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
서정오 지음 / 현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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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이란 곳에서 우리가 정말 알고 있는 신화는 얼마나 될까? 솔직히 말하여 단군신화, 주몽신화, 혁거세신화, 석탈해신화 등과 같은 건국신화 쪽이 아닌 이상 그렇게 많이 신화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사실 신화라는 것은 신의 이야기라는 풀이로 보이나 그 이면에는 신이 아닌 인간이 담고자 하는 하나의 가치관이나 관념들이 담겨진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아주 멀고 먼 과거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들 세대까지 내려온 우리의 관념적인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한국 신화는 그저 지나간 옛날이야기로 치부된다. 그런데 막상 알고 보면 신화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가 전혀 낯설거나 미지의 공간이 담긴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에서부터 습관, 관념, 문화, 풍습까지 다양한 면에서 신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신화에 대한 내용을 알아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신화라는 것은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꾸준히 만들어가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신화는 무엇일까?

대부분 우리가 접하는 신화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건국신화와 같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가진 신화이다. 이런 신화는 대부분 구술로서 전승되어 오기 보다는 서적에 기록되어 일정한 형태로 내려오는 기록신화이다. 기록신화는 한번 기록되어 문헌으로 전승되어 그 내용을 누가 임의로 변조하지 않은 이상 그대로 전해가기가 좋다.

반면 기록이 아닌 구술신화는 사람에 의해 글로 내려오기 보다는 시대, 지역,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고 또 바뀌어 간다. 같은 신화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 조금씩 다르거나 공간적·시간적인 배경이 다른 이유는 다 이런 것들이다. 그래서 구술로 내려오는 우리 신화는 다양한 소재로 사용되어 재밌고 신기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돌고 도는 신화와 신화가 아니더라도 전설과 민담 등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옛날이야기나 혹은 전래동화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로 통해 우리는 재미, 감동, 교훈을 얻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내려오는 신화 중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신화를 보고 느껴야 하는가? 우리 신화라는 서적은 우리가 알아야 할 많은 신화 중에서 아주 대표적인 몇 가지의 신화를 선정하여 만든 우리의 이야기들이다.


우리 신화라는 서적의 특징은 신화의 이야기와 흐름이 일반적으로 적혀있는 3인칭 관점을 서술하기 보다는 마치 그 신화를 누가 직접 봐서 그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나하나씩 해주는 듯한 문체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서적을 본 사람들은 어린 시절 자신이 보던 그림으로 이루어진 전래동화를 글자로 이루어진 전래동화로 보는 기분일 것이다.


신화로 보는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도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었구나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최근 한국은 서구사회 문화의 유입으로 서구사회 특성에 맞는 사고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시대는 변화하고 역사는 흘러가나 우리가 우리의 근본을 무시하면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체성은 희미하게 흐려져 갈 것이다.


우리가 우리 신화를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자아 정체성을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드시 이 책이 아니더라도 많은 한국 신화서적을 읽어봄에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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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화와 스토리텔링
김의숙 지음 / 북스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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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흔히 신화, 전설, 민담이라고 하면 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신(迷信)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 미신으로 취급하여 저급한 것으로 보는 이 신화, 전설, 민담 즉 설화 들이 아직도 우리 생활 구석구석 많이 차지하고 있는 줄을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선조의 느낌을 알기 위해 찾아가는 박물관이나 아니면 자신이 불교문화에 관심이 많으면 절간이나 아니면 명승지나 고향 제삿집에 가는 길도 다 이런 설화가 깃들여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생일을 맞이하면 이런 말을 한다. "너 아침에 미역국이나 먹었냐고?" 이 미역국의 원천이 무엇일까? 

