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창조: 비구상 미술


추상-창조: 비구상 미술Abstraction-Creation: Art non-figuratif은 1931년 2월 파리에서 추상 혹은 비대상 미술을 추구하는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결성한 그룹 명칭이다.
이들은 1930년 파리에서 제1회 국제 추상 미술전을 열고 이듬해에 그룹을 결성했다.
추상-창조 그룹은 1930년에 창립된 원과 사각형 그룹을 계승한 것으로, 국적 제한이 없었고, 조직의 구속력이 약해 한 때 회원이 4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룹의 명칭이 나타내는 것처럼 이들은 소위 ‘창조적인’ 추상의 발전을 꾀했는데 ‘창조적인’ 추상이란 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ere(1888~1964)를 비롯한 몇몇 프랑스 화가들이 발전시킨 추상화나 영국의 대상적 추상처럼 자연의 외관에서 출발한 추상이 아니라 비구상적 요소들, 대개는 기하적 요소로 이루어진 추상 작품들을 의미한다.

보르도 국립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0년 파리로 가서 생계를 위해 기자로 일하면서 계속 회화에 몰두한 비시에르는 초기에 위풍당당한 기세와 미묘한 매력을 지닌 고향 풍경화를 주로 그렸는데, 이 그림들은 전혀 감상적인 느낌을 자아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감동적이다.
파리로 돌아온 뒤 1919년 살롱 도톤을 통해 처음 작품을 전시했고, 이때 앙드레 로트Andre Lhote(1885~1962)를 만났으며, 그를 통해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샤를-에두아르 잔레Charles-Edouard Jeanneret, 1887~1965)를 알게 되었고, 그들이 발행하는 잡지 <에스프리 누보>에 글을 기고했다.

보르도 태생의 로트는 10년 동안 상업적인 목조각공으로 일한 뒤 1906년경 흑인 조각과 고갱의 회화에 크게 감명을 받아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906년 파리로 가서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 전시했다.
1910년 드뤼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을 때 앙드레 살몽, 기욤 아폴리네르, 자크 리비에르 같은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에 주목했고 파리 미술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트는 1911년 입체주의를 접하고 입체주의의 매너리즘적인 양식을 사용하여 특히 항구 풍경과 운동경기 같은 일상적인 장면과 사물을 묘사했다.
로트는 인물과 사물을 분해하여 주도 면밀한 윤곽선과 순색으로 이루어진 유사 기하적 평면들로 재구성하는데, 1917년작 <럭비>는 그런 한 예이다.

로트는 1917~40년 <라 누벨 르뷔 프랑세즈 La Nouvelle Revue Francaise>에 자신의 미학적 견해를 상세히 서술한 평론과 논설을 기고했으며, 작가로서 성공하려는 야망을 갖고 1923~50년 미술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출간했다.
로트는 1922년 자신이 설립한 아카데미 몽파르나스를 통해 프랑스는 물론 외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로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제는 매우 다양하여 풍경, 정물, 실내 정경, 신화, 초상 등을 망라한다.
모든 작품은 색조의 변화가 없는 선명한 색채로 칠해지고 정밀하게 표현된 평면과 반기하적 형태들이 상호 작용하는 복잡한 체계로 세심히 구성되어 있다.
그의 정물화 중에는 퓨리즘 작품과 유사한 은근한 매력을 지닌 것이 있으나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디자인과 리듬은 대게 즉흥적이기보다는 지적인 사고를 거쳐 나온 것이다.

스위스계 프랑스 건축가이며 화가인 르 코르뷔지에는 고향 쇼드퐁 미술 학교에서 공부했고 조판공 훈련을 받았다.
1905년에 건축 공부를 시작했고 현대 건축 발전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하나가 되었다.
회화와 판화에서도 건축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입체주의의 여러 혁신적인 기법에 깊이 몰두했다가 후에 종합적 입체주의는 공허한 장식 미술로 변질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1918년 아메데 오장팡Amedee Ozenfant(1886~1966)을 만나 이 같은 견해를 밝힌 <입체주의 이후 Apres le Cubisme>라는 저서를 공동 집필하여 출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회화 작품에 ‘잔레’로 서명했다.
1920년 오장팡과 함께 <에스프리 누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1920년대의 새로운 미학 정신을 훌륭히 서술했으며, 기계 미학을 표방한 퓨리즘Purism 운동을 탄생시켰다.
퓨리즘은 1918년 무렵부터 1925년경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으로 기계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과 관련되어 있었다.
퓨리즘은 르 코르뷔지에와 오장팡에 의해 주도되었고 <입체주의 이후>에서 퓨리즘의 토대를 규정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입체주의 이후>에 적었다.
“새로운 정신으로 활기가 넘치는 위대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정신이란 명확한 개념에 의해 좌우되는 건설적이고 종합적인 정신이다.”

그는 장식 자체를 위한 장식을 혐오하는 퓨리즘의 태도를 계속 견지했지만, 회화 작품은 더욱 역동적으로 변해갔고 양감의 표현도 프레스코를 연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0년대 후반 그의 작품에서는 더욱 풍부한 상상력과 서정성이 나타났지만 지나친 표현을 철저히 혐오하는 기본 정신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는 1930년에 프랑스로 귀화했으며 이후 회화보다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 건축가로서 상당한 영예와 명성을 얻었다.

엔의 생캉탱 태생의 프랑스 화가 오장팡은 스페인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 뒤 생캉탱 미술 학교에서 소묘를 공부했다.
오장팡은 입체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입체주의 그룹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1915년 이후 입체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장식적 추상으로 퇴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런 견해를 1915~17년 직접 편집하던 비평지 <엘랑 L'Elan>에 발표했다.
오장팡은 자신이 창간한 <엘랑>을 통해 종합적 입체주의의 장식적 경향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으며 뒤에 퓨리즘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을 주창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에스프리 누보>를 창간했는데 이는 1925년까지 퓨리즘과 기계 미학의 주요 토론장이 되었다.
1924년 르 코르뷔지에와 공동으로 <현대 회화 La Peinture Moderne>를 집필했는데 후에 그는 이를 “에스프리 누보 운동의 요약”이라고 말했다.
그는 1928년 그의 가장 중요산 저서 <미술 Art>를 출간했다.
이 책은 1931년 영국에서 <현대 미술의 기초 Foundations of Modern Art>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1952년에는 뉴욕에서도 출간되었다.
그는 1931~38년에 대규모 구성 작품 <삶>을 제작했는데, 이것은 100여 명 이상의 인물들이 인류의 단결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퓨리즘 양식으로 그린 것이다.
1938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오장팡 미술 학교를 세웠다.
그 후 몇 년 동안 ‘전성설 theory of preformation’을 발전시켰는데, 이 이론은 세계의 위대한 걸작들은 ‘발견자’가 그것을 찾아내어 생명을 불어넣기를 기다리며 항상 인류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퓨리즘 시기와 1930년대 동안의 오장팡의 작품은 경제 개념, 곧 가장 경제적인 수단으로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개념의 지배를 받았다.
후기 작품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인상을 주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좀더 세밀한 세부들이 드러난다.

한편 비시에르는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를 알게 되었을 무렵 입체주의 양식을 터득하여 “인간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입체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작품들은 뛰어난 감수성을 보여주는 탁월한 것이었다.
비시에르는 자연의 표현적인 속성들에서 영감을 얻어 타시즘 양식의 그림을 그린 에콜 드 파리 예술가들 중에서 표현 추상의 아버지라고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그린 그림들은 매우 개성적인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1938년에 은퇴한 뒤 사실상 무명 화가로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쟁 중 녹내장 때문에 정상 시력의 1/3도 안 되게 시력이 저하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태피스트리와 다른 재료들을 이어 붙인 작품을 제작했다.
1948년 수술이 성공하여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에 이르러 그토록 오랜 기간 누리지 못했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비시에르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말기 작품으로 인해 감식력이 보다 뛰어난 소장가들과 미술품 수집가들은 초기 및 중기의 작품들을 재평가하게 되었는데, 그는 머지 않아 그 작품들이 이미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말기 작품보다 더 높이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태피스트리 같은 작품 중 일부에는 상형문자가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추상 방식은 자연의 외관을 서정적이고 세심한 구성의 추상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근원이 되는 것들의 표현적인 특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추상-창조 그룹은 추상 미술의 추구라는 커다란 원칙하에 외견상 매우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가보, 페브스네르, 리시츠키의 구성주의와 몬드리안,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 도멜라의 신조형주의로부터 마넬리, 글레즈 같은 예술가들과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까지, 심지어는 아르프의 생물 형태적 추상이나 일부 추상적 초현실주의 등 많은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포괄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과 데 스테일의 지지자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점차 표현적 추상이나 서정적 추상보다는 기하적 추상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러시아 화가, 조각가이며 그래픽 예술가 엘 리시츠키El Lissizky(옐리예제르 마르코비치Eliezer Markowich, 1890~1941)는 1909~14년 다름슈타트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리시츠키는 입체-미래주의 양식과 루보크lubok라 불리는 농민 목판화 전통이 융합된 양식을 사용하면서 샤갈과 함께 유태교 서적의 삽화를 그렸다.
루보크는 밝게 채색된 러시아 민속 판화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민속 우화나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루보크는 17세기 중반부터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작되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루보크란 용어는 교육받은 계층이 평민 미술에 대해 내린 경멸적인 평가를 함축했다.
그리고 조잡한, 값싼, 단정치 못한, 심미안이 결여된 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리시츠키는 1919년 비텝스크에서 말레비치를 알게 되었고 러시아 구성주의를 주도하는 예술가의 한 명으로 성장했다.
활자 인쇄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20년에 직접 저술한 10쪽 분량의 책 <2개의 정사각형 이야기 The Story of Two Squares>를 디자인했는데, 1922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이 책은 현대 인쇄 디자인과 서적 디자인 분야에서 중요한 지표로 간주된다.
1922년 베를린으로 간 그는 일랴 에렌부르크와 함께 <베시치/게겐슈탄트/오브제 Veshch/Gegenstand/Object>란 제목의 구성주의 잡지를 창간했고, 반 두스뷔르흐 및 데 스테일의 일원들과 교류했으며, 한스 리히터, 모홀리-나기와 함께 구성주의 그룹을 창설하고 잡지 <게 G>를 창간했다.
<게>는 형성Gestaltung을 의미한다. 리시츠키는 1923~25년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ABC 그룹을 조직하고 같은 명칭의 잡지를 그룹 회원들과 공동으로 발간했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추상 예술가였다.
그의 전성기 작품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타틀린과 로트첸코의 구성주의, 그리고 몬드리안의 네덜란드 신조형주의가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하노버 공과 대학에서 건축과 조각을 배운 독일 추상화가 프리드리히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Friedrich Vordemberge-Gildewart(1899~1962)는 그 대학에서 엘 리시츠키를 알게 되었다.
또한 아르프, 슈비터스, 반 두스뷔르흐와 접촉했으며, 반 두스뷔르흐를 통해 접하게 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은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의 작품 세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나치 독일에서 비재현적 미술이 금지되자 1937년 스위스로 이주했다가 1938년에 네덜란드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국적을 취득했다.
1954년 독일로 돌아왔고 울름 조형 예술 대학의 시각 정보학과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의 목적이 미술과 기술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임을 밝혔다.
세심하게 계획된 그의 작품은 염격한 환경에서 장식으로서는 세련되지만 사람을 끄는 매력이 결여되어 있고 감정적 호소력이 부족하다.

