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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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을 읽으면서 The Great Couples시리즈를 나불댐

 

 

나에게 국내에 번역된 미술서 중에 하나만 추천하라면 숨도 안쉬고 The Great Couples시리즈를 권한다. 시리즈 중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에 대해서는 불만이 하나도 없다. 나는 김광우씨를 통해 마네, 모네, 뭉크, 쉴레, 클림트, 다비드 다섯분을 새롭게 알았다. The Great Couples의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도판의 다양성이다. 다른 책의 도판들이 서로를 닮은 아이돌 가수의 랩같다면 이 책들은 손때와 연필 때문에 너덜너덜한 가사집을 가진 mc의 랩처럼 환상적인 라임과 플로우의 도판이 끝없이 나온다. '공들였구나'하는 생각이든다.

yes24에 있는 ntitled2001님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리뷰를 따와 본다. 내가 적어도 이미 나의 생각과 같은 글을 봐버렸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듯 해서다.
도판에서 진정한 내공이 드러난다. . 왠만큼 우리의 미술서적들의 인쇄상태와 화질을 아는지라 얼마나 원화에 가깝게 색에 신경을 썼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김광우선생님의 뒤샹에 관한 책을 읽은지라 새로운 책이 나와 무척 반가웠다. 사실 나 역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미술서적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책을 보다 보면 그림없는 이론서는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림이 있는 책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은 그런 부분에서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는 아름다운 책이다. 한 권의소설을 읽듯 자연스럽게 읽혀지면서도 작가의 세부적인 것까지 놓치지 않는 부분은 글쓴이가 오랜 시간 공들인듯 했다. 모네의 작가정신은 날 돌아보게 했는데 그림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 어린 화가 지망생, 그들의 부모,그리고 앞만 보고 가는 작가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살 때 값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책을 읽고 마네와 모네의 모든 것을 안 순간 난 부자가 되었다. 오히려 출판사가 손해본 것 아닌지...
이렇게 좋은 기억만 남아있다면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이 출판 되자마자 집어들었어야 하는데 2003년에 나온 책을 이제야 읽는다. 앞의 것들이 성공적이라 돈 좀 벌었는지 반양장이였던 껍질이 하드커버로 바뀌고 표지를 씌웠는데 금색의 포스가 너무 강력해 내손과 같은 극을 가진 자석같아 손의 접근을 원천봉쇄한다. 출판사에서도 해놓고 보니 '아뿔사' 였던지 다음 책인『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하얀색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사하도서관에선 껍질이 벗겨진 체 딸기색을 띄고 있어 겨우 마음을 허락했다. 게다가 다비드와 나폴레옹을 묶으니 왠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아니라 미켈란젤로씨의 '대두' 다비드상이 떠올라서 또 한 번 움찔. 나폴레옹이 왜 미술서에 나오는 거야 하면서 또 움찔. 어렵게 어렵게 집어 들었다.

역시나 도판은 양과 질은 모두 최고다. 자크 루이 다비드씨는 그림 몇 개로 단편적으로만 알았는데 명성과 돈에 집착하는 야심가였다니 그림들이 새로 보인다. 하지만 책의 절반이 넘어가 다비드씨와 나폴레옹씨가 헤어지면 나폴레옹씨의 전기문이 되어버린다. 나폴레옹씨는 예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지만 그 영향력을 인정했기에 다비드씨를 이용했고 다비드씨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서 인정받기위해 권력을 가진 나폴레옹씨를 이용한 서로 땔수 없는 관계인 것은 알겠다. 하지만 나는 나폴레옹씨의 삶이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든게 아닌데. 나폴레옹씨의 비중을 약간 줄이는 편이 좋을 듯하다. The Great Couples라는 컨셉에 내용이 희생된 느낌이 든다.

다음 책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도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두 분 다 좋아하는데다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익숙한 커플이라(코와붕가~) 둘의 이야기를 같이 하는 책들 있었다. 독창적일 수 있을까. 한가지 더, 책 대여점에 팔릴 것도 아닌데 1,2권으로분책 한 게 조금 찝찝하다.(페이지수가 많긴 하지만 해리포터 외국 초딩은 해리포터도 통째로 보는데...) 게다가 결정적으로 더 이상 새 책이 안나왔다. 부들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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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 2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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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

|2005 문화관광부 학술부분 추천도서|

위대한 커플시리즈 No. 5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은 르네상스의 두 거장을 역사 속에서 비교 분석한 책이다. 전세계 천재 가운데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천부적 재능으로 예술가의 지위를 확보해낸 미켈란젤로.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문화혁명 속에서 예술계의 르네상스를 완성시킨 그들의 발자취와 더불어 정치․경제․종교와의 관련 속에서 예술의 독자성을 일구어낸 행보를 살펴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근대 과학의 지평을 열다

