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남한산성>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봐서는 안 된다.

 

문학가 김훈의 원작소설 <남한산성>이 추석연휴를 맞이하여 극장에서 개봉했다. 사극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2007년 초반에 하던 <대립군>과 비교하여 흥행한 편이다. <대립군><남한산성>의 흥행도와 작품의 완성도에서 후자가 우월했다. 연기자들을 봐도 후자 쪽이 더 높은 수준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도 실력이 좋은 배우가 나온 것은 분명하나, 후자 쪽에 더 연기력과 수준이 높은 배우들을 중역으로 내세운 점이다. 영화의 메시지를 본다면 <대립군>은 임진왜란 당시 영웅을 이순신과 같은 장수가 아니라 이름도 없이 가난을 이기지 못해 군역을 대신 복무하는 민중이었다.

 

영웅주의를 소재로 한 서사에서 민중주의 서사로 넘어가는 점에서 영화의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무리한 소재나 상황연출이 한계로 나타났다. 그러나 2작품을 보면 확실히 생각해야 한다. 광해군이 분조를 지휘하던 왕세자로 활약한 시기는 임진왜란이고, 인조가 청국의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올릴 때는 병자호란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군사, 정치, 경제, 문화적인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 시기이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생각하나, 당시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의병들, 그리고 분조를 맡으면 목숨을 내건 광해군보다 명나라 군대를 더 우대했다.

 

사당은 죽은 이를 기리는 주술적 공간이다. 명나라가 왜군을 치는데 도와준 이유로 그들의 장수를 기리는 생사당을 만든 지경이니 얼마나 한심한가? 선조는 알고 있었다. 도성을 떠난 자신보다 왜란의 위기를 모면하고 수습한 이순신과 광해군의 활약을 말이다. 선조는 백성에게 원망은 대상이나, 이순신과 광해군은 백성에게 큰 덕망을 보였다. 이게 화근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을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보는 게 참 위험한 이유는 바로 여기부터이다.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이 발생된 시기는 인조가 군림할 때이고, 인조가 군림 전에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켰다. 광해군의 정책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관계성을 긴밀하게 유지하여 전쟁에 최대한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인조반정 명분이 폐모살제, 국정운영의 부패가 있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명나라의 사대정신이다. 광해군의 중요 집권세력은 북인이고, 그 중에서 대북이었다. 북인이 가장 광해군을 따르는 이유는 임진왜란의 활약이다. 북인의 이이첨은 임진왜란 때 임금의 어진(초상)을 수습한 덕분에 출세했으나, 북인의 학문적 정통성을 받은 정인홍은 경상도에서 곽재우와 함께 활약한 의병장이다.

 

남명 조식 아래 실천적 도학을 추구한 그들은 다른 사림세력과 달리 직접적으로 왜란을 억누르는데 활약했다. 북인과 남인이 분당 전, 동인이던 그들에게 조식의 영향은 막대했으며,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이 광해군 집권 시기 중요한 인물이었다. 선조가 북인 이산해를 이용하여 남인의 영수 류성룡을 탄핵시키고(이날 이순신 장군이 서거하심), 다시 북인과 서인이 조정을 움직이고 있으나, 북인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광해군이 북인을 손잡은 것은 결국 명나라를 절대적 지존으로 보는 퇴행적 성리학자들에게 큰 반발을 주었다.

 

서인이 반정을 일으킨 이유는 광해군의 정책이 아니다. 그가 명나라를 섬기지 않은 이유고, 명나라를 섬기지 않은 이유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거부하는 것이다. 명나라가 왜란을 종식하는데 도움을 준 것도 맞으나, 한편으로 방해도 많이 했다. 이순신과 권율의 군사작전수행 과정에서 트러블이나, 민가의 약탈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서인이 재조지은을 노려야 하는 이유는 지배이데올로기의 명확성이다. 만일 임진왜란을 조선민중의 힘으로 했다면, 자신들의 통치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관계에서 트러블이 많았고, 명나라가 청나라를 공격할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부분 역시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는 조선이 하던 외교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미 첩자를 풀어 조선의 현실부터 시작하여 내부 정치적 상황까지 모조리 알았다. 청나라가 조선을 집어삼키는 일은 이미 정해진 일이다. 문제는 우리는 그 침략에 어떻게 대응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전쟁의 깊은 상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이 심각했다.

 

<남한산성>을 두고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인조를 중심으로 의견이 2가지로 나눈 최명길과 김상현이 같은 서인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인조방정을 통해 조정에 큰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고, 모두 서인이다. 서인이 분당한 것은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구분된다. 노론과 소론은 같은 서인의 뿌리지만, 숙종부터 시작하여 영조까지 피로 피를 씻는 붕당정치의 모순을 보여준다. 노론이 보수고, 소론이 진보라면 그럴 수 있다. 사도세자를 옹호한 소론이 시파계열이고, 사도세자를 부정한 노론이 벽파계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인조는 오로지 서인만 존재했고, 고관대신이 인조를 두고 서인이 만든 임금이라 당당히 말한다. 보수라고 해도 국제정세가 어두운 법이 없고, 진보라고 하여 국제정세에 모두 밝은 것은 아니다. 정치적 권력에서 추구하는 방향성이 차이가 있고, 가치관이 다르다. 단지 <남한산성>2가지의 조류는 국제정세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현실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탄핵되어 파면될 때, 진보정당만 탄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보수에서도 탄핵을 추구했다. <남한산성>을 두고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은 어리석다. 만일 우리나라가 전쟁 나서 불리한 상황이 온다면 끝까지 항쟁할 것인지 아니면 더 나은 좋은 조건으로 협의할 것인지에 대한 차이점이다.

 

(2) <남한산성>, 국제 정세를 모르는 이들의 권력지향

<남한산성>은 소설이고, 다소의 실재 사료기록과 차이점이 있지만, 병자호란을 조금 더 자세히 알려면 한명기 교수의 서적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광해군>, <병자호란> 등을 말이다. 청나라가 조선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던 계기는 명나라의 장수들 덕분이다. 명나라는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빚었고, 무능한 임금에 부패한 신료들이 뇌물로서 정치를 움직이고 있었다. 명나라의 영웅에게 모반죄로 무고하여 죽게 만들고, 전방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장수를 없애려 했다. 자국의 주군에게 충성할 이유를 잃은 명나라 명장들은 청나라에 투항하여 이신(貳臣)으로 활동하여 명나라의 군사를 격파하는데 도움을 주고, 게다가 조선의 군사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청나라는 주로 기마부대를 운용하기에 수군은 매우 약했다. 조선은 수군이 강한 편이기에 인조와 조정대신을 그것만 믿다가 봉변을 당한다. 명나라 장수 중에 수군을 다룰 줄 아는 자가 있기에 강화도를 점령하고, 많은 문제를 이겨낼 수 있었다. 청나라는 모든 정보를 모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능력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는 인재까지 포섭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 군세에 붙은 점도 그렇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의병장이 사대부들이 차지했으나, 병자호란 시기 의병활동이 너무 잠잠했다. 명나라에 대한 무조건 충성심이 권력을 정당화의 수단이 되었지만, 권력의 몰락도 되었다.