암스테르담 태생의 세자르 도멜라 니벤호이스Cesar Domela Nieuwenhuis(1900~92)는 1919년 네덜란드를 떠나 아스코나와 베른에서 자연 풍경을 그리면서 구성주의와 추상 미술을 실험했다.
그 뒤 베를린으로 옮겨 1923년 노벰버그루페Novembergruppe의 전시회에서 비구상 작품을 선보였다.
노벰버그루페는 1918년 11월 베를린에서 결성된 급진적 독일 예술가 그룹으로 진보적인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국민 생활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것이 그들이 공언한 목적이었다.
그룹의 결성을 주도한 사람은 막스 페히슈타인, 세자르 클라인이나 후에 하인리히 캄펜동크, 루돌프 벨링, 에리히 부흐홀츠, 오토 뮐러, 한스 푸르만 등이 가담했다.
도멜라 니벤호이스는 1924~25년 파리에서 반 두스뷔르흐, 몬드리안과 교제하면서 데 스테일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1924년 헤이그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27~33년 베를린에 머물면서 나운 가보의 영향을 받아 여러 다른 재료의 재질과 색채의 대비를 이용하여 몽타주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유명해졌다.
1933년부터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다.

피렌체 태생의 알베르토 마넬리Alberto Magnelli(1888~1971)는 1911년경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채 피렌체 미래주의 예술가들과 교제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넬 리가 공식적으로 미래주의 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1913~14년 파리에 머물면서 마티스, 피카소 및 여러 입체주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1915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잠시 동안 밝은 색채의 추상화를 그렸지만 곧 구상적 회화로 전환하여 이탈리아 형이상학적 화파의 영향을 받은 형식화된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1931년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을 방문한 마넬리는 바위덩어리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 스스로 <깨진 돌>이란 제목을 붙인 추상에 가까운 화화 연작을 제작했다.
1933년 파리로 가서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완전한 추상 회화로 다시 돌아갔다.
실제로 마넬리는 작품 활동 초기에 칸딘스키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앵포르멜이나 표현적 추상 양식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추상 구성은 윤곽선이 뚜렷하게 그려진 기하적, 혹은 그에 가까운 형태들이 구성주의의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구축된 것이었으며 단지 색채만이 극히 표현적이었다.
또한 형태의 윤곽선을 처리한 방식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이에 대해 벨기에 화가, 판화가이며 미술평론가로서 원과 사각형, 추상-창조 등의 그룹 창립에 적극적으로 활약한 미셀 쇠포르Michel Seuphor(1901~99)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마넬리의 발견 중 가장 훌륭한 것 가운데 하나는 투명한 피부 같은 역할을 하는 다색선으로, 이것은 형태를 둘러싸거나 분할하기도 하며, 침투한 영역을 지니고 있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히 그 영역을 변화시킨다.”

프랑스 예술가로는 장 고랭, 오귀스트 에르뱅, 장 엘리옹이 추상-창조 그룹에 참여했다.
생테밀리옹블랭 태생의 장 고랭Jean Gorin(1899~1981)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1926년 몬드리안을 만나 신조형주의로 전환했으며 최초로 신조형주의 양식의 부조 구성물을 제작했다.
원과 사각형 그룹과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이었고 추상-창조 그룹의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36년의 연감을 편집했다.
1946년 살롱 데 레알리티 누벨의 창립에 참여했다.
고랭의 작품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 놓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구성주의 구조물의 유형을 예고했다.
후기 작품에서는 대각선적 형태와 원형을 도입했으나 몬드리안의 수평-수직 양식을 지속했다.

1930년대 파리에서는 모든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적극 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화가들은 두드러진 활약을 나타내지 못했다.
1936년경 몇몇 주요한 구성주의자들이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뒤 그룹의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1978년 뮌스터에서 과거의 그룹전을 되살린 ‘추상-창조’ 전시회가 열렸고 이는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에서도 잇달아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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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미술 2


1910년까지 추상 미술은 무르익어 갔고 여러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발전되었다.
칸딘스키는 종종 추상 회화를 그린 최초의 인물로 인용되지만, G.H. 해밀턴이 말한 것처럼 사실상 어떤 특정한 화가를 선택하여 그를 최초라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초의 추상 수채화’로 알려진 칸딘스키의 작품에는 1910년이라는 날짜와 서명이 기입되어 있지만 몇몇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이 제작된 것은 그보다 더 이후의 일이며, 칸딘스키가 이를 제작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 기입해 넣은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칸딘스키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초기 추상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최초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작품 제작 날짜를 앞당기려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개별 선구자들에 이어서 곧 추상 미술 그룹과 운동이 뒤따라 나타났다.
그 최초의 것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오르피즘과 싱크로미즘이 있다.
아폴리네르가 1912년 ‘섹시옹 도르’ 전시회와 1913년 베를린의 슈투름 화랑에서 전시된 로베르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만들어낸 오르피즘Orphism은 비재현적 색채 추상을 의미했다.
아폴리네르는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1913)에서 이를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화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그리는 미술이라고 설명했다.
오르피크orphique란 말을 과거에 상징주의자들이 사용한 적이 있으며, 아폴리네르는 여기에 낭만적 의미를 부여하여 엄격한 입체주의에 서정적 색채를 가미하는 시도와 쿠프카처럼 순수 색채 추상과 음악의 유사성에 관심을 갖는 경우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마케와 같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가 오르피즘에 관심을 갖았던 것은 이런 낭만적 연상 때문이었다.

들로네는 1912년에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묘사한 추상 연작 <동시적 원반>과 <원형 리듬>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로지 색채만이 형태이자 주제이다.
미술이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한 묘사적이고 문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불완전한 표현 수단으로 인해 점차 타락하여 노예 상태나 모방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예술가가 빛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사물에 비친 빛이나 여러 사물 간의 관계에 의해 파생되는 빛을 그리는 데 급급하여 빛에 회화적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르피즘은 비록 단명했지만 비재현적 색채 추상의 추구를 목표로 삼은 최초의 운동이었다.
들로네는 후기의 저서 <입체주의에서 추상 미술까지 Du Cubisme a l'art abstrait>(1957)에서 오르피즘이란 명칭을 이런 색채 작품이나 쿠프카의 작품과 유사한 작업, 미국 싱크로미즘 화가 스탠턴 맥도널 드-라이트와 모건 러셀의 작품 등에 한정하여 사용했다.
즉 그는 오르피즘의 기원을 입체주의보다는 오히려 인상주의와 쇠라의 신인상주의로 파악했다.

