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시간 - 김근태, 남영동 22일간의 기록 평화 발자국 12
박건웅 만화 / 보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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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간의 지옥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1983년 9월 4일부터 9월 26일까지
22일간 지옥같은 고문을 당한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남영동에서 나오던 날을 빼고는 처음으로 감옥에서 나와 차를 타고 구치감에 도착했을 때,
희안하게도 법원과 검창청 밑은 땅굴로 이어져 있었다.
고문을 철저하게 숨기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단 한차례 결정적인 실수로 김근태의 고문은 세상에 알려진다.
검창철 승강기에서 내리는 순간 거기에 아내 인재근을 만나 변호인의 도움으로 어두운 계단 밑에서 아내에게 아래 사실을 모두 말하게 된다.
아래는 김근태가 그때 아내에게 전달한 남영동에서 받은 고문의 종류와 횟수, 총 시간이다.



1. 고문의 종류와 횟수

9월 4일 : 전기고문 및 물고문(총10시간)
9월 5일 : 전기고문 및 물고문(총5시간)
9월 6일 : 전기고문 및 물고문(총5시간)
9월 8일 : 전기고문 및 물고문(총10시간)
9월10일 : 전기고문 및 물고문(총5시간)
9월13일 : 전기고문 및 물고문(총10시간)
9월20일 : 전기고문 및 물고문(총5시간)

지독한 고문을 받았다는 것을 <남영동 1985>영화를 보고 체감했지만, 그 횟수와 시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물고문 같은 경우는 수건 or 거즈를 코와 얼굴에 딱 붙이고 콧구멍으로 샤워기나 주전자를 들이붓는 것이다.
몇분 동안이 아니라, 그 짓을 5시간 이상씩 고문자 4-5명이 땀을 흘려가며 했다하니
기절하지 않고 버틴 김근태도 대단하다.

전기고문은 발가락에 붕대를 감고 전극을 발가락 사이에 넣고 전기를 통하게 한다.
물고문 뿐만 아니라 전기고문도 칠성판에 천을 씌워 돌돌 말아 5군데를 묶어 꼼짝못하도록 한다.
전류의 세기는 우리 몸에서 가장 먼저 실핏줄이 터지는 회음부를 고문기술자(장의사)가 살펴보며 터지기 직전에 멈춘다. 두 가지 모두 외상을 입지 않아 고문의 흔적이 남지 않는 방법이다.




2. 지옥의 칠성대(칠성판)

두께는 남자 팔뚝 정도인 나무판이 사람 키보다 약간 큰 일이로 펼쳐져 있다.
머리쪽이 세면대쪽으로 뒤로 젖힐 수 있게 한쪽은 세면대에 갖다 붙힌다.
칠성대 위에 담요를 깔고 사람이 누우면 담요로 싼 다음에 그 바깥을 군대 허리띠 같은 줄로 꽁꽁 묶어 버린다.
담요로 몸을 감싸는 것은 몸에 상처가 날까 봐서다. 고문 당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담요 바깥을 줄로 묶는 것도 상처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 그런 것이 분명하다.
발목, 무릎위, 허벅지, 배, 가슴까지 다섯 군대를 묶는다. 완전히 묶이면 꼼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머리는 움직일 수 있다.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면 고문의 증거인 상처가 날테니 말이다.
머리의 절반 내지 3분의 2정도는 받침대가 없어서 뒤로 젖힐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물고문할 때 효과적으로 고통을 주기 위해서이다. 기를 쓰고 움직이면 발목 아래 부분과 팔꿈치를 약간씩 비틀 수 있다. 물론 눈은 가려진 채로.


