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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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은 한 여인을 향한 한 남자의 처절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순수"라고 규정하였다. 『순수 박물관』을 펼치고 있는 매순간마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 규정"에 대해 수긍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순수 박물관』은 사랑하는 여인만을 갈망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케말은 부유층출신으로 아름다운 약혼녀가 있는 자타공인 행복한 남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먼 친척 퓌순에게 한순간 마음을 뺏겨버린다. 약혼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말은 퓌순과의 금지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예전보다 더욱 행복한 남자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약혼식날 이후로 사랑하는 퓌순은 종적를 감쳐버린다. 이 순간부터 케말의 인생목표는 퓌순의 자취를 찾는 것으로 급수정되었다. 한 남자의 일상은 양 손에 떡을 쥔 아이처럼 연애 따로, 결혼 따로의 행복을 만끽하다가 연애대상이 사라진 이후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케말의 퓌순 찾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영원히 회자될 화두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오르한 파묵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나는 『순수 박물관』에 대해서 많은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마주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나의 기대를 저버린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간단히 말하자면 『순수 박물관』은 마치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통속극의 불륜 드라마와 비슷한 내용이다. 나는 『순수 박물관』을 읽기 시작하면서 초반에는 이 작품이 진정 오르한 파묵의 작품인지를 여러 번 확인해 보아야만 했다. 처절함의 한계를 훌쩍 넘어선 남자의 사랑이야기는 어떠한 공감도 얻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씁쓸한 실소만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내용과는 무관하게 오르한 파묵의 문체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단순한 이야기를 힘있게 이끌어가는 그의 필력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그의 필력과 문체가 있었음에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고 하여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또한 1970년대 터키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그 당시 터키의 사회 문화적인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담고 있어 터키인들의 사고를 엿보고 우리와 비교해보는 재미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어린아이는 순수하다. 순수하기에 한없이 잔인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케말이 보여준 사랑을 어린아이의 '잔인한' 순수로 정의하고 싶다. 자신의 사랑에만 순수하게 열중하고 있었기에 그는 약혼녀와 퓌순에게 상처를 주었다. 특히 약혼녀 시벨에게는 더욱 잔인한 기억을 남겨주었다. 작가는 케말의 사랑을 근원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사랑이 오직 원초적인 본능에 의한 감각적인 사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입장에 따라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릴 것이라 예상된다. 오르한 파묵은 "나는 이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순수 박물관』이 독자의 기억 저편너머에 머무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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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러스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메리칸 러스트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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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자신이 읽고 있는, 또는 읽고자 하는 책을 서점 가판대에서 만나게 된다면 반가운 마음이 들 것이다. 특히 그 작품이 본인 이외의 다른 독자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면 왠지 모를 뿌듯함까지 생긴다. 『아메리칸 러스트』는 현재 독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작가 필립 마이어는 독자의 기대에 100% 이상 충족시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한때 매우 부유했지만 지금은 가난하고 음울한 도시가 『아메리칸 러스트』의 주된 배경이다. 스러져가는 도시 속 가정의 운명 역시 그 도시와 다를 바가 없다. 처참하고 비참해진 가정 안에는 '희망과 꿈' 따위는 발 디딜 틈조차 없다. '꿈'을 향해 이 도시를 떠나든지 아니면 '꿈'을 잊고 이 도시와 함께 죽어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도시와 함께 절망의 늪 속으로 차츰 침잠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비상한 두뇌로 수재였던 아이작은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병든 아버지를 간호한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고등학교 풋볼선수로 유명했던 절친한 포와 함께 떠나고 싶었던 아이작은 그를 설득하지만 포는 아이작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다. 위기에 처한 포를 구하기 위해 뜻하지 않게 아이작이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다. 포는 살인사건의 범인이 되었고 그런 친구를 남기고 아이작은 마을을 떠나버리면서 본격적인 『아메리칸 러스트』가 시작된다.

실제로 쇠락해버린 철강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는 생생하고 사실적인 『아메리칸 러스트』를 멋지게 탄생시켰다. 부엘 이라는 도시의 흥망성쇠가 도시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고 엄청났다. 나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이 비단 외국인(미국인이 아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새삼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작가는 한두 명의 주인공 위주의 시점을 탈피하고 살인사건과 관련된 등장인물 모두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이끌어 간다. 아이작의 아버지와 누나, 포의 어머니, 경찰서장은 그들만의 시선으로 자칫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요소들을 재확인시켜줄 뿐만 아니라 작품의 폭과 깊이를 넓고 깊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첫 번째 작품으로 『아메리칸 러스트』를 내놓은 작가 필립 마이어에 대한 찬사가 단순히 의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의 차기작에 대한 나의 기대는 필연이 되었다.