 

하지만 웃긴 점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보이게 만든 것은 서인인데, 나중에 그 책임을 인조에게 미루고, 인조가 죽고 효종이 등극하자 효종조차 무시했다. 인조의 수치와 봉림대군 효종이 청국에 끌려간 이유가 서인의 무능함인데, 스스로의 문제를 왕에게 전가한 것이다. 효종이 서인도 한당보단 산당에 눈을 돌린 이유는 명나라 붕괴이후 조선이란 국가가 중화주의를 계승한 유일한 조정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청나라를 욕하던 서인이나, 추후 서인들이 가장 청나라의 권력에 충성한다. 하지만 청나라로 유입되는 신문물을 제대로 찾지 않았다.

 

<남한산성>을 보면 최명길은 외로운 전쟁을 한다. 그의 목을 치라는 유생의 상소가 매일 어전에 올라오고, 내부 고관대신도 최명길을 파직하라고 한다. 그러나 인조는 최명길을 버리지 못한다. 최명길만 오직 청나라와 소통할 수 있는 외교라인이기 때문이다. 최명길이 청나라 장수를 만나 외교문제를 논하고 오자, 오랑캐와 내통했다고 난리치는 인간을 보면서 정치적인 본질보다 권력의 정당성을 찾는 행위만 보여준다. 이런 한심한 행동에 누가 죽어 나가는가?

 

(3) <남한산성>, 백성이 녹아 없어지네.

조선은 왕조시대지만, 사대부들의 도움 없이 절대로 운영될 수 없다. 왕 혼자서 정책을 내리지 못하며, 정책을 수행할 인재도 필요하다. 신권이 지나치게 강하면 왕은 정사를 주도하는 자가 아니라 이끌려가는 보조자에게 불과하다. 인조가 무능하지만, 서인의 무능함은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영화에서 김상현은 우연히 알게 된 남한산성의 대장장이의 청을 국조에 언급한다. 급하게 조달된 군사들이 추위에 떨고 있으니, 그들을 위한 볏짚을 바닥에 깔고 몸에 걸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말의 먹이가 부족하자, 농사보병의 볏짚을 빼앗아 말 먹이로 주고, 그것도 모자라 초가집을 헐어 그 짚을 말 먹이로 준다. 땔감을 위해 짚이 없는 집의 나무를 헐어 연료로 사용한다. 무능함 정치가가 군림하면 그 문제는 그대로 피지배계층인 백성에게 돌아간다. 영화도입부 김상현은 인조가 계신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이때 산성 아래 강을 건너는데 뱃사공의 도움을 받는다. 뱃사공은 임금을 피신시킬 때 자신이 길잡이를 했는데, 김상현을 도와주면서 당시 아쉬움을 토로했다. 원래 이 일을 먹고 사는 자이니 임금을 피신할 때 좁쌀 정도 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청나라 군세가 오면 길을 건너게 해주어 식량 정도 얻고 싶다고 한다.

 

김상현은 노인을 죽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군사적 전략을 고려하여 노인을 죽인다. 임금이 도망치고, 백성이 굶주리는 이유는 조정의 문제지만, 그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단 단지 눈 앞의 화근을 없애고 싶은 심정에 칼을 휘두른다. 그 이후 산성으로 뱃사공의 손녀 나루가 찾아오고, 그 아이를 인조에게 알현 후 김상현이 거두어 키우게 한다. 김상현은 어린 소녀를 보고 갈등을 느낀다. 나루를 보호하고 조선의 백성으로 살게 해줘야 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나, 오히려 그 나루의 명줄인 뱃사공을 죽였다. 김상현은 처음에 최명길과 반대의 각을 세우나, 이후 다른 관점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뱃사공 손녀 나루가 보여주는 희망의 봄을 들었기 때문이다. 뱃사공은 나루를 위해 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음식을 해준다. 그 생선 맛이 좋아 눈이 녹고 개나리가 피는 봄날이 오면 나루는 김상현에게 그 물고기를 잡아 대접해주고 싶다고 한다. 김상현은 실제 정사에서 청국으로 끌려간 후 병으로 죽지만, 영화에서 자살을 한다. 그의 자살은 무엇인가? 최명길이나 김상현은 인조반정이 신세계를 열어 나가지만, 결국 자신들이 늙은 시대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리뷰 서두에 위치한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남한산성>을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21세기에 와서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전쟁을 수행하거나 계획할 경우 그 정권을 바로 망한다. 국가가 당장 망하는 게 되었는데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20세 초 조선이 멸망할 때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 진보와 보수가 나누어져 있었던가? 자유주의 내지 사회주의자들은 진보라면, 성리학자들은 보수주의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프레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다.

 

(4) <남한산성>, 임금은 어찌 되던지 백성은 살아간다.

영화 <남한산성>은 비참한 조선의 운명을 보여준다. 인조가 청나라 칸에게 패배를 시인한 후 청국에 끌려간 조선인은 50만 명이다. 이중 일부는 다시 돌아오지만, 여성들은 청나라 놈에게 몸을 팔았다는 누명을 받아 환향녀가 되어 비극의 삶을 마감하고, 청국의 문화를 영향을 받아 간첩으로 취급당하는 남자도 많았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가서 성실히 몸과 마음을 다스려 백성을 두둔하고 조선에 돌아와 새로운 문물을 전파하려 했지만 인조의 질투심에 온 가족이 몰살한다. 인조는 수치를 겪고, 조선은 전쟁의 피해로 큰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을 보면 뱃사공 손녀 나루는 대장장이 집에서 같이 살면서 봄을 맞이한다. 대장장이는 정묘호란 시기 가족을 모두 잃었고, 나루는 할아버지 손에서 외롭게 컸다. 김상현은 나루를 대장장이 날쇠에게 부탁한다. 가족을 모두 잃은 날쇠와 나루, 그들은 부녀가 아니나 부녀가 되어 남한산성에서 다시 봄을 맞이한다. 나루는 동네친구와 화창한 봄을 맞이하며 놀러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남한산성 내 어전에서 인조와 고관대신의 고민과 방황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봄을 맞이한다. 최명길이 말한 그 수치는 결국 백성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고, 패배자의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은 만 백성을 지켜야 하는 임금의 책임인 것이다. 처음에 작은 것을 내주기 싫다가 점차 큰 위협으로 오자, 비로소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한다. 남한산성 내 피신한 자들의 기록을 보면 사실 비참하다. 먹을 것도 없고 추위는 여전히 온 몸을 얼게 만든다. 고립되어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강화도에서 들려온 포로가 된 왕세자 가족의 기별은 인조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지경이 된다.

 

국가에서 살아가는 것은 백성 혹은 국민이나, 어떻게 국가적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가의 일이다. 정치가가 어떤 상황에 문제가 발생하여 자신의 입장이 난처할 때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자신에게 더 큰 장애물이 다가오고, 국민들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남한산성>에서 서인들은 무능했지만, 그들의 눈에서 광해군 역시 무능한 임금이고, 광해군 시절 사대부가 아닌 천민들도 벼슬자리를 준 것에 대해 매우 거슬리게 생각한다. 어느 누구는 돈을 주고 관리직을 받았다고 하나, 그런 점은 명종시대가 더 심각했다.

