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한국영화는 다소 이색적인 형태를 보였다. 여름에 주로 등장하는 공포 내지 스릴러 장르에서 기존 스크린을 장악했던 것은 외국 영화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한국영화가 주요 공포영화로 등장했다. 곽도원 씨가 주연을 맡은 <곡성>을 늦은 봄에 시작하여 늦은 여름에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르가 아니다. 흔히 B급 정서라고 불리는 다소 서브컬쳐 요소가 강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몬스터 내지 좀비가 직접적으로 한국 영화에서 등장할 사례들은 많이 없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B급영화라고 해도 그 시장의 규모가 형성된 반면, 한국영화 시장은 일반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그 외 영화들은 인디 내지 예술영화로 상영되어 예술전용 소극장이나 혹은 대형극장 내에서 아트 시네마 홀에서 상영되기도 하나, 그 좌석규모는 매우 적다. 대중이 이용하는 영화관 내 예술전용 상영관 좌석규모는 80석 내외 정도다. 게다가 상영 회수가 매우 제한적이며, 상영기간도 길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큰 무리가 있다. 대중영화를 찾는 것보다 소소하게 볼 수 있는 예술영화의 맛은 기존 영화의 법칙이나 패턴에서 우회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서사나 소재 역시 우리가 직시하지 않은 부분도 많이 드러내며, 다큐멘터리나 르포르타주 형식도 많기에 사회적 문제에 대한 쟁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곡성>이나 <부산행>같은 B급 성격을 가진 영화는 예술영화는 아니나, 인디 내지 예술영화 쪽에서 다소 맥락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연상호 감독이 그동안 해오던 작품들이 B급 정서의 영화보단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인디 내지 예술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옴니부스 애니메이션 <셀마의 단백질 커피>에서 내 사랑 단백질부분이었다.

 

가난한 자취생 3친구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통닭을 주문했는데, 팔 한 쪽이 없는 돼지가 와서 통닭을 건네준다. 그 통닭은 돼지 옆에 통닭가게의 주인의 아이였던 것이다. 닭의 아이이니 병아리고, 병아리는 하늘을 날 수 없지만, 하늘을 날고 싶어 했던 꿈 많은 아이였다. 배고픔 속의 자취생,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닭과 돼지의 모습에서 자본주의 사회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서민의 블랙코미디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돼지의 왕>은 매우 충격적인 애니메이션이며, 영상미학적으로 반() 리얼리즘인 애니메이션이나, 작품에서 보여주는 의미는 매우 현실적인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으로 <>은 군대 내 신임병장과 막 입영한 이등병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병영생활과 구타, 그리고 군대라는 공간에서 보이는 이질적 세계관을 고발한다. 연상호 감독이 보여준 작품은 언제나 불편하고 날카로우며, 때로는 매우 잔혹했다. 언제 학술 세미나에서 연상호 감독 작품세계에 대한 강연을 들을 때 연상호 감독의 작품은 대중사회의 폭력성과 ()연대성, 그것을 만들게 하는 비인간적 사회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고 한다. 연상호 감독 작품 세계는 결국 우리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그가 말하려는 현실이란 모순과 부조리, 폭력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영상을 보면 화질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투자규모가 적고, 시장형성에서도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돼지의 왕>이나 <>, <사이비>를 보아도 화질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을 이용하여 현실의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돼지의 왕 GV>에서 그가 관객과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래서일까? 이번 <부산행>이란 영화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소극장 강당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실사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으며, 단지 실사영화보단 애니메이션영상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다양하기에 앞으로 영화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더 많이 의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대부분 한국영화나 외국영화를 봐도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은 들어가고, 미니어처 세트에서 장면을 다른 화면과 연계할 때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처리를 많이 한다. <부산행> 역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처리한 부분은 역시 많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부산행>은 실사영상이 메인이 되는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감독 연상호,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인디 애니메이터로서 대중영화에 첫걸음 한 그로써는 영화 <부산행>은 엄청난 성공과 새로운 도전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 팬 중에서 오랫동안 영화에 대해 깊은 이해와 비판, 그리고 연구를 하던 사람에게 <부산행>은 다소 실망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영화를 보면 스토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고, 뻔한 패턴과 흐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B급 정서 영화는 대부분 황당하게 전개되거나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으며, 마니아적인 요소를 가지기에 엽기 혹은 안 봐도 비디오로 갈 요소가 많다. 그러나 기존 연상호 감독이 인디 애니메이션 세계에 있다가 메인 주류 문화시장인 대중영화에 올라와 성공한 점은 분명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여태까지 도전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대신 <부산행> 이후 <서울역>에서는 실사영상이 아닌 애니메이션영상이기에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의문이다. 한국에서 한국애니메이션을 외면하고 미국 애니메이션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충실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이 그동안 제작해오던 작품들과 방향성, 그리고 이번에 보여준 <부산행>, 그 연속적인 관계성에서 보자면 왠지 낯선 풍경이 아닐 수가 없다. 애니메이션 영상과 실사영상은 전혀 다른 영상미를 가지고 있으며, 배우와 배경을 바라보는 카메라 앵글 속의 풍경도 다르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좀비가 서울역에서 발생하여 전국으로 퍼져 국가적 기능에 큰 타격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만든다. 우연히 부산에 있는 아내에게 가기 위해 딸 수안과 함께 KTX에 탑승한 석우는 기차 안에서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다. 어떤 여성 승객이 발작 후 사망하자, 그 승객 옆에 상황을 보고하던 KTX 여승무원을 공격한다. 그리고 여승무원은 오한과 발작을 일으킨 후 사망하더니 어느덧 다시 일어나 승객들을 공격했다. 이때부터 기차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좀비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달리는 기차 안에 기차역에 도착할 때까지 멈출 수는 없고, 오로지 괴물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전개되어진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란 틀을 가진다. <부산행>은 사실 발단 그 자체가 위기였고, 절정까지도 위기의 연속이다. 영화에서 어느 일정한 시간을 기준으로 위기의 해소가 있고, 그 해소 안에서 긴장감을 잠시 풀기도 하나,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는 그 조차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잠시 숨만 돌렸을 뿐이지 앞으로 계속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보통 인간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런다고 가만히 앉아 죽을 수 없으면 인간은 과연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가? <부산행>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수 있다. 자신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인간, 남을 위해 도와주는 사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가 결국 선동에 의해 집단이기주의화 되는 인간들, 인간 군중에 대해 연상호 감독은 다소 비관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인간이 위기에 빠지면 소수에게 구원을 손길을 줄 수 있어도 오히려 외면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연상호 감독의 기존 시각만을 보여주지 않았다.

