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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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검색하면 교보문고 집계로 10년간 최다 판매량을 기록한 작가라고 한다. 대충 계산해도 400만 권 이상의 책이 팔려 나갔을 거라고 하고 있는데, 물론 현 기준이 아닌 4년 전 기준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 작가인 셈이다. 하지만 사실 난 하루키의 소설책은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그에 대한 반감에서 읽지 않은 건 아니고, 썩 좋아하지 않는 장르이기 때문에 읽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순수문학에 해당하는 책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즉, 문학상을 수상하고 등단한 시인, 소설가들의 책을 읽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 가며 책을 읽는 습관에서 스토리로 보면 페이지 하나로 끝날 것을 심리묘사, 풍경 묘사 등으로 책 한 권으로 만드는 그런 고전문학을 접한 이후 순수문학에 대해 질렸었다. 이게 좀 오래가서 한동안 문학 소설은 읽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 세계 고전 문학을 보다가 비문학 책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소설류는 장르소설을 주로 보았고, 그 외 문학 소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순수문학으로 보이는 소설가의 책들은 잘 읽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 책을 읽지 못하다 다시 손에 책을 잡게 되니 그다지 이것저것 가리지 않게 되었고, 소확행의 인기로 인한 궁금함에서 찾게 된 하루키의 책 탐독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대표작인 소설에 손이 가지 않고 계속 에세이만 관심을 갖고 있다.

무라카미 수필 모음집으로 출간된 도서를 재구성해서 내놓은 것으로 예전에 총 3권으로 냈던 것을 분리하고 추가하고 하여 총 4권으로 다시 엮었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은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라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책도 읽은 적도 관심도 없었으니 잘 모른 상태에서 읽은 것인데 하루키 수필집의 초기 작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저 수필집의 글의 풍은 시종일관 동일하다. 쿨하다.

지금 나의 나이 즈음에 쓴 글이라 같은 나이 때의 다른 시공간에 있던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웃으며 보게 된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사뭇 진지한 생각까지 다양한 생각을 쏟아내고 있다. 이 책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에세이보다 더욱 시대를 알 수 없게 쓰였다. 전작에서 처럼 시대를 유추할 수 있는 소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타국이다 보니 유명인들을 열거하면 추리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사고방식도 쿨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터인데, 그래서 더욱 재미있었다. 지금 봐도 고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신변잡기의 내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시대의 사고방식 작가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처럼 주인공 뒤에 숨어 표현할 수 없다. 헤르만 헤세의 에세이를 같이 보고 있는데, 단박에 이 책은 헤르만 헤세가 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문체였다. 이 책은 고전문학이다. 그런 생각을 감출 수 없는 반면에 사진 몇 장 갖다 놓고 블로그에 올리면 신변잡기 이야기구나 할 정도로 생각이 쿨하다.

하루키의 소설을 접하지 않은 입장에서 하루키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 이 책은 읽는 게 좋습니다. 라던지 비판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에세이 작가로서 충분히 재미있고 즐거운 책을 쓰는 사람이다. 다음 책을 기다리는 것이 즐겁다.라는 생각을 해 본다.

결국 독서란 것이 유일한 신화적 미디어였던 시대가 급속하게 종식되고 만 것이다. 지금의 독서는 다양한 각종미디어 중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경향이 좋은지 나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회현상이 그렇듯 이 역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것이 다. 개인적으로는 교양주의적, 권위주의적 풍조가 사그라진다는건 사그라지고 있는 게 맞겠지- 기쁘게 생각하나, 한편 한 사 람의 글쟁이로서 책이 안 읽히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출판에 관계된 여러 사람을말합니다)가 의식과 체질을 바꾸어, 새로운 지평에서 새로운 종 류의 좋은 독자들을 사로잡는 일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언제까지고 한탄만 한다고 묘책이 생기진 않으니까.

- 본문 P155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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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을 드세요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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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오가와 이토는 먹는 것의 묘사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먹는 것 외 사물의 묘사와 거리의 묘사를 아기자기하게 잘한다. 언제나 그녀의 책에는 먹는 것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려낸다. 일본 요리이기 때문에 대부분 먹어본 적이 없지만, 당장이라도 있으면 입에 넣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썼다.

제목에서부터 먹는다는 표현이 있어 이 책은 작가가 한껏 능력을 발휘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먹는 것만 표현한 것일까? 어떤 책일까 궁금했는데 목차를 보고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인 것을 알았다. 총 7편의 단편 소설을 모아 놓은 것으로 각각의 소설이 각자의 사연으로 식사를 하면서 이루어진다.

