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서재
이채윤 지음 / 푸른영토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책을 읽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책 한권을 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보통 책 한권을 읽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느냐 마느냐 차이가 있겠으나 단순히 인기소설이나 유행하는 자서전은 제외하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보통 인문학 도서나 혹은 고전소설을 읽게 되면 분명히 그 책을 읽음으로서 다른 책들을 계속 이어가야 흐름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령 닥터 지바고란 소설과 영화가 있다고 치자, 그 작품은 지금이야 명작이 되어버린 고전 소설과 영화다. 하지만 그 작품을 알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사와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과 러시아내전, 스탈린의 독재정치를 생각하지 않으면 내용의 깊이를 향유하지 힘들 것이란 점이다. 그저 소설 책 한권을 읽었을 뿐인데, 그 책에서 보이는 작가의 정신세계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혹은 그 시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들어가 있다. 그 시대적 배경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지도 알 수 있고, 거기에 대한 작가는 어떻게 여겼는지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역시 인간이므로 자기의 이성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지와 사랑과 데미안을 저술한 헤르만 헤세의 경우 그의 책을 처음 읽는 순간 프리드리히 니체가 생각났다.

 

 

나중에 그 책을 다 읽은 후에 후기를 보니 그는 실제로 니체를 열심히 보고 심취했다고 한다.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가 의도한 그 세계와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그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책의 매력이면서도 큰 짐이기도 하다. 1권이 책이 세상을 살아가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람들 중에서 책을 통해 책을 알아가는 것은 또 어떤 이야기와 방향이 있을까? 어떻게 보면 최근에 본인이 계속 어느 특정인물을 추모하는 것일지도 모르나, 그는 분명히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었으며, 정치가였다.

 

 

이번에 내가 읽은 서적은 <노무현의 서재>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상당한 정치적인 안목이 넓었으나 그가 처한 정치적 약세와 언론과 여론의 견제에 많은 타격을 입었다. <노무현의 서재>에서도 언급하다시피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5년 동안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극복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발한 참여정부는 보수 세력이 득세하는 우리나라 정치 현실 속에서 비주류에 속한 정부였다. 노무현 역시 우리 사회의 주류와 다투는 비주류, 마이너리그의 삶은 산 사람이었다. 반면 대한민국의 보수는 거대 기업, 거대 언론사, 거대 연구소, 법원, 검찰, 강남, 서울대, 학술원을 비롯한 각종 학회, 라이온스클럽, 로터리클럽, JC(청년회의소), 등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형성하고 있었다.”

 

 

라는 내용처럼 그의 대통령 생활은 단순히 옆에서 보면 한심할 지경이었으나, 막상 그 실상을 알고 보면 한심한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목을 물고 늘어지는 한국의 고질병들이었다. 겉으로 뭔가 단순하고 무식한 말투를 내뱉는 그이지만, 막상 그가 가진 사고와 판단력을 생각해서는 그런 사고를 가지는 것은 한심하다는 말만 내뱉을 수밖에 없다. <노무현의 서재>를 읽기 전에 이미 <진보의 미래>를 읽어보았는데, 그 책에서 그가 인용한 도서나 철학자 그리고 내용은 보통 사람으로서 기대하기도 어려운 책이었다. 그의 독서량은 기본적으로 철학에서 시작되는 고전부터 시작하여 현대 사회과학, 경제학 도서까지 파고들었다.

 

 

특히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공학도가 아닌 법대나 정치학 전공자란 한계로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경우 과학과 기술에 대해 중시했고, 특히 공학적 기술력을 중시했다. 과학기술력의 발전은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기술관료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에너지가 고갈되고, 자원이 모자라며, 물과 공기와 같은 자연환경 역시 위기에 처해지는 것을 알았다. 그런 점들을 정치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나, 그런 행동적 주체는 과학과 기술이란 점이다.

 

 

물론 이 책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그런 인력을 위한 인프라 조성만 다루는 것만은 아니다. 시민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 안목을 매우 중시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어느 누구를 지지하거나 따르는 것으로나, 또는 어느 특정인물은 반대하고 무조건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으로 지식인 내지 양심적인 인간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물론 정말 그렇게 반대하고 거부해야 하는 인물은 있다. 독재정치나 폭력정치를 하는 정치가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일어나서 투쟁하는 것도 좋으나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 의식을 깨우치는 방법밖에 없다. 국민과 시민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국민은 어떻게 보자면 대중인 mass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는 시민 즉 people은 무엇인가? 시민이란 정치적인 안목과 판단력이 가지고 있어서 그 사회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올바른 안목으로 훌륭한 정치지도자를 선별하고, 그들이 바른 정치를 하는지도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시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이다. 그 정답은 좋은 독서라는 점이다. 참고로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계기는 여러 가지이나 최고의 계기는 그의 정치적 팬클럽인 노사모와 더불어 인터넷 매체였다. 그가 2000년 부산 북·강서(을)에서 패배 직후 그의 안타까운 소식과 더불어 인터넷에서 이미 그는 많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정치적인 인맥이 없다. 비주류 속에 비주류였던 그는 처음 자기 당내 대선경선에서 후보로 결정되었는데, 멀쩡한 사무실도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제대로 그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것은 일반 사람들의 관심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그여도 인터넷은 정보로서 가치가 높아도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책이라고 했다. 인터넷이란 공간은 너무 유동적이고 정보가 너무 넘쳐 흘러내리기 때문에 도리어 올바른 정보나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고 와류되는 것이 더 쉽게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으로서 그가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일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바르고 틀리고를 외부의 영향이 아니라 자신의 관찰에서 볼 수 있는 점이다.