 

<부산행>을 보면 열차승객(일단 승무원은 배제)의 분포현황을 보면 대부분 성인이다. 일부 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도 탑승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오직 수안만 있었고, 임신기간이 거의 다 된 성경만이 유일하게 다른 부류였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최후의 생존자는 누구라는 것이다. 분명 임신부인 성경과 그리고 석우의 딸 수안이란 점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 가임 중인 여성과 어린 아이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 중에 약자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다.

 

<부산행>은 좀비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기차 안에서 생존투쟁을 그린 영화다.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을 무시하는 인간들의 냉혹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관객이 느끼기엔 인간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막상 인간이 그런 처지에 높인다면 자신이 그런 인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래도 영화는 이기적인 인간의 세계에서 마지막 희망은 있다고 말해주려 한다. 석우는 서울 유명 펀드매니저 회사의 직원이고, 그는 돈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적인 삶을 택한다.

 

석우의 유일한 핏줄인 수안의 행동에 그는 이때까지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닌텐도 게임기가 있었는데, 다시 또 사온 것을 보면서). 딸을 이끌고 부산에 갈 때 그는 현실세계의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번뇌한다. 그리고 상황이 터지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뜬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아버지란 집안의 가장으로 군림하는 게 아니라(그러나 그는 늙은 홀어머니를 모신 점에서 완벽한 의미로 가장은 아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자녀에게 미래라는 시간을 넘겨주는 것이다.

 

석우와 상화, 그리고 영국 일행이 좀비의 벽을 넘어 수안, 성경, 진희에게 목숨을 걸고 찾아간 것은 인간이 마지막 순간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와 딸, 남편(아버지)와 아내(), 친구와 친구로 말이다. 마지막에 용석의 배신으로 영국과 진희는 같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석우와 상화는 자신의 죽어도 수안과 성경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간단한 질문을 받고, 그것을 영화의 장면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

 

물론 가족과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라고 말할 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은 과거가 되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간다. 그래서 <부산행>은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을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영화 중간에 볼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젖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간사회를 두고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뉴스에서 좀비로 난리 났는데, 그것을 반국가적 세력이 꾸민 짓이고, 군경이 투입하여 해결 중이라 한다. 실제로 일어난 현실과 미디어의 정보는 분명 다르다.

 

정치권에서 올바른 정보로 해결방안을 주기보단 그저 이 상황을 넘어가려는 오묘함만 보여준다. <부산행>에서 좀비가 나타나 위기에 봉착한 것은 맞으나 위기가 터진 이유, 그리고 그 문제가 발생해도 대처가 되지 않고 오히려 치명적으로(대전역사의 탈출 장면처럼) 작용된 점이다. 시스템이 붕괴한 시점에서 현실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는 너무 연약하고 무기력하다. 좀비의 탄생은 그저 단순히 우발적으로 생성된 존재는 아니다. 개봉예정인 <서울역>에서 풀어줄 것처럼, 그것은 시스템 오류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면 기본적으로 그 오류의 근본을 고치기보단 임시방편적으로 누군가를 항상 희생시켜 오류의 발생 그 자체를 은폐시킨다. 처음 좀비의 탄생이 석우가 맡고 있던 생물연구기관에서 발생되었다는 점에서 정치, 경제, 권력, 언론 등의 이해관계에 부조리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물론 현실의 세계에 나는 좀비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나, 단지 좀비 같은 인간을 만들어 내는 존재들은 항상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도 <부산행> 결말처럼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는 점에서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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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6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좀비가 산 사람보다 행복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고통도 없어,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어, 경쟁도 없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어, .......

만화애니비평 2016-08-16 11:08   좋아요 0 | URL
여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좀비가 되면 덕질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오덕에겐 잔혹한 일인 겁니다!! 오오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6 12:31   좋아요 0 | URL
아 !
 
루소 - 시공 로고스 총서 31 시공 로고스 총서 31
로버트 워클러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최근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을 읽었다. 랑시에르의 책에서 말하는 요지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대중을 수동화 시키는 점이다. 수동적인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서식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프레임이 갇혀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그 틀 안에서 열렬하게 돌고 도는 인생을 만끽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없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도덕이란 가치가 있다. 그런데 도덕적 가치는 사회적 합의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회적 합의는 그 시대의 풍미와 조류에 의해 움직인다. 건전한 사회에서 흘러나오는 도덕은 매우 아름답고 사람들은 행복의 미소로 가득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사회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서로 경계하고 미워하며, 조금이라도 작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성난 이리처럼 으르렁거릴 것이다.