 

백성들 입장에서 왕이 누가 되는지가 관건이 아니라 전쟁이 나지 않고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좋은 것이다. 때로는 자신들의 말이 위로 가서 언로가 막히지 않은 것이 중요했다. <남한산성>에서 보면 백성의 언로가 철저히 막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솔직히 인조와 조정대신, 유생이 없어도 백성들은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의 사소한 자존심이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가장 한심한 장면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가 청나라 군대를 습격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불찰을 부하에게 떠맡기는 모습이다. 실제 정사에서 김류는 청나라 군대가 매복 유인을 위한 보급물자를 군사를 풀어 가져오게 하다가 모두 몰살시켰다고 한다.

 

병자호란은 결국 명나라의 재조지은에 대한 충성심에서 자초한 사건이고, 청국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국제정세를 판단한 광해군을 폐위한 것은 김류이다. 김류를 비롯한 많은 조정대신은 백성의 삶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전쟁에 내몰린 것은 백성으로 이루어진 병사이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조 이후 효종과 헌종, 숙종과 영조로 넘어가면서 정치권력이 누가 되던 백성은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 권력자들이 백성의 삶을 좀 먹는 자가 아니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권력자가 없으며, 그런 짓을 저지하려던 정치가들은 모조리 숙청된다.

 

영화 <남한산성>을 두고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풀이하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사실 역사를 두고 비슷한 사례로 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어느 하나에 매몰된 이유는 없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말이다. <남한산성> 영화는 그 영화 자체로 본다면 비극이나, 이미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입장에서 소극에 불과하다. 정치적 상황과 배경, 인물만 다를 뿐 반복되는 역사는 늘 우리 앞에 등장했다.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을 논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두고 <남한산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당한 착오일 것이다. 최명길과 김상현의 대사에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김상현은 과거에 불과한 인물이고, 최명길 역시 그런 과거와 함께 퇴장해야 할 존재이다. 최명길이 진보이고, 김상현이 보수라고 프레임을 나누고, 보수와 진보의 눈으로 모든 것을 정하는 순간, 그 담론조차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물론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을 넘어 진보적으로 갈 수 있지만, 그 진보적인 성과란 나루와 날쇠의 삶이다. 삶이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를 말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들 입장에서 과연 그것이 올바른 답을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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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7-10-23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회되면 정도전,서경덕,조식,이황,이이,정약용 같은 조선 유학자들에 대해서 얘기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듯 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7-10-23 09:22   좋아요 0 | URL
아 너무 할 게 많습니다!!
 
미수 허목 - 청빈한 대쪽 선비
허찬무 지음 / 진한엠앤비(진한M&B)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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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이용하여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기 전에 제대로 시청하지 못한 드라마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 드라마는 <불멸의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을 다룬 작품인지라 우리 민족이 겪은 최대 위기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의 고통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이순신 장군이라 강직하고 지혜가 넘치는 명장으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 이순신에 대한 위인전을 읽으면 가난한 사대부집안에서 태어나 무관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낙방하여, 이후 다시 합격 후 수군 장수가 되어 왜군을 물리치고, 노량해전을 마무리하여 서거한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막상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재구축한 <불멸의 이순신>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달라진다. 20세기 이순신과 21세기 이순신은 다르다. 2세기 모두 이순신은 성웅이고 명장이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인 것은 분명하다. 전자는 영웅주의에 대한 모습만 강조했다면, 후자는 고뇌하는 인간, 그리고 성찰하는 인간, 모두와 뜻을 나누는 인간 이순신을 다루었다. 이순신 장군은 신은 아니나, 우리 민족이 망하는 그날까지 바다의 신이 되어 줄 것이다.

 

이순신의 죽음을 보면서, 그의 죽음은 교전 중에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때를 맞추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순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은 왜군의 조총이나, 이순신이 심장을 멈추고자 결심하게 만든 것은 조정의 권력다툼이었다. 이순신은 이미 조선의 영웅이었고, 당시 군왕인 선조보다 더 높은 존재였다. 선조는 그가 자신보다 우월하고 뛰어난 영웅임을 알고 있었고, 그가 조선에서 가장 필요한 인재라는 사실도 알았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 없고, 지금 당장 제거해야할 역적으로 삼았다.

 

이순신의 친구 서애 유성룡은 말한다. 진실로 말했는지 모르겠으나,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끊임없이 조선의 백성을 걱정한 그의 태도를 보자면 충분하다. 드라마에서 선조에게 이르길 나는 군왕을 섬기지 않으며, 내가 섬기는 것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는 군왕을 섬기고 싶다고 말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미화(美化)될 수 있는 인물은 광해군이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선조 내지 조정대신과 같이 회의석상에서 그가 전하는 말이 실록 내지 사료에서 충분히 기재될 수 있으며, 심지어 <난중일기>에도 이순신 장군이 광해군을 걱정했다고 하니 말이다. 광해군은 민심은 천심이고, 백성을 무시하는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을 질투하는 아버지 선조 앞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수군지휘관 선발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도 그렇다. 조선시대 반상의 차이로 과거는 사대부만 할 수 있으나, 일개 군졸이 지휘관으로 삼으려 하는 이순신의 정책은 선조나 조정대신에게 큰 반발심을 일으켰다. 모두 반대할 때 광해군은 세종대왕 때 장영실을 당상관을 임명할 사례를 말하며, 이순신의 정책을 지지한다. 반상의 양천에 얽매이지 않고, 백성 그 자체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광해군이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선조나 인조 이상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태조와 태종을 제외한 나머지 군왕과 달리 직접 전쟁을 수행했으며, 전쟁에서 함께 뜻을 나눈 자와 관련하여 태조와 태종은 장병과 소통했다면, 광해군은 백성과 소통했다. 광해군이 모든 것을 잘 한 것은 아니나, 그가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권력과 백성의 관계는 다르다. 권력을 사랑하는 자는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소외받기 때문이다. 힘을 가져야 백성을 사랑할 수 있다고 여긴 선조도 결국 백성보단 권력을 선택했다.

 

이순신의 죽음과 유성룡의 파직, 그리고 수많은 의병장의 몰락은 그 증거이다. 조선시대 역사에서 권력의 패자들은 정말 많다. 말도 안 되게 파직, 장형, 유배, 사사, 참수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피의 역사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조선이 대한제국을 걸쳐 대한민국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이고, 왕조시대는 아니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대한제국의 한 글자의 차이다. 대한의 나라는 주인이 왕에서 국민이 되었을 뿐이다. 조선이란 역사와 문화가 대한민국의 모습을 갖추게 한 원동력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은 정말 많았다. 권력의 패자는 비참하게 운명을 맞이했다. 권력의 승자와 후예들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넘어 현대사회에 와서도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까지나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어도, 민심 그 자체를 움직이는 것은 무리이다. 역사의 기록에서 권력의 패자가 이제는 영원한 승자가 되었다. 이번에 읽은 서적이면서 그 인물인 <미수 허목> 역시 그렇다. 가난한 선비고, 늙은 나이에 벼슬에 올랐지만, 조선 역사에서 위대한 정승으로 이름을 남겼다.