그것은 산신할머니본풀이 즉 산신할머니가 탄생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하는 그 이야기를 신화에 고스란히 녹은 것이다. 한국의 선조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반드시 미역국을 먹였는데, 그건 미역국에 요오드 성분이 많아 항체능력을 키우고, 또한 산모에게 부족한 각종 영양분 및 무기물을 보충하기 위해서이다.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우리 산모관리문화에서 미역국을 먹고 집앞에 고추달린 벼의 새끼가 꼬여 있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히 합리적이다. 부족한 영향을 흡수하고 문 앞에서 벼의 쌔끼를 놓는 이유도 "이 집에는 임신한 여자와 아기가 있으니 출입에 신중을 기하시오"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하나의 문화풍속이 되어 삼신할매와 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이야기는 상당히 상상력이 풍부하고 정겨운 신화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을 미신이라 하고 남의 나라의 문화와 종교는 진리로 받아들여 무비판적인 수용을 곧 우리 민족의 자아의식을 파괴한다. 물론 남의 사상과 종교가 좋으면 받아들여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우리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무분별한 가치관 수용은 우리 사회의 혼돈을 야기한다. 솔직히 우리나라의 신화에 깃든 이야기를 해석하자면 그렇게 타인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나도 소중하듯이 남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 정겹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나라 신화와 그 속에 반영된 무속신앙이다.

그런 한국 신화가 잘 반영된 곳에는 주민 공동체나 이웃에 대한 왕래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점차 도시화가 되어 우리 이야기는 어느덧 미신이 되어 사라지려 하고, 사람들은 우리보단 나만 이라는 개인주의적으로 변해간다.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옆에 누가 아픈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다.

우리는 점차 공감대를 형성하기 보다는 개인의 욕심만 추구한다. 인간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을 위한 투자가 결국 자신의 발전이 되고, 어떻게 본다면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근원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발전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과 의미를 다시 되돌아 보는 것과 같다. 세상에는 부모없는 자식은 없다. 그것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세계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심리적인 세계도 더욱 심각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신화와 스토리텔링은 한국 신화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우리 신화의 이야기를 제시하여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주는 신화를 토대로 문화콘텐츠라는 새로운 힘을 부여한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감에 따라 이야기를 소비하고 그리고 그 소비하는 이야기 속에 다양한 상품적인 가치로 통해 대중적인 면을 살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이 참 중요하다. 이책에서 매우 중요한 문장이 1가지 나온다.

"우리의 원석을 연마한 스토리를 문학으로 연극으로 애니메이션으로 만화로 영화로 뮤지컬로 그리고 게임으로 드러냄은 우리의 잠재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이고,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방도이며, 나아가 문화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라고 되어있다. 실제 그리스로만 신화는 다양한 소재로 문학, 연극,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 뮤지컬, 게임 등으로 만들어져 있다. 신화는 인간의 서사 중에 1번째 이야기다. 신화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을 나타내어 주는 하나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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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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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이것은 OOO은 아니다를 알게 된 것은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라는 서적이다. 애니메이션이고도 불구하고 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는 말은 이것이 단순히 애니메이션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내용이 담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서적을 통해 나는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철학과 인문사회학이 얼마든지 자신이 원한다면 끝없이 보여줄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내용이 있는지 충분히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본래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에서 본제는 벨기에 미술가 및 철학자로 명성을 떨친 르네 마그리트 선생의 작품이었다.



르네 마그리트 선생은 어느 빈 공간의 화백에 달란 담배 파이프 하나 그려 놓고서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는 이상한 작품을 그렸다. 우리 인간의 눈에 분명히 파이프가 맞는데, 파이프가 아니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라 그 이상이나 혹은 그 이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의미의 내용을 그리던 르네 마그리트 선생은 다양한 작품을 남겼는데 다소 추상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작품을 남겼다. 그래서 근현대 미술에서 르네 마그리트 선생의 작품은 상당히 가치가 높은 것이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미학 오딧세이에서도 르네 마그리트 선생의 작품을 소개하고 여기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품처럼 우리가 생각하던 기존 관념에 대해 다시금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때까지 살아오면 사회의 인식아래 기존 관념이나 편견, 혹은 독단은 우리 인간 스스로 하여금 속박하게 하였고, 그 속박은 이제 하나의 당연한 사회가치관으로 되기도 하였다.