순수하게 색채만으로 회화의 형태와 내용 모두를 전달하려고 한 미술 운동이 싱크로미즘Synchromism이다.
파리에서 작업하던 두 명의 미국 화가 스탠턴 맥도널 드-라이트Stanton MacDonald-Wright(1890~1973)와 모건 러셀Morgan Russell(1886~1953)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켰다.
미술 평론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와 형제인 맥도널 드-라이트는 1907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일년 반 동안 수학한 뒤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회화를 수학했다.
그는 모건 러셀과 함께 색채 이론을 연구했으며, 1912년경 과학적인 색채 배치에 바탕을 둔 회화 이론을 전개했다.
이 이론은 1913년 뮌헨의 노이에 쿤스트 살롱에서, 그리고 그 뒤 파리에 있는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합동 전시회에서 발표되었다.
이 이론은 쇠라와 시냐크 등 신인상주의자들이 슈브뢸의 <색채의 동시 대비 법칙 De la loi du contraste stimultane des couleurs>과 O.N. 루드의 <현대 색채학 Modern Chromatics>으로부터 끌어낸 이론들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이 이론은 1913년 이후 들로네와 쿠프카가 색채 원반 추상으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주었다.
뉴욕 태생의 러셀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06년이었고 잠시 동안 마티스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파리에서 맥도널 드-라이트와 친구가 되어 그와 함께 슈브뢸의 색채 이론을 공부하고 들로네의 오르피즘과 유사한 순수한 색채 회화의 방법을 고안해냈다.
맥도널 드-라이트는 1919년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하여 싱크로미즘 회화를 그만두고 컬러 영화를 위한 키네틱 기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한편 러셀은 1920년 무렵부터 구상적인 회화로 전환했다.
1930년대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큰 종교화를 그렸으며 1946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편 러시아에서 추상 미술이 번성했는데, 절대주의 외에도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광선주의Rayonism가 1915년에 시작되었다.
유럽 구성주의는 비재현적 혹은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여 그 의미가 모호한 데 반해 러시아 구성주의는 매우 구체적인 명칭이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유럽 구성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작품을 의도적으로 배격했다.
리시츠키만 러시아 구성주의와 유럽 구성주의 모두 동조했다.
1920년경 러시아에서 구성주의의 기본 개념은 1920년대에 순수 미술과 실험실 미술에 반대하고 생산 미술을 지지하던 비대상 예술가의 이념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타틀린은 입체-미래주의자들의 활동 기간에 널리 유행한 구성이란 용어를 자신의 작품과 관련하여 채택했다.
타틀린은 이런 구성물에서 실제를 흉내내는 대신에 실제 물질을 사용했으며, 회화의 가상적 공간 대신에 실제 공간을 이용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은 환영을 부인하는 것인데, 이는 서구의 구체 미술 개념과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이는 사회적 유용성과 더불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타틀린의 물질 문화주의는 현대적 물질의 미적이고 실용적인 실제 특징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이후 구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예술가들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구성주의자라는 용어는 1920년 8월에 간행된 가보와 페브스네르 형제의 <사실주의 선언>에서 타틀린의 미학적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선주의는 러시아 화가 곤차로바와 라리오노프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행한 회화 양식을 가킨다.
이 운동은 라리오노프가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언문으로 시작되었고, 이 선언문은 191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표적’ 전시회에 맞추어 발행된 문집에 실렸다.
선언문에 따르면 광선주의는 입체주의, 미래주의, 오르피즘의 종합이었다. 광선주의 양식은 물체에서 발산되며 가까이 있는 다른 물체에 의해 차단당하기도 하는 보이지 않는 광선에 대한 불분명한 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 광선은 어떤 점에서 이탈리아 미래주의 이론에서 요구되던 ‘힘의 선’과 유사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미적 목적에 맞는 형태를 창조하기 위해 이런 광선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하며,
“물체에서 발산되는 광선은 다른 물체로 건너가면서 광선주의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예술가는 이것을 자신의 미적 표현 욕구에 맞게 구부리고 굴복시켜 형태를 변화시킨다.”
많은 광선주의 회화가 특히 일단의 대각선으로 주제의 해체를 강조한 점에서 미래주의 작품과 양식적 유사성을 보인다.
광선주의 운동은 곤차로바와 라리오노프가 1914년 이후 이젤화를 그만두면서 급속히 종결되었다.

추상 미술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소명 내지는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의 일부 예술가들은 거의 종교를 향한 것과 같은 열정으로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했으며, 1917년에 창립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 그룹의 예술가들도 이와 유사했다.
<데 스테일>은 미학과 미술 이론을 다룬 네덜란드 잡지로 1917~28년 테오 반 두스뷔르흐가 운영하고 편집했고, 마지막 호는 1932년 반 두스뷔르흐의 미망인에 의해 발간되었다.
데 스테일은 1917년 레이덴에서 반 두스뷔르흐가 조직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단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반 두스뷔르흐 외에 창립에 참여한 인물로는 화가 피트 몬드리안, 빌모시 후사르, 시인 안토니 콕크, 건축가 야코부스 요하네스 피테르 오우트Jacobus Johannes Pieter Oud(1890~1963)가 있다.
정기 간행물 <데 스테일>은 반 두스뷔르흐와 동료들의 신념을 잘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미술은 혁신적이면서도 자기 만족적이며 새로운 미학적 신조를 포함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일반 대중에게 이런 신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간행물의 목적은 이런 새로운 미학의 표출을 위한 장을 마련하고 그것이 추구하는 미의 종류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순수 조형적 작품을 만들고 이를 대중에게 홍보했다.

그들이 선언한 미적 신조와 미술 양식은 새로운 조형주의, 혹은 신조형주의로 알려졌다.
이는 극단적인 미적 엄격성을 특징으로 하며 재현을 전적으로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의 표현적 요소들을 직선, 직각과 빨강, 노랑, 파랑의 3원색 및 흰색, 회색, 검정색의 무채색으로 엄격하게 제한했다.
이런 엄격한 예술적 금욕성은 신비적인 색채를 띤 철학이나 미학과 관련되어 부과되었다.
이런 철학은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상황에 반발하며 형성되었다.
시대의 불행은 널리 퍼진 개인주의의 결과이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삶의 모든 단계를 집단화하고 비개성화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따라서 완벽한 정확함에 대한 추상적인 이상을 지닌 기계 기술은 장인의 솜씨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었고, 주관적인 표현은 예술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했다.
윤리적인 면에서 몬드리안은 주관적인 개인주의는 모든 단계에서 보편적인 조화에 대한 추상적 이상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보편적인 조화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 예술이 미래의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개념에 따라 데 스테일의 추종자들은 좁은 의미의 예술관을 피력했는데,
즉 미술에서 구상적 요소를 제거하고 시조형주의의 미학적인 엄격함을 추구함으로써 시각 예술을 주관적인 감정에 대한 의존과 자연 대상물의 재현에 내재한 가치 체계로부터 해방시켜 예술에 자유를 부여하고 그 자체의 법칙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 점차 추상적인 진리의 본질적 원리에 대한 표명으로 옮겨 갔던 하나의 역사적인 과정에서 볼 때 예술의 정화로 간주되었다. 
  

데 스테일은 1920년대에 운동의 범위가 어느 정도 확대되면서 초기의 엄격성을 상실했다.
몬드리안이 인간의 정신성을 개혁하기 위한 신조형 회화의 유토피아적 기능을 예언적인 비전으로 나타낸 반면, 반 두스뷔르흐는 점차적으로 건축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실제적인 개혁으로 관심을 돌렸다.
1921년경부터 반 두스뷔르흐는 다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1922년 <메카노 Mecano>라는 이름으로 <데 스테일>의 다다 부록판을 출간했다.
1924년부터 그는 초기의 신조형주의 원리를 수정하기 시작하면서 요소주의는 조형주의의 지나치게 독단적인 적용에 대한 수정이며 그것의 논리적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직선과 직각으로 엄격하게 제한시키기는 하지만 그는 이제 수직, 수평을 거부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면을 허용함으로써 더욱 위대한 역동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허버트 리드는 추상 미술의 가장 심오한 선구자들은 대부분 “형이상학적으로 고뇌하는 민족인 러시아인, 독일인, 네덜라드인”인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예술가들에게 추상은 단순히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각적 표현법을 발견하는 문제였다.

몬드리안, 반 두스뷔르흐, 칸딘스키, 말레비치는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추상의 선구자들로 모두 미술에 대해 신비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칸딘스키는 회화는 자유롭게 흐르고 감성적인 추상이며, 몬드리안과 반 두스뷔르흐의 회화는 엄격하게 기하적 추상으로, 이들의 회화는 추상의 가상적 대극점에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신지학의 영향을 받았다.
신지학은 1875년 뉴욕에서의 신지학 협회의 창립을 계기로 현대적 제의가 된 고대의 철학 체계이다.
신지학자들은 우주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으로 믿었다.
겉으로 보이는 세계의 혼돈의 근저에는 깊은 조화가 내재하고 있다는 그들의 사상은, 자신들의 회화가 유물주의적인 서구 세계에 정신의 부흥을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같은 화가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추상 미술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설명을 공식화하면서 예술가가 외관이라는 바깥 껍질을 넘어설 수 있다면 “보는 자의 영혼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을 색채로 보았는데, 이는 색채가 “정신적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울림”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것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신지학 책에 실린 보다 높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 동반되는 채색 삽화들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로 애니 베선트와 C.W. 리드베터가 저술한 <생각의 형상들 Thought Forms>(1905)이 있는데, 구름과 비슷한 형상의 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책의 독일어판이 1908년에 발간되었고 칸딘스키는 이것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몬드리안은 1909년에 신지학 협회의 일원이 되었고 평생 동안 회원으로 활동했다.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몬드리안도 추상 미술이 외관을 관통하여 그 아래에 있는 더 큰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명확하고 균형 잡힌 자신의 미술이 우주적인 시각적 조화가 삶을 지배하는 사회에로 이끌어 줄 것으로 믿었다.

일반적으로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에는 구상 미술이 지배적이었고 추상 미술은 대중적으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추상 미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왕성하게 성행했는데 미국에서는 추상 표현주의로 유럽에서는 앵포르멜로 나타났다.
1960년경 추상 미술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서양 미술의 지배적인 정통파가 되어 가고 있었다.
많은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들도 그 접근에 있어서 칸딘스키나 몬드리안과 같은 고매한 정신을 가졌지만 이제는 두 사람이 행했던 것과 같은 철학적 정당화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추상 예술가들이 나치 독일과 소련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을 금지했던 전체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에, 때로는 추상 미술에 서구의 사상적 자유의 화신이라는 도덕적인 차원이 부여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많은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런 억압의 공포를 피해 뉴욕으로 탈출한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미국에서 추상 미술을 지원한 것은 거의 애국심의 한 형태로 생각되었다.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추상 표현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대안으로 ‘미국적 유형의 회화’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 운동에 관한 권위 있는 저서들 중 하나인 어빙 샌들러의 <추상 표현주의>(1970)에는 ‘미국 회화의 승리 The Triumph of American Painting’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추상 표현주의는 미술에 있어서 위대한 분기점을 의미하며, 이후의 많은 발전은 추상 표현주의로부터의 진화이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반동이었다.
여기에는 특별히 팝 아트의 형식으로 대표되는 구상의 부활도 포함되지만 1960년대를 풍미했던 후기 회화적 추상, 옵 아트, 미니멀 아트와 같은 새로운 양식의 추상도 포함된다.