 

물론 그는 숙종 시기 경신환국으로 벼슬을 잃었다. 자신과 같은 당인 남인은 사사 내지 유배, 장형을 당해 죽거나 몸을 상했다. 정조에 이르러, 정조에게 깊은 존경심을 받은 인물이 되었고, 정약용 선생에게도 큰 감명을 주기도 했다. 가난하지만 대쪽 같은 선비, 조선은 유학 성리학을 토대로 국가가 돌아가는 세상이다. 성리학으로 시작한 조선이 성리학으로 망한 이유는 성리학의 기본적 학문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보수보다 더 보수적인 수구형태로 될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진보적 성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도를 말하고자 하는 점에서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기본 진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책에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으로부터 하며, 하늘이 듣는 것도 우리 백성으로부터 한다.” 지금은 국민이나 그 당시에는 백성이다. 백성은 군왕의 하늘이어야 존재이고, 민심을 뒤로 하는 군왕은 폭군(暴君) 내지 혼군(昏君) 같은 어리석은 임금이다. 백성이 삶에 힘들어 곤충을 말하는데, 나라님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다. 만일 그 원망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성군이 되나, 그 말을 듣고 증오하여 칼을 휘두르면 수 천 년의 역사가 그를 손가락질 한다.

 

서양의 근대 민주주의를 성립하게 만든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미수가 말하는 국가관은 다스려진 나라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쇠퇴한 나라는 대부를 부유하게 하고, 망하는 나라는 정부를 부유하게 한다.” 루소 역시 민주정, 과두정, 군주정에 대한 정치제도를 <사회계약론>을 통해 설명했으며, 참주정과 과두정에 대한 문제를 잘 설명했다. 폭군은 참주가 아니나 참주는 언제나 폭군임을 말하듯이 말이다. 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신하들끼리 당파싸움을 통해 서로 피를 물들게 하고, 자신의 권력의지와 신하들의 권력의지가 일치하면 동조하기도 했다.

 

고관대신들은 사대부들이다. 미수 허목은 사대부라는 선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 이유는 천하에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이다.” 하지만 자칭 선비라는 사대부들은 걱정거리와 다툼을 풀어주어 보상받는다면 다행이다. 아무 것도 하지도 않고 보상을 바라니 참으로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가 없다. 이미 황구첨정과 백골징포는 시작되고 있었다.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아이가 군적에 오르고, 시아버지 죽은지가 몇 해가 지나도 군포를 내고 있다.

 

세금을 내지 못해 이웃에 세금을 내게 하거나 그들의 친척에게 물리도록 하여, 어떤 마을은 아예 사람조차 살지 않는다. 모두 가렴주구라는 관리들의 횡포에 참지 못해 고향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진다. 병으로 죽고, 굶어 죽고, 매에 맞아 죽는 이 원통한 비극에서 선비들이 해야 할 임무는 그들을 마을에 다시 모여들게 하여 생업에 힘쓰도록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겁박하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허목이 가난하게 살고, 직접 몸소 근검하여 절약하는 이유는 권력자가 하나를 더 가지면 누군가는 하나를 내어주어야 하고, 가난함을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버림받은 백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비들이 부에 집착하면 농민의 농지를 빼앗고, 백성의 딸과 아내를 빼앗아 간다. 백성은 글을 모르며 고을사또가 있는 관아의 담장은 높고 문 앞의 포졸은 성난 이리와 같다. 하소연하지 못하고 그저 신음하며 세상을 원망하니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권력을 잡고 이권을 챙기는 자들과 대적해야 한다. 허목이 반대당인 노론에게 상당히 좋지 못한 자로 낙인이 찍힌 이유는 바로 그러하다. 권력의 패자로 될 수밖에 없었지만, 죽어서 칭송받는 이유는 바로 그런 연유이다.

 

허목은 세종 때 황희, 선조와 광해군 시절의 오리 이원익과 더불어 임금에게 직접 집을 하사받은 정승이다. 게다가 허목은 오리 이원익의 손자사위였다. 이원익은 이 글의 초반부 이순신 장군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선조에게 충언을 드린 인물이다. 백성을 사랑하고, 언제나 검소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과 벼슬자리가 박탈되어도 소신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원익은 가난하지만 영민한 허목을 아껴 제자를 삼고, 그에게 손녀를 주었다.

 

그들은 청백리로 인정받고자 선비의 정신을 보여준 게 아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비로 살아온 것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오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양반이 되었다. 그 성씨가 원래 반가의 집안도 있지만, 너나 나나 연애는 서로 간 자유이다. 여자가 반가의 후손이든, 남자가 반가의 후손이든 모두 반가의 후손이다. 하지만 선비의 정신을 그대로 가진 자는 얼마 없다. 고리타분한 시대착오적 발상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를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선하고자 하는 인물이 선비이다.

 

허목은 예라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효종과 헌종 시대에 예송(禮訟)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큰 당쟁 중 하나였다. 예송에서 상복의 착용기간이 얼마나 중요 하겠는가 라고 말하지만, 군왕을 사대부와 동일하게 보는지 아니면 그 이상으로 보는지에 따라 왕권과 신권의 권력관계가 성립된다. 허목은 왕권을 추구했다. 왕의 권력을 높이고자 할 때 개혁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서로 간의 당파적 이익도 있으나, 당론의 채택되지 않으면 정책의 실현이 어렵다. 남인의 반대세력인 노론 역시 대동법을 두고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나누어 대립했다.

 

대동법이 도입된 이유는 정치 권력가와 상인들의 농간을 막기 위해서이다. 백성에게 요구되는 진상품을 상인에게 억지로 사게금 만들고, 그 상품의 가격을 너무 높이게 되면, 백성에게 따르는 생활고는 당연히 힘들어진다. 그래서 일정한 세금납부 방법을 정하여 세금을 부과한다면 백성에겐 그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거기에 두고 노론 내부에도 서로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당 내에서 당론이 대립되니, 다른 당끼리의 당론은 더 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론을 두고 조정과 군왕, 조선의 종조를 논하는 자들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며, 당론을 두고 백성의 기근과 고충을 걱정하면 충신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는 언제나 권력을 원한다. 조선 백성이 당해온 그 억압의 시간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은 결국 시스템의 문제였던 것이다. 미수 허목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적 대안이 필요했고, 남인의 영수로 활약한 것이다. 물론 제일 중요한 시작은 인사이고, 인사의 시작은 과거이다. 과거에서 이루어진 부정부패는 광해군 시절보다 심하다고 한다. 물론 광해군 이전인 명종시대의 부정 과거는 더욱 심각했다. 조선은 척신과 권신들의 농간을 피하지 못해 망했다.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자신의 기반이 되는 자들을 뽑아 올려준다.