감성을 억누르는 이성, 여성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남성, 흑인을 굴복시키려는 백인 등 우리는 기존 인식 속에서 해서야 안될 일들조차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이런 인식은 예술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그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사회, 그리고 주변 여견에 따라 변한다. 만약 피카소가 불행한 민간인들의 학살을 보지 않았다면 게르니카, 한국에서의 학살을 어떻게 그렸을까? 피카소는 전형적인 아방가르드 즉 전위예술가이다. 그런 그가 왜 이런 작품을 만들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가는 그 당시 사회가 말해 주었다.

물론 피카소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 주의자였다.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북한 공산당과는 당연히 다르다.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권력으로 누르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구조주의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도 기본적으로 마크르스적인 학문을 차용하였다. 게다가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인 사상이 된 사람이 마르크스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는 인간의 예술은 그 시대적인 흐름과 인식을 반영하는 하나의 구체화된 사물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이나 그것이 조각이나 미술, 사진으로 나타나는 순간 하나의 시각정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여지고 왜 그렇게 되며, 또한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 것인지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르셀 뒤샹처럼 남자소변기에 싸인을 하고 "샘"이라고 하던지 모나리자 그림에 콧수염을 붙인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겐 이상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결국 이것이 팝아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점이 되었다.

예술이란 우리가 생각하기에 숭고하고 대중과 멀은 저 높은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적어도 모더니즘 사상이 근원하던 시대나 그 이전에도 그렇다. 프랑스 혁명이전 모든 예술은 귀족과 왕족에게 하나의 권력상징이었다. 그리고 근대시대에서는 지식인이나 부유층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근대이후 나타나는 예술은 백인남성 중심 엘리트가 아니라 흑인, 여성, 제3세계 국가에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술을 느끼는 미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하나의 공공용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하고 느끼고 다가가는 것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술이나 예술을 좀 더 감상하기 위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철학자와 임마누엘 칸트, 칼 마르크스와 같은 즁세 및 근대철학자, 그리고 기 드보르나 장 보드르야르, 삐에를 부르디외, 질 들뢰즈와 같은 현대 철학자 및 예술가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예술에 대해 깊이 다가 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근대가 아닌 현대에서 예술은 그 예술적 가치를 대중들이 알아주지 못할 망정 대중에게 예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들에서 보이는 삶과 일상에서도 예술적인 가치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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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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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것은 참 기구한 것 같다. 예술이란 것이 비록 넓고 매우 깊게 분포되어 있는 하나의 대우주라도 거기에는 어느 정해진 패턴이 숨어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통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이란 과연 상업성적인 면을 배제가능한 것이라는 물음이다.

 
이런 물음에 대해 절실하고 궁극적인 표현을 해준 것이 바로 편집자 이본 마멜편일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 루카스 요더라는 작가는 매우 성실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에 대해 끝까지 완수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루카스 요더라는 사람의 입장과 상황에서는 좋은 작가일지도 모르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예술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창조해내는 그 존재에 대해 매우 진실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나 그런 예술적인 가치가 높은 존재도 결국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가치가 정해져 버린다. 그리고 그 가치를 파악하고 그것이 하나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그런 업무를 맡는 중간론적인 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생산자와 소비자는 전혀 다른 생각과 관점을 가지는다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런 대중들에 의한 기호나 취향 그리고 작가에 대한 작문실력이나 깊이를 가늠하는 것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 중간적인 업무를 맡은 편집자인 이본 마멜의 이야기는 예술은 결코 창작자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특히 이본 마멜의 경우 본래 유대인 계통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자신이 어린 시절 가난했다는 점과 그리고 남자같은 성격으로 인해 팔골절상을 당하여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가 운동이 아닌 문학을 접한 것은 사실 팔이 불편하여 자신이 가만히 앉아 쉬고 있을 때 그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본 마멜 즉 어린 시절의 셜리 마멜스타인은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녀의 문학적인 관심은 그녀를 미국 키네틱출판사의 유능한 편집자로 발돋움하게 해주었다. 그런 셜리 마멜스타인이 이본 마멜이 되기 전의 인생을 바라보면 대중의 기호와 문학가의 실력을 제대로 간파하는 편집자의 고뇌가 절실하게 드러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매우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글을 적는 루카스 요더 선생, 그 선생에 비해 아주 전위적이고 열정으로 살아가는 셜리 마멜스타인의 애인이자 천재문학도인 베노 래트너 이 2사람의 대조되는 상황에 따라 셜리 마멜스타인의 인생은 크게 좌우된다. 그녀는 자신이 프로적인 의식을 지닌 편집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인간적인 면을 가진 편집자였다.
 