 

 

현재의 시점과 과거의 흐름, 앞으로 다가올 문제들은 끊임없이 보고 연구해야할 사항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이 들어간 좋은 책들이다. 노무현의 서재에서는 노무현이 추천하던 책을 위주로 정리한 도서이다. 나는 반드시 노무현이 좋아서든 혹은 싫어서든 이 책을 권하라고 싶지는 않다. 단지 정말 자신이 시민으로서 올바른 지식과 판단력이 있다고 자부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고 판단하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노무현이 아낀 도서에 대한 소개와 노무현의 입장을 대비하는데, 노무현의 입장은 안 보더라도 그 책들에 읽어 보고 판단함은 좋다.

 

 

왜냐하면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과 서적들은 세계적인 석학들이고, 상당히 수준 높은 서적들이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과 같은 세계적 사회학자 및 경제학자를 비롯해 앤서니 기든스와 같은 사람들은 세계 정치흐름과 사회, 경제흐름을 아주 잘 관찰해내고 있으며, 이들의 책에서 오늘 날의 우리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 것인지를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도서가 아니라도 21세기는 환경과 에너지 문제를 토대로 자연환경도시인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매우 놀라운 내용이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환경공학을 전공했기에 환경 관련 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내용은 언제나 접촉하는 내용이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지구 에너지 고갈과 수질오염과 수자원고갈로 인한 사막화 현상과 식수문제, 에너지 극단화로 통한 빈곤의 문제는 계속 우리가 풀어갈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가 대통령재임 시절에 환경문제를 생각하여 하이브리드 자동차 내지 친환경자동차를 추진하려고 한 것을 알았는데, 대기업의 압력에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는 그 반대였지만, 지금은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석유값은 계속 오르고, 석유에너지의 사용은 대기오염을 증감하고 있고, 대기오염으로 인해 비가 내리면 수질오염과 토양오염,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먹는물과 식량이 손실을 준다. 환경이란 것들은 계속 돌고 도는 하나의 생태계시스템이므로 전체적인 안목과 더불어 그 시스템에 대한 상세한 안목이 없다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쿠바의 식량문제와 의약품 문제, 경제문제에 대한 해결을 오로지 자연에 순응하여 얻은 성과품인 것이다.

 

 

오로지 파괴만을 일삼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계속 낭비하는 현대사회의 이기적인 합리주의는 양극화와 더불어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인 문제에 대해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에 대한 하나의 구조나 체계, 그리고 거기에 대한 원인과 문제, 앞으로 대처해야할 과제나 방법에 대해서는 상당히 취약하다. 시민들이 갖추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가이다. 뭐든지 정치인들이 위임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 그런 문제를 공감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야 하며,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경우 서로 그 문제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는지 서로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물론 이런 판단에서 그의 생각을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제는 동조조차 할 수 없는 세계에 가있지만, 그에 대한 반대와 비판에서 그런 반대와 비판 역시 올바른 판단력과 객관적인 논리로서 대하자는 것이다. 때로는 그런 비판 역시 새로운 대안과 길을 창출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 길조차도 역시 올바른 지식과 양심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여 노무현의 서재에 들어있는 책의 양은 새 발의 피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참고하여 정책적 영역에 도움을 준 서적을 읽기 위해서는 그 책을 읽을 능력과 수준까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그 책들을 읽으면 그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한 책들이 또한 제시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1. 정치사회

가.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 울리히 백 지음 / 정일준 옮김 / 새물결

나. 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 조셉  S. 나이 엮음 / 임걸진 외 옮김 / 굿인포메이션

다. 제3의 길 / 엔서니 기든스 지음 / 한상진 외 옮김 / 생각의 나무

라. 노동의 미래 / 엔서니 기든스 지음 / 신광영 옮김

마. 시장인가? 정부인가? / 김승옥 지음 / 부키

바. 유러피언 드림 /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원기 옮김 / 민음사

사. 주식회사 장선군 / 양병무 지음 / 21세기북스

아.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 배기찬 지음 / 워즈담하우스

자. 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 외 지음 / 이종태 엮음 / 부키

차. 국가의 역할 / 장하준 지음 /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타. 대한민국 개조론 / 유시민 지음 / 돌베개