 

그들의 능력과 성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얼마나 충성할 수 있는지에 따라 성과가 달라진다. 이런 자들이 올라오니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서 사라질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허물이 없을 수만은 없을 것이나, 적어도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현실이 가진 문제의 본질을 안다면 그 역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나. 그조차 반성하지 못하고 부와 권력을 탐닉하고 스스로 붕괴하는 권력가의 마지막을 종종 본다. 미수 허목은 그런 본질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살아왔다. 허목은 인자한 늙은이의 눈썹처럼 미수(眉叟)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 미수(米壽)의 인생으로 살아갔다. 그의 길고 긴 하얀 눈썹이 그려진 초상화는 국가의 보물이 되어 우리 삶에 새로운 감동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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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0-11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의 「국가」에서 말한 철인정치가 잘 구현된 시대가 조선시대였다고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주리론‘의 한계를 넘지못한 철학자들이 집권한 시대에, 서양에서는 과학문명이 융기했다는 점이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라 생각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0-11 09:04   좋아요 1 | URL
국가라는 책을 보면 단순히 군주제보단 정치력과 무력을 동시에 가진 철인군주이나, 조선의 왕은 철인군주로 될 만한 임금은 얼마 없었지요. 정말 권력을 위해서라면 피를 피로 씻는 당파싸움까지 이용하니 철인에서 철이 哲이 아니라 鐵이라 생각 듭니다. 성리학에서 공자의 기본철칙을 생각했다면 저래 되지 않았겠죠
 
광해군 - 하
이기담 지음 / 창작시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광해군을 소재로 하던 소설에서 <대왕 광해군>은 광해군 이혼보다 어느 서얼이던 동명이인 이혼을 중심으로 내려간다. 물론 한자로 이름은 다르더라도 이혼이라는 맥락일치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목표로 하는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이번에 읽은 그냥 <광해군>이란 소설은 주인공 자체는 광해군으로 둔다. 우리가 아는 광해군이란 조선임금 중에서 연산군과 더불어 종조를 붙이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가 대부분 아는 것은 광해군이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오를 때, 중립외교를 했다는 점, 그리고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죽인 것, 인목대비를 폐서인으로 하여 불효를 했다는 점이다.

 

하늘의 도를 내세워 광해군을 비판하면 어느 모순이 생긴다. 태종 이방은 형제와 사촌을 죽이고, 세조는 단종을 죽였으며,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뿐인가?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서 죽도록 만든다. 그냥 편하게 독약을 내리는 사사(賜死)가 좋다. 반란이 있거나 예상되는 인물 그리고 정치적 숙적들은 항상 죽음을 당한다. 왕가의 친척들은 든든한 아군이기도 하나 절실한 적이기도 하다. 모든 일이란 전후맥락이 존재하고, 원인에 대한 결과에서 그 원인에 대한 근원이 있다.

 

광해군을 본다면 정말 난해한 인물이다. 혼군(昏君)이라 하나, 조선시대에서 내려온 유산 중 그가 만든 업적은 탁월하다. 궁을 복위하고, 전쟁으로 사라진 도서를 재편찬하고, 지금 한국의 의술 한의학을 정립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게 만든 인물이다. 동의보감의 가치는 현대의학에서 그대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외의 서적도 역시 한국의 중요한 유산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된 서적을 복원하고, 실록도 1곳에 보관한 것을 4곳으로 늘려 보관하게 한 것도 광해군의 업적이다. 실록을 현대 한국에서 국가의 보물로 삼았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 400년 전 그가 하던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었는가?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에 있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한다. 광해군 시대는 북인과 서인이 공존하고, 서인이 열세하자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한다. 서인이 주도로 작성한 광해군일기나 서인에서 노론이 중심이 되던 조선의 정치사에서 광해군의 존재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소설 <광해군>에서 어느 정도 실화이고 어느 정도 가정인지 모르나, 적어도 실록의 기록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광해군의 말이나 강홍립의 의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적어도 강홍립이 없었다면 병자호란 이전 정묘호란에서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전쟁영웅이 모두 제거되는데, 그 대부분은 선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이나 영원한 해군제독인 이순신 장군을 봐도 그 죽음이 부당하기 짝이 없다. 전쟁에서 주요활동인물은 동인세력이 주축이 되는데, 동인도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져 남인 유성룡 세력이 퇴각이 북인이 급성장한다. 북인이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갈리고, 대북은 다시 또 분당한다.

 

광해군은 붕당정치가 시작될 때 그 당쟁의 희생자였고, 폐위와 그 이후의 삶 역시 당쟁의 희생자였다. 당쟁의 문제는 유학이 백성을 도학으로 치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론의 이익을 따라 모두 따른다는 점이다. 당쟁의 문제는 전쟁의 대응력까지 문제되고, 임진왜란 당시 순국지사 학봉 김성일은 분명 훌륭한 유학자이나, 일본 왜국 방문 시 서인과 반대되는 당론을 추구하다 전쟁의 화를 만들었다. 전쟁이 나면 가장 문제인 건 전투보단 국민, 백성의 안위다. 선조는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치고, 그 아들인 광해군을 남겨 분조를 이끌게 했다.

 

<광해군>에서 광해군은 분조를 기회로 보나, 최근 개봉한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군의 모습은 그저 힘없이 내몰린 희생양이었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의지가 없다가 전쟁이 나자 신성군을 마음에서 버리고 광해군을 선택한다. 전쟁을 지휘하라 하나, 막상 전쟁터에서 언제 참극을 피할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광해군은 임금시절만 보나, 사실 광해군의 탁월함은 전쟁이었다. 분조를 이끌며 의병을 독려하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한양을 되찾은 후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백성들은 다독거렸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저잣거리에서 형편없는 밥상을 백성과 같이 먹어주던 임금은 오로지 광해군이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올라가 도망치기만 바빴다. 결국 체면과 생존에서 체면을 버리고 삶을 택했다. 대신 백성 수십만명이 청국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거나 평생 돌아오지 못했다. 설사 돌아와도 수많은 돈이 지출되고, 아녀자들은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바뀌어 창녀 취급을 받았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추구한 것이 드러나는 것은 곧 지배계층이 어리석다는 것은 반증하고, 임진왜란 당시 명의 황제가 칙서를 선조가 아닌 광해군으로 내린 것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여 조선을 흔드려 했다.

 

소설에서 광해군은 선조에게 명군을 파견하지 말 것을 청하는데, 유성룡도 그런 말을 한 것을 보면 그 고증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단지 명이 오는 이상 조선은 그 이상의 대가를 줘야할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오면 큰 빗으로 쓸고 간다면, 명나라는 참빗이 쓸고 가는 형국이라 했다. 가는 길마다 강간, 살인, 약탈이 끊이지 않으니 천군이란 명성은 그저 강도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선조가 재조지은을 내세우고, 대신들도 광해군에 이르러 그 뒤에도 재조지은을 말하는 이유는 지배계층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실 임진왜란은 명군의 도움은 초반에 없었고, 전쟁의 승리가 눈에 보이자 공을 내세우기 위해 움직인다. 후에 명군을 분명히 왜군을 소탕하였지만, 임진왜란의 승리는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의 장수와 의병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선조와 인조반정 세력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광해군이 분조를 지휘한 것은 만 백성이 알고, 거기에 의병이 나와 왜군을 격퇴한 것은 타국도 알았다. 영화 <광해>에서 광해군의 가슴에 흉터가 있는데, 그것은 전쟁 중 활에 맞은 상처이다. 가슴이 활에 공격당했다면 죽을 공비를 넘겼다. 일국의 왕자가 죽음을 당할 뻔 했는데도, 그는 도쿠가와 막부와 외교를 맺었다.

 

전쟁을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소설 <광해군>은 오로지 백성의 편을 생각하는 군주로 묘사된다. 실제 한명기 교수의 연구도서를 보면 광해군이 폐위될 때 백성들은 모두 놀라워하고 두려워했다. 이때 오리영감 이원익이 한성부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진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무리수는 내부 권력의 다툼이었고, 백성들은 궁궐의 권력암투는 일상화가 되었기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토목공사로 재정을 많이 낭비했지만, 명나라에 군을 파견하여 여진족에게 몰살당하는 것보다 났다. 만 명 중 7000여명이 살아왔다면 오히려 그게 더 큰 이익이다.