우리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태양열 기구, 운하, 비행기, 냉․온수기, 증기 기관차, 기중기 등 수많은 과학적 발명품들. 19세기의 산물로 여겨지던 이러한 발명품들이 바로 레오나르도의 천재성 속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은 경탄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며, 그와 동시대인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들도 그에게 크나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공식적인 교육 대신 무엇이든 혼자 터득해야만 했던 사생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란 아름다움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 그대로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조망하라"는 주장은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려는 그의 신념의 표현이다. 서른 구 이상의 사체를 해부하면서 남긴 드로잉들은 심장, 폐 등 순환기를 비롯해 간, 장 등의 소화기, 생식기 등을 해부 분석한 것들로 18세기 말까지 의학적 자료로써 인정받을 정도로 정교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바랐던 레오나르도의 ‘르네상스 맨’적인 호기심은 인체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안으로 파고들어 도시의 구획을 통한 복지공간의 창출을 기획했으며, 운하를 이용한 이윤 축적을 예감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경제․사회적인 면에서 이 진보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의 아이디어는 제한적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군사 전문가가 되기를 바랐던 그는 200여 년 후 만들어질 기관총의 전신을 고안했고, 비행의 원리를 터득했다. 또한 거울을 이용한 태양열 기구, 기중기, 물과 공기의 흐름에 관한 연구 등 그가 일구어놓은 많은 과학적 발견들은 아무런 장비도 없이 수많은 과학 분야를 탐험한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미켈란젤로,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다

교황권의 파행이 극치에 달하는 정치적 혼란과 이탈리아 전역에 감돌던 전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작된 그의 예술인생은 르네상스 미술의 이정표가 된다. 초기 르네상스 미술은 섬세하고 유려한 작품을 지향했던 교황과 귀족들에 의해 이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단지 종교와 신분에 종속적인 존재로 그들의 주문을 통해 작품을 제작했을 뿐이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이런 예술계의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유려하고 우미한 그의 초기 작품들은 당시 예술계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후 명성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예술가가 처했던 종속관계를 청산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정신에 내재한 이미지를 물질로 구현’하고자 했다.
“돌 속에 이미 내재한 형상을 자유롭게 했을 뿐이다.” 미켈란젤로는 오랜 사색 끝에 얻어진 자신의 정신에 내재한 추상적 형상을 질료로 탁월하게 구현시킬 줄 알았고 ‘순수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자연을 과학적으로 조망하라”던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예술이󰡒자연보다 더욱 지혜롭다󰡓고 주장했으며 예술을 통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물질은 정신을 드러나게 하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심판>에 표현된 육중하고 뒤틀린 육체들과 구성은 정해진 대상을 교리에 맞춰 그려야만 했던 당시의 사고방식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고, 또한 종교적 제약을 벗어나고자 한 그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신성모독, 이단사상, 동성애, 오만 등 그에 대한 수많은 험담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 있을 때 3권의 전기가 출간되었고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까지 불렸다. 이러한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재능에 힘입어, 그 이후의 화가들은 더 이상 종교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그려내는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왜, 그들을 만나야만 하는가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도 친숙하게만 느껴지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그들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책들을 통해 소개되는 것은 유래를 찾기 힘든 천재성과 예술적 재능 때문이었다. 수학자․과학자․이론가로 명성을 떨친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에서 발견되는 번득이는 천재성과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흘러넘치는 예술적 재능은 세계인들을 경탄하게 만든다. “쇠처럼 녹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레오나르도의 천재성과 참된 삶을 위한 고민했던 미켈란젤로의 종교적 신념은 삶에 대한 성숙한 시각을 제시한다.
현대는 기술에 의존하여 사색과 고민을 잊고 살며, 본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즉흥적으로 제시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립과 반목이 아닌 ‘조화’이다. 레오나르도의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과 미켈란젤로의 물질 속에서 정신을 뽑아내는 사색은 현대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만나야 하는 중대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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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 풍상 70년 - 월전 회고록
장우성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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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은 저서 『화단 풍상 70년』에서