추상 미술의 몇몇 대표자들과 지지자들은 추상이 과거의 가장 위대한 미술과 같은 높은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칸딘스키는 “삼각형의 날카로운 각이 원에 닿을 때의 충격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신의 손가락이 아담의 손가락에 닿는 장면 못지 않는 강렬한 효과를 낸다”라고 적었다.
키스 본Keith Vaughan(1912~77)은 칸딘스키의 그런 언급에 대해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라고 간결하게 응답했다.
서식스의 셀시힐 태생의 본은 거의 독학으로 회화를 배웠으므로 1940년대 중반까지 영국 회화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1946년부터 캠버웰 미술 공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본의 1950년대 그림은 드 스탈의 방식으로 점차 평면적으로 변화하면서 추상화되어 갔다.
1954년 노샘프턴셔의 코비뉴타운을 위해 시라믹으로 된 추상 벽화를 디자인했다.
많은 평론가들이 칸딘스키의 견해보다는 본의 견해에 공감했다.
그런 평론가들 중에는 추상 미술을 “다소 지루한” 것으로 본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Lord Clark of Saltwood, 1903~83)와 E.H. 곰브리치가 있다.
런던 태생의 클라크는 미술사학자, 미술 행정가, 미술품 컬렉터이며 스스로 말한 “나의 부모님은 게으른 부자”로 알려진 상류 계층에 속했다.
그는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했는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는 역사를 공부했다.
1934~45년 런던 내셔날 갤러리의 관장을 역임했고, 1934~44년 영국 왕실의 회화 감독관의 직책을 겸했다.
클라크는 자극적인 작가였으며 세련된 TV 출연자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책으로도 출판되고 특히 60개국 이상에서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문명>(1969)을 통해 미술사를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풍경에서 미술로 Landscape into Art>(1949), <누드 The Nude>(1956)로 잘 알려져 있듯이 크라크의 주요 저서는 르네상스 미술과 보편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지만, 그는 <헨리 무어의 드로잉 Henry Moore Drawings>(1974)을 비롯하여 20세기 미술에 관한 책도 집필했고, 1943년에 시작된 ‘펭귄 현대 미술가’ 시리즈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는 추상 미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이를 “다소 단조롭고 허풍스럽기는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진정한 표현”으로서 평가했다.

곰브리치는 1958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존경과 흥미를 강요하는 몬드리안과 니컬슨의 그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내게는 진정 즐거움을 주는 칸딘스키의 그림들, 즉 색채 음악 작품들이 존재한다. ...
그러나 내게 무엇인가 의미를 주는 위대한 음악 작품과 최고의 ‘추상’ 회화에 대한 나의 반응을 진지하게 비교해 보면 추상은 단순한 장식의 영역으로 사라져버린다.”

후에 그는 “나는 추상 미술이 종교적인 시대의 미술만큼 훌륭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인간적 염원의 서로 다른 차원에 위치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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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미술 1


추상 미술abstract art은 형태와 색채가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묘사하려는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고유의 표현적 목적을 갖는 미술을 말한다.
따라서 많은 장식 미술을 추상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미술이라는 서구의 전통적인 미술 개념을 탈피한 20세기의 회화와 조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1930년대와 그 이후 많은 문학 작품과 미술 비평을 발표했으며 일반 대중에게 아방가르드 미술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허버트 리드Sir Herbert Read(1893~1968)는 이에 대해 <아트 나우 Art Now>(개정판 1948)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관례적으로 어떤 미술작품이 외적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예술가의 지각에서 출발했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대상에 기반하지 않는 독자적이고 일관적인 미학적 총체를 만들어 나가는 모든 미술작품을 우리는 추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의 추상 미술은 1910~20년에 탄생하여 10여 년 동안 그 특수한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현재는 20세기 미술의 가장 특징적인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추상 미술은 수많은 운동과 사조로 발전했지만 두세 개의 기본적인 경향들로 추려낼 수 있다.
미국 미술사학자이면서 미술 행정가 앨프리드 H. 바Alfred H. Barr(1902~81)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 Cubism and Abstract Art>(1936)에서 “지나친 단순화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추상 미술을 두 개의 주요 경향으로 양분했다.
우선 말레비치로 대표되는 첫 번째 경향은 “지적이고, 구조적이며, 건축학적이고, 기하적이며, 직선적이고, 고전적인 엄격함을 지닌, 논리와 계산에 기반한” 것이다.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두 번째 경향은 “지적이기보다 직관적이며 감상적이고, 기하적이기보다 유기체적이며 생물 형태적인 형태를 취하고, 직선적이기보다 곡선적이며, 구조적이기보다 장식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고전적이기보다 낭만적이다.”

러시아 화가 카시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Karimir Severinovich Malevich(1878~1935)는 키예프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1905년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 인상주의’라 불린 양식에 있어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복제품과 시추킨, 모로조프 컬렉션을 통해 보나르, 뷔야르, 세잔, 레제를 비롯한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주의 작품을 접했다.
1908년경 나탈리아 세르게예브나 곤차로바Natalia Sergeevna Goncharova(1881~1962), 미하일 페도로비치 라리오노프Mikhail Fedorovich Larionov(1882~1964)와 교류하면서 말레비치의 양식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1898년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배운 곤차로바는 러시아 농촌 미술과 중세 성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 시기 그녀의 회화 작품에서 세련된 원시주의가 나타난 것도 이런 관심의 영향이었다.
1908년 군대에 징집될 때까지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 학교에서 공부한 라리오노프는 많은 작품을 제작한 다작의 화가였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기 인상주의를 러시아풍으로 해석한 작품을 그린 그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후에 아내가 된 곤차로바와 함께 러시아 민속 미술에 바탕을 둔 일종의 세련된 원시주의를 발전시켰는데, 그의 양식이 곤차로바보다 훨씬 공격적이었다.
1914년 곤차로바와 함께 파리의 폴 기욤 화랑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갔으나 1915년 곤차로바와 함께 다시 파리로 와서 정착했다.
이후 그는 사실상 이젤화를 그만두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식에 열중했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작품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면서 시골 농부들을 모티프로 그리기 시작했고 이전의 세련된 기교 대신 의도적으로 원시주의 양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입체주의 기법에 깊이 몰두했는데, 농부들을 그린 많은 작품에서 인물들은 레제를 연상시키는 원통 같은 형태로 형식화되어 나타나고, 형상과 배경은 깊이감이 거의 없이 대조를 이루는 평면적인 색채의 색면들로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표현되었다.
이런 경향을 추구하면서 그림에서 모티프의 중요성은 감소된 반면, 평면과 양감의 구성은 더욱 중요해지는 동시에 체계적으로 되었으며, 어느 정도 미래주의적 요소를 지닌 독자적인 분석적 입체주의에 도달한 말레비치는 이 양식을 입체-미래주의라고 명명했다.
입체-미래주의의 뒤를 이어 1913년과 1914년에는 또 다른 급격한 양식의 변화를 이루었다.
즉 피카소와 브라크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따라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콜라주를 통해 그림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후 말레비치는 비구상 회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1915년 12월 절대주의 회화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었다.
절대주의가 분석적 입체주의나 종합적 입체주의로부터 직접 발전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입체주의는 세잔의 권고에 따라 자연의 현상을 기하적이거나 그와 유사한 형태로 분해한 것인데 반해, 절대주의는 구성주의의 한 형태로서, 보이는 현실과 전혀 연관이 없는 기하적 추상 형태로 그림을 구성해나갔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저서 <비대상 세계 The Non-bjective World>에 수록된 논문 ‘절대주의 Suprematism’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절대주의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진정한 미술에 도달하기 위해, 또 이런 우월한 관점에서 순수한 예술적 감각을 통해 삶을 조망하기 위해, 주변 환경의 사실적인 재현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사회적, 정치적, 혹은 그 밖의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미적 정서’라 불리는 감정의 순수한 표현이라고 묘사했다.
절대주의 회화를 구성한 기본 요소들은 직사각형, 원, 삼각형, 십자가형이다.
말레비치는 ‘가장 순수한’ 형태는 정사각형이라고 믿었다.
‘순수한 감성’을 표현한 회화는 1917~18년의 그 유명한 <흰색 위의 흰색> 연작으로 절정에 도달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절대주의 구성: 흰색 위의 흰색>이다.
앨프레드 바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에서, 20세기 미술사에서 말레비치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추상 미술의 역사에서 말레비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선구자, 이론가이며 예술가로서, 러시아의 많은 추종자들뿐 아니라 리시츠키와 모홀리-나기를 통해, 중부 유럽의 추상 미술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휩쓸고,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네덜란드 데 스테일의 영향력과 결합하여 독일과 나머지 유럽 대부분의 건축, 가구, 인쇄, 상업 미술에 변혁을 가져온 추상 미술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다.”