파. 대통령 보고서 / 노무현대통령 비서실 보고서 품질향상 연구팀 엮음 / 워즈덤하우스

하. 이제는 단신 차례요. Mr. 브라운 / 엔서니 기든스 지음 / 김연각 옮김 / 인간사랑

거. 디케의 눈 / 금태섭 지음 / 궁리

너. 유엔미래보고서 / 박영숙 외 지음 / 교보문고

더.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 지음 / 돌베개

 

 

2. 경제, 경영

가. 변화관리 / 존 코티 외 지음 / 현대경제연구원 옮기 / 21세기북스

나. 소유의 종말 /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다. 체인지 몬스터 / 지나 다이엘 덕 지음 / 보스턴컨설팅그룹 옮김 / 더난츨판사

라. 수소 혁명 /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진수 옮김 / 민음사

마.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 / 오영교 지음 / 더난출판사

바. 생태도서 아바나의 탄생 / 요시다 타로 지음 / 안철환 옮김 / 들녘(코기토)  

사. 블루오션 전략 / 김위찬 외 지음 / 강헤구 옮김 / 교보문고

아.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 / 국민 경제자문회의 엮음 / 교보문고

자.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 제임스 맥그리그 빈스 지음 / 조중빈 옮김 / 지식의 날개

차.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 / 댄 코헨 지음 / 존 코터 감수 / 유영만 옮김 / 김영사

타.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엮음 / 한스미디어

파.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 / 존 코터, 댄 코헨 지음 / 김기웅, 김성수 옮김 / 김영사

하. 슈퍼 자본주의 / 로버트 라이시 지음 / 형선호 옮김 / 김영사

거. 사회정책의 제3의 길 / 양세진 외 지음 / 백산서당

 

 

3. 역사, 문화

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이덕일 지음 / 김영사

나.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 송기도 지음 / 개마고원

다. 칼의 노래 / 김훈 지음 / 생각의 나무

라. 거의 모든 것의 역사 / 빌 브라이슨 지음 / 이덕환 옮김 / 까치

마. 일본제국흥망사 / 이창위 지음 / 궁리

 

 

4. 그 외

가. 괭이부리말 아이들 / 김중미 지음 / 송진헌 그림 / 창작과 비평사

나. 까치집 사람들 / 정시아 지음 / 토우

다. 그늘이 더 따뜻하다 / 정시아 지음 / 토우

라. 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 / 조기숙 지음 / 지식공장소

마. 대한민국 교육 40년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엮음 / 한스미디어

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로펜 슬레이터 지음 / 조중영 옮김 / 에코의 서재

사. 생각의 오류 / 토머스 카다 지음 / 박윤정 옮김/ 열음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김영명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정말 무엇을 하자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다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자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요 그런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종교적인 부분에서 어디가 가장 강한 종교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불교라고 대답할 것이다. 불교라는 것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유입되어 지금까지 계속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향유되던 종교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국인과 같이해온 종교로서 분명히 한국사회와 많은 친숙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계속 깊이 들어가면 이해하기란 어렵다. 지금 글을 적는 본인도 사실 가정 내에서 어머니는 절에 다니시고, 이글을 적는 석가탄신일 당일 역시 절에 가셨다. 또한 평소에 좋은 명산에 있는 사찰에 친구 되시는 분들과 같이 다니시니 우리 집안 역시 불교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 게다가 나는 중학교 시절 불교재단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다고 하여 나는 절실한 불교신자도 아니고, 그런다고 다른 종교를 믿는 것도 아니다.

 

 

나에겐 종교라는 것은 신앙심과 이념을 강조하는 부분만 보이는 것만 같아 종교라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다. 그래도 나는 부처님과 예수님은 좋아한다. 단지 부처님과 예수님 옆에 두고 근본이 아닌 교조적인 이념으로 몰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멀리 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인간은 이성을 가지면서 동물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동물은 지금의 현재시점에 본능적으로 살아가므로 죽음이란 단어를 심각히 고민하지 않는다.

 

 

아니 죽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슬픈 이야기나 가시고기 부모들은 알을 놓을 때 어미는 배란 후에 어디 멀리 가서 죽고, 아비는 새끼들이 부화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다가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의 밥이 되어준다고 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무엇일까? 그 죽음이란 것 역시 본능에 의한 하나의 삶의 과정이 아니런가? 그래도 그런 본능을 보자니 인간보다 동물이 더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희생으로 후예를 이끌어가는 그 생존본능에서 말이다.

