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Though no one can go back and make a brand new start, anyone can start from now and make a brand new ending.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순 있다. - 카를 바르트 "

 인상깊은 구절이 몇가지 있어 적어두었지만, 가장 인상깊게 본 구절은 책의 표지에 써있는 문구였습니다.


 책을 읽기 전,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트라우마들에 대해 하나씩 끄집어내기 전, 저어하는 나를 달래주었던 문구였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여러 생각을 하곤 합니다. 대체로 내일 할 일을 계획하기도 하지만, 가끔 '과거로 돌아가서 가장 없애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떠올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후회되는 지난 일들이 떠올라 도리어 잠이 깨거나 이불을 발로 차기도 합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마음에 짐처럼 남아있는 과거의 일들을 되살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저 문구가 책장을 넘기기 전 마음을 한 번 다잡아 주었습니다. "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순 있다. "


 우선 리뷰에 들어가면서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심리학적 문제 '트라우마'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트라우마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심리적 외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수많은 사고나 개인과의 마찰등이 정신적, 심리적으로 상처가 되어 그것이 오랫동안 남아 행동과 심리, 성격에 영향을 주는 일 등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 개에게 물렸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 개를 무서워한다던가,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이 자동차 타는 것을 꺼려하는 등의 일등을 쉽게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것은 매우 특수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 한 개인의 심리적 취약성보다는 그 취약성을 뒤흔들어 놓은 트라우마를 더 많이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나는 매일매일 치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의 이야기에서, 갈등이 심한 부부들의 양보할 수 없는 다툼 속에서, 그리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친구의 삶에서, 아주 흔하게 트라우마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저자는 트라우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 개인의 삶에서 트라우마라는 것이 이렇게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생겨나는 문제임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속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트라우마에 대해 재조명합니다. 이 책에서는 개인이, 그리고 개인을 넘어 사회가 품고 있는 상처를, 그러한 상처들을 영화로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비추어보고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책의 구조는 상당히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트라우마의 원인/ 트라우마의 증상/ 트라우마 공화국, 대한민국/ 트라우마의 치료] 다섯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단계별로 읽을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심리학과 트라우마라는 것에 대해 모르는 독자도 순차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요. 또 각 단락별로 말하고 싶은 주제에 맞는 영화들이 몇편씩 소개됩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쉽게 풀어쓴 이론적인 설명이나, 개인의 경험, 혹은 주변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며 내용을 풀어가기 때문에 독자는 흥미를 갖고 쉽게 심리학에 접근하게 됩니다.


 또한 영화의 내용들도 매우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독자들은 소개된 영화를 통해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심리학의 내용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심리, 행동패턴을 좀 더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소개된 영화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삶을 말하는 상당히 괜찮은 영화들이 이야기 되고 있고, 자신이 보았던 영화가 있다면 한층 더 깊이 마음으로부터 공감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영화와 책이라는 두 콘텐츠가 '심리학'이라는 코드와 만나 상승효과를 이뤄내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특히 더 읽고 싶었던 이유는,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근래 들어 내면에만 치중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있던 중 "내가 가진 상처를 혼자서 끌어안고 고민하고 반성해봤자 남는 것은 자책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그리고 그 문제에 대응하는 나 자신에 어떤 한계점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은 그 질문에 어느 정도의 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책으로 위안을 받는 일은 타인과 소통하여 치유하는 일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 아주 사소한 일상사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어른들에게는 별거 아닌 사건이지만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마음의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사건들이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평생에 걸쳐 자아 존재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 당시 그 사건을 당할 때 아이였던 당신은 무척 당황해했고, 무서워했고,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의 당황스러움, 수치심의 기억이 점점 옅어져가고 다른 좋은 기억도 많이 남게 되어 이런 사건의 기억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자라게 됩니다. 하지만 몇몇 기억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자신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경 회로 깊숙한 어딘가에 그 기억이 그대로 남아 별 것도 아닌 일에 두려움이나 수치심, 분노감 같은 감정이 갑자기 재현되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하는 식으로 말이죠. p51 파트2 트라우마의 원인 "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이지만 이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상사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말은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잘 알려진 비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 알려진 이 속담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단락을 읽으며 누군가로부터 어린 시절 어떤 사건에서 제가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이해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 그때 그랬구나.' 하는 듯한 위안을 받았지요. 정말 간단한 말이고, 어찌보면 누구나 아는 것들을 적어놓은 것일 수도 있지만, 책을 통해 차근히 조리있게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면서 지나치는 말들보다 더 강렬한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위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시계는 움직였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해는 뜨고 졌지만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에는 소리가 있었다면 이제는 침묵뿐이다. 한때 완전했던 것이 이제는 산산이 부서졌다. - p87 영화 '위 아 마셜' "