치매 걸린 노인 이야기라던지, 죽음 이야기 등을 잔잔하게 풀어가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자극적이거나 극적이지 않다. 식사를 하면서 따뜻한 이야기 환경을 만들거나 혹은 요리를 준비하면서 훈훈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나간다. 슬프면서도 오열하지 않게 웃기지만 입 밖으로 웃음이 나오지 않도록 절제된 느낌을 준다. 그건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지 않고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그리고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다 보면 슬픔을 잊게 만드는 것 같다.

일곱 가지의 단편이 갖가지 상황을 펼쳐가면서 다양한 먹거리를 보여준다. 이야기에 빠져가면서도 음식 묘사에 빠지게 된다. 일본 음식이 이토록 다양했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가 일본 음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나 일본 음식의 경우는 상세하게 묘사가 가득하지만 타국의 음식은 표현보다 이야기에 많이 치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난이 아니라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람은 하루 세끼 일 년이면 약 2,000 끼니 정도를 먹게 된다. 100세 시대로 먹는다고 치면 20만 끼를 먹는 셈이다. 모든 식사에 추억이 깃들진 않겠지만 그만큼 추억을 담을 수 있는 확률도 높다는 이야기다. 먹는다는 것은 식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고 쾌락을 동반하는 생리적인 활동임으로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갖게 되는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 점을 잘 파고든 책이라 생각한다. 200 페이지가 안 되는 얇은 책에 삽화도 많이 있기 때문에 금방 읽히는 책이다. 하지만 금방 읽히고 되세김질 하듯 오래 곱씹게 되는 책인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 된장국이었나 몰라."
나도 젓가락과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갖고 있던 소박한 의문이었다. 다만 왠지 모르게 아빠와 엄마의 사적인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 같아 물어보지 못해다. 엄마는 된장국에 몹시 연연했다. 다른 건 몰라도 된장국만은 매일 아침 꼭 끓여드려야 한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한 뒤에도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
"아마 그것 때문일 거야."
아빠는 부드러우면서도 달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에대한 추억을 얘기할 때, 아빠는 곧잘 그런 표정을 짓는다.
"아빠가 매일 된장국을 끓여달라고 엄마한테 프러포즈를 해서가 아닐까?"
아빠는 얼굴을 붉혔다. 엄마에 대한 얘기는 뭐든 해주던 아빠지만, 그 얘기만큼은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뭐라고 대답했어?"
아빠를 심문하듯이 물었다.
"그야 ‘예‘ 그랬지. 매일 된장국을 끓여줄 테니 당신의 아내가 되게 해주세요‘ 하고."
"와우, 엄마가 정말 그런 말을 했어?"

- 본문 P82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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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나라의 공장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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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에세이 중 온전히 본인의 이야기를 담아 쓴 글은 시대가 어느 시대인지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그의 생각이 현재의 트렌드와 많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감탄하기도 했었는데, 이 책은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대번에 30~40년 전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았다. 공장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았다. 공장은 대량생산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으로 공장에서 나오는 생산품을 보면 시대를 모를 수가 없다. 목차만 봐도 글이 생성된 년대를 추측할 수 있었다.

80년대 중반의 이야기로 딱 이후 일본은 장기 경기침체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 직전이니 한참 전성기 일본의 모습을 그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항상 상승하는 경기 경제 곡선과 끊임없이 생산되는 공장의 제품들이 일본 국민의 마음속에서 뿌듯함으로 남았을 것이고, 이러한 기대에 발맞추기 위해서 신문과 유명 소설가가 합세하여 공장 견학기록문을 만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루키라는 사람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이야기를 쓰는데 객관적으로 쓴다. 민족주의를 활활 타오르게 하고 싶어 없는 사실을 쓰거나, 자긍심에 불 붙이려 기를 쓰는 그런 내용은 없다. 그냥 있는 사실을 덤덤하게 작성하는 편이다. 그래서 거부감 없이 글을 읽는데, 지나가는 말로 본인들의 경제 부흥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촉발되었다고 기술하는 것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썼구나 저때는 저렇게 글을 써도 크게 비난을 받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라는 생각을 했다.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하다. 역사문제, 영토문제, 정찰 문제 등 계속 이슈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이유로 현재 시점에서 저런 식으로 글을 썼다면 일본 내에서도 비난이 속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때는 저렇게 글을 써도 크게 뭐라고 하지 않은 사회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후로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지독한 경제 위기가 닥쳤으니 욕할 정신도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공장 탐방기는 르포가 되어야 하겠지만, 하루키는 역시 독특하게 글을 썼다. 공장의 세세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와! 이런 공장도 있네 재밌다˝ 이런 유의 기록이다. 공장을 다녀오고 쓴 공장 탐방 감상문 정도의 느낌이라고 할까?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썼다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가볍게 썼다. 가볍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공장이라고 꼭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니 말이다. 어느 정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썼냐면, 예식장도 공장으로 생각하고 예식장도 다녀왔다는 것에서 하루키의 탐방기 마음의 무게를 알 수 있다.