사실 쓰레기산이라 불리는 반송될 운명에 처한 원고들 속에 돌속에 묻힌 보석을 찾아내는 일이란 매우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그런 그녀가 900편의 쓰레기 중에서 100편당 1편씩 명작이라는 말에 우리는 그녀의 직업정신이 얼마나 투철한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투철한 정신과 지나친 인간적인 면을 그녀를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만든다.
 
그녀의 절실한 작가인 루카스 요더는 파문이라는 좋은 작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흥행실패로 회사에서 입장이 난처해지던 사실과 그녀의 애인인 베노 래트너는 매우 열정적이고 천재적이고 감상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내력과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기본적인 소양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셜리 마멜스타인은 작가로서 최고의 자질을 가지면서더 최악의 자질을 갖춘 2사람 사이에서 심한 방황을 하였다.
 
특히 그녀의 애인인 베노 래트너는 자신의 여인인 셜리 마멜스타인이 독일인 작가 루카스 요더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만 믿고 너무 교만했던 것이다. 그래서 베노 래트너는 자신의 혈기넘치는 기질을 이기지 못하여 원고가 세상에 알려질 수 없게 되자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셜리 마멜스타인은 자신의 한계와 베노 래트너의 안타까운 인생에 대해 깊은 상처를 받는다. 또한 시골에서 묵직하게 자신만의 길을 걷는 루카스 요더 선생에 대해서는 생각한다. 2사람은 분명 편집자인 자신에게는 좋은 작가이었으나 편집자로 속한 출판사와 고객들에겐 형편없는 작가였다. 그런 작가를 어떻게 하면 꾸준히 찾아 개발할 수 있을까라고 그녀는 고민한다.
 
최후에 그녀는 미스 셜리 마멜스타인에서 미즈 이본 마멜로 개명한다. 그런데 나는 이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고친 것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그녀의 애인인 베노 레트너는 독일계 미국인인 루카스 요더를 경멸했다. 그리고 셜리 마멜스타인의 친부모는 사실 독일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넘어온 이국민이었다.
 
그런 그녀와 주변 상황으로 보자면 독일이란 국가나 혹은 독인민족에 대해 왠지 모를 무언가를 지닌 반발적인 심리가 있지 않은가 싶다. 프랑스 발음이 편해 이본 마멜이라고 웃음짓는 그녀이지만 그녀의 가족사와 그녀의 애인인 베노 래트너가 듣기만 해도 증오하던 늙은 독일인 이름에 대한 명칭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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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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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임스 미치너 선생이 만든 소설인 "소설" 마지막편인 독자 제인 갈라드까지 읽었다. 아마 이 작품의 최종적인 결론부분이 나오면서 이 작품의 제시하는 부분이 여기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의 마지막인 제인 갈라드 편에서는 마지막 부분이지만 신기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편의 일기를 적어놓은 듯한 글이란 점이다.