절망 속의 나태하고 안일한 일상은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다. 아이작과 포 앞의 살인사건은 폭탄을 터트리게 만든 자그마한 불씨일 뿐 결코 시한폭탄이 아니다. 단지 평소 위험천만한 시한폭탄을 짊어지고 사는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살인사건으로 인해 터져버린 폭탄은 오히려 아이작과 포를 성숙하게 만든다. 자신의 범죄를 밝히기 위해 부엘로 돌아가는 아이작과 감옥에서 그동안의 자신을 반성하게 된 포는 아직 희망의 끈을 잡고 있음에 확실하다. 빛한줄기 새어 들어올 틈이 없을 것 같은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을 보여준, 희망은 있다고 하는 필립 마이어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아메리칸 러스트』를 내려놓은 지금 나는 표지의 녹슨 못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못 위의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이 자리잡은 녹을 아이작과 포가 깨끗이 닦아내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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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케빈 마이클 코널리 지음, 황경신 옮김 / 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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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이유로 케빈은 태어날 때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 뱃속에서부터 두 다리가 없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의 부모는 아이가 신체적으로 불완전했기에 정신적으로는 '완전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들은 케빈을 비장애인 아이와 다름없이 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집 밖으로 한 발짝만 나서면 케빈은 타인에 의해 불행의 희생자로 규정되고 낙인찍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은 간단하고 쉬운 포기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도전을 선택한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는 두 다리가 없어도 무한도전을 즐기는 20대 청년 케빈이 때로는 남의 일인 것처럼 담담하게, 때로는 자신의 분에 못 이겨 감정적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놓은 작품이다.

나는 저자의 불가능할 것 같은 도전 앞에서 여러 단계의 심리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동정이었다. 매번 열기 힘든 문을 열고자 두드리는 저자의 행동이 무모해 보였고 매우 안쓰러웠다. 그 다음으로는 끊임없이 문을 두드려 결국에는 관문을 통과한 케빈의 모습에 놀라움과 감동의 기분이 이어졌다. 또한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카메라로 찍어내는 케빈과 많은 사진의 주인공들로 인해 나는 부끄러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케빈은 편치 않은 몸을 보드 위에 맡긴 채 세계여행을 다녀오고 앞으로의 여러 계획을 세운다. 그는 나에게 장애인과 비장애인 중 어느 쪽이 불완전한 존재인가, 라는 복잡한 화두를 마지막에 던져주고 자신의 다음 도전을 향해 유유히 사라진다.

신체적으로 불완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안타깝고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지육신이 멀쩡하지만 안일하고 나태한 나와 비교하면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그의 열정과 노력을 배우고자하는 소망이 생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이들은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엄청난' 사람이라는 선을 그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평범한 인간보다 높은 레벨의 존재가 되는 순간이다. 결국 내가 본연의 안일하고 나태한 생활을 합리화시키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의 저자, 케빈은 대단하고 엄청난 사람이지만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의 시선이 억울하고 싫고 화가 난다. 일종의 복수심에서 출발한 사진 촬영에 대해서도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또한 여행지에서 만난 장애인을 보고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느낀 자신의 모습에 고뇌한다. 이처럼 케빈은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독자들에게 여실히 드러내면서 자신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 외치고 있었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는 기존의 인생역정 감동백배 장애인 에세이와는 전혀 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차별화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많은 문제를 고민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얻은 결과물은 독자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발현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대단하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를 접하면서 내가 갖은 지극히 상투적인 감상이다. 하지만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알맹이가 첨부되어 있으니 이 '상투적인 감상'을 꼭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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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슬픔 - 엉뚱발랄 과부 소피의 팍팍한 세상 건너기
롤리 윈스턴 지음, 송정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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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의 젊은 여자가 갑작스레 남편과 사별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만약 나였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마주했을까! 상상하기에도 끔찍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소피의 입장에 나 자신을 자꾸 투영해보았던 것 같다. 젊디젊은 소피는 한순간에 미망인이 되어버렸다. 미망인이 된 순간부터 소피는 절망의 늪으로 곤두박질 당했고 그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현실감각을 느낄 틈도 없었으며 주위사람들을 의식할 수 있는 여유조차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피의 방황은 꽤나 길었다. 남편과 힘들게 돈을 모아 구입한 가구를 자선단체에 기부해버리고, 잠옷을 입고 회사에 출근하고, 애지중지 다루던 그릇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등 그녀는 남편의 죽음으로 발생한 슬픔을 이러한 방식으로 발산했다. 작가는 그녀의 심리상태를 조금은 건조하면서도 아주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소피가 슬픔을 표현하는 일련의 이상행동에 무리없이 공감하고 수긍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서 타인이 잠시 그녀를 안아줄 때 계속 안겨있기를 원하던 소피가 너무 가여울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라도 대신 오랫동안 그녀를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소피는 태생적으로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아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남편과 함께 살던 실리콘 밸리의 집을 팔고 친구 루스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친구의 아이를 돌보다가 불우한 환경의 십대 소녀 크리스털의 후원자가 된다. 소피가 크리스털의 '큰언니'를 자처한 시점은 솔직히 그녀가 타인을 돌볼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아야할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크리스털과의 만남이 소피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상태가 아닌 불완전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돕는 것이 인간을 더욱 성숙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피의 홀로서기가 크리스털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그녀를 더욱 매력적이고 능동적인 인물로 발돋움하게 만든다.