 그리고 이처럼 저 역시도 지난 과거에 대해 아직 집착하고 있던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계는 움직였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았'던 것이지요.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일들만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넘기게 되었을 때 내용은 개인에서 사회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나는 내 개인의 내면에 치중하는 일부분만큼도 사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구나, 그건 또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무관심이었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책은 이제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를 말합니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은 이것입니다.


 "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사고의 전환'이었습니다. 즉 매사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로 임한 결과 인생의 장애물을 인생 도약의 뜀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쓰시타는 콤플렉스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발전 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지요. 긍정적 사고와 희망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인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에도 긍정적 사고와 희망 이상의 치유책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36 "


 이 부분을 읽으며 '원영적 사고'라는 밈을 떠올렸습니다. 실패와 거절의 경험을 오히려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꾸는 사고의 전환이 바로 그런 예가 아닐까요. 갈수록 흉악한 범죄 소식이 많이 들려오고, 상식과 배려가 부족한 사회구성원들의 다툼이 공론화되는 일이 잦아지며 이해와 용서가 부족한 사회풍조가 불안과 스트레스를 줍니다. 더불어 과도한 경쟁, 성장과 성공에 대한 압박과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자책과 우울에 빠지게 되는 개인들이 고립되는 현상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부정적인 사건들에 피로감을 느낄 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긍정적인 사고의 표현이 좋은 반발을 일으킨 예입니다. 


 " 처음에 그들은 상대방의 의도부터 의심합니다. "정말 날 선의로 도우려 하는 것인가? 나에게 뭘 바라는 것은 아닌가? 나를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에 반사적으로 다가오는 상대방과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상대방의 의도가 진실이란 걸 알게 되어도 그들은 그 선의의 의도를 비웃습니다. "당신은 운이 좋아서 나같은 상처를 경험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당신 같은 평범한 사람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를 눈곱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어?",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어, 당신은 날 도울 수가 없다고." -p252 "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고 그것을 털어내기 어려운 사람들은 종종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저 역시도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아직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좁혀진 시야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들도 있지요. 그래도 이 책에서는 '희망'을 말합니다. 외부에 대한 불신을 가진 사람들이 진정한 소통자를 만나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혹은 세상을 향해 개인이 맞서 상처를 딛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자라나는 나무는 없듯이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자라나는 희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상당히 많은 부분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보듬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화와 책과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 개인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해줄 수 있는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콜드브루 별 헤는 밤 디카페인 (원액) - 500ml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디카페인이라 좋고 맛있습니다.
다만 겉에 붙인 상품 라벨이 잘 떨어지는 재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재활용하기에 좋지 않아 상품 디자인에 조금 더 고심하는 알라딘이 되었으면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프리카 이리 재미날 줄이야 - 아프리카 종단여행 260일
안정훈 지음 / 에이블북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십년 전 아프리카를 다녀오면서 십년 뒤에 꼭 다시 와야지, 생각했었다. 올해로 그 10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연말이 되어서야 그때의 다짐이 떠올랐다. 잊고 있었구나. 아프리카의 여행기를 담은 책을 앞에 두고 나도 다녀왔었지 하고 생각하다 기억의 바닥에서 퍼올린 다짐이었다. 몰랐는데, 살다보니 잊혀지는 것들이 정말 있긴 했다. 물론 강렬했던 아프리카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다녀온지 10년이 됐다는 것은 헤아리다 잊어버렸다. 이쯤되면 세월의 흐름은 조금 몰라도 괜찮겠지 싶기도 했다.


