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섭섭함도 없더라. 

아쉬움도 없더라. 

그리움도, 미련도 없더라.  아들이 그러하더라.

재학생도, 중고등학생 언니오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리고 꽃다발도 없더라.  

초등학교 졸업식날 우리 아들은 졸업에 대한 의미나 생각해보는건지, 새로운 출발이라는 걸 

되새기며 뿌듯한 다짐을 하는 흔적일랑 샅샅이 뒤져봐도 보이지 않고 그저 점심을 뭘 먹으면 

졸업기분이 최대가 될까만을 곰곰 생각하는 듯 보였다. 

졸업식장 역시 5학년학생 한반정도 나와서 송사하는 정도로 그치고-식장은 그저 상받는  

학생들에게만 의미있는 장소가 될 뿐이었다. 

동생졸업이라고 학교을 빠져 나온 중고생 언니오빠들은 볼 수가 없었고, 운동회날이나 

입학, 졸업식때면 운동장을 메워주시던 어르신들조차도 이젠 옛모습이란 말인가! 

생화값이 워낙 비싸니(한다발에 만오천원을 주고 샀다) 꽃다발 대신 사탕부케같은 것을  

팔고 있는 모습도 신풍속도라 하겠다.  

점심메뉴에만 온통 마음이 쏠린 아들은 그날 점심으로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짜장면을 먹었다. 

신풍속도 속에서 여전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래도 '짜장면'인가보다. 

졸업선물은 휴대폰이다. 우리때는 보편적이었던게 만년필이었던 것 같은데... 앨범이었나? 

발빠르게 변해가는 흐름속에서 짜장면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오래도록 남았으면 좋겠다. 짜장면이라도... 

내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나는 졸업은 또다른 출발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알게 된다. 

이제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확장이전을 해서 찾아갔두만, 원장은 왜그리 뚱~한 표정인지 곧 문 닫을 사람인가싶을 정도였다. 

그전보다 3~4배 정도 넓은 곳이여서 유지비도 만만찮겠두만 일부러 찾아간 고객을 웃음도 없이 

보내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라면 더더욱 미소가 떠나선 안될 일이다.  

미용비도 오천원이나 더 올려 받두만 이건 원, 뒷맛이 씁쓸해서 다시 가고 싶은 맘이 싸~악 

사라졌다. 측은지심에서 계속 찾을 수도 있을 상황이었건만... 

한편으론 아마도 만만찮은 유지비가 백배부담 되고, 그것에 비해 수입은 예상을 훨씬 못 미친 

다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아니지, 비록 그러하더라도 아니지.......한사람이라도 

더 붙잡아야 할 상황 아니겠는가!!! 나는 그러지 말일이다. 타산지석이라 했다. 

여튼, 나는 더이상 찾진 않겠지만 확장이전을 했는데 잘되길 바라는 마음...잘될까? 그런 태도로? 

ㅎㅎ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Grace 2012-09-28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그는 2년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그나마도 건강으로 인한 때문인지
다시 1년도 안된 시점에서 되돌아온 미장원조차도 넘겼다...
그의 건강을 기원한다, 한때의 단골고객이었던 사람으로서의 예의라고
보면 될 것 같군!
 

조선일보에 난 기사를 옮긴다.  

1931년 이상은 한 공사 현장에서 처음 각혈을 하며 쓰러졌다. 이후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그는 1933년 3월 조선총독부 건축기수직을 사직하고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요양 여행을 떠났다. 소설<봉별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스물세살이오-3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 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폐결핵은 가난과 과로를 달고 사는 예술가들의 질병이다. 예술가들이 삶의 추잡함을 정화하고 날마다 소멸하는 비루한 이승의 삶에 불을 밝히는 영혼의 질병으로 받아들이는 폐결핵을 두고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죽음과 삶이 기이할 정도로 뒤섞여 있는 나머지, 죽음이 삶의 홍조와 빛깔을 취하고, 삶이 기분나쁘고 소름 끼치는 죽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질병"이라고 썼다. 

1935년 1월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이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후기구인회 멤버로 들어왔고, 이미 구인회 멤버였던 이상과도 친교가 이루어졌다. 

이상은 김유정에 대해 '운명 공동체'라는 연대감을 느꼈다. 그것은 유정이 어린 시절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듯 자신도 생부모를 떠나 백부에게 입양되며 '정신적 고아'가 된 것, 자신이 가난의 신고 속에서 허덕이듯 유정 역시 토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이 가산을 탕진한 탓에 가난 속에서 신음한 것,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폐결핵으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 등의 공통점에서 비롯됐다. 