 

궁궐 토목공사 자체를 긍정적이지 않으나(물론 현대 한국인들은 이런 것이 있기에 즐겁게 한양나들이를 돌아보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많은 장정을 잃는 게 국력의 훼손이 크다. 광해군은 역대 임금 중 태조와 태종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쟁을 수행한 군주이다. 그는 직접 백성들 상대하고, 그들의 원한을 들었다. 아니 들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백성을 지켜주지 않으면 전쟁에서 광해군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탐관오리에 의해 배를 굶고, 포악한 사대부에게 딸을 빼앗기며, 그 원통한 사연은 어디 가서 호소조차 못한다.

 

파주현감 조명식이 실존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대동법 초안이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만나 그 의미를 찾았는지 알 수 없다. 단지 대동법이 김육이 제안했다고 하나, 사실 남인영상 이원익이 시작했고, 이원익은 광해군 북인시대에 초라한 남인세력이다. 그는 성격이 워낙 온순하고, 백성들에게 친절한 청백리였으며, 전주이씨 후손으로 종실이었기에 그만큼 추종을 받았다. 하지만 권력과 무관한 인물이었기에 단순히 이원익이 주장한다고 하여 그 세에 따라 대동법 시행이 되었다면 논리가 서지 않는다.

 

당시 양반들은 농지지주가 되어 많은 이익을 차지했고, 김육이 대동법을 주장할 때 산당의 서인들이 모두 반대했다. 광해군이 폭군으로 등록이 된 이유는 겉으로 폐모론과 골육상잔이겠지만, 그 뒤에는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자들의 물밑작업이다. 소설은 그런 광해군의 고뇌가 잘 드러난다. 광해군이 물러나자 정묘호란이 일어날 때 여진족 군사는 협약을 맺지 않을 경우, 남하할 때마다 백성들의 집을 모조리 없애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고 했다. 여진족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그들은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밟아버렸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단 일말의 자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광해군의 입장에서 전쟁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병사로 차출되어 비명을 질렀는지, 하얀 옷을 입은 백성들의 시체가 너무 많아 흰 무덤을 보았다는 말이 나올 때 전쟁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도 한국전쟁을 겪으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지만, 더 슬픈 것은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다. 상대진영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면 모조리 길가에 끌고 와서 총살시키던 그 사진은 너무 끔찍했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현재 북핵문제로 한국은 전쟁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미국에서 연구한 결과, 한국이 전쟁이 날 가능성은 50%이고, 하루 민간인 사망자는 2만명이라 하는데, 사실 2만명은 최소이다. 장기전이 되면 전쟁의 폭격이나 화생방 상황만 아니라 식수와 식량문제, 전염병 각종 범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21세기 전쟁은 16세기 임진왜란처럼 활과 조총, 그리고 칼과 창이 아니다. 20세기 한국전쟁처럼 총과 대포, 프로펠러 전투기도 아니다. 제트전투기가 폭격하고, 지대공 내지 지대지 미사일이 수백 내지 수천를 강타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또 다시 역사의 반복이란 시련에 빠져든다. 광해군이라면 현대의 한국을 어떻게 할까? 외교적으로 어떻게 하고, 전략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대는 대부분 활로 사격을 했으나, 왜군의 조총에 밀렸다. 조선에도 화약제조에 관심을 가진 것과 조총 정예부대를 만들어 전쟁의 불화를 번지지 않게 한 것도 대단한 혜안이다. 국방력은 그 나라의 운명은 좌우하고, 외교에 대한 정보처리는 일각을 좌우한다. 소설 <광해군>은 그런 심정에서 광해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흘러간다.

 

분명 정치적으로 실정이 있었고, 그가 실수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대북 이이첨은 처음에 광해군을 도왔지만, 후반부에는 광해군은 그를 멀리하려 했고, 중국과의 외교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것은 노론의 입장에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재조지은의 명나라를 올리지 않은 점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을 파병시킨 자신들의 입지가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명군을 그렇게 올린 이유는 임진왜란의 문제가 정치적 무능함을 상기시키고, 왜란의 해결사가 조선의 백성이라면 사회적 모순에 대한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결사가 명군이고, 그것이 선조와 권력층이고, 의병의 활동이 들러리라면 기존의 정치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명나라가 존재하기에 그 명분을 들먹일 수 있는 것이고, 명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의 입지 역시 좁아지는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 을묘왜변 같은 큰 전쟁이 있지만, 한양이 함락된 사례가 없었기에 섞은 물은 그대로 고여만 갔다. 소설에서 광해군의 말년이 나온다. 늘 우울하고 비참하며 슬픔에 젖은 그는 어느 조정의 신하가 올린 장계처럼 비참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비참함 이상으로 조선의 백성은 더욱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대신에게 내 나라 백성이 소중하고, 그깟 사대가 무엇이 중요하냐? 식으로 이야기한다.

 

남한산성에 몰려 척화파와 주화론자들이 분열할 때 조정은 아직도 권력 또는 명분에 집착했다.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명분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지 백성의 입장은 전혀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재미있는 사실 1가지를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근왕병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기 의병과 근왕병이 거의 없었다. 백성들은 왜란에 따른 후유증이 너무 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의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하지 않은 것은 의아한 일이다. 왜 그럴까? 광해군 분조시기에 의병이 전국적으로 넘쳤다. 광해군의 평가는 모두 긍정적일 수 없다.

 

그러나 민심에 의해 움직이는 의병활동은 생각해볼만하다. 그 이후의 의병은 기존 왕조에 동조하여 일어난 의병보단 항일운동 및 동학운동과 같은 민중봉기가 더 많이 발생된다. 조선이 망하자 조선독립을 위한 의병활동이 있었지만, 조선의 군주보단 조선의 백성을 위한 의병이 더 많이 나온 점을 생각하면 광해군이 보여준 분조활동, 그리고 거기에 얻은 경험을 정치로 활용하는 점에서 그가 혼군이라는 평은 너무 지나치다. 그는 혼군이 되어야 했던 군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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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퇴근길 버스를 타고 가는데, 마치 노 키드 존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진행자와 패널, 그리고 시청자의 전화까지 받아보면서 노 키드 존에 대한 열렬한 의견이 오고갔다. 기본적으로 노 키드 존에 대한 내 의견을 밝히자면 찬성이다. 진보성향이 있지만, 진보언론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은 것이 의아하겠지만 그렇다. 그런데 진보신문사의 글을 보면서 내심 의구심이 들었다. 나중에 정리하겠지만, 진보성향 언론은 뭔가 핀트가 일괄적이지 못하고 점차 파상적으로 흩어진 맥락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 소고를 적어 내려가는 이유는 언론과 방송에서 모든 원인을 제대로 간파하지 않았다. 어느 유명한 식당의 주인의 인터뷰를 보면서 답은 이미 그곳에 나와 있는데 말이다. 노 키드 존에 대한 인식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그 전에 아이들이 오면 어떠한가? 그렇게 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노 키드 존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 것이 과거라고 한다면 어떻게 보는가? 어린이에 대한 훈육과 어머니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분명히 있다. 가정주부로 고생하여 아이하고 같이 집밖에 나와 산책도 하고 맛있는 차 한 잔을 하고 싶으며, 게다가 자신 역시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을 것이다.