『좋은 슬픔』에서는 소피만큼 안타까운 사연의 불완전한 인물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 중심에 친구 루스와 시어머니 마리온이 있다. 완벽한 외모의 루스는 대학시절 사귄 완벽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남자는 별볼일없어 보이는 여자와 바람이 나서 그녀를 떠나버렸다. 루스는 오히려 미망인이 된 소피가 자신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위로를 받아야할 그녀가 친구를 돌봐주는 장면에서는 소피가 자신의 슬픔을 조금씩 지워가는 듯 보인다. 또한 항상 흐트러짐 없이 완벽함을 추구하는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린다. 소피는 시어머니 마리온도 완벽한 인간이 아닌 그저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한낱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피는 주변사람들을 통해서 자신만이 슬픔에 처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책을 읽기 전에는 '좋은 슬픔'이란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슬픔을 통해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슬픔 없는 미성숙한 인간과 슬픔으로 성숙한 인간, 본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전자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애석하게도 '슬픔'을 배제할 수 없다. 어차피 피할 수도 없고 거쳐야 할 과정이라면 우리는 "슬픔"을 이용하여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좋은 슬픔'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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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마을의 꿈>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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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목을 조르는 노인의 떨리는 두 손이 한동안 뇌리에서 사리지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의 숨통을 끊기 위한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의 끝없는 악행을 대신 결말짓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딩씨마을의 꿈』은 처참한 현실을 너무도 담담하게 풀어가는 작품이었다.

모든 마을에 정부의 "매혈"정책이 하달된다. 처음에는 매혈정책에 아주 무관심하던 딩씨마을이었다. 하지만 피는 우물처럼 퐁퐁 솟아난다는 마을 큰 어른인 딩수이양의 한마디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딩씨마을 사람들은 "매혈"에 미쳐버린다. 그 결과 딩씨마을은 지옥으로 변했다. 많은 수의 마을 사람들이 열병, 즉 에이즈에 감염되어버린 것이다. 비위생적인 채혈과정에서 열병이 발생, 전염되었고 그 원인제공자는 딩씨마을의 존경받는 선생 딩수이양의 큰아들 딩후이이다. 아들의 죄를 갚기 위한 일환으로 딩수이양은 열병에 걸린 사람을 모아 학교건물에서 집단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집단생활 초기에는 열병환자, 가족, 딩수이양 등 모든 사람들이 만족해한다. 나도 이 부분에서는 그들처럼 한시름을 놓고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도 놓아버릴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쉴새없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그리고 마치 예정된 수순인것마냥 정리된 모든 것들을 무참히 헤집어놓고 만다.

죄인의 아버지가 대신 죄를 갚는 것에 대해서 마을사람들은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는다. 애당초 감사의 인사는 원하지도 않았던 딩수이양은 마을사람들의 무자비한 태도에 섭섭한 마음조차 갖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딩수이양은 여전히 그들에게 미안하고 그들이 두렵기 만하다. 하지만 이런 그도 무참하게 도굴된 둘째 아들의 묘를 보고는 더 이상 그들에게 미안해하지도, 그들이 두렵지도 않게 되었다. 이렇게 딩수이양이 딩후이의 굴레에서 제발 벗어나길 원하던 나는 그의 변화가 잠시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성인군자 아버지와 달리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아들은 이제 열병으로 죽은 자까지 돈벌이수단으로 이용한다. 열병으로 죽은 처녀총각들의 영혼결혼식(음친)으로 불쌍한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아들의 소식은 아버지로 하여금 최악의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벌건 피에 미쳐 을씨년스런 마을이 되어버린 딩씨마을에서 딩수이양은 최후의 광인이 된다.

작품의 말미에는 몹시도 메마른, 풀 한 포기마저 뿌리내릴 수 없던 땅에 풀이 자라고 그 위에 비가 내린다. 그리고 딩수이양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상태에서 새롭게 펄쩍펄쩍 뛰는 세상을 보게 된다. 현재의 불행보다는 미래의 희망을 강렬히 기원하는 작가의 바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처를 드러내놓고 치료하지 않으면 그 상처는 곪아터진다. 간단하지만 의외로 실행하기 어려운 이치를 작가는 실행해냈다. 그로 인해 『딩씨마을의 꿈』은 중국정부로부터 출판금지를 당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치료하고자 하는 작가의 용기 있는 결단이 녹아든 작품, 『딩씨마을의 꿈』이었다. 이 작품을 체력이 아닌 생명을 들여 탄생시켰다는 작가에게 독자로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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