 나의 아프리카를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아프리카도 꽤나 이가 갈리는 여행지였다.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비포장도로에서 몇시간을 시달리거나, 경찰에게 돈을 뜯기거나, 비행기를 놓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어려웠다. 이런 사건들이 없이도 녹록치 않은 여행지는 이후에 중국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넓게 펼쳐진 땅 위로 물들어가던 노을을 바라보며 사파리 관광차 옆을 지나는 동물들이 실제로 살아움직이는 땅이 있다는 것을 느꼈던 순간은 아프리카의 모든 단점을 다 잊게 만들었다. 


 '아프리카 이리 재미날줄이야'를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러 동물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사진도 찍고 신기해했었는데, 빅파이브로 꼽아놓는 동물들이 있었다는 것도 그랬었나 싶고 기억에 새로웠다. 재밌었던 건 한페이지에 동물들 사진을 하나씩 채워넣은 마지막 칸에 서양인 가족의 모습(143)도 함께 담아놨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관광에는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서양인 가족의 모습도 함께 포함되듯이.


 가끔은 천편일률적인 여행책이 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평소에 보던 여행책들이랑은 좀 다른 느낌이라 재밌게 읽었다.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여행책을 주로 내는 세대보다 조금 달라 이런 여행도 있구나 하며 읽었다. 유명한 유튜버인 빠니보틀과 만난 얘기를 담으며 "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과연 이렇게 청춘들과 어울릴 수가 있었을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88) "고 잘라 표현하는 부분이 재밌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으로 글을 읽은 것 같았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글을 재밌게 쓰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활기차게 여행을 다닐수가 있었는지, 솔직히 적지 않은 나이의 저자라 몇번이나 읽으며 감탄했다. 휴가로 짧은 여행만 다녀와도 집이 최고라 생각이 들 정도로 지치곤 하는데 아프리카를 260일 동안 종단하다니, 대단하다. 물론 가끔은 저자도 늘어지는 때가 있기도 했다. 그럴 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낯선 곳에서 이발과 면도를 도전하기도 하고(238) 느려도 자신의 속도대로 여행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나도 나중에 이런 여행을 해야지 그 열정과 마음가짐을 긍정하며 책을 읽게 되었다. 아프리카가 궁금한 사람들은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막아, 사슴아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안타깝게 생각하기로 진지함이 묻어져나오는 제목과 표지가 가벼움이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인 에세이 신간들 사이에서 그리 매력을 발산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저 가을에 잘 어울릴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려 했는데 첫눈에 이 책이 마음에 들어차 좋아졌다. 문장이 정돈되어 있고 단어가 살아있다. 에세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이런 글을 쓰는 작가의 것이라면 어떤 사소한 문장이라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우리의 취향이 삶의 여정을 지나면서 바뀌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전에는 바다를 앞에 두고 일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젊을 때는 봄을 기다렸는데 지금은 어느 계절에나 그 나름의 매력에 감탄한다. (11)"


 본 내용의 가장 첫줄부터 깊은 공감을 했다. 몇년전부터 꾸준히 어느새 모든 계절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고 말하곤 했는데, 같은 생각을 성숙하고 아름답게 풀어낸 문장을 보고 좋은 책을 만난 것 같아 반가웠다. 때로 종교적인 이야기가 있어 우리 사이에 바람 하나 불어올 공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일품요리'를 차려낸 식탁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가까이 앉아 '사막아, 사슴아'를 읽었다.


 얼마 전 친구와 마주앉아 꼭 가보고싶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뜨거운 땅, 추운 바다, 빛나는 하늘을 이야기하다 별이 뿌려진 모래, 사막도 함께 꼽았었다. 다른 뜻이 아니라 저자의 산문집 제목의 사막 역시 말 그대로 직접 찾아간 사막들을 뜻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어쩌면 평생 한 곳을 가보기도 어려운 사막을 여러 곳 다녀온 사진과 글을 보다보니 다시 한 번 여행에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기도 하고, '사막들과 매우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75)'다는 점이 부럽기도 했다. 


