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해 탄생한 입체주의는 일반적으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6~07)과 브라크의 <누드>(1907~08)에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대략 1912년 가을까지 분석적 입체주의, 그 후를 종합적 입체주의로 구분한다.
입체주의란 명칭은 <질 블라스 Gil Blas>의 평론가로서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명칭과 관련이 있는 루이 보셀의 글에서 유래했다.
보셀은 1909년 5월 25일 칸바일러 화랑에서 1908년 11월 14일에 개최된 브라크의 전시회를 평가하면서 ‘입체 cubes’와 ‘이상한 입방체 bizarreries cubiques’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주택 도색업자 아버지 밑에서 도제로 일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는 1900년 파리로 가서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아카데미 옹베르에서 공부했다.
그는 같은 르아브르 출신인 오통 프리에스와 어울리면서 1906년에는 르시오타와 레스타크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야수주의 양식으로 그렸으며 다른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살롱 도톤과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했다.
그러나 브라크는 기질적으로 야수주의의 주관적이고 충동적인 성향과 맞지 않았으며 1907년 살롱 도톤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에서 큰 충격을 받고 분석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좀더 논리적인 기하적 분석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07년 화상 칸바일러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났고 함께 작업하면서 입체주의 양식을 창조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두 사람의 작품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했다.
1908년 가을 다니엘-앙리 칸바일러는 1907년 이후의 브라크의 작품들로 전시회를 기획했는데, 이 작품들은 두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롱 도톤 주최측으로부터 거부당했던 것이었다.
야수주의란 명칭을 만들어낸 루이 보셀은 이 그림들이 ‘입체들’을 그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혹평했다.
이렇게 해서 입체주의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처음에 입체주의는 사실주의 기법의 하나였다.
입체주의자들은 고갱, 반 고흐와 나비 그룹으로부터 야수주의에 이르는 당대의 표현주의적 경향에 반기를 들고 감각적이거나 장식적인 표현 기법을 엄격하게 배격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새로운 표현 기법의 개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강한 인간적 호소력이나 정서적인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모티프 대신에 중립적인 모티프를 선호했다.
또한 정서적 느낌이 내포된 색채의 사용을 배제하기 위해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단색조의 회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1900년대까지 여전히 유행하던 인상주의의 광학적 사실주의Optical Realism에도 반기를 들었다.
인상주의자들의 목적은 변화하는 빛에 따라 사물의 채색된 표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반면 분석적 입체주의는 세잔의 ‘지각적 사실주의 Perceptual Realism’를 계승한 것이다.
분석적 입체주의자들은 사물의 불변적 구조가 견고한 리얼리티처럼 인지되도록 묘사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표현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런 기법 중 많은 부분은 이미 세잔이 좀더 조심스러운 형태로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 기법은 현재에는 친숙하지만 당시에는 낯설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그림의 표면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시선이 화면 속으로 후퇴하는 거리감을 줄였다.
파편화된 평면들을 나란히, 또는 중첩되게 그림으로서 얕은 회화 공간을 표현했다.
기타, 바이올린, 머리, 인물 등의 대상은 양감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평면으로 분해되고 단편화된 다음 회화 공간을 표현하는 면들의 체계 속으로 도입되었다.
때때로 여러 가지 시점에서 본 대상의 단편들이 하나의 그림 속에 합쳐지기도 하고, 세잔의 경우처럼 공간 표현에 이동하는 원근법이 도입되기도 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고안하여 레제가 완성한 엄격하고 매우 논리적인 이 기법은 입체주의 화파를 이루는 예술가들에 의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서 전통 회화의 현대적 변용으로 전락했다.
1911년과 1912년 브라크는 세레와 소르그에서 피카소와 함께 작업했고, 이때 종합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콜라주를 처음 시도했다.
그는 화면에 실제 사물과 인쇄물의 글자를 도입함으로써 실제와 화면 속의 환영적 이미지를 통합하고 또 서로 대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브라크는 피카소와 나란히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구사하며 함께 활동했다.