 

 

그래서 죽음을 알 수 있는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언제나 다른 것이기도 하나같은 것이기도 하다. 철학을 하는 이유에서도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점과 그 죽음이란 무의 경지조차도 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런다고 현실적 존재가 아니기에 무라고 할 수 있는 오묘한 이야기가 들린다. 인간에게 죽음은 정말 두렵고 무섭고도 상상 이상의 억눌림이다. 과거 프랑스혁명에서 루이16세의 목이 단두대 아래 잘려나간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죽게 되었는데, 그녀는 죽기 전날에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 인해 머리색이 하얗게 되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란 그 누구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인과인 것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으로 모셔지는 석가모니와 경우 그런 인간의 고통을 일찍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점과 그런 고통이 생로병사라는 길에서 헤매는 것을 알고선 출가를 했다. 당시 왕의 아들이요, 앞으로 왕이 될 권력자가 그 모든 것을 접고 출가를 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불교설화집에서 많이 나오는 부분이다. 그런다고 하여 우리 일반적인 인간들이 부처님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같이 찾는 것은 어렵다. 그 분은 오랜 수행과 깊은 마음 그리고 넓고 아름다운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지 못할망정 그런 분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좋아한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반드시 생각해 볼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면서도 복잡하고 또한 실행하기가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보자면 그런 일들은 매우 많다. 설령 행동을 하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을 위한 하나의 가치관 정립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을 저술한 김영명 교수는 분명 정치학을 전공한 인물이다. 그는 본래 불교에 깊은 뜻을 두던 사람도 아니고, 우연히 불교강좌를 듣고 나서 불교에 흥미를 가졌다.

 

 

불교에 깊게 관여하지 않은 사람이 불교에 대해 적는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이지 못하면서 어울리지 않을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있기에 볼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불교의 경전을 생각하면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고, 한자어라고 하여도 말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불교라는 것이 부처님이 많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내세우지만 그것이 도로 아미타불이라면 부처님의 말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서 불교에 흥미를 가지고 불교에 조금 다가가려는 사람에게 불교라는 것이 친숙해야할 존재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권위와 낯설음의 존재라면 그것은 종교적인 종교가 아니라 권위로서의 종교로 자리 잡음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 하여 색이 있는 것이 색이 없고, 색이 없는 것이 비어있다는 말처럼 뜻을 생각하기 어렵고 난해하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쉽게 가느냐 말이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쉬운 말일 것이다. 단순히 불교를 종교적 영역이 아닌 철학적 영역으로 본다면 말이다.

 

 

불교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실존주의적인 영역이다. 부처님도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좋으나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자신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스스로를 발견하라는 점이다. 자기의 말이란 그것을 위한 도움이란 점이다. 또한 비어있는 것과 채워진 것에서 불교에서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내세우는 것을 중시한다. 인간에게 언제나 가지지 못하는 것이 마음의 평온이고, 또한 존재적인 현상이다.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진리가 가장 진리적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유동적으로 대처하고,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일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 살아가면서 행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른다고 하여 지나칠 수는 뭔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으나, 시중에 나온 불교도서들이 너무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 역시 문제 중에 하나이다. 따라서 이제 접하는데, 이게 뭔지 몰라서 조금이라도 알고 싶은 사람이 만든 책이니 불교에 이미 오래 머문 분이나 혹은 이제 접근한 분이 이 책을 본다면 조금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
아이자크 도이처 지음, 이주명 옮김 / 필맥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드디어 예전에 읽은 동물농장의 중요한 이야기가 연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40년 8월 2일에 일어난 트로츠키 암살 사건의 맥락이 연결된다.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되고 이제 더 이상의 트로츠키가 정치적 권력으로서 정치에 임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그는 온갖 조작, 비방, 왜곡, 공작으로 통해 자기의 일어날 공간을 빼앗긴다. 그가 처음 러시아에서 떠날 때는 러시아혁명을 위한 전초전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영원히 러시아에서 머물 수 없는 추방자로 낙인을 찍혀버렸다.

 

그렇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보여주는 비극의 유머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성장을 위해 공업화가 필요하여 농민으로부터 야유를 받는 그의 난감함을 스탈린이 꼬리 잡아 트로츠키를 정치적으로 패배시켰다. 하지만 웃기게도 가장 러시아 농민인 굴락과 무지크를 억압한 사람은 스탈린이다. 그의 폭력적인 테러리즘은 사회주의 혁명이란 숙제를 그저 독재정치의 역사적 교훈으로 부각시켰다. 사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인 반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였다. 그가 노린 전략은 대중들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동물적 존재 본능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조작법과 더불어 공포심이란 것을 이용했다.