 

그런 것은 문제가 없다. 아이가 옆에 울고 보채면 달래주어야 하나, 가끔 매장을 보면 그것을 무시하고 서로 수다 떨기 바쁜 분도 있다. 하지만 모든 분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의 몰지각한 분들로 노 키드 존이 완성될 수가 없다. 단지 노 키드 존이 생성될 수밖에 없는 변증법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은 우리가 분명히 가져야 한다. 전에 어느 유명한 식당 인터뷰를 보았는데, 서울 중심상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식당이다. 점심시간에 발 딛을 틈도 없이 바쁘며, 손님은 가게 안에 늘 왕래했다.

 

이 가게가 처음에 노 키드 존을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11식을 원하지 않았다. 어느덧 11식에 노 키드 존까지 이어졌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임대료가 올랐다고 한 것이다. 내 기억에 인터뷰를 진행할 때, 한 달 임대료가 약 2,000만원 가까이 된 것으로 기억한다. 2,000만원 임대료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을 4명을 고용한다고 생각하자. 급료는 1인당 약 150만원이면, 1달 최소비용은 2,600만원이고, 거기에 음식재료, 전기, 수도, 세금, 각장 감각상각비를 고려하면 최소 월 매출은 5,000만원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임대료가 처음에 2,000만원이 아닌 1,000만원이라면 최소매출은 4,000만원으로 보면 되고, 지금 가게를 방문해주는 손님의 80% 정도면 충분하다. 가게를 이용하는 손님이 오고가는 전환비율만 제대로 되면 문제가 없다. 1인당 주문 및 식사시간이 40분이고 좌석이 20개 정도라면 점심시간 12:00~14:00 사이 20 × (120÷40) = 60명이 온다. 1인당 1만원이라면 60만원의 매상이 오르는 것이다. 만일 1인당 1식단이 아니라면, 그것도 2인이 1개만 시키고, 식사시간도 많지 않고 부수적인 것까지 제공한다면 가게 입장에서 손해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시간당 비율 손님이 오는 것과 매상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단지 과거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 왜 문제인가? 라는 설정에서 문제는 가게를 찾는 손님이 아니라 가게에 손님이 전환비율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전에 유명 치킨 메이커가 비싼 가격으로 상품을 팔았다. 2만원이 넘어가는 가격에 막상 원자재 육계의 가격은 2만원의 101조차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비용은 무엇인가? 치킨집 인건비를 생각해도 아르바이트생이 200만원 이상 될 리 없고, 다른 재료비를 다 합쳐도 육계 1마리의 반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대기업에서 영업점에 요구하는 상품메이커 가격이고 나머지 임대료이다. 가령 2만원 짜리 메이커 통닭이 있다면 메이커 없는 치킨은 15,000~18,000원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 명확한 답이 있어도 언론은 부모의 자질이나 사회적 소통문제로 여긴다.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과정에 대한 고찰은 없다. 진보언론의 문제는 가게 점주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않았고, 진영적 논리로 따지고, 보수는 자본주의적 문제가 가진 본질을 피한다.

 

요새 새로 지은 아파트 1채 가격이 서울에서 5~6억이 기본이라 말을 들었다. 강남이 아닌 지역에서 그렇게 요지부동으로 가격이 오르니 임대료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르고 있다. 서민들의 시장물가는 엉망이고, 집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다. 형이 얼마 전 통화하면서 앞으로 젊은 사람들은 집 사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 부동산 투자하지 않으면 돈 벌기 어렵다며 한 번 재고하라는 말을 한다. 문제는 알면서도 문제해결보단 문제의 본질을 두고 이익을 챙기려 하는 점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문재인 정부가 전번 정권처럼 부동산경기를 엉망으로 하지 않겠지만, 부동산을 잡기가 어려울 것이라 말에서 주변 사람의 말을 들으니 과연 그렇다. 내 아이가 나하고 좋은 곳에서 먹기 어려운 이유는 No-Kid Zone이 생긴 이유도 있지만, No-Kid Zone이 생기기까지의 한국현실은 외면하고, 거기에 동조하여 부동산투기에 빠진 현 실태에서 가게점주를 탓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집 옆에 메이커 브랜드 아파트가 오는 것은 좋아해도, 영세한 시민을 위한 임대주택이 오는 것은 반대이다. 그런데 이런 점을 논하지 않는 언론이다. 그들은 밑바닥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진영의 논리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 놀이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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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광해군 1
박혁문 지음 / 늘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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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중에서 가장 칭송을 많이 받은 인물은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다. 세종대왕은 문의 극치로 훈민정음을 반포했다면, 정조대왕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만든 문무를 겸비한 군주이다. 그러나 2사람의 조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세종의 아버지는 태종 이방원이고, 그는 강력한 군주세력을 만든 장본인이다. 결국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으며, 권력을 조금이라도 이용할 가능성이 농후한 척신과 고관대신을 숙청했다. 심지어 형제의 목을 내치니 그의 잔혹함에서 다들 너무한 임금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백성의 입장에서는 성군이라 볼 수 있다.

 

권력이 세분화된 가지로 집중되면 결국 이권이 몰리며, 그 이권의 토대는 백성의 노고로 이루어진 것이다. 임금은 피로 이어진 세습제이나, 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의 삶이다. 백성을 해롭게 하는 인물이라면 형제라도 아내라도 내쳐야 한다. 임금은 왕자에게 하나뿐인 아버지이나, 임금은 만 백성의 어버이여야 하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임금이 진정한 군주이듯이 그 시기가 잘 맞으면 성군으로 기록으로 남겨지나, 그렇지 못하면 평생 폭군이란 명칭이 남아 전해진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할아버지로부터 임금을 승계 받은 군주이다.

 

영조는 처음에 사도세자를 죽일 때 그 자신의 입장과 노론의 정치적 입장이 어느 부합되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정조가 올라갈 때는 그 시점이 달랐다. 사도세자는 죽어도 사도세자의 아들은 살아있고, 사도라는 이름도 결국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에 대한 슬픔과 후회로 이어진 것이다. 조선의 왕조는 최고 권력자라고 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조선은 역대 한국의 왕조국가와 다른 형태의 정치구조이다. 고구려와 발해, 고려 같은 경우는 북방의 중국에서 독립하여 자치적으로 세운 국가이다.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해도 결국 고구려는 고조선의 영토를 중심으로 활동한 점, 발해는 고구려와 말갈부족의 후예들이 건국한 점, 고려 역시 내분에서 시작했으나, 북방 중국과 외교적 분쟁이 있었다.

 

중국대륙과의 종속관계는 몽골의 침입에서 시작했고, 몽골이 원나라로 이어진 후 명나라에 뒤에 명나라에 삼켜진다. 명나라가 새로이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무신이면서 반정으로 조선을 만들었다. 결국 조선은 반정의 국가이고, 반정 무신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세력이다. 반정의 역사는 세조와 중종, 그리고 인조에 이르게 된다. 조선의 왕은 순탄하지 못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중종은 이복형 연산군의 눈치를 보고, 명종은 후사가 없어 대비의 의지에 따라 조카 선조에게 인도된다.