3. 김근태가 느낀 고문의 고통


- 물고문

˝이를 갈면서 견디었습니다.
짧은 시간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지요.
숨을 몰아쉬고 안 쉬고 또 몰아쉬고 하면서요. 하지만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고, 꺼져 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함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덮쳐 왔습니다. 둘레는 신 냄새 나는 짙은 깜깜함으로 뒤바뀌고, 속은 메스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으로는 노린내가 치솟고 물이 쏟아지는 그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요.
온몸을 바둥거리고 혼신의 힘으로 뒤척거리니 칠성대도 기우뚱했습니다.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버리고,
담요도 땀으로 물컹해졌지요.(...)
아득한 절망감, 질식해 버릴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170~176쪽 첫번째 5시간 물고문


-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동시에

˝물고문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 몸에 땀이 나게 되면 그때부터 전기 고문을 시작했습니다. 짧고 약하게 하다가 중간에 다시 약하게, 가끔씩은 발등에 순간적으로 전기를 대기도 했지요.
그래서 발등의 살가죽이 꺼멓게 타버렸습니다. 김수현과 백남은은 뒤에서 지켜보면서 전기고문은 고문기술자가, 물고문은 김영두가 직접 집행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한마디로 불고문이었습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고 극심한 고통과 공포를 가져오는 고문이었습니다. 물고문과 불고문의 조화라고나 할까. 그 상승효과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어요. 물고문이 밑바닥에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 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은 불에 달구어 뜨거워진 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려 바스러뜨리고, 둘둘 말아서 불테 튀기는 그것이었습니다.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를 끊어버리는 것 같았지요.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느껴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리는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온몸이 저리고 칙칙해져서 끈적끈적한 외마디를 계속 질러 댔습니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끝까지 쑤셔 댈 때마다 어두운 비명을 토해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온몸 마디마디가 해체되어 나가는 중이었어요. 오직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비명뿐이었습니다. 온몸에 시퍼렇게 핏줄이 솟고 목은 쉬어가는데 이것은 멱이 따진 돼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습니다. (...)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 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어요.˝. 206쪽~214쪽

˝격렬한 전기 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버려 살가죽과 뼈만 남아 버린 것 같았습니다.(...) 고통에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댔기에 목에서는 피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단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 때문에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만 했습니다.˝
- 244쪽


- 물고문과 전기고문,
그리고 소금과 고추가루

˝고문자들은 세수수건 대신 코와 입 위에 거즈를 덮고 물을 쏟아부었습니다.
세수수건을 덮고 고문할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숨을 못 쉬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은 중간에 한번 입을 벌려서 고춧가루를 쳐넣었습니다. 곧 뱉어 버리긴 했지만 입안이 얼얼하고 고문대 위 담요에 고여 있는 땀과 물에 떨어진 고춧가루 때문에 등 전체가 따갑기고 했습니다.
무슨 화학약품이라고 겁을 주면서 거즈 위에 한움큼을 집어다 놓고 물로 녹여서 입, 귀, 코로 녹아들게 했습니다.
이런 일을 세 번 했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간 찝찔한 것으로 봐서는 소금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는 고문할 때 심리적 압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전기고문할 때 몸에서 전류가 더 잘통하도록 하기 위해 피의 전리도를 높이려는 계산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날 고문은 더할 수 없이 잔인했습니다. 목이 완전히 붓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연거푸 비명을 질러 댔기 때문에 목이 쉬어 버렸습니다.
팔꿈치와 발뒤꿈치는 이미 헤어져 상처가 심하게 깊어지기도 했습니다. - 260~266쪽




4. 고문기술자(장의사) 이근안

김근태가 느낀 첫인상은 아래와 같다.

˝델시 상표가 붙어 있는 사무용 가방을 들고 건장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거리 구석에 있을 듯한 깡패, 누가봐도 조직폭력배 같은 사내였습니다.
몸무게는 거의 90킬로그램에 이를 것 같고 키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었으며
눈은 불안정하고 걸음걸이는 뻐기는 듯한, 그야말로 인간 백정 같았습니다.
<잃어버린 전설>에 나오는 뒤뜰에서 식칼을 가는 그런 사람 같았습니다.
이 사람에게 그래도 빛이 있다면 눈동자에 어리는 장난기 같은 그림자, 그것뿐이었습니다. -199~200쪽


이근안은 1988년 군사 정권이 붕괴한 뒤 수배를 받았고, 11년 동안 도망다니다가(비호를 받지 않고서는 힘든) 1999년 검찰에 자수하고 구속되어 징역 7년형을 받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그제서야 자수한 것은 범죄 시효를 계산한 것이다.
2006년 감옥에서 나온 뒤 2008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개신교 목사가 되었으나 2011년 김근태가 사망한 뒤 책임과 논란이 불거지면서 목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은 지금도 살아있다. 인근 주민에 의하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배우자가 폐지를 주워 연명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김근태가 자수한 이근안을 한번 만났고, 그 이후 이근안은 또 한번 김근태를 농락한다.