읽는 이의 지식에 따라 책의 느낌은 다를 텐데, 글이 작성되고 30년 이후의 사람인 내가 봤을 때는 독특한 재미가 있었다. 과연 그때 탐방했던 회사들이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 몇이나 될까? 이런 생각을 했다. 대표적으로 인체 모형이라던가, CD 공장은 지금쯤 다 문 닫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CD는 거의 생산을 하지 않고, 인체 모형은 굳이 저런 게 필요한가? 필요하면 3D 영상으로 대체하면 될 테니 말이다. 업종을 바꾸거나 다른 물품으로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으면 사라졌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당시는 하이테크 업종,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야 하는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회사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미래의 모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웃음이 나오는 포인트였다.

물론 이 일곱 가지 공장을 취재한다고 해서 경제대국으로 불리는 일본의 평균적인 공장 현황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내 개인적 흥미에 따라 고른 것이라서 상당히 편중된 경향이 있고, 규모로 봐도 중소기업·경공업 공장이 많으며 중공업 · 대규모 공장은 선택에서 밀려났다. 오히려 현재 일본 공장의 평균적인 모습을 살펴보자‘는 의도를 지닌 사람 같으면 영 선택하지 않을 종류의 공장만(마쓰시타 공장은 예외지만) 골랐다 싶을 정도다. 이런 점은 비전문가(논픽션 작가)의 변신쯤으로 해석해주었으면한다. 결과적으로는 이 일곱 곳을 선택한 것이 타당하지 않았나 하고 내심 - 이렇게 써버렸으니까 더이상 내심이 아니지만 - 자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책의 제목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취재와 집필을 계속하는 사이 내 안에서 ‘일본‘과 ‘일본인‘ 이란 것=개념의 존재가 점점 커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해 뜨는 나라의 공장‘으로 제목을 변경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쓰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쓰기 시작했다가는 ‘서문‘ 이란 한정된 영역에는 도저히 다 수용하지 못할 것 같으니 이 자리에서는 일단 패스하겠습니다.
- 본문 P12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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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계단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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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책은 두 권째 읽는다. 책을 쓴 저자가 누군지는 살펴보지만 어떤 이력을 갖고 있는지는 잘 보지 않는다. 나중에 책이 괜찮아 다른 책도 읽을까 하여 찾을 때 유심히 보는 편이다. 이 책을 읽기 전 저자의 다른 책을 봤을 땐 또 찾아 읽을 일이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책을 못쓴다기보다는 책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철학에 대한 부분은 크게 와 닿지 않는다. 대부분이 그렇듯 철학은 어려워서 싫어요. 이런류의 반감이 아니라, 왜 저렇게 어렵게 글을 쓸까에 대한 반감이라고 볼 수 있다.

유물론적, 형이상학적, 로고스 뭐 등등등 각종 난해한 용어로 점철된 글로 표현한다. 오죽하면 철학 용어 사전이라는 책도 나올까? 또한 철학은 모든 자연을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과학도 철학의 종류로 치부하는 결론을 만들어낸다. 또한 모든 학문은 오로지 진리를 규명하는 것이다고 정의하게 되니 모든 학문이 철학이 되는 진기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래서 철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채사장의 전작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모든 사물을 규정하려 한다. 하지만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고지식하게 적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을 했다. 이 정도면 읽을 만 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굉장히 끌리지는 않고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글을 읽게 되었다.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강했다. 어린 시절부터 생겼던 많은 물음에 대해 어떻게 깨닫게 되는지 10 발자국으로 표현해서 정리했다. 11 번째 발자국은 현시점이니 논외로 생각했다.

읽으면서 전공이 철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철학에 대해서 깊게 고민했던 흔적을 보게 되니 왜 그런 책을 썼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애초부터 사고가 철학에 규정되어 있었다. 이 책은 어떻게 그런 사고가 이어졌는지 철학 전공자의 의식을 따라갈 수 있어서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름 영리하게 글을 쓴 게, 계단 계단마다 책을 한 권씩 비치했다. 이 책을 보고 이런 느낌, 저 책을 보고 저런 느낌 책 한 권으로 깨달음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처럼 표현했다. 물론 중간에 책이 아닌 가수가 한 분 계시기는 하나 거의 평전같이 썼기 때문에 일종의 평전으로 생각한다.