 

인간이 진정 행복한 시대란 도대체 언제라는 것일까? 사소한 일에 인간들은 수지가 틀리면 친구에서 적이 되고, 돈 앞에서 우애 좋았던 형제자매마저 법적 소송까지 벌인다. 심지어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관계가 비틀린 모습도 TV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으로 망가지는가? 마르크스이라면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했으니 자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전이라면 루소는 개인의 이기심이라 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소를 다소 비판적 관점에서 대하고 있으나, 마르크스의 서적들을 읽은 후 루소의 서적을 읽으면 상당한 유사한 요소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친구인 엥겔스 같은 경우 루소의 서적을 세심하게 읽었고, 노동자에 대한 현실의 비극은 루소가 보던 것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 발견자, 루소>에서 루소는 마르크스, 로베스피에로의 아버지라고 한다.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서적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이전에 존재하던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찾아간다.

 

그 원류는 애덤 스미스의 제자인 데이비드 리카도 좌파와 또 하나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활약하던 자코뱅 좌파였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고전경제학의 발전과정이고, 마르크스의 정치학은 계몽주의 운동가의 발전과정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은 마르크스의 <자본>에게 이론적인 요소를 전달했지만, <자본>이 가진 정신적 가치까지는 아니다. 산업혁명 당시 메뉴펙처라는 분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그의 제자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자본>에서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생산력은 발전시켰으나, 분업은 인간은 도구화시켰고, 임금의 질을 하락시켰다. 분업이 만약 노동자들이 하나의 합동체계로 만든 회사면 모르나, 분업은 자본가 하나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다. 노동자가 기계부품처럼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임금이 생계수단의 한계점으로 이어지고, 가혹한 노동환경은 직업병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부분에 대해 루소는 조금 다르게 보았다. 인간이 분업이 되면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기에 메여진 것들만 가능하다.

 

인간의 직업이 시인, 벽돌공, 수리공, 교사, 의사 등으로 세분화되면 인간의 인생은 매우 한정적이고, 지나친 전문화는 인간에게 부조리한 권력한 명예 그리고 허영을 쫓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논조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밀>에서 언급된다. 위에서 언급한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 루소의 주장에서 시작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스펙타클화 된 인정투쟁은 인간 스스로의 감옥을 만들어낸다.

 

루소의 직업에 대한 고찰은 후에 가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이어진다. 사회적 분업은 비단 노동자의 임금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마저 분리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의사의 손에, 교육은 교사의 손에, 결혼도 예식매니저, 죽음도 상조전문가에게 맡긴다. 인간 본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어지게 된 세상이다. 인간 스스로가 노동자, 교사, 시인,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은 없다.

 

루소의 경계는 바로 현대사회에서 드러난다. 영국 정치사상학자 로버트 워클러의 <루소>는 근대민주주의 꽃을 피우던 프랑스대혁명 전야에 존재했던 루소에 대하여 연구한 도서이다. 그의 말대로 18세기를 가장 과격하여 비판한 사상가이고,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았던 사상가 중에 하나이다. 루소의 철학을 보면 관념적으로 칸트로 넘어가고, 유물론적인 요소는 마르크스로 넘어간다. 그러나 루소가 보던 시기는 언제나 스파르타의 절제된 간소함이고, 로마의 민주정이었다. 과거를 바라보던 루소는 플라톤의 정치사상을 담고 있으나, 오히려 전도시켜버린 광기의 천재였다.

 

루소의 사상이 오히려 현대사회에 더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은 철학의 시작이나 인문학의 시작일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공감대로 이어지는 것에서 다소 벽이 느껴진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를 이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오면서 루소가 주장한 내용이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의 입으로 나온다. 루소 이전의 사회는 종교가 정치와 결부된 사회다. 종교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삶의 가치를 강요했고, 인간의 운명은 이미 신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의 삶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 움직이고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라도 루소는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일반적 계몽주의자처럼 지식인 엘리트들이 무지한 대중을 계몽하여 이끌어간다는 것과 다르게 루소는 오히려 민중의 선한 감정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처럼 기계화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불가능하겠지만, 자연이 있는 농촌인간들의 순박하고 정직함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의 도서는 당대 엘리트에게 많은 공격을 당하고, 지금도 그의 사상을 두고 말이 많다. 죽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은 사상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루소가 보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자아성찰과 자아반성만의 영역이 아니다. 루소의 <에밀>처럼 어린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면 타락한다고 보았다. 아이의 비위를 너무 맞추면 그 아이는 버릇이 없어진다. 루소는 직접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적은 없으나, 루소가 말하는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세계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부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빼앗겨버렸다. 주입식 교육으로 수동적인 인간이 되었고, 주변 사물에 대한 판단은 누군가의 경험으로만 대체되었다. 선험적인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이성의 영역은 모조리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서평 머리부에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 나온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어릴 때부터 우리의 눈을 빼앗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이어진 것이다. 루소는 그 이유는 부패한 사회와 문명이라고 했다. 그 문명의 교육이 다시 아이에게 이어지고, 다시 재생산되어 인간 본연의 세계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를 읽는 것은 18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우리가 보는 세계를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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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6-08-0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애니 비평님 글은 만화 애니가 아닌 사회 문화 비평글일때 더 재미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07 22:15   좋아요 0 | URL
아니고, 오타쿠가 실천해야할 본연의 임무가 이렇게 되다니요..ㅎㅎ

루쉰P 2016-08-07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도대체 이런 글을 어떻게 쓰시는지 원...감탄을 하고 갑니다 ㅋ 루소 정말 정말 매력적이네요 ㅋㅋㅋ 읽고 싶은데 왜이리 저는 읽을 게 많은지 ㅋㅋㅋ

역시나 재미난 글 잘 보고 갑니다 ㅋ

만화애니비평 2016-08-07 22:1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지금도 루소가 적은 도서를 다시 읽는 중입니당..ㅎㅎ

루쉰P 2016-08-08 10:16   좋아요 0 | URL
항상 독서를 하면서 느끼지만요 ㅋ 한 명의 사상가를 온건히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더라구요 ㅋ 전 톨스토이, 간디, 마틴 루터 킹, 루쉰 이렇게만 파고 들고 있거든요 ㅋ 어찌나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정말 루소의 전문가이신게 대단하신 것이라 느껴집니다. ㅋ

2016-08-07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7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9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의당 내 메갈리안에 대한 문제로 많은 당원이 탈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여성 정의당 회원이 자신의 글을 올린 것을 링크를 타고 읽었다. 지금 내가 가장 열받는 사실은 이른바 지식인이란 자들이 정확한 전후맥락의 상실과 자신들의 발언에 대한 논리적 모순이 있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한 점이다.