중형을 받을까봐 고문범죄의 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하여 울면서 무릎 꿇고 사죄한 이근안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왔던 김근태이지만 아마 용서하기 어려웠을것이다. 아니 용서는 못했을 것이다. 고문받은 사람이 고문을 한 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이 쥐새끼는 목사가 되어 한 언론사에서 특급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대목을 들어보자.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하하.아닙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입니다. 그때는 고문이 ‘애국‘이었으니까 말이에요.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기 고문은 사실 내가 취미 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뺀 AA건전지 2개를 이용해 겁을 준 것 뿐입니다. 허허 그건 전기 고문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말로 겁을 주고 건전지 두 개를 맨 발바닥에 댔는데.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항상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문도 하나의 예술입니다.˝ -556~557쪽

이 인터뷰는 유튜브에 찾아봐도
많이 나온다. 과연 그 누가 이 놈을 용서할 수 있을까?



5. 한국의 천재건축가 김수근

김수근은 1976년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설계했다. 원래 5층 건물에서 전두환 집권 시기 증축하여 7층으로 올렸다. 지금은 경찰에서 이 곳을 인권센터로 내놓아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김근태가 고문을 받은 5층 끝방에서 조금 떨어진 509호가 바로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고 사망한 방이다.
물고문..김근태가 받은 물고문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저 얼굴에 물을 몇번 붓다가 죽은 실수가 아니라 김근태가 느낀 아득한 지옥의 고통과 공포를 느끼다 질식사 한것이다. 얼마전 TV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김종민 어머니의 당뇨를 관리해주시는 주치의로
당시 박종철 사망 후 왕진을 갔던 오연상 전 중앙대 전문의와 전화로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오연상 교수님은 양심을 저버릴 수 없는 용기 있는 행동을 했고, 그 결단이 6.29민주화 운동의 마중물이 되었다.
이 건물에 올해 4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하여 직접 509호실을 보고 설명을 듣고 헌화했다. 민갑룡 경찰청장도 이 곳을 인권센터로 바꾸고, 개방함으로써 이 땅의 모든 경찰이 이 비극의 공간을 다시 한번 추념하고 다시는 이런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대통령앞에서 했다.


다시 김수근 건축가 이야기로 돌아가자.

˝김수근. 그이는 공간의 정서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잘 알고 있는 빼어난 건축가입니다. 대표작으로 88올림픽 주경기장, 워커힐 힐탑바, 남산의 자유총연맹, 세운상가 현 아르코미술관...한국 건축사에 큰 성과를 낳았습니다. 김수근이 설계하고 지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심문과 취조, 고문의 효과, 그리고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가 놓인 처지를 세심하게 처리한 건축물입니다.
7층짜리 대공분실 건물을 바깥에서 바라보면, 5층 창문만 유달리 아주 작고, 좁은 직사각형인 것이 바로 눈에 뜨입니다. 이는 건축설계자가 처음부터 이 건물을 정상이 아닌 비정상적인 용도로 쓸 것이란 사실을 미리 계산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설계입니다. 따라서 ‘건축가가 짜 놓은 초기 설계를 실무자가 바꾸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건축계의 가설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김수근은 벽돌 하나, 창문 배치 하나하나까지 직접 관여할 정도로 굉장히 꼼꼼하고 치밀한 건축 설계자라는 것은 건축계에서는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취조 고문을 당하기 위해 강제로 끌려온 이들은 양팔이 묶이고 억센 손아귀에 이끌려 건물로 들어섭니다. 이윽고 나선형 철제 계단을 오르거나 승강기에 갇혀 5층으로 올라갑니다.
나선형 계단은 끌려온 이들이 빙빙 돌며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공포심을 느끼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계단에는 층 표시를 하지 않아 자신이 몇 층에서 고문당하는지 모르게 합니다.
문을 어긋나게 배치한 것은 문이 열렸을 때 고문당하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을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한 처리였습니다. 또한 이곳에 끌려 온 이들에게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더욱 극대화시킵니다.
여기에 고문당하는 사람의 비명이 복도에 울려 퍼집니다. 방안의 전등 불빛을 조절할 수 있는 스위치는 조사실 밖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안에서 밖을 보기 위해 만들어진 투시경이 이곳에서는 반대로 밖에서 안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되었습니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은 약 3평 정도 크기인데 전구와 형광등은 철망으로 둘러쳐 있고 철제 가구와 침대는 붙박이로 설치되어 바닥에 단단하게 박혀있습니다.(* 침대는 잠을 재우지 않고 고문하기 때문에 수면욕에 대한 심리를 극대화하기 위해 갖다둔 것)
이는 자살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 천장에는 폐쇄회로 카메라를 달아 배변의 존엄성도 보장받지 못하게 하여 취조 효과를 높였습니다. 내부 벽은 모두 방음 처리를 해 고문당할때 나는 비명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하였고 다른 방에서 나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게 해서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사람 머리도 채 내밀 수 없을 만큼 좁은 직사각형 창은 이 건물을 마치 미술관이나 고급 호텔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볼 때에는 이곳이 어떤 건물인지 전혀 알수가 없습니다..(...)
이 건물은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가로 불렸던 김수근이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담아 설계한 살아 있는 건물입니다.˝ -280~290쪽