모스크바 태생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1893년 모교의 법대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1895년 러시아에서 처음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1897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안톤 아츠베와, 후에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뮌헨 분리파의 창립회원이 되는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 뮌헨의 중요한 아방가르드 미술은 아르 누보, 즉 독일어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이었고, 이 양식에 정통한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Phalanx라는 아방가르드 전시 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칸딘스키는 1909년에 뮌헨 신예술가 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한편 그는 하계 예술가 모임의 중심 인물이었는데, 이 모임은 뮌헨 교외 무르나우에 있는, 칸딘스키의 정부인 가브리엘레 뮌터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여기에는 러시아 화가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을 비롯하여 독일의 젊은 화가인 프라츠 마르크와 아우구스트 마케가 참여했다.
이들은 1911년 말 뮌헨 신예술가 협회에서 탈퇴한 분리 그룹의 핵심 인물들로, 블라우에 라이터Der Blaue Reiter(청기사) 그룹을 결성했다.
칸딘스키는 1912년에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Uber das Geistige in der Kunst insbesondere in der Maleret>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추상 미술의 원리를 독창적으로 체계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갔고 1921년 독일로 돌아와 바우하우스의 교수가 되어 1933년 폐교될 때까지 재직했다.
그는 1924년 클레, 야블렌스키, 파이닝거와 함께 블라우엔 피어Die Blauen Vier를 결성했으며 1927년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다.
블라우엔 피어는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4인방이라는 의미로 블라우에 라이터를 계승하여 결성한 모임이다.
칸딘스키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인 <점 선 면: 회화의 기초적 요소들의 분석 Punkt und Linie zu Flache: Beitrag zur Analyse der malerischen Elemente>이 1926년 바우하우스 총서로 출간되었다.
1933년 바우하우스가 국가 사회주의 정부에 의해 문을 닫게 되자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 파리로 가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의 작품들은 1937년 뮌헨에서 나치의 기획으로 개최된 퇴폐 미술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1939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칸딘스키는 비구상적인 추상을 향해 나아갔는데, 이는 미술의 본질을 ‘비대상적인’ 것으로 보는 그의 철학적 관점의 전개와 함께 진행되었으며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시기의 추상 회화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초기의 완전히 비재현적인 과슈 작품들은 보통 1910년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몇몇 미술사학자들은 시기를 1913년으로 늦추어 추정하기도 한다.
바우하우스 시기의 추상화는 기하적 추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표현주의 미술에 속했고 뮌헨 시기의 낭만적 요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좀더 계획적으로 구상되었으며 형태의 기하적 성격은 더욱 명확해졌다.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이론적이며 교육적인 저술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칸딘스키는 20세기 전반기의 비재현적 추상화의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자연의 사물이나 광경의 표현적인 특징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지 않고 실제 모습에 상관하지 않은 채 미술 재료 특히 물감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였다.

추상 미술의 문제를 바의 관점보다 더 후대의 관점에서 조금 다르게 보면, 추상 미술에는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적인 외관을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형상으로 감축시키는 방법으로, 브란쿠시의 조각을 예로 들 수 있다.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란쿠시Constantin Brancusi(1876~1957)는 11살 때 가출해 7년 동안 방황한 끝에 크라이오바에서 고급 가구 제작자의 도제로 일하다가 1898년 부쿠레슈티의 미술 학교에 들어갔다.
1902년 뮌헨으로 갔고 그 후 걸어서 파리까지 간 뒤 1904년 그곳에 정착하여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다.
이 무렵 브란쿠시는 로댕의 자연주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그의 작품을 본 로댕은 자신의 조수 겸 제자가 될 것을 제안했지만 브란쿠시는 이를 거절했다.
이 무렵 그는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이는 사물의 외관을 충실하게 혹은 표현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런 노선을 따라 그는 추상 분야에서 금세기 최고의 거장이 되었다.
그는 묘사하고자 하는 형태를 단순화시켜 개개의 사물을 서로 구별짓게 하는 고유한 세부 요소를 제거하는 한편 각 부류가 가진 특징적인 형태를 살려서 강조했다.
단순함과 총체적 진리야말로 그의 이상이었다.
1920년 브란쿠시는 파리 교외에 살던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저택 정원에 세울 목조 조각 <끝없는 기둥>을 만들었다.
높이 7미터의 이 기둥은 높이 올려다볼수록 점점 크기가 작게 보이는 9개의 마름모꼴 형태로 구성되었다.
브란쿠시는 이후에도 야러 번 기둥 모티프를 반복해 다루었으며 특히 1937년 티르구지우의 공원을 장식할 조각 작품들을 만들기 위해 조국 루마니아를 방문했을 대도 기둥 모티프를 사용하여 높이 29.33미터의 강철 조각 <끝없는 기둥>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받침대 역할을 하는 강철 사각 기둥 위에 15개의 단위 형태들을 세운 것으로, 맨 위와 맨 아래 부분은 이 단위 형태를 반으로 자른 형태로 되어 있다.

생전의 브란쿠시의 명성은 대단했으며, 그가 미친 영향 또한 상당했다. 엡스타인과 아르치펜코에게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었고 고디에-브제스카는 공인된 브란쿠시의 숭배자였다.
칼 안드레이는 브란쿠시의 <끝없는 기둥>에서 영감을 얻어 그것을 변환시켜 공장 생산된 내화 벽돌들을 수평으로 배열해놓았다고 주장했다.
브란쿠시는 자신의 작업실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는데 그 중에는 여러 차례 개작된 그의 대표작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루마니아에서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1976년을 ‘브란쿠시의 해’로 공식 지정했으며, 영국에서는 숀 허드슨이 예술원의 도움을 받아 티르구지우의 공원에 대한 기록 영화인 <루마니아인 브란쿠시>를 제작했다.

자연적인 외관을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형상으로 감축시키는 방법 외에도 비재현적인 기본 형상들로 작품을 구축한 경향이 있었는데 벤 니컬슨Ben Nicholson(1894~1982)의 부조가 여기에 해당된다.
버킹엄셔의 데넘 태생 니컬슨은 1911년 잠시 슬레이드 미술 학교에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정식으로 회화를 배우지는 않았다.
전쟁 중에 보티시즘 화가들과 접촉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몇 점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1920년 위니프리드 데이커(로버츠)와 결혼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1년 파리에 머물며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들을 보았다.
1920년대에는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들은 입체주의의 피상적인 매너리즘에 결코 찬성하지 않으면서 입체주의적 방식의 추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보여주었다.
기하 추상에 관심을 돌린 그는 특히 마분지를 잘라 저부조를 제작했는데 주로 자신의 이름과 연관된 형태를 만들었다.
1934년 세븐 앤드 파이브 협회에서 첫 번째 흰색 부조를 전시했다.

다음으로는 즉각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의 액션 페인팅을 예로 들 수 있다.
1929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지방주의 화가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도를 받으며 회화 공부를 시작한 폴록은 1930년대에 지방주의 양식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멕시코 벽화가들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 중반까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인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 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뿌리고 튀기는 drip and splash’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캔버스를 마루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 다음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루었으며 때로는 모래나 유리조각, 혹은 다른 이물질을 혼합하여 임파스토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동일한 이유에서 이는 제스처 회화로 불렸고 미국에서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신조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폴록은 올오버 회화 양식을 도입한 화가로도 기억되고 있다.
이는 전체 화면 내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을 두지 않으며 따라서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전통적 의미의 구성을 포기한 회화 양식이다.
폴록의 회화는 캔버스의 형태나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을 보면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려져 있기도 하다.
이후 이런 회화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파들이 캔버스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올오버 양식의 영향이었다.
폴록은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하기도 했다.
서체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감을 창출하며, 움직임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를 가로질러 중앙을 향한다.
이런 모든 특징들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개화한 새로운 미국 회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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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해 탄생한 입체주의는 일반적으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6~07)과 브라크의 <누드>(1907~08)에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대략 1912년 가을까지 분석적 입체주의, 그 후를 종합적 입체주의로 구분한다.
입체주의란 명칭은 <질 블라스 Gil Blas>의 평론가로서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명칭과 관련이 있는 루이 보셀의 글에서 유래했다.
보셀은 1909년 5월 25일 칸바일러 화랑에서 1908년 11월 14일에 개최된 브라크의 전시회를 평가하면서 ‘입체 cubes’와 ‘이상한 입방체 bizarreries cubiques’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주택 도색업자 아버지 밑에서 도제로 일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는 1900년 파리로 가서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아카데미 옹베르에서 공부했다.
그는 같은 르아브르 출신인 오통 프리에스와 어울리면서 1906년에는 르시오타와 레스타크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야수주의 양식으로 그렸으며 다른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살롱 도톤과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했다.
그러나 브라크는 기질적으로 야수주의의 주관적이고 충동적인 성향과 맞지 않았으며 1907년 살롱 도톤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에서 큰 충격을 받고 분석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좀더 논리적인 기하적 분석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07년 화상 칸바일러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났고 함께 작업하면서 입체주의 양식을 창조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두 사람의 작품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했다.
1908년 가을 다니엘-앙리 칸바일러는 1907년 이후의 브라크의 작품들로 전시회를 기획했는데, 이 작품들은 두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롱 도톤 주최측으로부터 거부당했던 것이었다.
야수주의란 명칭을 만들어낸 루이 보셀은 이 그림들이 ‘입체들’을 그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혹평했다.
이렇게 해서 입체주의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처음에 입체주의는 사실주의 기법의 하나였다.
입체주의자들은 고갱, 반 고흐와 나비 그룹으로부터 야수주의에 이르는 당대의 표현주의적 경향에 반기를 들고 감각적이거나 장식적인 표현 기법을 엄격하게 배격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새로운 표현 기법의 개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강한 인간적 호소력이나 정서적인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모티프 대신에 중립적인 모티프를 선호했다.
또한 정서적 느낌이 내포된 색채의 사용을 배제하기 위해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단색조의 회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1900년대까지 여전히 유행하던 인상주의의 광학적 사실주의Optical Realism에도 반기를 들었다.
인상주의자들의 목적은 변화하는 빛에 따라 사물의 채색된 표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반면 분석적 입체주의는 세잔의 ‘지각적 사실주의 Perceptual Realism’를 계승한 것이다.
분석적 입체주의자들은 사물의 불변적 구조가 견고한 리얼리티처럼 인지되도록 묘사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표현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런 기법 중 많은 부분은 이미 세잔이 좀더 조심스러운 형태로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 기법은 현재에는 친숙하지만 당시에는 낯설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그림의 표면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시선이 화면 속으로 후퇴하는 거리감을 줄였다.
파편화된 평면들을 나란히, 또는 중첩되게 그림으로서 얕은 회화 공간을 표현했다.
기타, 바이올린, 머리, 인물 등의 대상은 양감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평면으로 분해되고 단편화된 다음 회화 공간을 표현하는 면들의 체계 속으로 도입되었다.
때때로 여러 가지 시점에서 본 대상의 단편들이 하나의 그림 속에 합쳐지기도 하고, 세잔의 경우처럼 공간 표현에 이동하는 원근법이 도입되기도 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고안하여 레제가 완성한 엄격하고 매우 논리적인 이 기법은 입체주의 화파를 이루는 예술가들에 의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서 전통 회화의 현대적 변용으로 전락했다.