한국사회든 세계사회이든 남녀차별은 있었고, 여성은 억압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이 영국 서프러제트 운동에 큰 방향성이 되어주었다. 서프러제트 당시 그녀들은 돌을 단져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폭탄을 집어 넣으며, 심지어 방화사건까지 일으킨다. 


그래도 그녀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들이 주장하는 바가 언제나 한 가지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한 과정에서 폭력이 수반되었다고 해도, 그 폭력은 대화를 원하는 것이다. 대화를 하는 것은 논리와 감성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지금 메갈리안 사태는 폭력만 있고 대화는 없다.


서브컬처 향유를 하면서도 리뷰와 학회논문을 쓰면서 지금 참 한심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전후맥락성과 이번 사태의 가려진 폭력성의 인과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메갈리안 옹호자들의 글을 보면 한국사회와 세계사회에 대한 전후맥락은 맞다. 


그리고 일베의 여성혐오도 있다는 것까지는 사실이다. 문제는 무엇이냐? 일베를 한국남성이 가지고 있는 심리를 보여주는 표본이라 한다. 그리고 메갈리안의 극단성은 그동안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을 저항하여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일베는 한국남성이고, 메갈리안은 한국여성이라면, 결국 이번 사태는 한국의 모순을 남성 VS 여성이란 프레임으로 만든다.


일베가 저지른 문제는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외국인,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발언, 지역감정에 대한 부추킴 등 다양한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일베에 대한 문제성을 단순히 여성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다변적인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런데 메갈이 일베에 대항한 유일한 집단이라 말하는 정신나간 지식인을 보면서 그들이 진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간과하고 있는 알 수 없다. 메갈이 외치는 것은 여성의 이름이지 지역차별, 인종차별, 빈부격차에 침묵하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그동안 메갈리안에서 판매해오던 티의 수익금의 출처이다. 그 수익금은 메갈리안 회원 중에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고소된 사람만 아니라 아동성추행을 저지르거나 커피에 여성호르몬제를 타서 상사에게 준 범죄자의 소송비용으로 나가는 점이다. 물론 페이스북 내 홈페이지 문제도 있겠지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지원은 반인간적인 행위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순수하게 우발적 내지 기획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후원해주는 것이다. 영국의 서프러제트처럼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불만을 느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서프러제트 운동당시 여성들은 사람들 그 자체에게 그 어떤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단순히 개인에게 저지른 범죄를 두고 돈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서북청년단이란 말하탄 자가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다고 강연회 자리에서 폭탄을 던진 일베학생에게 돈을 주는 행위와 같다. 


일베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낙오된 남성이 강력한 남성권력층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심리에서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즉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이에 반면 메갈리안의 범죄행위는 개인적 인성 문제점을 감추기 위한 저지르고. 그것은 수단을 위한 목적으로 왜곡한다. 일베의 여험에 따른 사적인 만행들은 전체주의적 발상에 따른 파시즘이고, 메갈은 그동안 축적된 불만이 사적인 영역에서 범죄를 저지른다. 그 행위에 대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뒤덮은 형태인 것이다.


일베나 메갈이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서로 다른 점은 행동방식이 되는 사고방식의 차이나는 점이다. 지식인들의 최대 오류는 메갈이 하는 행동이 여성의 표현이고, 일베는 남성의 심리라 하자. 그렇다면 남성들은 잠재적인 성범죄자고, 여성은 잠재적인 아동학대자고 음독기도자이다. 한국사회의 모든 남자와 여자는 범죄자란 논리가 성립된다. 미러링의 수단이 혐오발언이나 표현까지라면 몰라도 혐오범죄가 되는 순간 미러링은 방법론적 가치에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일로 한국사회가 얼마나 전후맥락을 안 보고, 누가 의문을 제기하면 한 번 더 알아보고 해야 하는데 이미 지식인부터 자신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다. 초반 사태부터 코미디는 여성 성우의 노동권을 말하는 분들이다.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기본적 지식에 대한 논의는 없고 단지 불이익 당했다고 말한다(그동안 공장애서 부당해고 당하거나 산업재해를 당하신 여성노동자에 대해서 그래 신경써 주면 고맙겠는데). 우선 만화와 게임의 성우는 그 제작사의 직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프리랜서나 혹은 소속사에 속해진 사람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및 게임제작 시 성우는 자신이 출현한 작품에 목소리를 더빙하여 계약금을 받는다. 이것은 내 억지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관련 도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차라리 그 성우분의 노동권을 운운하기 전에 이번 사건으로 다음 더빙 계약건에 불이익이 없으면 좋겠다고 해야겠지만, 사실 그것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넥슨일까? 네티즌일까? 아닌 넥슨 본사 앞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일까? 


일부문제가 생긴 것은 사회적 부조리가 있는 것은 맞으나, 일부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그 대상을 사회적 전체로 확대오류화 시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그리고 지식인이나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오해는 더 위험하다. 이번 일로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하겠지만, 그들의 믿음에는 대중의 시각에 대해 배려성이 없다. 대중은 하나같이 어려운 책을 읽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공감이란 단어를 원한다. 