6. 타인의 고통

근 30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고문만 없어졌을 뿐이지, 고문 빼고는 세상의 부조리는 여전합니다.
여전히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된 세상을 강요당하는 지금, 어쩌면 고문보다 더 끔찍한 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우리들 자신이며, 지금 우리 사회는 남영동 건물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시대의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진실에 침묵하고 안전한 다수의 편에 서는 바로 우리, 변절자 우리들이었습니다.
누군가 할일이지 바로 이것이 내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없었던 겁니다.
돼지를 잡아 보지 않은 사람들은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직접 잡거나 본 사람은 고기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그저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아 너무 잔인해~˝하며 ˝난 그런거 원래 싫어~˝하고 그 사실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우리 현대사는 안과 밖의 풍경이 그렇게 달랐습니다.
하지만 우린 참혹한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만들어가는 유전자가 우리 사회에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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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에 칠성판 그림만 봐도
끔찍합니다. 김근태님 22일간 고문을 받은 기억을 담았습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2011년도 타계했지만 70년대 같은 수배자로서 만난 그의 아내가 현재 인재근 국회의원입니다.
두분다 3선씩 부부합산 6선 국회의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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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3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 고문 받은 거, 다른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런 거 또 읽으면 마음이 무척 아플 것 같아요.
보시지 않은 분들이 많이 보면 좋겠습니다.
 
그 여름날의 기억 - 노근리 이야기 1부 평화 발자국 13
박건웅 만화, 정은용 원작 / 보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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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은 연못>을 봤다고
감히 노근리 사건을 잘 알고 있다 했던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1부는 당시 사건현장에서 살아남은 정은용 씨가 40여년동안 우여곡절끝에 펴낸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가 원작이 된 만화입니다.
당시 어린 두 자녀를 잃고(표지에 있는 바로 저 그림속의 두 자녀입니다) 해방이후 다시 낳은 아들이 2부의 원작자 정구도 교수지요.

미국 정부를 상대로 노근리 사건을
알리고 손해배상 청구를 해서 최초로 미국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한 사건입니다.
당시 김대중 정부도 미국의 눈치를 볼수밖에 없었던지라 클린턴의 유감표명 이후 바로 다음날이야 진상조사를 촉구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 책은 미약한 피해자 집단이 감히 미국을 상대로, 정확히 미국 정부를 상대로 싸워 일궈낸 엄청난 쾌거였습니다.
2부에서 어떤 자료로, 어떤 단체와 언론사들이 도움을 줘서 여론을 형성하고
마침내 위대한 미국이 왜 자신의 전쟁범죄를 시인했는지 알 수 있을겁니다. (당시 가해자였던 현장의 미군들 중 양심 증언에 동참해 준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들도 작전지시를 따라야만 했던 일개 군인이었으니까요)

피해자들조차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외면했던 사건이 정은용, 정구도 부자의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우린 노근리 쌍굴에 평화기념공원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서라도 꼭 가서 국화꽃 한송이 놓고 올까합니다.
이 책이 발간된 당시까지 노근리 대책위원장인 국무총리도 한번 방문안했다하니 미국이란 나라는 역시 위대한가 봅니다.