 
처음부터 시작한 1991년 10월 6일이라는 가을부터 시작하여 1992년 1월 15일까지 일어난 일들을 적어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제인 갈라드 여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파트에 나온 인물에 비해 상당히 객관적으로 다루어졌다. 루카스 요더, 미즈 이본 마멜, 칼 스트라이버트 교수는 자신의 과거시절과 현재 상황에 이야기하는 것에 출실한 반면 독자인 제인 갈라드는 자신의 과거보단 위 3명을 응시한다는 느낌으로 적어 내려갔기 때문이다.
 
우선 제인 갈라드 여사는 펜실베이나 독일인 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마을유지라는 점이 중요한 사항이고, 그 여사의 남편인 돌아가신 래리모어 사장은 상당한 부자이면서도 매우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지닌 소유자란 점이다. 래리모어와 갈라드 여사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위해 헌금도 하고 학교를 위해 기부도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화합을 도모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진정한 여성 지식인으로 갖추어야할 지식, 덕목, 교양을 고루게 가진 한명의 사람이었다. 그런 갈라드 여사이던 만큼 그녀는 교양인으로서 갖출 덕목과 교양에다가 독서도 좋아했다, 그년느 책을 엄청 빨리 읽었고, 명석한 지식을 소유한 만큼 잘 이해했다. 그런 그녀의 재능덕분인 갈라드 여사의 손자인 티모시도 역시 명석하고 지성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래서 이 마지막 이야기는 갈라드 여사가 일기에 적힌 순서대로 주변 사람들과 만나서 일어나는 일들과 갈라드 여사의 최고비극인 그녀의 손자인 티모시의 살해로써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기본적으로 갈라드 여사는 같은 마을에 사는 메노파 사람이던 루카스 요더씨를 매우 좋아한다. 시골노인만큼 고집이 세나 자신이 노력하고 언제나 성실한 모습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루카스 요더의 작품은 인간의 사소한 감수성까지 담아내는 글이라 갈라드 여사 역시 그런 감성이 담긴 서적을 좋아한다.
 
그러나 루카스 요더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칼 교수의 태도와 손자 티모시의 의견은 루카스 요더의 팬인 갈라드 여사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 갈라드 여사는 칼 교수와 티모시에게 갈등을 느끼며, 한편으로 루카스 요더를 돌에 묻힌 보석처럼 찾아낸 미즈 이본 마멜에 대해 깊이 신용한다. 게다가 갈라드 여사는 자신의 하나뿐인 혈육인 티모시의 연인인 소어킨 양도 마음에 들어한다.
 
루카스 요더는 개방적이고 전위적인 소어킨에 대해 반발감을 느끼나 갈라드 여사는 오히려 포용해주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손자를 만나게 되어 고맙다고 할 정도이니 갈라드 여사의 의식구조는 구식세계관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갈라드 여사는 소어킨 양의 소설을 보면서 좋은 비평까지 아끼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글을 보는데 있어서 칼과 티모시처럼 깊은 비평지식이 없어도 글을 잘 보고 있었으며, 이본 마멜처럼 편집자가 아니나 편집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단지 그녀는 감성이 넘치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다. 하지만 루카스 요더는 조금 이야기가 달랐으며 한편으로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갈라드 여사편을 읽으면서 가장 큰 사건이 3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파운드에 대한 영화, 하나는 손자 티모시의 죽음, 하나는 루카스 요더의 새로운 소설이다. 갈라드 여사의 손자인 티모시가 칼 교수에게 교육을 받으며, 파운드에 대한 내용에서 티모시는 파운드에 대해 좋은 평을 주나 루카스 요더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준 점이다. 그런데 루카스 요더는 그 자리에서 글을 쓰고 보고 하는 사람이 글에 대해 진지하게 비판하는 것은 좋으나 유대인 학살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동조할 수 없다는 말에서 내 가슴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저 시골노인처럼 보이던 루카스가 그것도 소통하지 않고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루카스가 가장 열린 생각과 깊은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닐까?
 