일베가 처음에 애국논리를 내세워도 왜 지금은 대중사이에 혐오집단이 되고, 현실인간 사이에서 기피대상이 되었을까? 대중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레임 분석과 프레임 짜맞추는 것도 좋겠지만, 자신조차 프레임에 갇힌 것부터 인지했으면 좋겠지만, 지금 급하는 것은 어서 더운날 넥슨사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 멈추고(또 다른 이유는 더운날 그러면 일사병에 걸림), 하나씩 근본부터 풀어가는 게 우선이다. 지금 인터넷을 보면 경찰 고소장이 그들에게 계속 넘어가고 있다. 


고소장 내용이 물론 넥슨사 항의에 대한 집회법이라면 민주주의 이념으로 반발이 가능해도 부동액을 타서 먹인 것이나, 남의 가족사진을 들고 가서 온갖 험담과 욕설을 퍼부은 사람들이 주로 고소장의 소환타임을 맞이했다. 그들은 그런 사건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억울하거나 오히려 고소한 사람에 대해 찌질하다고 한다. 


한국의 여성들이 다 저런 사람들인가? 아니다. 물론 기존 사회의 문제에 대해 개선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저지르는 일탈행위에서 말과 행동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그 행동이 분명 잘못되었다는 점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 메갈과 페미니즘이 동일시하는 순간, 한국여성들의 수준만 격하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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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5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6-08-0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수단과 결과는 동일하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더러운 수단을 가지고 깨끗한 결과를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천사를 닮으려다 괴물이 되어 버린` 파스칼의 말처럼 불합리를 바꾼다고 그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푼다는 건 반대에요 ㅠ 왜이리 우리는 본질을 제대로 못보는지 모르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6-08-05 12:19   좋아요 0 | URL
수단(자신의 불만)을 숭고한 이데올로기로 덮는 것만큼 미친짓이 없죠

기억의집 2016-08-0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메갈의 후원금이 저런 범죄자들을 위한 건가요? 저는 메갈은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남성혐오라는 이유로 부동액을 타서 주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게다가 그런 사람을 위한 변호사비를 대 준 다는 거죠. 이 글 사실인 거죠??????

만화애니비평 2016-08-05 12:18   좋아요 0 | URL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60803000810

부동액 사건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2&oid=014&aid=0003569312

아동문제..

사실 남성이나 여성 모두 아동에 대한 성적 발언은..
귀여워서 로리나 쇼타 정도까지 문제 없으나...
차라리 성적욕망을 하려면 성인을 해야하는 게 맞죠.

일부는 편향되었다고 하나 위키 메갈리안 사고사건 항목을 참조하면 더 나옵니다.

https://namu.wiki/w/%EB%A9%94%EA%B0%88%EB%A6%AC%EC%95%84/%EC%82%AC%EA%B1%B4%EC%82%AC%EA%B3%A0

메갈 사이트 내 자신들이 올린 글이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도 저런 발상 자체가 문제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의 논리가 저는 이해가 안 가는군요.
메갈4는 메갈`과는 차이를 두고 시작하는 커뮤니티입니다.
메갈 4는 본격적으로 여성주의를 진지하게 논의하겠다고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애비 님의 논리는
성추행 목사가 잊을 만하면 등장하니 하느님은 그들과 다를 게 없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전형적인 확증 편향이죠.

만화애니비평 2016-08-05 13:03   좋아요 0 | URL
차이라고 하나, 결국 관점의 차이겠죠..

예전에 좃린이사건(아동성추행사건)의 후원을 메갈리아4에서 한다는 점에서(링크된 아카이브) 곰발님이 정말 그들이 옳은 취지로 간다고 여기시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카이브에 마인드C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글쎼요? 과연 누가 누구하고 같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http://archive.is/W7z1I
http://archive.is/L4cN7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5 14:07   좋아요 0 | URL
메갈 4의 취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 실행 과정에서의 오류는 있겠지요. 모든 운동이라는 데 시행 착오를 거치기 마련입니다.

하튼, 이것은 저와 만애비 님의 입장 차이라고만 정리해 두겠습니다.
우린 때 되면 막거리 마시는 사이 아닙니까. 건강 챙기시고요..

은령 2016-09-20 02:28   좋아요 0 | URL
메갈의 취지를 최선편향 해석하고 실체는 투영상의 오점의 일종으로 보는 건

비유하신 것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를 표방하고 있는 그 어떠한 반도덕적 종교집단도 그 표상을 감안하여 고려해야한다는 논리와 일치합니다. 더군다나 페미니즘의 해석적 권위를 누리는 일종의 교황권이 메갈에 있지 않음은 자명하고요.

취지를 키워드로 변환한 다음 그 키워드를 이끌어 낸 사상의 최고 가치를 찾아내어, 그것을 기준으로 삼은 다음,
그 취지를 명목상으로 표방한 것 만으로 그 특정 발언집단을 `그 기준`을 준거로 재단할 수 있다는 것은 비약의 극치가 되겠지요.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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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항상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연구하는 사회학을 찾아가면 그래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눈으로 돌아가는 현실이나 그 원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거대한 조류로 휘말려 있다. 마치 수수께끼로 얼룩진 미스터리 현상처럼 우리가 사는 일상은 늘 익숙하면서도 그 익숙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머리에서 에러 신호가 깜빡인다. 사회학이란 영역을 내 개인적으로 독학을 했다.

 

사람들은 나보고 독한 놈이라 한다. 돈도 안 주고, 봐도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왜 하냐고 묻는다. 책을 읽으면서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내어야 하고, 초반에 책을 살 때는 박봉을 나누어야 했다. 지금은 도서사이트의 포인트가 총알이 되었지만, 그 총알이 장전되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총알을 공중으로 뿌려야 했다. 어째든 사회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란 결국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하여 내 스스로가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의 투쟁이다.