저자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알 수 없다. 계단을 올라갈 때 인과에 따라 계단을 딛고 올라갔는데, 과연 어디가 끝인지 본인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 모든 계단을 다 딛고 올라간 것이라면 엄청난 선지자일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좀 오버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내가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거나, 대중매체를 통해 그 인물이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편견적인 반응일 수 있다. 뭐, 그건 이다음에 나온 책을 먼저 본 입장에서는 후에 나온 책 보다 7년 전 나온 이 책이 더 나은 것 같아 생긴 반응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나마 열한 계단에선 풍부한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가서 본 영화가 재미있었다는 그런 의미로 보면 될 것 같다.

가끔 주위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들의 특징은 한 권의 책이 갖는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정 서적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어떤 책들을 읽어서는 안 될 책으로 상정하고,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이를 접할까 봐 노심초사한다. 이들은 진보적인 책은 진보적이라고 욕하고, 보수적인 책은 보수적이라고 욕한다. 성경은 종교적이라고 욕하고, 과학은 유물론이라고 욕하고, 또 어려운 책은 어렵다고 욕하고, 쉬운 책은 쉽다고 욕한다. 이들은 평생 한 권의 책만 읽을 기세다. 이들은 대중이 자신보다 단순해서 쉽게 휩쓸릴 것이라 믿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는 책이 아니라, 이런 편협한 사고를 가진 단순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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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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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나이를 찾아본다. 오래전부터 이름을 알던 사람인데 애석하게도 소설은 읽은 적이 없다. 일본 작가의 책은 어떻게 하다 보니 여성 작가들의 책을 주로 읽어 하루키의 책은 읽지를 않았다. 그나마 읽은 책도 판타지류로 문학과는 거리가 먼 책들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70세 만 나이로 69세 되었다. 역시 오랫동안 이름은 자주 들었던 이유가 있다. 나이를 찾아본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언제 쓴 글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게 봐도 글을 쓴 배경 시점은 90년대가 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사고방식은 현재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글을 쓴 일자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지만 찾아보진 않았다. 에세이다 보니 신변잡기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읽다 보면 시대를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80~90년대 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역시 80년대에 쓰고 90년대에 엮어 책으로 발간했다고 한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영향권이기 때문에 보수적이고 어떻게 보면 꽉 막혀 있다 봐야 할. 텐데 너무 자유롭게 글이 쓰여있다.

이 책을 냈을 때 의외로 많은 반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시점에서도 이런 글을 쓴다면 상당히 쿨한 사람이네 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게 30~40년 전의 이야기라면 쿨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독특한 사람이네, 말도 안 되는 사상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을 것 같다.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가 가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저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인 시대다. 그렇게 본다면 하루키는 유행을 상당히 앞서 간다고 생각해도 될법하다.

가장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구절은 표어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시절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표어가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각종 포스터에 표어들이 길에 넘쳐났다. 현재는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꾸준히 공익광고 등으로 표어를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다. 일본도 비슷한 시대 그랬나 보다. 그 시절 각종 표어 만들기 대회가 있고, 당연하게 생각하던 걸 하루키는 삐딱하게 쳐다본다. 그러면서 트집잡기식으로 대상을 받은 표어에 대해서 정리해서 썼다. 본인도 트집잡기라는 것을 알면서 쓴 글이다. 표어가 싫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나름 논거라고 반박하면서 쓴 글을 보니 귀여워서 실소가 나왔다. 70 먹은 어르신을 귀엽다고 표현한 것이 아닌 그때 당시의 하루키라면 내 나이보다 아래 거나 비슷할 테니 예의에 어긋나 보이진 않는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뭔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성찰이나 자아실현 이런 이야기보다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 대부분의 에세이가 가지고 있는 누구를 가르치러 드는 듯한 불쾌한 감정이 덜하고 왠지 모를 흥이 생긴다. 그래서 그런지 대표작들인 소설류보다 에세이를 먼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오래되고 소설책처럼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에피소드를 요리 붙였다 저리 붙였다 해서 찾기 어렵긴 한데, 최대한 찾아 읽어보고 그의 소설 세계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 본문 P151, 127 중 -

예를 들어 나는 고등학교 시절 온통 미국 소설만 읽었기 때문에, 우선 읽고 쓰는 것으로 영어를 시작해 그다음에 조금씩 회화로 들어갔다. 그래서 회화가 가능해질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앞에서 말했듯이 지금도 그리 잘하지 못한다. 어눌하고 투박하게 말한다. 발음도 엉망이다. 말이 매끄럽게 술술 나오지도않는다. 하지만 그게 나라는 인간이다. 세상에는 내가 잘할 수있는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일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때우고 산다. 우리는 아주 불완전한 존재이고, 하나에서 열까지 두루 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갖가지 사람이 있다.

아무튼 부모와 자식이 뭐든 얘기하는 가정은 과연 정말로 즐거운 가정일까? 나는 그 표어 앞에 서서 근본적인 의문에 빠졌다. 이런 표어는 때로 근본적인 사고의 확인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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