우리들이 노근리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해주신 2014년에 타계하신 정은용 아버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아직도 진상조차 밝히지 못한 360여건의 양민학살에서 외로운 죽음을 당한 그들이 노근리 사건처럼 잘 해결되어 양지로 나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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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약간 쌀쌀하지만 햇살이 따사로운 가을 오후네요.
박건웅 만화에 꼽혀 찾아 읽다보니
평화발자국 시리즈에 좋은 책들이 많은 걸 알았습니다.
평화발자국 12번 박건웅 작가의 <짐승의시간>은 김근태가 남영동에서 겪은 22일간의 기록입니다.
예전 영화로도 봤는데 그 때의 실감나는 충격은 꽤 오래 갔었습니다.
564페이지로 두툼한 느낌이 넘 좋기는 한데 그 분량만큼 또 가슴 저려야하네요.

평화발자국 19번 김금숙의 만화 <풀> 또한 500여페이지 분량의 양장본입니다.
위안부 이야기로,
이번에 해외에서 상 받으신거 축하드리며,
그녀의 또다른 작품 <나목>은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더니 구입중이라네요.


엔젤에서 라떼 한잔하며
노근리이야기 1권을 읽는데,
뭔가 더 자세히, 다른 쟝르로, 또한번 접하는 기분이 뭔가 뿌듯한 것이~
묵직한 아픔의 현장을 이런 마음으로 본다는 묘한 죄책감과 함께 참 표현하기 어려운 심정이었습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쌍굴 안에서의 학살 이전에 피난민들은 이미 그곳에 당도하기 전에 노인,어린이,부녀자 할것없이 피난 인솔을 진행한 미군에 의해 비행기 공습에 기총소사로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증언은 말 그대로 살육의 도가니였지요.
아이가 뇌가 쏟아진 엄마 머리를 잡고 울거나, 포탄폭풍에 눈이 튀어나와 제 손으로 뽑거나, 살점들이 쏟아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으레 공습의 결과니까요.
1명도 남김없이 죽여야 하는 철저한 소탕작전이었습니다.

수십차례 공습과 사격으로 피난민들을 학살하고 부상자까지 확인사살후 배수구나 풀숲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노근리 쌍굴에 밀어넣지요.
이제 겨우 학살1차전이 끝났습니다.
이제부터가 노근리 사건의 시작입니다.



햇살 좋은 날 커피 마시며 읽는 책으로
참 어울리지 않네요.
그래도 더더 자세히, 정확히 알아가는 게 살아남아 풍요롭게 살아가는 자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진실이 이루어내는 기적의 첫걸음이니까요~~그리고 그들에게 ˝우리도 함께 아파한다˝고, 우리도 알고 있다고, 잊지 않았다고, 말해 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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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8명의 이웃들

세 아이의 아빠이자 다정한 남편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선고 18시간만에 사형당할 때 막내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죽었습니다.
1975년 당시 45세이던
우홍선님의 이야기는 그의 배우자, 딸, 아들의 기억으로 시작합니다.
늘 꿈에선 살아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착각하고, 또 잠에서 깨면 눈물을 쏟았다지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분들은 이런 꿈 많이들 꾸시자나요. 깨고나면 너무나 헛헛하고 아련한 기분 아시죠~
빨갱이의 가족으로 감시받고, 냉대받던 처절한 인생을 그 누군들 실감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2005년도에 과거사진실규명워원회에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됐다는 결과가 났고 2007년도에 재심에서 32년만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만..

박정희와 민복기(1913년 친일파 민병석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판사가 되었으며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대법원장이었다)가 우홍선님의 가족을 갈가리 찢었습니다.
민복기는 94살까지 장수했고, 아주 화려한 친일경력에 2000년대는 자랑스런 서울대 법조인으로 뽑혔다네요~
아주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요즘은 현충원에 계신답니다.


두번째 김용원님의 스토리
읽을 자신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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