장우성은 저서 『화단 풍상 70년』(미술문화)에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6·25동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 하루는 이른 식전에 그가 장우성의 집을 찾았다.
밀집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그만 손가방을 든 채 면도도 하지 않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방에 들어서서는 대뜸 세수할 물을 달라고 청했다.
오랜만이어서 장우성이 행적을 물으니 어름어름 대답을 피하면서 가방을 열고 화첩을 꺼낸 후 거기에 그림을 한 폭 그려달라고 청했다.
이른 시간이라서 아침상을 차려내고 화첩을 두고 가면 곧 그림을 그려놓을 테니 나중에 가지고 가라고 했더니 시간이 없다며 당장 그려달라고 졸랐다.
즉석에서 그려주니 황급히 일어서서는 휭하니 사라졌다.
그 후 소식이 끊겼고 6·25동란이 발발하여 불안과 초조의 나날을 보내던 중 장우성이 들은 소식은 인민군이 덕수궁미술관에 있는 미술품들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해 나무상자에 짐을 구리는 현장에 이석호가 참여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청계 정종여(1914~84)는 경상남도 거창 태생으로 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34년경 서울로 와서 향토적 수묵화가로 명성이 높은 이상범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935년 제14회 협전에 처음 입선했다.
협전은 1935년 10월 23일부터 30일까지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렸다.
동양화부 입선자는 정종여 외에 김진우, 조동욱, 오일영, 김기창, 장우성, 심인섭, 이석호, 진세빈, 이용우, 장운봉, 조용승, 박승무, 고희동, 최우석, 김중현, 노수현, 백윤문, 이상범, 지성채, 정운면 등이었다.
서양화부 입선자는 도상봉, 박광진, 이제창, 김중현, 공진형, 장석표, 이승만, 장발, 윤희순, 김용준, 이동우 등이었다.
김중현은 동·서양화부 모두 입선했다.


정종여는 1936년부터 선전에 출품하면서 입선과 특선으로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40년을 전후하여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미술학교와 사설 미술연구소에서 일본화를 배웠으며 일본화 경향의 화조화와 인물화를 세밀한 채색화로 그리면서 이석호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선전에 출품했다.
해방 후 그는 좌익 성향의 조선조형예술동맹 간부위원,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었으며, 1948년 정부 수립 전후 여운형이 암살된 후 박헌영이 이끈 좌익계 민족주의 민족전선 산하단체인 조선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전향을 나타냈고, 1949년 4월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한 그는 평양미술대학 조선화 강좌장,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내고 ‘인민예술가’의 명예칭호를 받았다.
현존하는 월북 이전의 작품으로 <지리산 풍경>(금성 북한 36)(1930년대, <금강산 전망> 등이 있다.


<지리산 풍경>은 소품이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훌륭하다.
그는 작품에 청계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20대 초 한때 기산이란 호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청계란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1936년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경에 산촌의 초가와 기와집이 보이고 토담 옆의 감나무는 속도감 있는 단붓질로 사생하듯 묘사했고,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감나무에 달린 감은 석채로 처리하여 수묵 효과와는 달리 마티에르와 색채를 강조하여 생동감을 높였다.
수묵과 청색을 적절히 조화시켜 산세와 원근감을 잘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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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미술 500년 - 모방에서 창조로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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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리품이 된 미술품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나폴레옹의 동생 루시앵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대사로 파견되어 1801년 아란후에즈 조약을 체결한 날 루시앵은 형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에 조약을 체결한 대가로 레티로의 화랑으로부터 훌륭한 그림 20점을 받았다면서, 이것들이 자신에게는 십만 개의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하다고 적었다.
미술품 수집을 즐긴 루시앵은 자신의 고문이자 화가인 기욤 르티에르에게 스페인 화가의 작품 70점을 구입하도록 지시했다.
루시앵이 받은 20점과 구입한 70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중에는 무리요의 작품이 3점, 모로의 작품이 1점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부채를 든 여인>302이 포함되어 있었다.
루시앵은 1801년 11월 파리로 돌아왔고 작품들은 루시앵이 새로 장만한 거처인 브리엔 호텔에 장식되었다.
루시앵은 신분이 낮은 여인과 결혼한 것 때문에 형의 노여움을 사 로마에 정착하여 평민으로 살았다.
소장품은 모두 1803년 말에 로마로 우송되어 루시앵 저택에 장식되었다가 1816년 런던에서 팔렸다.