이 무렵 김유정의 폐결핵은 연속되는 과음과 철야 집필로 깊어진 상태였다. 1936년 7월 그는 서울 정릉 근처의 산중 암자로 요양을 갔다. 암자에서 술과 담배를 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오한과 열이 내리고 기침도 줄었다. 이처럼 그의 병세는 한때 호전되기도 했지만 8월 하순경 급격하게 다시 나빠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카 영수와 매형 유세준 등이 정릉 암자로 달려와 유정을 업고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해 가을 어느 날 김유정이 푸른 포장을 방안에 치고 촛불을 켠 채 글을 쓰고 있는데, 이상이 찾아왔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불우함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대화가 오갔다.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다면..."하고 이상은 귓속말로 동반자살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 제의를, 유정은 

 "이것 좀 보십시오"하고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영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라며 끝내 거절했다.  

이상은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가라앉는걸 반복하며 거친 호흡을 하는 유정을 서글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김형!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라고 이상이 작별인사를 하자, 유정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었다. 

1937년 2월에 김유정은 거처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상곡리에 있는 매부 유세준의 집으로 옮겼다. 문단에서는 병고 작가 구조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8일, 유정은 세상을 뜨기 열하루 전에 휘문고보 동창인 안회남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유정은 병마와 최후 담판의 시각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유정은 안회남에게 탐정소설을 변역해서 보낼테니, 극력 주선하여 돈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닭 삼십 마리를 고아 먹고, 땅꾼을 사서 살모사와 구렁이를 십여 마리 달여 먹겠다."고 했다.그러나 유정은 답장을 받기도 전인 3월29일 새벽 세상을 떴다. 그리고 20일 뒤인 4월 17일, 이상 역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불우한 두 천재 작가들은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운명을 달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래 전 독후감을 적어 볼 요량으로 독후감상문노트 초등생용을 산 적이 있다. 

매번 책을 읽기만하고 그냥 밀쳐두니 남아 있는게 없는 듯 해서 그리해보았지만 

다섯편을 넘기지도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책꽂이 어디즈음 박혀 있을 것이다. 

그러다 알라딘 서재를 알게 되었고 요즘같은 날에는 이곳이 너무 즐거운 곳임은 말할필요도 없다. 

엄청나게 많은 독서량을 자랑하는 다른 누군가의 서재를 훑어 볼때면 경의감마저 들기도 하고 

나름 많은 참고가 되니 더없이 좋다. 그들의 독후감상문을 읽어보고 그 책을 사보기도 하고  

다시 그들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지워지지않는 '기록'이라는 것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동시에 한껏 편안히 느낄 수 있고, 

언제든 클릭한번으로 다시 찾을 수 있는 편리함은 물론이거니와 내것뿐만이 아니라 다른이의  

것도 볼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장점이 아니겠는가!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어 제차 새기듯이 그 새김을 잊지않기 위해 다시 나의 서재로 옮기는  

과정은 나를 칭찬하게 만들 수 있어 참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라딘 메인에 있는 책을 훑어 보는데  

심금을 울리는 제목이 보인다.  

.........

'바람이 너를 지나가게 하라' 

'바람이 너를 지나가게 하라' 

'바람이 너를 지나가게 하라' 

..........

몇번을 되뇌어도 너무 아름다운 문장이다. 굳이 그 속뜻을 알뜰히 알고자 하지 않더라도 

문장자체만으로 나를 흔들기엔 너무 충분하지 않은가!

'바람이 너를 지나가게 하라' ...........

작가들은 가히 천재들이지 싶다. 책을 읽다보면 참 많이 느끼게 된다-특히 월든을 읽었을땐 

더욱 그러했다.

나같은 사람은 결코 이런 아름다운 문장을 떠올리지조차 못할터인데 이렇듯 쉽게  

제목에서 마음을 흔들 문장을 접하게되니, 책이란 월든에서 언급했듯이 가만히  

앉아서 정신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이점이 충분하고도 남는다. 정신세계가 아니면 

또 어떤가! 상상만으로도 족하거늘.... 

 

제목에서 흔들림을 느꼈던 또다른 책은 둘다 류시화시인의 것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립다니...  

이 얼마나 사무치는 표현이란 말인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그저 안타까워지는 제목이다. '그대가 곁에..." 

보다는 울림이 덜하지만 그래도 퀭~~~거리는 울림은 있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Grace 2010-01-3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줄도 너무 길다'-한 줄도 너무 길다니... 또한 류시화다.

Grace 2010-03-06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 법정
너무 많은 것을 단지 14개의 글자에 모두 담아 두었다.
가장 이상적인 세상살이는 바로 이 14개의 글자가 아니겠는가 싶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