 

책을 읽다보면 왜 그런 논리가 되는지가 이해가기도 하고,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경우가 많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읽혀지는 책도 있고,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읽히는 책들은 그 안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는 함의가 현재도 통용되고 앞으로 통용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책을 읽은 후 세상 안의 인간들을 만나면 순간 낯선 나를 발견한다. 사회에 살아가는 것은 그 안에 머물러가는 존재지만, 안에 머무는 것은 그 안에서는 자신이 어떤 세상인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사회학을 두고 현실적인 도구로 대체하자면 반투명 유리라고 생각한다. 자신 주변의 벽은 색으로 가려진 벽이나, 사실 그 밖은 안을 볼 수 있다. 단지 안쪽은 거대한 용기이기에 보는 사람은 그 벽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볼 수 있는 규모가 작고, 너무 멀리 있으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멀리서 봐야지 다양한 인간군상을 알고, 세상만사를 알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멀리서 자세히 보려면 좋은 안경이 필요하고, 다시 확인하려면 녹화장치도 필요하다.

 

인간이 살고 있는 거대한 반투명용기에서 사람들은 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 문을 여는 것은 주저한다. 문을 열면 시간을 괜히 낭비해야 하고, 그 문까지 찾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게 귀찮다. 그래서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이 이미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자신이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과 멀리서 바라보는 인간이 말하는 것과 너무나 큰 차이점이 있다. 물론 멀리서 보는 인간들도 다 좋은 의도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이에나 같은 시시탐탐 기회를 보면서 자신의 잇속을 채울 수 있는 사냥감을 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에 살면서 부조리와 모순에 부딪힐 때 아무 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가만히 있어야 할 경우, 그 위기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며 걱정을 한다.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말이다. 단지 눈앞에 이익과 즐거움만 원한다.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이기심과 쾌락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원하고 찾으려 해도 마치 신기루처럼 자신의 손에서 멀어져 간다. 신기루는 사라져가도 그 이미지의 상을 더 크게만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헛된 욕망과 스펙타클의 열렬한 선수가 되어 허상 위의 경기장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 현대사회는 모든 척도가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경제적인 빈부는 인간의 인성과 가치마저 형성하고, 그 사람이 가진 의식과 판단력조차 돈으로 결정된다. 좋은 옷과 좋은 잡화류는 자신의 신분이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이미지에 상당히 집착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이다.

 

백화점 고급핸드백에 빚을 내고 구입하는 여성들, 기름 값과 보험료에 고민하면서 고급 차량을 구매하는 남성, 이 모두가 자신의 처지와 실용성보단, 세상의 조류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하지만 그 애절한 움직임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단지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자신이 마치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을 억지로 보여주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위한 하나의 기만이다. 기만의 세계는 언제나 열려 있다.

 

사회성에서 책에서는 인정투쟁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지 못한 채 언제나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현대인들의 슬픈 초상이다. 책에서 오타쿠가 차라리 나아보이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 없다. 힘없는 사람 앞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위에 권력자에겐 바른 말 한마디 못하고, 아부를 밥 먹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잘 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지 못해 고립된 상태이기에 남의 이목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남에 시선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 경계나 이형의 존재로 보이기는 싫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움직이는 이상한 세계의 인정투쟁,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야지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한다. 대놓게 내가 입고 싶어서 혹은 지나가는 누군가 잘 보이려 입은 게 아니라 하나, 막상 그들의 정신분석을 해보면, 그들의 입장을 옳으나 그 입장에 숨어있는 타인에 대한 욕망은 인정하기가 싫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서모임에서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눴다. 한국인은 개인주의화가 덜 된 나라 사람이다. 개인주의보단 오히려 개인적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활보치는 세상이다.

 

따라서 뭔가 이익이 목적되지 않은 이상, 뭔가 자신을 돋보이거나 더 좋은 것이 오지 않은 이상 더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에서 타인의 입장보단 나의 이익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문제는 포커스가 남에게 무의식적으로 사소한 피해가 아닌 생존의 박탈 앞에서 무덤덤할 수 있는 자세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다. 주변을 돌아보기보단 자신의 주변을 스스로 뱅글뱅글 돌아야 한다. 한국사회가 가진 공동체 사회에선 인간은 소외되지 않은 존재였다.

 

태어나면 마을에서 크고, 마을에서 일을 하며, 마을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 죽어서는 마을에서 장례식을 지내고, 마을 산자락에 있는 언덕에 시체를 묻었고, 그 과정을 되풀이 했다. 그런다고 과거의 유산이 모두 좋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인간에게 외로움이란 고독에 스스로를 보내지 않았다. 지금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직장과 학원으로 소원해지고, 아파트 이웃은 다정한 사람보단 집값을 위한 동원될 정예군이고, 층간 소음에 따른 불천지 원수가 되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만족해야 하나, 막상 감옥은 같은 규격이 아니라 돈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오브제로 구성되어 있다.

 

서평을 적어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왜 말이 연결되는 것처럼 적어가나, 내용은 계속 여기저기 튀는 것일까? 사회학을 연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순은 사회란 것은 단순하고 명쾌한 영역이 아니라 매우 복잡 다양한 미로라는 것이다. 미로를 찾아갈 때 미로를 향하여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다.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처럼 다 볼 수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이 아닌 이상, 새는 새대가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꾀꼬리가 노래 한 수 불러주면 감사할 따름이나, 도시에는 꾀꼬리 대신 닭 같이 생긴 비둘기만 펄럭거린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이런 복잡 다양한 사회상의 문제를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나 작가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더구나 자유롭게 서평이나 적는 독자이기에 이렇게 적을 뿐이다(나보고 이딴 식으로 글 적는 것에 불만 있는 분은 나에게 월급을 주면 된다. 적어도 내 글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이상 말이다). 사실 사회학 관련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엘리트의 시선은 왠지 피곤하게 느낀다. 이 책은 엘리트가 적은 글이나 그나마 엘리트라도 수면 아래서 코와 입을 밖으로 내놓은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한 글이다.