1911년과 1912년 브라크는 세레와 소르그에서 피카소와 함께 작업했고, 이때 종합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콜라주를 처음 시도했다.
그는 화면에 실제 사물과 인쇄물의 글자를 도입함으로써 실제와 화면 속의 환영적 이미지를 통합하고 또 서로 대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브라크는 피카소와 나란히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구사하며 함께 활동했다.
종합적 입체주의로 알려진 제2기 입체주의는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파피에 콜레는 브라크와 피카소, 후안 그리스가 함께 발전시킨 새로운 기법으로 신문, 벽지, 유포, 성냥갑, 공연 프로그램 인쇄물 등을 캔버스에 붙이고, 소묘(브라크) 또는 소묘와 유화(피카소와 그리스)를 결합시킨 방법이었다.
캔버스에 부착된 재료는 두 가지 역할을 했다.
이는 회화 표면의 일부인 동시에 그림 이미지의 가상적 공간 속에서 재현의 기능을 했다.
그런데 파피에 콜레와 소묘 혹은 유화를 결합시킨 효과를 회화로 흉내낸 그림이 등장하면서 화면은 더욱 모호해졌다.
한층 밝고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피카소와 그리스는 물감에 모래나 다른 재료를 섞어 함께 사용했다.
초기의 분석적 입체주의가 주로 표현 기법의 측면에서 발달했다면 종합적 입체주의에서는 단편화된 형상의 추상으로부터 안정되고 통일된 회화 구성을 구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그리스, 피카소, 브라크는 각각 독자적인 방식으로 종합적 입체주의를 전개시켰다.
브라크는 1918년부터 감각적이고 촉감적인 성질, 색채와 표면의 표현적 가치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드리드 태생의 후안 그리스Juan Gris(호세 비토리아노 곤잘레스Jose Vittoriano Gonzalez, 1887~1927)가 파리로 온 것은 1906년이었고, 라비낭 가 13번지 피카소의 집이 있는 건물에 살면서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을 만났다.
1910년에 정식으로 회화를 시작한 그는 1912년에는 브라크와 피카소가 먼저 시작한 파피에 콜레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종합적 입체주의를 나름대로 소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갔는데 이는 동일한 양식으로 제작된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스는 4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입체주의 화파에 관한 언급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10년 로베르 들로네, 앙리 르 포코니에, 알베르 글레즈, 페르낭 레제와 장 메챙제가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 함께 작품을 전시했을 때였다.
파리 태생의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는 장식적인 상업 회화 공부를 한 뒤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순수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으로부터 파생된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그는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들로네는 입체주의자들과 교류했으며 1911년과 1912년에 열린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1912~13년 들로네는 <원반>과 <우주의 원형> 연작을 발표했는데, 이는 <동시적 창>에서 시작한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 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켰지만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 추상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고 명명한 ‘색채 입체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으며, 쿠프카의 작품과 더불어 유럽 미술 최초의 진정한 색채 추상화였다.

추상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 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 미술의 발전, 특히 1930년대 막스 빌이 주창한 구체 미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키네틱 아트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1901년 파리로 이주하여 1906년부터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한 앙리 르 포코니에Henri Le Fauconnier(1881~1946)는 세잔의 영향을 받은 양식으로 그렸고, 1910년경부터 입체주의 화가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1912년부터 아카데미 드 라 팔레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그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입체주의를 버리고 다양한 표현주의를 받아들였다.
르 포코니에의 작품에는 입체주의에서 파생된 구조적인 특징들이 남아 있었으나 그는 이것을 표현적인 목적에 맞게 변형시켜 사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후에 전 유럽에 떨치게 될 명성의 기반을 닦았으며 매너리즘적인 입체주의를 네덜란드에 확산시킨 것은 물론 네덜란드 특유의 표현주의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파리 태생의 알베르 글레즈Albert Gleizes(1881~1953)는 공업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00년경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입체주의 화파의 일원이 되어 1910~11년 다른 입체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했다.
1912년 섹시옹 도르의 창립 구성원이었고 메챙제와 함께 <입체주의에 관하여 Du Cubisme>라는 중요한 책을 집필했다.
글레즈는 유럽과 미국에 입체주의를 널리 알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는 입체주의 양식에 실제적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노르망디의 아르장탕 태생의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1881~1955)는 1897~99년 캉에서 건축가의 도제로 일한 뒤 1900~02년 파리의 한 건축 사무소에서 제도가로 일했으며 1903~04년에는 사진을 수정하는 일을 했다.
1903년 파리 에콜 데 보자르의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장식미술 학교와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했다.
1909년경부터 입체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1911년부터 퓌토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퓌토 그룹은 1911~13년 파리 근교의 퓌토에 있는 자크 비용의 작업실에서 비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졌던 예술가 그룹으로 주로 입체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마르셀 뒤샹과 레몽 뒤샹-비용, 글레즈, 메챙제, 그리스, 아르치펜코와 체코 화가 프란티세크 쿠프카 등이 참여했다.

레제의 입체주의 시기의 작품은 튜브 모양과 곡선으로 그려진 추상화로 피카소와 브라크가 선호한 직선 형태와는 대조된다.
1911년경 입체주의 화가 중 최초로 비구상적인 추상 미술을 실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르 코르뷔지에, 오장팡과 교류했다.
레제는 기계 부품을 즐겨 그렸으며, 정밀하고 매끈한 기계를 그린 그의 회화는 정적인 특성을 띤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에는 캔버스 전체에 한 개의 사물만을 묘사하곤 했는데, 때로는 거대한 크기로 확대해 그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그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앙리 포시용, 앙드레 모루아, 다리위스 미요와 함께 예일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캘리포니아의 밀스 칼리지에서도 가르쳤다.
이 시기에는 주로 곡예사와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구성 작품에 몰두했다.
1945년 프랑스로 돌아온 뒤부터 그의 작품에는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더욱 두드러지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색조의 변화가 없는 평면적 색채와 두터운 검은 윤곽선, 그리고 원통형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형태 사이의 대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정적이고 장대한 양식은 계속 유지되었다.

레제는 입체주의 시기에는 자율적 활동으로서의 미술 개념을 신봉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갑자기 눈이 부시기도 하고 새롭기도 한 현실로 떠밀려 들어갔다.”
그때부터 현대 사회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미술을 창조하려는 포부를 품었다.
그는 명확히 묘사된 일상 사물 속의 시적 가치와 현대 기계류와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된 물건들이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프롤레타리아적인 모티프를 선호하여 이를 기계문명과 관련된 모티프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고 정밀하게 묘사했다.
레제의 사상은 1923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기계 미학: 공장에서 제조된 물건, 장인, 예술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그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광범위했으며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낭트 태생의 장 메챙제Jean Metzinger(1883~1957)는 1903년 파리로 가서 신인상주의와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입체주의 화파의 일원이 되어 1910년과 1911년 입체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섹시옹 도르 그룹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1913년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슈투름 전시회에 참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메챙제의 양식은 더욱 사실적으로 변했고 입체주의 이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입체주의 화가들이 1910년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시인이자 입체주의의 대변인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작품이 피카소의 작품을 무미건조하고 생명력 없이 모방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들 입체주의 화가들은 1910년에서 191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하나의 단체를 이루어 1911년 봄 살롱 데 쟁데팡당이 열렸을 때 별도의 전시장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같은 해 이 그룹에 뒤샹 삼형제, 피카비아, 아르치펜코, 마레, 레트, 레제와 마리 로랑생 등이 가세했다.
로랑생의 작품은 입체주의적이지 않았지만 당시 그녀는 입체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1912년에는 그리스, 쉬르바주, 마르쿠시, 에르뱅, 몬드리안, 리베라와 쿠프카 등이 합류했다.
이들 중 몇몇 화가들의 양식은 매우 미미하게 입체주의적이었고 대부분의 화가들이 수년 내에 입체주의 노선을 포기했다.
평론가들 중에서는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로제 알라르, 모리스 레날 등이 이 운동을 지지했다.
아폴리네르는 1913년에 <입체주의 화가들, 미학적 명상 Les Peintres cubistes Meditations esthetiques>을 출간했다.