아무리 지식인이라도 그것이 우수해도 인간의 존엄성 밟힌다면 그것은 진정한 문학적 가치가 있을까라는 평소 내 생각처럼 루카스 요더의 발언은 의외였다. 갈라드 여사편에서 읽어본 루카스는 매우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티모시가 살해당할 때 그는 매우 진지하게 티모시의 살인범을 추적하려고 했다. 결국 그레쥴러라는 사람과 노력해서 독일인 마을의 애플파이군을 잡아내었으나 루카스 요더의 냉철한 사고와 추리력은 상당히 놀랬다.
 
물론 티모시의 살해됨에 따라 그런 걱정은 루카스 요더 뿐만 아니라 칼 교수와 이본 마멜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티모시의 살해로 인해 이렇게 루카스 요더라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줄 지는 몰랐다. 칼 교수는 항상 루카스의 책에는 자신이 생각하던 새로움과 이상적인 가치관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루카스를 공격했다. 그런데도 루카스는 그런 의견이나 그런 의견이 실린 신문기사조차도 외면해 버린다. 루카스 옆에 있던 그의 부인 엠마는 그런 내용을 접할 때마다 분노하나 루카스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알고 보니 루카스는 하루에 몇 십통의 독자편지가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만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루카스는 그 편지를 읽은 후에 하나하나 답장을 해준다. 소설 상권의 루카스 요더가 갑자기 되버린 싸인회에서 그렇게 일일이 악수하고 애기하고 싸인해주던 모습이 왜 그런지 알 수 있게 해준 대목이었다. 루카스라는 사람은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적으려던 사람이고, 칼이라는 사람은 독자가 자신을 따라와주길 바란 사람이었다.
 
그래서 루카스는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너무 시대적인 정신에서 멀어진 것은 분명하다. 그런 루카스의 정체된 인생에 하나의 파문이 된 것은 칼 교수와 티모시일 것이다. 그런 상황을 보고 말해주는 것은 갈라드 여사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소설 마지막편은 갈라드 여사로서 끝맺음을 하는 게 루카스 요더와 엠마로서 맺는다. 루카스는 티모시의 살인과 더불어 거기에 대한 새로운 소설구상을 담아 기존에 자신이 담은 글과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칼이라는 사람이 루카스라는 인물에 대해 좋은 평을 주지 못했으나, 그런 평들을 루카스에게 아무것도 전달해주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루카스는 마지막에 그런 칼과 티모시의 생각을 받아들여 자신을 새롭게 변하려고 했다.
 
이 소설이란 작품을 보면 초반에 루카스 요더라는 사람은 장인정신을 가진 작가로 내비추었으나, 이본 마멜로 통해 고집불통이나 자신에게 힘이 되는 시골영감으로 칼 스트라이버트에서는 시대에 동떨어져 감수성에 빠져사는 어리석은 노인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 루카스 요더는 하나의 진실한 작가로서 다시 태어난다. 물론 진실한 작가로 되어 빛을 본 것은 루카스만이 아니다.
 
냉철하고 엘리트주의적인 칼 교수도 자신이 비평가이었으나 비평가로서 너무 거기에 매달린 것에 대해 조금은 개선되어 갔으며, 이본 마멜은 외롭고 삭막한 도시를 떠나 독일인 마을로 정착하여 거기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지내려 한다. 갈라드 여사도 기존에 루카스 요더 작가 작품만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칼과 티모시가 주장하는 작품도 좋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렇게 되는 과정이 티모시라는 젊고 유능한 인재의 희생 아래 성립된 것에서는 아쉬운 점이나 글을 쓰고 읽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동시에 대화하는 것과 같다. 글로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글로 통해 감동을 받는 것은 어느쪽이든 소중하다. 이런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 소설 마지막편 독자 제인 갈라드 여사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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