종합적 입체주의로 알려진 제2기 입체주의는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파피에 콜레는 브라크와 피카소, 후안 그리스가 함께 발전시킨 새로운 기법으로 신문, 벽지, 유포, 성냥갑, 공연 프로그램 인쇄물 등을 캔버스에 붙이고, 소묘(브라크) 또는 소묘와 유화(피카소와 그리스)를 결합시킨 방법이었다.
캔버스에 부착된 재료는 두 가지 역할을 했다.
이는 회화 표면의 일부인 동시에 그림 이미지의 가상적 공간 속에서 재현의 기능을 했다.
그런데 파피에 콜레와 소묘 혹은 유화를 결합시킨 효과를 회화로 흉내낸 그림이 등장하면서 화면은 더욱 모호해졌다.
한층 밝고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피카소와 그리스는 물감에 모래나 다른 재료를 섞어 함께 사용했다.
초기의 분석적 입체주의가 주로 표현 기법의 측면에서 발달했다면 종합적 입체주의에서는 단편화된 형상의 추상으로부터 안정되고 통일된 회화 구성을 구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그리스, 피카소, 브라크는 각각 독자적인 방식으로 종합적 입체주의를 전개시켰다.
브라크는 1918년부터 감각적이고 촉감적인 성질, 색채와 표면의 표현적 가치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드리드 태생의 후안 그리스Juan Gris(호세 비토리아노 곤잘레스Jose Vittoriano Gonzalez, 1887~1927)가 파리로 온 것은 1906년이었고, 라비낭 가 13번지 피카소의 집이 있는 건물에 살면서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을 만났다.
1910년에 정식으로 회화를 시작한 그는 1912년에는 브라크와 피카소가 먼저 시작한 파피에 콜레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종합적 입체주의를 나름대로 소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갔는데 이는 동일한 양식으로 제작된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스는 4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입체주의 화파에 관한 언급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10년 로베르 들로네, 앙리 르 포코니에, 알베르 글레즈, 페르낭 레제와 장 메챙제가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 함께 작품을 전시했을 때였다.
파리 태생의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는 장식적인 상업 회화 공부를 한 뒤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순수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으로부터 파생된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그는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들로네는 입체주의자들과 교류했으며 1911년과 1912년에 열린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1912~13년 들로네는 <원반>과 <우주의 원형> 연작을 발표했는데, 이는 <동시적 창>에서 시작한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 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켰지만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 추상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고 명명한 ‘색채 입체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으며, 쿠프카의 작품과 더불어 유럽 미술 최초의 진정한 색채 추상화였다.
추상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 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 미술의 발전, 특히 1930년대 막스 빌이 주창한 구체 미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키네틱 아트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1901년 파리로 이주하여 1906년부터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한 앙리 르 포코니에Henri Le Fauconnier(1881~1946)는 세잔의 영향을 받은 양식으로 그렸고, 1910년경부터 입체주의 화가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1912년부터 아카데미 드 라 팔레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그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입체주의를 버리고 다양한 표현주의를 받아들였다.
르 포코니에의 작품에는 입체주의에서 파생된 구조적인 특징들이 남아 있었으나 그는 이것을 표현적인 목적에 맞게 변형시켜 사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후에 전 유럽에 떨치게 될 명성의 기반을 닦았으며 매너리즘적인 입체주의를 네덜란드에 확산시킨 것은 물론 네덜란드 특유의 표현주의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파리 태생의 알베르 글레즈Albert Gleizes(1881~1953)는 공업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00년경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입체주의 화파의 일원이 되어 1910~11년 다른 입체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했다.
1912년 섹시옹 도르의 창립 구성원이었고 메챙제와 함께 <입체주의에 관하여 Du Cubisme>라는 중요한 책을 집필했다.
글레즈는 유럽과 미국에 입체주의를 널리 알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는 입체주의 양식에 실제적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노르망디의 아르장탕 태생의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1881~1955)는 1897~99년 캉에서 건축가의 도제로 일한 뒤 1900~02년 파리의 한 건축 사무소에서 제도가로 일했으며 1903~04년에는 사진을 수정하는 일을 했다.
1903년 파리 에콜 데 보자르의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장식미술 학교와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했다.