 

가령 말 잘 듣지 않는 오리가 있다면 그 오리를 잘 대해주어서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오리털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심지어 치유될 수 없는 큰 흉터까지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리는 폭력을 휘두른 인간에게 따라온다. 그것은 옛날 고대부터 이어온 정치적 테러리즘이다. 스탈린은 그 폭력을 아주 교묘하게도 이용하였고, 심지어 그 폭력으로 통해 스탈린주의자에게도 그 폭력을 향했던 수준만큼 되돌려준다. 오죽했으면 게페우라는 비밀경찰조직을 통해 온갖 살인과 테러를 일삼았던 것도 모자라 그들마저도 총을 심장을 향하게 했다. 단지 어이없는 부분은 처음에 희생당한 정치인들은 모두 트로츠키를 음모의 원흉이라고 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레닌과 더불어 러시아혁명을 일꾼 영웅이고, 코민테른에서 아주 중요한 입장과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의 위원회에서 활약을 했다. 그들은 트로츠키가 옳아도 트로츠키에게 죄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죽음은 받아들이되, 그들의 어리석음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은 어리석음이 보였다. 그러나 지노비예프는 처음에 레닌에게 10월 혁명을 반대한 것보다 지금의 스탈린에게 당한 것이 치욕스럽다고 한다. 트로츠키의 선견은 결국 현실로 되었고, 트로츠키가 터키와 노르웨이, 프랑스로 전전긍긍한 후 최종적으로 멕시코에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에 스탈린에게 절대적으로 봉사하고 버림받은 부하린마저도 죽음을 당한다.

 

예전에 보았던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이란 서적에서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내용에서 부하린의 죽음을 토대로 <한낮의 어둠>이란 소설을 인용한다. 대중들의 자발적인 폭력으로서 세워진 소비에트연방이 이제는 대중들에게 향하는 폭력으로 스탈린주의 독재국가로 변질된다. 시대착오적인 그 사상은 분명히 소비에트연방이 미국을 이은 경제 및 군사강대국과 과학기술의 절정으로 성장한 것은 분명하나 그것은 진정한 진보가 아닌 폭력과 조작으로 통한 집단주의였다. 아니 파시스트적인 요소가 강한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문제가 최근 국내에 일어난 점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철저한 집단주의적이고, 오류만 남은 그 사고들이 아직도 망상의 유령이 아닌 현실의 유령에서 말이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그 유령과 더불어 그 유령을 향해 미친 듯이 침을 튀기고, 확대화 하려는 자들은 유령을 떠나 악령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러한데, 당시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트로츠키의 선견지명에 정말 놀란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의심하고 내쫓은 노르웨이 정치가에게 언제가 나치의 정복으로 당신들은 모두 도망칠 것이란 사실에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독일에 일어난 나치의 강성과 히틀러의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은 소비에트연방에게 쫓기고 스탈린에게 죽음의 위기가 오기에 말할 힘이 없었다. 자신의 입은 언제나 열려있으나 옆 사람들은 귀가 막혀버렸다. 그렇지만 결국 그의 위험은 확실했다. 실화에서 프랑스 대사관이 2차 세계대전 전에 히틀러를 만나는 자리에게 히틀러에게 트로츠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히틀러는 매우 놀라는 표정으로 일어나며, 트로츠키의 위험을 언급했다. 무기 하나 가진 것도 없고 조직도 없는 늙은 정치사상가 한 명이 스탈린은 물론이고 히틀러에게 최고의 강적이었다.

 

오히려 히틀러는 스탈린보다 트로츠키가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독일이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을 점령 후에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의 조약을 맺어 군사적으로 두려울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과연 무엇이 무섭고 두려운 것일까? 스탈린은 무척이나 트로츠키가 두려워 한 모양이었다. 스탈린의 정치적 압제는 수용소 죄수에겐 하나의 순교자로서의 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스탈린은 자신의 반대세력을 모조리 총살을 시킨다. 과거 1937년에 시작한 러시아 대숙청과 대이주와 더불어 교도소 역시 피의 바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교도소에는 많은 트로츠키주의자가 있었고, 이들은 무식한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과는 달리 엘리트였고, 한편으로 높은 도덕심도 보유했다.

 

그들의 존재란 스탈린에게 눈에 가시고, 하루 빨리 없어야 했다. 결국 없애버리고, 그것이 아닌 존재도 죽였다. 조금이라도 눈에 벗어나면 말이다. 그런데 처음에 트로츠키가 내쫓길 때는 모두 트로츠키를 의심하던 이들이 총살형으로 나무기둥에 묶여 있을 때 모두 트로츠키여 영원하라 하고 외친다. 심지어 트로츠키가 죽고, 스탈린이 죽은 후에 스탈린주의 후예들조차 뒤에서 몰래 트로츠키가 옳았음을 인정한다. 물론 100% 옳은 것은 아니나 그런 정치적 판단력을 가진 상태에서 말과 행동을 옮길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소비에트연방은 정치적 자유나 표현이 사라졌다. 오죽했으면, 스탈린이 자신은 노동자의 국가라고 하면서 독일 히틀러와 쪼개먹은 상대국가에 대해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그 토지를 농민에게 죽는 것이라, 그 농민마저 강제노동에 부역시켰냐는 것이다.