모스크바 태생의 레오폴 쉬르바주Leopold Survage(1879~1968)는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다가 1908년 파리로 가서 마티스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그러나 곧 입체주의에 매료되었으며 입체주의 화가들과 함께 1911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글레즈, 아르치펜코와 함께 섹시옹 도르Section d'Or에 가담했다.
프랑스어로 ‘황금 분할’을 의미하는 섹시옹 도르 그룹의 예술가들은 1912년 라 보에티에 화랑에서 ‘섹시옹 도르’란 명칭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같은 명칭의 잡지도 발행했다.
쉬르바주는 대규모 장식에 재주가 있어 디아길레프로부터 발레 <마르바>를 위한 무대장치를 의뢰받기도 했다.
그는 입체주의에 집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체주의의 원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입체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린 정물화보다 도시 풍경을 더 좋아했으며, 정통적인 입체주의와는 거리가 먼 신비한 요소를 암시하는 흥미로운 공간감을 나타내곤 했다.

폴란드계 프랑스 화가 마르쿠시Marcoussis(1883~1941)는 크라쿠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뒤 1903년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했다.
그는 몇 년 동안 만화가로 일하다가 1910년에 브라크를 만났고 그 후 피카소, 아폴리네르와 알게 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다른 입체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12년 섹시옹 도르 그룹과 함께 전시회를 가졌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에 다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마르쿠시는 비주류 입체주의 화가 중 가장 지각력이 뛰어난 화가였고, 입체주의 기법으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으며, 명백하고 단순한 구성을 시적 사실주의, 자연에 대한 감성과 결합시켰다.
마르쿠시는 1913년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다시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실험했으나 보다 대표적인 작품은 자연을 연상시키는 회화들이다.

1906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한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1882~1960)은 1909년에 바토-라부아르에 작업실을 마련했고,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표현적인 풍경과 입체주의 구조를 결합했다.
에르뱅의 작품은 서서히 추상화되어 1917년경 완전히 추상에 이르렀다.
에르뱅은 오랫동안 기하 추상에 몰두한 몇 안 되는 프랑스 화가 중 하나로서 많은 젊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과나후아토 태생으로 멕시코 벽화주 화파의 선구자인 디에고 마리아 리베라Diego Maria Rivera(1886~1957)는 10살 때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세기 절충주의의 아카데믹한 화가 산티아고 레불과 멕시코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인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 밑에서 공부했다.
1908~09년 치차로와 함께 스페인에서 공부했고, 1911~21년 파리에서 살면서 모딜리아니의 친구가 되었으며, 입체주의자들의 모임에도 자주 참여했다.
리베라는 입체주의 미학을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1913~17년 입체주의 방식으로 작업하면서 아카데미즘의 유물로부터 벗어났다.
또한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식적 구축의 특징에도 정통했다.

입체주의는 1911년경부터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관련된 많은 운동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출판물에 실린 도판과 세베리니가 쓴 글을 통해 입체주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은 1911년 2월 보초니, 루솔로와 카라의 파리 방문을 계기로 입체주의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미래주의자들은 입체주의 화가들이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입체주의 회화에서 역동성과 움직임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지만 미래주의는 입체주의가 고안한 표현 기법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관련된 모든 사조들 가운데 가장 입체주의에 가깝다.
사실 재능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단일한 하나의 양식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에서 입체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다이아몬드 잭’ 전시회에 출품되었으며 러시아 미술품 콜렉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1854~1937)은 피카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시추킨은 특히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컬텍션으로 유명하다.
말레비치는 1913년 그의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에 대해 입체-미래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미래주의와 입체주의의 영향은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에 의해 시작된 광선주의 운동을 자극했다.
독일에서는 야수주의뿐만 아니라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작품도 표현주의란 명칭으로 뒤셀도르프, 쾰른, 베를린과 뮌헨에서 전시되었다.
입체주의의 영향은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특히 프란츠 마르크의 양식 발전에도 기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입체주의와 독일 표현주의를 새로운 국가적 양식으로 통합하려고 한 아방가르드 화파가 부상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거의 모든 독일 예술가들의 표현주의에 대한 열정은 입체주의가 가진 반표현주의적인 엄격성으로 인해 무위로 끝났다.
당시 영국에서는 입체주의가 거의 발전하지 못했지만 몇몇 입체주의 작품은 로저 프라이가 기획한 제2회 후기 인상주의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입체주의는 보티시즘 양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보티시즘은 격렬하고 격정적인 ‘반란자 rebel’ 그룹이 주창한 사조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에서 최초로 추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를 열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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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18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반세기 동안 서양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회화 운동인 인상주의는 체계적인 운동으로 순수 프랑스 미술의 현상이었지만, 많은 나라에서 인상주의의 목적과 실천을 수용하여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유럽은 물론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근본적으로 인상주의는 화가의 개성과 세계에 대한 반응을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추구하여 거대하고 딱딱한 형식에 사로잡혀 높은 완성도만을 추구하던 회화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인상주의 운동의 중축은 1860년대에 형성되었고, 인상주의란 명칭은 1874년 파리에서 열린 최초의 그룹전을 평한 한 평론가가 조롱조로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1873년 국전이 열린 후 5월 어느 날 크로드 모네는 화가들이 모여서 독자적으로 그룹전을 열고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것임을 언론에 공언했다.
모네가 중재자가 되어 협회 설립정관을 몇 차례 뜯어고친 후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협회가 탄생했다.
이들은 ‘무명협동협회 Societe Anonyme Cooperative’라고 명칭을 정하고 그룹전을 열기로 했다.
제1회 인상주의전으로 미술사에 남게 된 이 전시는 1874년 카퓌신 불바드 35번지, 사진작가 펠렉스 투르나숑 나다르Felix Tournachon Nadar(1820~1910)의 2층 작업실에서 개최되었다.
카탈로그에는 65점의 작품이 실렸으며 출품 작가는 모네 외에 부댕, 펠렉스, 브라크몽, 세잔,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테,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카이유보트 등이었다.
전시는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인데,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 연장하기도 했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으며, 카탈로그는 50센티메에 팔았다.
첫날부터 비교적 사람들의 방문이 잦았는데 그들은 작품 앞에서 킬킬거리며 웃는 것이 예사였다.
어떤 사람은 전시장을 둘러본 후 화가들이 권총에 물감 튜브를 장전해 캔버스를 향해 발포한 후 뻔뻔스럽게도 서명을 했다고 말했다.

모네가 ‘새로운 회화’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했으므로 평론가들이 이 전시회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 반항적인 전시회를 즉각적이고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협회의 리더 모네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4월 25일자 <르 샤리바리>에는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글이 실렸는데 제목이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였다.
르루아가 인상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부터 인상주의란 용어가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을 두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고 경멸조로 적었다.

인상주의전은 이후 일곱 번 열렸으며 마지막 전시회는 1886년에 개최되었는데, 이즈음에 인상주의 그룹은 그 응집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인상주의 운동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구성된 적이 없었다.
중심 인물들로는 단 한 번도 인상주의전에 출품하지 않은 에두아르 마네, 모네, 에드가 드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폴 세잔을 꼽을 수 있다.

평편한 표면이라는 회화의 물리적인 성질을 인식하기 시작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자신의 글 <모더니스트 회화>(1960)에서 ‘모더니스트 회화’란 말을 사용했다.
그린버그는 마네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꼽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미술은 매체를 간과하였고 미술을 통해 미술을 숨겨왔다.
모더니즘은 미술을 통해 미술로 주의를 돌리게 한다.
옛 거장들은 회화 매체를 구성하는 한계인 평면적인 표면, 지지대의 모양, 안료의 특성들을 단지 은연 중에, 혹은 간접적으로만 습득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했다.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이같은 한계는 개방적으로 습득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마네의 회화는 그것이 그려진 표면 아래의 평면을 선언한 솔직함 덕분에 최초의 모더니스트 회화가 되었다.”

모더니즘의 기원을 19세기 중반 파리에 두는 시각이 일반적이며, 삶의 경험 자체가 변화하므로 예술이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67)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들레르는 “절대적이며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는 화가는 현대 생활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보들레르의 친구 마네의 회화는 모더니즘 전통에서 핵심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마네의 회화가 회화 자체를 위한 매체의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 점차적으로 몰두하게 된 아방가르드 회화 경향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을 순수하게 시각적인 경험과 관련된 지속적이며 자기 비평적인 전통으로 인식한 그린버그는 마네를 모더니즘의 출발점으로 상정했으며, 사실상 파리나 뉴욕을 제외한 곳에서 제작된 미술작품을 무시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현대 미술 Modern Art’이란 용어는 1849년 <아트 저널>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오늘날 현대 미술이 19세기에서 제1차 세계대전 사이까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물론 일부 평론가들은 훨씬 전 또는 후를 출발점으로 꼽기도 한다.
앨런 보니스는 <현대 유럽 미술 Modern European Art>(1972)에서 양식적 측면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독립성 측면을 고려하여 1863년을 “현대 회화사의 가장 알맞은 출발점”으로 보는 입장을 지지했다.
그는 우선 “대중이나 예술가들 사이에서 국전이 누리던 특권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낙선전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적었다.
“오늘날 우리가 파리의 국전, 영국의 왕립 아카데미, 또는 그 밖의 곳에서 유사한 단체들이 19세기 중반에 수행한 중대한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양한 작품이 출품되던 대규모 연례전은 예술가가 대중에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정상적인 통로였다.
그 외에는 어떤 대안도 없었으며, 예술가가 국전에서 전시하지 않을 것이며 미술관과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낙선전 이후 상황은 와전히 달라졌다.
1874년 인상주의자들이 그들만의 전시회를 기획한 것처럼 예술가들은 직접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화상의 중요성이 매우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즉 화상들이 예술가의 대리인으로서 활약하고, 사업적인 일들을 처리하며 전시회를 기획하는 등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들이 곧 나타났다.”