1909년경부터 입체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1911년부터 퓌토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퓌토 그룹은 1911~13년 파리 근교의 퓌토에 있는 자크 비용의 작업실에서 비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졌던 예술가 그룹으로 주로 입체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마르셀 뒤샹과 레몽 뒤샹-비용, 글레즈, 메챙제, 그리스, 아르치펜코와 체코 화가 프란티세크 쿠프카 등이 참여했다.
레제의 입체주의 시기의 작품은 튜브 모양과 곡선으로 그려진 추상화로 피카소와 브라크가 선호한 직선 형태와는 대조된다.
1911년경 입체주의 화가 중 최초로 비구상적인 추상 미술을 실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르 코르뷔지에, 오장팡과 교류했다.
레제는 기계 부품을 즐겨 그렸으며, 정밀하고 매끈한 기계를 그린 그의 회화는 정적인 특성을 띤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에는 캔버스 전체에 한 개의 사물만을 묘사하곤 했는데, 때로는 거대한 크기로 확대해 그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그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앙리 포시용, 앙드레 모루아, 다리위스 미요와 함께 예일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캘리포니아의 밀스 칼리지에서도 가르쳤다.
이 시기에는 주로 곡예사와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구성 작품에 몰두했다.
1945년 프랑스로 돌아온 뒤부터 그의 작품에는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더욱 두드러지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색조의 변화가 없는 평면적 색채와 두터운 검은 윤곽선, 그리고 원통형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형태 사이의 대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정적이고 장대한 양식은 계속 유지되었다.
레제는 입체주의 시기에는 자율적 활동으로서의 미술 개념을 신봉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갑자기 눈이 부시기도 하고 새롭기도 한 현실로 떠밀려 들어갔다.”
그때부터 현대 사회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미술을 창조하려는 포부를 품었다.
그는 명확히 묘사된 일상 사물 속의 시적 가치와 현대 기계류와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된 물건들이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프롤레타리아적인 모티프를 선호하여 이를 기계문명과 관련된 모티프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고 정밀하게 묘사했다.
레제의 사상은 1923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기계 미학: 공장에서 제조된 물건, 장인, 예술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그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광범위했으며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낭트 태생의 장 메챙제Jean Metzinger(1883~1957)는 1903년 파리로 가서 신인상주의와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입체주의 화파의 일원이 되어 1910년과 1911년 입체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섹시옹 도르 그룹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1913년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슈투름 전시회에 참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메챙제의 양식은 더욱 사실적으로 변했고 입체주의 이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입체주의 화가들이 1910년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시인이자 입체주의의 대변인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작품이 피카소의 작품을 무미건조하고 생명력 없이 모방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들 입체주의 화가들은 1910년에서 191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하나의 단체를 이루어 1911년 봄 살롱 데 쟁데팡당이 열렸을 때 별도의 전시장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같은 해 이 그룹에 뒤샹 삼형제, 피카비아, 아르치펜코, 마레, 레트, 레제와 마리 로랑생 등이 가세했다.
로랑생의 작품은 입체주의적이지 않았지만 당시 그녀는 입체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1912년에는 그리스, 쉬르바주, 마르쿠시, 에르뱅, 몬드리안, 리베라와 쿠프카 등이 합류했다.
이들 중 몇몇 화가들의 양식은 매우 미미하게 입체주의적이었고 대부분의 화가들이 수년 내에 입체주의 노선을 포기했다.
평론가들 중에서는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로제 알라르, 모리스 레날 등이 이 운동을 지지했다.
아폴리네르는 1913년에 <입체주의 화가들, 미학적 명상 Les Peintres cubistes Meditations esthetiques>을 출간했다.
모스크바 태생의 레오폴 쉬르바주Leopold Survage(1879~1968)는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다가 1908년 파리로 가서 마티스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그러나 곧 입체주의에 매료되었으며 입체주의 화가들과 함께 1911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글레즈, 아르치펜코와 함께 섹시옹 도르Section d'Or에 가담했다.
프랑스어로 ‘황금 분할’을 의미하는 섹시옹 도르 그룹의 예술가들은 1912년 라 보에티에 화랑에서 ‘섹시옹 도르’란 명칭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같은 명칭의 잡지도 발행했다.