 이어지는 사슴아, 라는 부름은 한 강아지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은 길에서 고양이를 만날 것을 대비해 고양이용 먹이를 조금씩 챙겨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길에 고양이가 많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돌아다니는 개들도 몇 마리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도시에서 주인이 없는 개는 찾아보기 어렵다. 가끔 뉴스에서 산이나 인적이 적은 곳에 버려진 개들이 들개화되어 돌아다녀 위험하다는 소식만 본 것 같다. 사슴이도 저자가 숲길에 버려진 유기견을 마주친 날의 이야기였다. 예전에 지인이 키우던 갈색 치와와를 보고 작은 사슴같다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읽고나니 사막과 강아지의- 동물의 맑고 순한 눈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볼 수 없는 투명한 풍경을 담고 있는 아득함, " 영원 같은 미지의 것을 갈망해 아스라해진 눈빛(101) ", " 순수한 비어 있음(108) " 같은 것들. 어떤 마주침은 순간보다 강렬하여 누군가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기곤 하는데 아마 이 둘이 저자에게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에겐 무엇이 몇번을 보아도 또 다시 찾게 되는 '멀어진 시원으로 회귀하는 비밀의 통로(108)'일까, 한동안 조용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일찍 끝나버린 가을이 어수선하여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다면 '사막아, 사슴아'를 읽어보면 좋겠다. 조용히 내면으로 생각을 인도하는 무게와 온도가 느껴지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우라 씨의 친구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친구란 참 어려워. 아무리 친한 사이도 작은 균열 하나로 쉽게 갈라지고 만다. (17) "


 처음 대여섯장을 넘겼을까, 싶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하나씩 되짚어 읽게 된다. 이런 책이구나. 이런 장치를 해두었구나. 만화이니까 가볍게 읽어야지, 싶었던 마음에 긴장감이 돈다. 구성이나 내용은 평범하고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될 거라 예상했는데 굉장히 멋있는 시작이었다. 약간의 어색함, 위화감이 집중을 환기 시키며 한층 즐거운 마음으로 몰입하도록 유도한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지금껏 한번도 인간관계에서 단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와의 인연을 놓아버리던, 누군가가 나와의 인연을 놓아버리던 혹은 의도치않게 자연스러운 환경의 변화 등으로 마무리 되는 관계더라도 돌이켜보면 그 사람과 그게 정말 마지막이었나 싶은 때가 있을 것이다. 나이들수록 친구를 사귀기 어렵고 또 이미 만들어진 관계더라도 그것을 잘 유지해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사고가 굳고 환경에 따른 변화도 생긴다.


 미우라 씨의 친구를 읽으려고 한 이유도 이런저런 관계로부터 생겨난 문제 때문이었다. 모임의 인원이 줄어드는 일은 예전에는 연연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아쉽다. 셋이나 넷이었다면 가능했을 메뉴 주문이 둘이 되어버리면 확실히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에. 내용 내내 사이가 멀어져버린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인연이 닿아 로맨스도 키워나가며 한꺼풀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런 간질간질한 면도 재밌다.


 " 밤새 이야기를 나눈 추억도 있어, 우리에겐. 그런 친구는 다시 안 생길지도 모르지만... (121) "


 얼마 전 친구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우리는 이제 하루쯤 밤을 새도 다음날이면 새로운 하루의 체력이 쌓일 나이가 아니구나' 하고 웃었던 일이 떠올랐다. 몸은 피곤했지만 아무 말이나 계속 이어가며 밤새 웃고 떠들었던 날이 정말 즐거웠었다. 학생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수련회나 수학여행의 밤 같다고 생각하며 이런 날이 또 올까 아쉽기도 했다. 그럴 땐 연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나 어울리고 또 여유를 갖는 미우라씨의 어머니가 말한 관계(107)를 떠올리기로 했다. 아직은 자주 못보면 아쉽고 섭섭하지만.


 나에게도 그런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생각하다 마지막에 가서는 감동했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정말 끝의 끝에 가서 예상치 못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날의 바다였구나, 하고. 책을 두 권 받았는데 사실은 한권씩 나눠 가질 생각이었지만 각기 다른 친구에게 한권씩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내 마음을 움직였듯이 그들에게도 어떤 의미가 되어줄 것이란 기대가 생겼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어른이 되면 한번쯤 해보는 고민과 감동이 알차게 담겨있는 책이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