 

그렇게 트로츠키는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여 과거역사를 사례를 통해 앞날을 예견했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과거를 반성하는 것은 오늘의 현재를 구성하는 원인과 구조를 파악하는 것도 있으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사회가 발전하더라도 인간은 결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단어가 적용된 것은 그리스철학이 시작되어 데카르트와 칸트에게 이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극소수 인간에게 적용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이상향은 국민정치가 아니라 시민정치였다. 어떻게 보면 폴리스국가에서 귀족적인 시민정치로 통해 어떤 사회의 실력과 학식, 인품이 높은 사람에게 많은 정치적 참여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차후 니체가 지적하는 대중사회는 이른바 군중심리와 도덕에 대한 의심 없는 순종이 더 인간을 부패하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트로츠키는 “도덕은 역사와 계급투쟁 속에 내재돼있는 것이며, 그 자체로 불변의 실체를 갖는 것은 아니다. 도덕은 사회적 경험과 사회적 필요를 반영한다. 따라서 도덕은 언제나 수단을 목적에 연결시킨다.”에서 그는 종교에 대한 도덕적 강요를 비판했다. 이런 점은 니체의 서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내용과 비슷하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의심하고 스스로 되물어볼 수밖에 없다. 본래 철학이란 것이 자기 자신부터 생각하고 비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는 이성의 시대가 아니라 광기의 시대였다. 유럽에서는 파시스트가 판을 치고, 그들은 전체주의로 통해 광기를 살기로 향상시켰다. 유럽이 아닌 동양의 일본도 그렇다. 트로츠키는 세계적으로 불안과 광기에 넘치자 항상 이에 대한 비판을 날렸다. 그런데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일본 천황과 독일 나치와 결탁했다는 것과 트로츠키가 미국의 언론과 정치인하고 진실규명이나 문제해결을 하려고 하면 자본주의의 앞잡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상 트로츠키에게 돈도 오지 않고, 나치도 트로츠키를 싫어했다. 본질과 상관없이 모든 대중들의 시선을 가리는 언론행위는 독재정치의 기본이고 필수라는 것이 여전히 드러난다.

 

그런 상태에서 트로츠키는 언제나 죽음과 마주보고 있었다. 그가 프랑스, 노르웨이, 터키를 오고가던 시절에 항상 암살과 테러의 위험에 쳐해 있었다. 게다가 그가 가던 집에 불이 나고, 누가 자신의 자료들까지 훔쳐가려 했다. 게페우가 으르렁 거리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1936년 멕시코로 이주를 가나, 거기라고 안정은 없다. 오기 전에 1번째 부인에게 얻은 딸 니나가 죽고, 2번째 딸 지나는 트로츠키의 손자인 세바를 데리고 오지만, 지나친 피로와 병들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고, 그녀는 쓸쓸하게 독일의 침대에서 자살한다. 아직도 인상 깊다. 그녀는 자신의 방을 함부로 열지 못하게 하고, 가스를 채워 질식사를 했는데, 그 표정이 고통이 아닌 행복이었다.

 

그 후에 트로츠키의 아들인 료바는 우울증과 피로, 병세로 32세의 일기로 죽는다. 그는 아내 사이에 아이를 두지 못했고, 그의 누나의 아들인 료바를 아들처럼 여겼으나, 결국 죽고만다. 아내인 진은 트로츠키주의보다는 몰리에르파로 료바를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었고, 세바가 아들처럼 귀여워해준 것이다. 하지만 결국 트로츠키 품으로 세바를 돌아간다. 세바를 찾은 트로츠키는 다행일까? 불행일까? 자신의 2딸 중에 1명은 러시아에서 병으로 굶주림으로 죽고, 1명은 병으로 인해 자살한다. 그리고 그녀들의 남편 모두 행방이 묘연해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아들인 료바는 괴로움 속에 죽었고, 다른 아들인 세르게이는 러시아에서 긴 유형생활을 하다 죽는다. 물론 죽기는 트로츠키가 죽는 것으로 나오나 트로츠키는 모든 가족들을 잃게 되었다. 심지어 1번째 부인인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공간이 없어 늙은 몸을 이끌고 그녀의 언니에게 의탁한다.

 

트로츠키에게 남은 가족은 세바와 그리고 40년 넘게 그를 지탱해준 나탈랴였다. 트로츠키는 평생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를 찬양했으며, 그녀가 없었으면 자신은 없었다고 한다. 영화 트로츠키 암살사건에서 트로츠키는 자신을 걱정하고 아이들을 잃어 슬픔 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바친다. 그러나 그렇게 노부부는 힘들게 망명생활을 하나, 결국 트로츠키는 잭슨이란 가명을 쓰던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피켈을 맞고 잔혹하게 쓰러진다.