 

선조가 오르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선조는 원래 왕세자가 아니라 조카인 점에서 권력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대신들은 동서로 분당될 시기이다. 붕당정치를 만든 폐단 제공자 중 단연히 책임자는 선조이다. 선조는 두 당으로 갈라진 신하를 보고 서로 죽이기까지 하던 정치적 음습을 고려하여 정쟁에 참여했다. 왕권을 살리기 위해 신권을 죽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신권을 키우게 되었다. 왕은 강해도 왕자들은 여럿이 있기 때문이다. 불운의 화는 광해군에게 미친다.

 

소설 <대왕 광해군>은 바로 동서분열과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질 때,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를 다루는 소설이다. 소설에서 광해군의 역할이나 모습은 그래 대두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존했던 김류나 신경진, 혹은 가공의 인물 이혼 등과 같은 인물을 내세운다. 그리고 마부태라는 청국의 장수는 진짜 조선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들을 보는 조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광해군이 등극하여 폐군이 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광해군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정말 광해군이 인조와 그의 계모대비를 향한 말이 사실인지 아니나,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광해군이 그린 외교적 판단은 정확했다. 역사학자 이덕일이나 오향녕 같은 사람 말고 한명기 교수의 서적을 보면 대충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전후의 세계정세와 조선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전쟁의 의도에서 많은 것을 내포하니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광해군을 오점으로 볼지 아니면 다른 관점으로 볼지는 많은 여지가 남아있다. 알라딘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조선의 임금에서 세종과 정조가 있었으면, 나머지 1명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을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는가?

 

세종은 태평성대의 시대고, 정조는 르네상스시대였다. 세종은 서구사회에서 르네상스가 도래한 시기이고, 정조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시기이다. 서구사회는 동양의 세계에 눈을 돌리기보단 내부갈등과 식민지정책이 아메리카로 향하고 있었다. 동양이 평온한 시기란 중국의 정치적 세력이 변하지 않은 점이다. 세종은 명국이 안정된 시기고, 정조는 청국이 안정된 시기이다. 태조 이성계가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시기 명나라를 따라 조선을 건국했지만, 광해군 시기는 명나라가 여진족에게 밀리던 시기이다.

 

명나라는 중국 한족이 한고조부터 시작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유학사상이 성리학을 중시하고, 조선 역시 성리학이 통치이념이 되었다. 공자의 사상과 달리 성리학은 지배계급 통치이데올로기를 중시한 학문이다. 어머니가 첩이면 태어난 아이는 양반이 아니라 서자로 평생 썩혀야 한다. 이런 사회적 모순은 능력이 있어도 신분제의 한계로 좌절을 맛본다. 광해군이 겪은 임진왜란과 광해군 이후 병자호란은 바로 이런 문제에서 조선을 후퇴시킨 문제였다. 책은 소설이나 서애 류성룡에 대한 연구서적을 보면, 류성룡 역시 정치적 문신이라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명나라를 의지해서 임진왜란을 종결할 수 없는 점, 명나라는 자신의 국경에 조선을 두고 왜국으로 침범 받지 않으려 한 점, 막상 명군이 파견와도 전투에 참가하기보단 눈치만 본 점, 명국이 상국인 점에서 무리한 요구를 계속 하는 점에서 자주국방이 중요했다. 왕권은 추락하고, 입만 놀리면서 권력을 탐하는 신료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조선의 백성은 굶주려 죽거나 말굽에 밟혀죽는데 말이다. 류성룡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무관의 자질이 있는 자가 공을 세우면 벼슬을 내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좌절되었고, 왜란 이후 탄핵되어 안동 하회마을로 내려가 평생을 마감한다. 그의 탄핵은 남인의 몰락이었고, 광해군 이전은 북인들이 득세하고, 북인은 광해군을 중심으로 대북, 영창대군을 중심으로 소북으로 갈라진다. 임금이 의지를 가져도 양반 사대부 신료들이 지지하지 못하면 임금의 결정도 결국 무마될 뿐이다. 소설의 시작 전에 이미 소설의 주인공 이혼의 한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혼을 보자면 북인이나 서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탄금대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해도 군령을 어긴 죄로 상관이 참수되고, 가상의 이야기지만 이이첨의 무리에 의해 가족은 몰살되었다.

 

명나라는 지고 여진은 올라오는데, 한양의 고관대신은 외교적 군사적 판단 내신 내부총질만 일삼고 있다. 권력을 가질수록 더 원하는 바고, 권력은 더 높은 권력을 위해 행사한다. 내외부의 위기를 넘어 더 나은 세계로 가기보단 그것을 찬스로 여겨 권력을 차지한다. 광해군 시절 북인들의 행동은 한심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멍청하기 짝이 없다. 세계정세를 읽지 못한 점, 명나라를 위해 출병할 때 자국의 백성에 대한 안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광해군 말대로 4만의 병력을 출전시키면 그들을 위한 국고와 식량은 둘째 치고, 나라의 백성이 없어져 큰 위기에 봉착한다.

 

만일 가족이 타국에서 잃게 되면 그 가족들의 원한은 어떻게 헤아려 볼 수 있는가? 광해군은 분조 당시 찬 바닥에서 잠을 자고, 전장에서 굶주리면서 백성과 같이 왜란을 이겨내었다. 광해군이 무리한 정책을 한 것도 있고, 그가 실책을 한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이룩한 일들도 많다. 업적으로 따지면 선조와 인조하고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의 대신은 재조지은이란 이름 아래 명국을 무조건 따랐다. 재조지은이란 이름으로 변방에서 고생하던 전쟁영웅은 조연에 불과했다.

 

전쟁영웅은 선조에게 미움 받아 죽음을 당해야 했다. 소설에서 인목대비 역시 선조 옆에서 한몫을 거둔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즉위를 반대한 세력이었고, 광해군이 선조와 인목대비에게 문안드릴 때 문전박대를 했다. 광해군이 선조에게 문전박대 당하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도 임진왜란을 거친 후이다. 아들에게 분조를 내려 전쟁을 책임졌는데도 말이다. <대왕 광해군>은 그런 광해군 시대의 명암을 가상의 인물로 통해 보는 책이다. 허균은 유용한 인물이나 역성혁명으로 사라진 자이다.

 

현재상황을 파악하고 지난 과거를 분석하여 앞으로 방침을 정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대사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권을 위해서라면 만 백성의 목숨도 아깝지 않은 자들이 결국 득세하는 역사의 일례를 보자면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나, 다행히도 승자도 그 당시의 승자이지, 먼 후예들에게 승자들은 백성을 팔아먹을 무뢰배에 불과했다. 인조는 홍타이지 앞에서 머리를 박으며 패배를 시인했고, 많은 조선인들은 청국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앞날을 대비하지 않은 덕분에 백성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왕은 수모를 당했다. 그런 것을 보고도 반성하지 않은 조선은 계속 되었다.

 

소설에서 인목대비가 화가 나서 광해군을 꾸짖는다. 인륜을 말하면서 말이다. 소설이니 그렇지만, 적어도 광해군은 맞는 말을 한다. 인목대비 한 사람이 백성보다 위에 있지 않다는 발언이 말이다. 동생 영창대군과 형 임해군의 죽음이 비극이지만, 그들의 죽음이 없다면 만 백성은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점을 말이다. 광해군의 몰락 그 스스로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광해군의 몰락으로 조선의 굴욕을 광해군을 몰락시킨 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알아야 했다. 조금 더 조선의 백성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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