되었던 값싼 종이의 착색용으로 옅은 노랑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노랑이 가치가 있다거나 노랑의 사용으로 물건의 가치를 높이려는 목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주최 신문사와 대단히 인기 있는 자전거 경주인 투르 드 프랑스와의 관계를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투르 드 프랑스의 절대적인 힘은 급속히 그 효과를 발휘했다.
일등 선수가 노란 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그 셔츠는 즉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 셔츠는 역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화적인 물건이 된 것이다.
그래서 “노란 셔츠”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이 표현은 자전거 경기는 물론, 스포츠의 세계를 넘어서 다른 분야에도 급속히 퍼져서 금융계의 “노란 셔츠”, 경제계의 “노란 셔츠”, 대학 내의 “노란 셔츠” 등의 말이 생겨났다.
그래서 이때부터 “노란 셔츠를 입는다”는 표현은 경기의 종류나 순위와 상관없이 “선두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프랑스에만 해당될지 모른다.
왜냐하면 1923년부터 이탈리아에서는 “분홍 셔츠”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투르 드 프랑스 경기보다 몇 주 전에(전통적으로 봄에) 열리는 이탈리아 일주 자전거 경주에서는 선두 선수가 분홍 셔츠를 입었다.
이렇게 해서 노랑은 투르 드 프랑스를 통해 가치가 높아져서 이제는 승리의 색이나 탁월한 자를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그것은 옛날 신문 『오토』의 퇴색된 종이 색이 아니다.
찬란하고 빛나는 새로운 황금의 색인 것이다.
아이들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색을 물어보면 노랑이라고 하는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 「노랑」, 「신호등」, 「스키」, 「선호도」, 「교통법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