쉬르바주는 대규모 장식에 재주가 있어 디아길레프로부터 발레 <마르바>를 위한 무대장치를 의뢰받기도 했다.
그는 입체주의에 집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체주의의 원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입체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린 정물화보다 도시 풍경을 더 좋아했으며, 정통적인 입체주의와는 거리가 먼 신비한 요소를 암시하는 흥미로운 공간감을 나타내곤 했다.
폴란드계 프랑스 화가 마르쿠시Marcoussis(1883~1941)는 크라쿠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뒤 1903년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했다.
그는 몇 년 동안 만화가로 일하다가 1910년에 브라크를 만났고 그 후 피카소, 아폴리네르와 알게 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다른 입체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12년 섹시옹 도르 그룹과 함께 전시회를 가졌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에 다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마르쿠시는 비주류 입체주의 화가 중 가장 지각력이 뛰어난 화가였고, 입체주의 기법으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으며, 명백하고 단순한 구성을 시적 사실주의, 자연에 대한 감성과 결합시켰다.
마르쿠시는 1913년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다시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실험했으나 보다 대표적인 작품은 자연을 연상시키는 회화들이다.
1906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한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1882~1960)은 1909년에 바토-라부아르에 작업실을 마련했고,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표현적인 풍경과 입체주의 구조를 결합했다.
에르뱅의 작품은 서서히 추상화되어 1917년경 완전히 추상에 이르렀다.
에르뱅은 오랫동안 기하 추상에 몰두한 몇 안 되는 프랑스 화가 중 하나로서 많은 젊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과나후아토 태생으로 멕시코 벽화주 화파의 선구자인 디에고 마리아 리베라Diego Maria Rivera(1886~1957)는 10살 때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세기 절충주의의 아카데믹한 화가 산티아고 레불과 멕시코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인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 밑에서 공부했다.
1908~09년 치차로와 함께 스페인에서 공부했고, 1911~21년 파리에서 살면서 모딜리아니의 친구가 되었으며, 입체주의자들의 모임에도 자주 참여했다.
리베라는 입체주의 미학을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1913~17년 입체주의 방식으로 작업하면서 아카데미즘의 유물로부터 벗어났다.
또한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식적 구축의 특징에도 정통했다.
입체주의는 1911년경부터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관련된 많은 운동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출판물에 실린 도판과 세베리니가 쓴 글을 통해 입체주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은 1911년 2월 보초니, 루솔로와 카라의 파리 방문을 계기로 입체주의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미래주의자들은 입체주의 화가들이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입체주의 회화에서 역동성과 움직임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지만 미래주의는 입체주의가 고안한 표현 기법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관련된 모든 사조들 가운데 가장 입체주의에 가깝다.
사실 재능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단일한 하나의 양식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에서 입체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다이아몬드 잭’ 전시회에 출품되었으며 러시아 미술품 콜렉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1854~1937)은 피카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시추킨은 특히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컬텍션으로 유명하다.
말레비치는 1913년 그의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에 대해 입체-미래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미래주의와 입체주의의 영향은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에 의해 시작된 광선주의 운동을 자극했다.
독일에서는 야수주의뿐만 아니라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작품도 표현주의란 명칭으로 뒤셀도르프, 쾰른, 베를린과 뮌헨에서 전시되었다.
입체주의의 영향은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특히 프란츠 마르크의 양식 발전에도 기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입체주의와 독일 표현주의를 새로운 국가적 양식으로 통합하려고 한 아방가르드 화파가 부상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거의 모든 독일 예술가들의 표현주의에 대한 열정은 입체주의가 가진 반표현주의적인 엄격성으로 인해 무위로 끝났다.
당시 영국에서는 입체주의가 거의 발전하지 못했지만 몇몇 입체주의 작품은 로저 프라이가 기획한 제2회 후기 인상주의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입체주의는 보티시즘 양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보티시즘은 격렬하고 격정적인 ‘반란자 rebel’ 그룹이 주창한 사조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에서 최초로 추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를 열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