 

어떤 사건과 문제가 발생하여 거기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비판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대안과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거나 상관하기 싫거나 또는 별천지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판단내릴 수 없다. 사회학은 위에서 보는 게 아니라 차라리 아래로부터가 더 좋은 것이다. 거대한 반투명유리에서 위에 보다는 아래에서 보는 게 좋다. 빛이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는 게 아니라 일부는 그늘에 가려 태양에 가린 채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학은 아래서부터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야 문제의 원인과 해결대안을 찾을 수 있다.

 

이미 자신은 어떤 문제에 대해 겪을 일도 없고, 겪을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공감이란 단어는 물 건너갔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직접 노동자의 삶을 보고 저술했다면, 현대인 중에 엘리트들은 그저 마르크스의 저서가 어렵고 엘리트로서 볼 책 중에 하나로 취급당하면 난감한 상태가 발생된다. 물론 마르크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 실천적인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이론이 있어야 생각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이 갖추어지나, 그 판단력이 어떤 판단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잘 때까지 세상살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거리는 많다.

 

단지 어떤 원리이고, 무엇이 문제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가 귀찮아진다. 이슈는 신경이 가지만, 현황에 대해 지겨워한다. 세상물정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물정에 대해 돋보기로 보는 것은 불편한 것들에 대한 연속적인 만남이다. 대신 눈을 돌리면 지금은 편하지만, 나중에 더 불편한 것들이 찾아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계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세상물정은 어떤 맛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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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여성 명배우 메릴 스트립이 영화 <서프러제트>에 아주 중요한 인물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를 맡은 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과거 영화 <철의 여인>에서 영국의 총리 대처 수상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찬사를 받은 대처이었으나, 대처 정권 때 가해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영국 노동자 계급은 결국 영국 대다수 국민이다. 그들의 경제적 내수붕괴는 영국의 경제악화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찬사와 비난이 오가겠지만, 메릴 스트립이 영화주인공으로 등장한 <철의 여인>과 그리고 이번에 등장한 <서프러제트>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그녀가 맡은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는 자신의 여성운동을 기록한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로 통해 열국 여성정치 참여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보여준다. 사실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와 영화 <서프러제트>는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성운동이 노동문제와 깊게 연결된 점이고, 많은 희생을 당하는 여성들이 공장에서 심각한 노동착취를 당하는 점이다. 그녀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이유는 가난 때문이고, 그녀의 어머니들은 10대에 애를 낳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조차 7세 정도가 되면 공장에서 일을 한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팽크허스트 여사는 그나마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그녀의 남편은 인권운동에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팽크허스트 씨는 비록 그녀와 같이 운동 초반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편 사이에 딸 3명을 낳았다. 그리고 그 딸들도 서프러제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소설은 팽크허스트 여사 중심으로 흘러가나, 영화 <서프러제트>는 공장 노동자인 모드 와츠의 중심으로 진행된다. 처음에 공장에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 집에 오면 사랑스런 아들과 다정한 남편이 있다.

 

하지만 아들은 몸이 아프고, 공장 안의 분위기는 언제나 험악하다. 그녀가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여한 것은 현실에서 느끼는 부당한 현실이다. 영화를 보면 잘 봐야 하는 장면들이 있다. 모드 와츠는 남편과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남편이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고 그녀의 등에 키스를 한다. 근데 와츠의 한쪽 어깨를 잘 봐야 한다. 그녀의 어깨는 화상을 입어 약간 흉측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와츠의 어머니는 공장노동자였고, 그녀는 뜨거운 세탁물로 인해 사망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노동착취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노동착취에 몸을 다쳤고, 심지어 공장 내 감독관은 과거 그녀를 성폭행까지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성문제가 왜 노동문제로 이어지는가? 남편 혼자서 돈을 벌어도 해결되지 못하고, 여성도 공장에 가게 되며, 그녀들에게 주어지는 임금은 남성의 2/3 정도이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서평을 적으면서도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엥겔스의 도서를 봐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1870년대 전후 영국 런던 공장노동자의 생활을 정확하게 묘사했고,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당시 노동자들이 겪은 비참한 모습을 고발한다.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읽으면, 여성에게 가족의 일원으로 권한이 없었으며, 자신이 가진 돈조차 남편에게 갈취당한다고 했다.

 

밀의 책에서는 여성은 남성보다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섬세한 일을 잘 할 수 있으므로 때로는 남성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남성보다 훨씬 더 우수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적었다. 물론 내가 가진 생각을 밀의 철학에 상당히 공감을 거기에 바탕으로 판단한다.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지 사회적 관계에서는 분명 공정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남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들을 억압했고(물론 여왕은 제외) 착취했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나서 최종 착취당사자는 인간이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와츠는 공장과 사회에서 겪는 모순에 딜레마에 빠진다. 원작인 책을 보면 영국의 대다수 노동자는 비참한 생활을 했지만, 남성 노동자들은 상당히 개선된 반면 여성에게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처음에 모든 노동자가 지배계급에 반항했지만, 이젠 남성노동자에게 여성을 지배한다는 명분을 살려 사회의 부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츠는 우연히 의회에 대신 진술하면서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한 여성노동자의 딸이고, 오랜 노동으로 인해 각종 질병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 <자본>에서 눈이 아프고, 가관지가 좋지 않으며, 휴식이 없어서 다리에 정맥이 생기고 관절이 불편하다. 그래도 그녀가 일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이 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와츠가 경찰에 간 후 다시는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으나, 남편과 대화에서 그녀는 투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만일 아들 조지가 아닌 딸을 낳았다면 이름은 무엇이 좋겠냐는 말에 남편은 자신의 할머니 이름인 마가렛을 주고 싶다고 한다. 할머니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마가렛이 태어나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는 질문에 남편은 무심한 표정으로 아내처럼 살 것이라 한다.