 

여기서 스탈린과 게페우의 치밀함이 보인다. 라몬에게 지령을 내릴 적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저 트로츠키의 여비서인 실비아의 애인으로 등장하게 하더니, 그녀와 지내게 하면서 트로츠키 주변에 갈 기회를 만들어 단순히 살해하도록 부추킨 것이다. 라몬이 트로츠키를 살해하기 전에 라몬이 왜 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게페우는 라몬의 어머니를 볼모로 잡았고, 어머니가 멕시코에 있었다. 굳이 멕시코에 나둘 이유가 없어도 나둔 이유는 라몬에게 협박을 한 것이란 점이다. 트로츠키 역시 인질을 잡은 적이 있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백위군과의 내전에 백위군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으나, 그들을 죽이거나 가혹한 대접을 하지 않았다. 단지 내전으로 인해 차르의 가족들이 그의 부하의 손에 죽을 때 그 책임을 자기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해 양심과 윤리, 기준이 있었다. 그는 폭력과 억압이 폭주하는 광기의 역사에서 그 고리를 부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성적인 영역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전설적인 인권대통령인 링컨을 생각하면 말을 남겼다. “미국 북부군의 잔혹성과 남부군의 잔혹성에 대해 역사는 상이한 잣대를 갖고 있다. 속임수와 폭력으로 노예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노예주인과 속임수와 폭력으로 족쇄를 벗어던지려는 노예를 생각해보자. 오직 경멸스러운 환관들만이 도덕의 법정에서 이 두 가지경우가 동등하다고 우리에게 말항 것이다.”라고 말한다.

 

폭력과 속임수를 파괴하기 위해 폭력이란 극단적 행위로 미칠 수 없는 현실의 비극에서 그는 피할 수 없는 길이라 여겼다. 그 결과 그는 추방되고, 버림받고, 배신당하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자신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도 그는 저항했다. 피켈을 맞아 머리에 70㎜정도 들어가도, 그리고 뇌수막이 찢어지고, 뇌신경이 파괴되어도, 뇌에 두개골 파편이 박히고 있을 때도 그는 라몬에게 저지했고, 그의 비명과 소란에 달려온 사람들을 설득하여 라몬을 포박하여 그의 증언을 내놓게 하라고 한다. 죽어가는 자리에서도 미래를 향한 이야기와 나탈랴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는 트로츠키가 죽어 20년 넘도록 트로츠키가 죽은 집에서 살아간다. 그의 시신이 화장되어 그 집에 묻혀 작은 비를 항상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의 죽음은 스탈린에게 큰 미소로 되었으나, 후에는 아픔을 맞이했다. 부하린을 죽인 스탈린은 부하린만큼 군사전략을 잘 아는 지휘관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처음에 히틀러와 계약하여 이익을 보던 소비에트연방은 결국 나치에 의 큰 타격을 받는다. 그것도 모자라 스탈린은 1919년 레닌이 세운 코민테른을 1943년 와해시키고, 무력으로서 혁명을 수행한다고 했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연방이 타국의 혁명을 도와주는 것이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엇갈린 혁명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에서도 이상하게 만들어졌다. 정복이 혁명이라고 하는 스탈린의 잔재가 여전히 유령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트로츠키 모든 것을 잘 한 것은 아니나 그가 살아온 투쟁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고, 생각해야할 가치이다. 그의 유언에서 아내인 나탈랴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내용이 나온다. “나타샤(아내의 애칭)가 정원에서 창문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그 창문을 더 넓게 열어 공기가 내 방으로 좀 더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했다. 나는 담장 아래로 밝은 녹색의 풀들, 담장 위로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도처에 반짝이는 햇빛을 본다. 인생은 아름답다. 미래 세대는 모든 악과 억압, 폭력을 씻어내고 이 아름다운 인생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그의 유언은 한편의 시와 같아. 아름답고 절대적으로 인류가 이루어야 할 가치관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가난과 빈곤, 죽음과 전쟁, 그리고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과 같은 문제로 병을 앓고 있다. 그의 가치관은 아직 유효한 것일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이고, 인권이라는 무엇인가? 세상에 평화는 무엇이고 인류가 가져야할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스탈린과 많고 많은 권력자들에게 목이 졸리고 졸려 죽음을 당한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나 그 자신의 인생과 가족들은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이제 그를 패배한 영웅이 아니라 진정한 영웅으로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해 그들을 핍박하고 모함한 이들은 모두 후대 역사의 패자로 남았다. 진정한 승자라는 것은 당시의 승자인지 혹은 후대의 평가인가는 모르나, 적어도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것처럼 그의 죽음으로 얻은 이름은 패배라는 아픔을 뛰어넘은 채 승화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봉하로 간다 - 열혈 명계남, 리얼 증언과 한맺힌 싸움의 기록
명계남 지음 / 모루와정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2012년 5월 23일 나는 정말 봉하로 갔다. 이번에 출판된 문성근 배우의 친구이며, 영화제작자 겸 배우인 명계남의 책 제목인 <봉하로 간다>라고 말이다. 이 책은 명계남 배우가 노무현이 처음 정치스타로 되는 시기인 2000년으로 올라간다. 그 당시 북구강서구 을인 허태열 후보에게 패배한 노무현에 대한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이른바 노사모가 결성되었다. 그는 그런 노사모의 중간에서 노사모와 더불어 노무현, 그리고 문성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 갔다.