보니스는 역시 낙선전에서 논쟁의 초점이 된 마네가 “새로운 방법, 게다가 현저하게 현대적인 방법으로 미술에 대해 사고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현대성modernity은 그림에 대한 마네의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회화는 종종 표면적인 주제보다 그리는 행위 자체에 더욱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마네가 현대 미술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문학, 일화 또는 도덕적인 내용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모네의 작품 <인상, 일출>(1872)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생 인상주의 운동의 목표를 고수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1~1926)는 젊은 시절에 지독한 가난을 겪었지만 1880년대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하여 1890년대에는 파리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지베르니에 저택을 구입할 정도로 부유해졌다.
1890년부터 모네는 같은 모티프를 시간대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상태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그리는 회화 연작에 몰두했다.
<건초더미>(1890~91)와 <루앙 성당>(1891~95)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 후 모네의 관심은 점차적으로 지베르니의 저택에 만든 연못 정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1899년부터 <수련> 연작을 그렸으며 그 뒤 계속 이 모티프에만 몰두했다.
1914~16년에는 거대한 크기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저택 마당에 특별한 작업실을 짓고 그곳에서 작업했다.
말년에는 백내장 수술(1923)을 받는 등 시력이 약화되어 곤란을 겪었으나 1926년 타계할 때까지 그렸다.
타계하기 직전에 완성한 수련으로 가득한 거대한 장식 회화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이 작품은 1927년 파리의 오랑제리 미술관에 설치되었다.

모네는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가한 화가들 중 가장 오래 생존했다.
인상주의의 주요 인물로 그는 19세기 후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마지막으로 그린 수련 작품의 거의 추상적 형태는 이후 등장할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칸딘스키는 1895년에 모네의 <건초더미>에서 추상성을 인식했으며, 리투아니아 태생의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마이어 셔피로Meyer Schapiro(1904~96)는 1937년 “뛰어난 공간적 형태를 지닌 수련 회화는 어떤 식이로든 현대 추상 미술과 연관이 있다”고 했다.
모네의 어른거리는 화면과 추상 표현주의, 특히 잭슨 폴록의 올오버 구성 간의 유사성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어빙 샌들러는 <추상 표현주의>(1970)에서 모네의 작품과 폴록의 작품에 나타난 유사성은 우연이었다면서 적었다.
“폴록이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는 문제가 있다.
확실히 폴록의 ‘뿌리기’ 회화는 모네의 <수련>과 유사하다.
그러나 폴록은 복제된 것이 아닌 실제 모네의 후기 작품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1940년대의 진보적인 화가들은 인상주의를 진지하게, 또는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탁월한 인상주의 예술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1834~1917)는 여덟 차례에 걸쳐 개최된 인상주의 전시회 중 일곱 번 참가했지만 다른 인상주의 예수가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작품은 어떤 일정 부분에서만 인상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타의 인상주의 화가처럼 드가는 계획되지 않은 자발적인 장면의 분위기와 움직임의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고, 사진의 영향을 받아 스냅 사진에서와 같이 인물을 잘라 그리기도 했으며, 일본 채색 판화의 영향을 받아 낯선 시점을 모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풍경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변화하는 빛과 대기의 효과를 표현하려고 하는 대부분의 인상주의자들의 관심사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드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자발성과 우연의 효과는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며, 실제로 그는 매우 신중히 화면을 구성했다.
그는 “자연을 바탕으로 작업할 때도 반드시 구성은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으며, 또한 “나의 작품보다 더 자발적이지 않은 작품은 없을 것이다”고 했다.

최초의 인상주의자들 중 하나로 현재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서 가장 사랑받는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는 특유의 모티프들, 즉 예쁜 어린아이, 꽃, 아름다운 장면, 특히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모티프 자체가 본능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 모티프들을 통해 르누아르 자신이 가졌던 즐거움을 직접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몇몇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활동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880년경부터 성공을 거두었으며 세기의 전환기에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890년대에 관절염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1897년 자전거를 타다 팔이 부러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1912년부터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지만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후기 작품에서는 인상주의 시기의 작품에서보다 더욱 따뜻한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형태도 충만하고 둥글며 부드럽게 처리되었다.
르누아르의 아들로 유명한 영화 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1962년 매우 생생하고 감동적인 자서전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 Renoir, My Father>를 썼고, 이는 1962년 영어로도 출간되었다.

엑상프로방스 태생으로 고갱, 반 고흐와 더불어서 가장 위대한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중 한 사람인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은 20세기 미술의 전개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잔의 아버지는 모자 사업을 시작했다가 은행가로 성공했고, 이로 인한 경제적 안정 덕분에 세잔은 말년까지 주목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면서 여덟 차례의 그룹전 중 첫 번째와 세 번째 전시회에 참가했다.
세잔은 1895년 파리에서 화상 앙부르아주 볼라르가 개인전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비교적 모호한 태도로 작업했다.
이 전시회는 대중에게는 거의 충격을 주지 않았지만 많은 젊은 세대의 화가들을 자극했으며, 당시 그는 거의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886년 아버지가 타계하고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 자 드 부팡 집안의 재산을 상속한 후로는 엑상프로방스에서 살았다.
세잔의 목표는 최상의 프랑스 고전 전통의 형식 구조와 최상의 현대적 자연주의를 결합하는 회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는 “자연을 좇아 푸생을 되살리고자 하는” 야망과 인상주의를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처럼 한결같고 불후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는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한 소재, 곧 아내 오르탕스의 초상, 정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엑상프로방스의 경관, 특히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리는 것에 집중했다.

자연에 대한 세잔의 각고의 분석은 모네가 <건초더미>, <포플라>에서 대상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훈련을 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세잔은 기본적인 구조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배경, 시간 심지어 계절 조차도 명백하게 드러나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인 회화적 균형을 위해 자연적 외관의 형태를 미묘하게 기울이거나 늘려 왜곡했다.
삼차원 표현은 원근법이나 단축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우 특이하고 미묘한 색조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가 타계한 지 1년 후인 1907년 파리에서 개최된 추모전은 입체주의 발생의 주된 요인이 되었고, 이후 그는 계속해서 다채롭고 지속적이며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리샤르 베르디는 <세잔>(1992)에서 직접적인 추종자들에 대해 그가 미친 영향을 요약했다.
“세잔의 미술이 내포한 의미는 너무나도 다방면에 걸쳐 있어서, 차세대의 가장 진보적인 화가들 중 그를 무시하고 작업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은 모두 사실상 초기 현대 미술의 탄생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세잔은 “우리를 수호하는 ...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마티스에게는 “회화의 신”과도 같았다.
클레는 그를 “더할 나위 없이 가장 뛰어난 스승”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세잔 미술로부터 양식적 영향을 거의 받지 않던 칸딘스키조차도 대상을 순수한 회화적인 상태로 전환시킨 그를 추상 미술의 토대를 쌓아올린 예술가로 인정하고 갈채를 보냈다.
세잔은 오늘날에도 매우 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1996년 테이트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를 찾은 관람자의 수는 40만 8천 6백 88명으로 공식 집계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여러 면에서 서로 달랐지만 외양을 세세하게 기록하기보다는 특정한 한 순간에 눈이 본 ‘인상’을 포착하면서 자발적이고 신선하게 주위 환경을 묘사함으로써 아카데미의 관습에 대항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들의 전형적인 주제는 풍경으로 야외로 나가 자연 속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인상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 밖에도 그들은 여러 주제를 다루었는데, 특히 일상적인 도시생활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화상 뒤랑-뤼엘의 선전에 힘입어 인상주의 화가들은 1880년대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으며 1890년대에는 그들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나갔다.
프랑스 밖의 예술가들이 전적으로 인상주의를 받아들인 경우는 드물었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인상주의의 사상과 그들 고유의 전통을 종합하면서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보다 자유로운 붓질을 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 인상주의가 가장 열렬히 수용된 나라는 미국이다.
인상주의는 오스트레일리와 영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프랑스 평론가 카미유 모클레르의 책을 영역한 인상주의에 관한 책이 1903년 영국에서 최초로 발간되었으며 모네와 친분이 있고 피사로와 서신을 교환하던 영국의 풍경화가 윈퍼드 듀허스트Wynford Dewhurst(1864~1941)가 쓴 <인상주의 회화: 그 기원과 발전 Impressionist Painting: Its Genesis and Development>은 최초로 영어로 씌여진 책으로 그 이듬해에 발간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인상주의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는 톰 로버츠이고, 영국에서는 주로 시커트와 스티어를 통해 인상주의가 유입되었다고 간주되고 있지만, 두 사람의 작품 차이점을 비교하면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부정확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D.S. 매콜은 “평론가들과 대중을 놀라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모든 새로운 회화”에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적용되었다고 논평했다.

인상주의는 모방이나 수용의 반응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역반응도 불러 일으켰다.
사실 인상주의의 영향은 너무 대단한 것이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미술사는 인상주의의 여파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광학적 원칙에 과학적인 기초를 부여하려고 노력했으며, 후기 인상주의는 순수하게 재현적인 기능으로부터 색채와 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여러 움직임을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인상주의자들이 덧없고 우연한 것에 너무 집중함으로써 희생되었다고 생각한 감성적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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