 

팽크허스트 여사나 와츠나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세상과 싸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불만인 것도 있지만, 앞으로 자신을 이어 살아갈 후손들이 그 부조리한 세상에 희생되는 게 너무 싫었던 것이다. 후반부로 가면 남편은 조니를 더 이상 돌볼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억지로 입양을 보낸다. 이 순간 와츠는 완벽한 서프러제트가 된다. 팽크허스트 여사가 수배 중 기회를 노려 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한다. 그녀가 하는 말은 여성의 권리를 찾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이고, 우리 아들딸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결국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모질게 싸우는 그녀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결국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다. 흔히 우리가 현재 남녀 모두 공평하게 투표를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다. 어느 누구는 그냥 누가 좋아서 무조건 , 누구는 나는 저 사람이 싫어서 저 사람 반대되는 자에게 투표라고 말한다. 또는 누가 되면 집값이 떨어질 것 같아 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진정 투표를 실행하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이후의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인권 중심이 모권에서 시작되었고, 모권이 중요한 것은 아동인권이 어머니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여성인권을 두고 흔히 남녀평등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성의 인권을 올리는 것은 남녀 사이의 성적인 양성평등으로 여기는 것은 서로 간의 프레임에 빠지기 쉬운 논리오류가 발생한다. 여성의 인권을 올리는 이유는 인간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고, 그것은 남녀평등보단 인간평등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는 점이다. 내가 이번에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현실문화연구(담당자님 더운 날에 파이팅인 겁니다.) 직원이 운영하는 포스팅도 있지만, 최근 페미니즘 논쟁 때문에 그렇다.

 

내가 그렇게 많은 페미니즘 도서를 읽은 것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도 그렇고,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를 봐도 현재 상황에 이해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과거에서 받은 핍박과 부조리는 알고 있지만, 정말 이 영화 <서프러제트> 같은 상황이라면 페미니즘 논쟁에서 다소 시위자의 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나 많은 도서를 읽어도 페미니즘 이론에서 미래란 가치를 과거에 투쟁하던 여성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타개하는 자세는 좋으나 그 시작점은 이상하다. 누군가는 이 사건들을 두고 페미니즘 운동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결국 이게 페미니즘 논쟁이 되어 긍정적인 방향이 될 것이라 본다. 물론 내가 회의적인 이유는 나는 왕자가 필요 없다 에서 한국의 대부분 남성들은 왕자로 살아가기보단 거의 일개미로 살아간다. 일개미가 왕자일 수도 없고, 왕자가 될 수도 없다. 티 한 장이 아니라, 티 한 장에 숨어있는 전후맥락을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다. 그런데 현재 진보적 매체에서는 티 한 장만 가지고 보려 하지, 그 뒤에 숨어있는 전후맥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서프러제트>에서 주인공 와츠는 어린 아들을 가진 어머니다. 그녀는 아들을 볼 수 없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프고, 입양되어가는 장면에서는 주변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티 한 장의 수익금 일부가 다양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사람의 합의금 및 소송비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서프러제트 운동처럼 반인권적 여성탄압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위해나 모욕, 그리고 아동 성추행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지원금이다. 아동 성추행을 일으킨 사람은 유치원 교사였다면, 그 피해아동의 부모, 혹은 자신의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맡긴 부모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그것도 한국남자의 아이니깐 당해도 상관없다는 논리에서 저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서 많은 국민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여전히 이런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고 계속 어려운 말만 내뱉는 지식인들에게 반대로 묻자면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중략) 즉 민중의 기본적 열정을 느끼고 이해함이 없이도 지식인일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그것도 그런 글을 적으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모두 달려드는 현상에서 말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남자들과 말만 잘 통하는 착한 페미니스트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거칠게 싸우는 페미니스트도 페미니스트라고 말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란 성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란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좋은 페미니스트이든 나쁜 페미니스트이든 그 당사자가 나쁜 인간이 되면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그저 가식과 위선에 불과하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많은 여성들은 아주 강하게 나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자세로 말이다.

 

그러나 행동과 달리 사상적 근본에는 항상 자신들의 신념과 명분이 존재했다. 그 명분이 결국 언론과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여성들에게 정치적 자유주의가 부여된 것이다. 영화는 진짜 애밀리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끝나며, 마지막 장면은 흑백영상으로 기록된 그녀의 장례식이 등장한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부조리와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폭력과 희생이 수반되었다. 어느 누군가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영화 <서프러제트>는 단순히 여성의 인권을 원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전 인류가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영화 원작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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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1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1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6-08-0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읽으러 올 때마다 많은 사색을 하게 됩니다 만화애니비평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인간이라는 공통의 대지 위에 서 있는데 왜 거기서 뭐가 다르고 뭐가 다르다 하면서 차별을 하는 것일까요? 여성 역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권리에 있어서 정말 많은 피해를 직접적 구조적 폭력을 당해 왔어요 ㅠ 정말 좋은 글 입니다 ㅎ

만화애니비평 2016-08-03 11:01   좋아요 0 | URL
신해철 씨가 이런 느낌의 유고를 남겼죠.

대한민국 여자들은 정말 X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다고 남자들도 X같은 곳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보면 둘 다 X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단지 그 차이는 사회구조적인 차이겠죠. 재벌 2세 따님이 불쌍할까요? 공사장 노가다 아저씨 아들이 더 불쌍할까요? 물론 공사장 노가다 아저씨의 따님이 더 불쌍하겠지만, 조금 생각해 볼 게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