1808년 5월 9일 나폴레옹은 나폴리의 왕으로 있던 형 조제프를 스페인의 새 국왕으로 세우고 나폴리 왕국은 자신의 처남인 뮈라에게 통치권을 주었다.
조제프의 즉위가 알려지면서 스페인은 전면적인 봉기에 휩싸였으며, 주동자들의 요청으로 영국 총리 캐닝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5월 말 1개 사단을 거느린 뒤퐁 장군에게 장 안도쉬 쥐노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의 지원을 받아 안달루시아를 거쳐 카디스를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1808년 6월 10일 조제프가 새 국왕으로 마드리드에 입성했지만 이튿날 뒤퐁 장군은 바일렌에서 스페인군을 맞아 치욕적인 항복을 했으며 나폴레옹 대군이 무적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조제프는 나폴리를 버리고 스페인으로 온 것을 후회했다.
몇 주 만에 스페인은 불에 타고 피로 물들었다.
마드리드에서의 소요는 1808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나폴레옹은 12월 4일 몸소 마드리드로 가서 형 조제프를 왕위에 앉혔다.
3주 후 나폴레옹 뮤지엄의 디렉터, 도미니크-비방 드농이 마드리드로 와서 파리의 뮤지엄으로 가지고 갈 회화작품 20점을 선정했다.
그는 과거의 궁정 소장품, 고야의 <옷을 걸친 마하>266와 <벌거벗은 마하>196가 포함된 고도이의 소장품, 귀족의 소장품들 가운데서 선정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농이 회화작품을 가져갈 것이라면서 형이 포획한 작품들이 많은 줄 알며 그것들 중 파리의 뮤지엄에는 없는 걸작들로 50점을 자신에게 선물로 보내주면 이에 상당하는 것들을 나중에 보상하겠다고 적었다.
조제프가 나폴레옹에게 보내는 회화작품들은 1812년에야 파리로 운반되었다.
조제프는 50점 외에 250점을 더 보냈는데, 이것들을 본 드농은 매우 실망하면서 나폴레옹 뮤지엄에 전시할 만한 것은 여섯 점에 불과하다며 조제프가 형편없는 것들만 보냈다고 투덜거렸다.
나폴레옹 뮤지엄에 전시할 만한 것들에는 수르바란의 <소틸로에서의 크리스천과 무어인의 전투>303와 무리요의 <로마 제국 지방 집정관의 꿈>304이 포함되었다.

나폴레옹에게 300점의 회화작품을 보낸 지 몇 주 후 조제프는 아주 많은 짐을 꾸리고 1813년 6월 마드리드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그의 짐 속에는 165점의 회화작품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무리요와 리베라의 훌륭한 작품들과 벨라스케스의 <세비야의 물장수>164도 있었다.
이 작품들은 조제프가 그의 아내와 살던 마드리드의 레알 궁전을 장식했던 것들로 나폴레옹에게도 주지 않고 그가 아꼈던 것들이다.
조제프의 행렬은 장군 위고(빅토르 위고의 아버지)의 인솔로 파리로 향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영국의 명장 아서 웰레슬리 웰링턴 장군의 군대를 만나 회화작품들을 포획 당했다.
페르디난도 7세는 자신의 왕위를 복위시켜준 웰링턴에게 그것들을 선물로 주었고, 이 작품들은 현재까지 웰링턴의 저택에 소장되어 있다.

회화작품에 대한 조제프의 집착은 아주 컸으며 걸작을 수집하려고 노력하는 나폴레옹과 드농의 눈을 속이고 은밀히 보관하다가 파리로 운반한 것들이 몇 점 있다.
그가 특별히 아끼던 것들로 이것들에는 당시에는 딴 화가의 작품으로 인식되었으나 훗날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확인된 3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들 중 일부는 스페인에 남겨두었지만 일부는 그가 미국의 필라델피아로 망명할 때 가지고 갔으며 이 작품들을 전시에 종종 빌려주었다.
1841년 그는 미국을 떠나 피렌체로 가서 1844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 갖고 있던 작품들 중에는 무리요와 벨라스케스의 걸작들이 있었고,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묘사한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305와, 이것을 작은 크기로 모사한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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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비밀 -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
미셸 파스투로 지음, 전창림 옮김 / 미술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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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유 換喩, Metonymy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실제의 색과 색 이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어떤 문장에서 빨갛다고 한 사물이 진짜로 빨갛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사물이 빨갛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물의 색과 그 색 이름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수사법에서 환유라고 불리는 비유의 형식에서 유래하는 것이 많다.
특히 환유를 통해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려고 할 때 그 차이가 생겨난다.
예를 들면 모든 방이 파란 벽지로 도배되어 있는 집에서 하나의 방을 ‘노란 방’이라고 부르는 일이 있다.
그것은 그 방의 벽에 걸린 파란색 큰 양탄자 위에 달려 있는 노란색 작은 장식 끈으로서 다른 파란 방과 구별해서 부른 것뿐이다.
여기서 ‘노란 방’이라는 표현이 진짜로 전면적으로 노란색 방을 가리킨다고 믿어버리면 안 된다.
나도 이와 흡사한 일이 있었다.
옛날 내 부친이 ‘녹색 가방’이라고 불렀던 가방이 있었다.
그것은 부친이 갖고 있던 천으로 만든 두 개의 파란 가방 가운데 하나로, 폭이 좁은 보강용 녹색 밴드가 걸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의 가방에는 푸른 바다색의 밴드가 달려 있었다.)

일상생활, 편지 왕래, 사무, 법률, 문학, 광고 등이 엄청난 양의 문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거기에 사용된 사물의 색은 아주 부분적으로만 실제의 색과 일치한다.
(어떤 때는 전연 일치하지 않기도 한다.)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는 어떤 하나의 정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릇되게 해석하지 않기 위하여 이 점을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정보(또는 진실을 다른 식으로 말하는 정보)도 종종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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