 

여태까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자서전 내지 일화를 다룬 서적들을 보면 상당히 고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복받쳐 슬펐다고 한다면, 이번에의 이 서적에서는 그리움으로 복받쳐 악으로 표출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는 단순히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당시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다루는 것보다는 그런 일들에 대하여 아주 열렬하게 깐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 조금 즐겁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배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배설이란 단어에서 말을 막 내뱉는 것이나, 그 내뱉게 한 일련의 과정과 형태를 보자면 배설 따위는 양반인 것 같았다.

 

노무현이란 인물이 당한 것도 그러하나 명계남 자신이 당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제일 인상 깊은 이야기가 바다이야기란 사행성 도박게임에 대한 일화다. 당시 명계남은 전혀 도박과 무관하고 그 엄격하고 무서운 칼날을 지닌 검찰과 법원에서조차도 무죄로 분명히 판결났다. 그러나 누가 명계남이 바다이야기의 중요사업자란 말을 억지로 만든 것이 이른바 공상 과학적 사고를 비꼬는 pata-physics라는 형이상이상학 영역으로 넘어갔다. 쉽게 이 단어에 대한 말한다면 나는 당신이 그것을 직접 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았으나, 나는 당신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법이 여태까지 우리 일상과 사회에서 가장 잘 통용되는 이야기다. 또 다른 것을 다루어볼까? 명계남은 노무현 시절에 국가정치인사에 등용되지 않았다. 물론 노사모 많은 회원도 그렇다. 얼마나 참 국내 인식이 웃기는지 어느 사람이 사업을 벌이려다가 노무현 출마를 보고 대선지지를 호소했다. 그런데 막상 되고 나서 그 사람은 아무런 자리를 받지 않았다. 그는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의 동네에서 그는 자리 하나 못 찬 병신이라고 하여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고 한다. 보통 일반인이 이 정도면 유명인이라면 어떠하랴?

 

명계남의 이야기를 보니 어느 신문을 쓰던 기자가 명계남이 장관자리 요구라는 기사를 썼는데, 그런 허위사실에 대한 정정과 사과를 요구하던 명계남에게 기자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그런 기사를 썼고, 그게 사실이 아니면 말고, 왜 미안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 한국의 언론수준은 세계적으로 상류에 끼지 못한다. 끼지 못하는 이유는 미디어란 자체가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 상당히 영향을 받고 있는 만큼 그것에 알맞게도 저널리스트가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 사진기자들이 받는 상인 퓰리처에서 우리나라 기자들은 몇 명이나 받을 수 있을까? 아니 몇 명이나 거기 후보에 올라갈 수나 있을까에 더 이상 희망을 거는 건 포기하겠다.

 

그 정도로 한국에서 언론이란 것이 과연 진실과 정의를 보도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허위와 불의로 가득한 세계로 조장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언론의 미디어 기능에서 사람들을 일차원적인 사고로 한정짓게 만드는 일은 정말 무섭다. 명계남의 일화에서 어느 부산 횟집식당에 갔는데, 명계남보고 봉하에 가면 한 몫 하겠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신문과 방송에서 그런다고 한다. 그것이 아니라고 하니 믿지 못한 것은 이해하겠다. 그렇지만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결정하란 말에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말에 처음부터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의도를 왜 들이대는 것이냐 말이다.

 

봉하사저를 설계한 정기용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하고 만든 가옥이 아방궁이란 말에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고 한다. 그런 정기용에게 분노를 만든 대표적인 신문사의 싸움일화는 정말인지 질리지도 않을 이야기다. 단지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천황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느낀 군중심리적 불안요소를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과 마녀사냥으로 풀었다. 사실 대지진이든 소지진이든 지진이란 현상은 자연과학적으로 지각 아래 맨틀과 맨틀의 운동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다. 누가 주술을 부려 만들 수 없는 일이거와 억지로 무기를 동원해도 만들 수도 없다.

 

지진으로 일본이 술렁거리고 있을 때 모 신문 사주는 천황에게 자신이 제대로 조선인들을 통제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한다. 허구일까? 거짓일까? 적어도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벌일 적에 오만 칭송에 조선인들을 관동군으로 보내는 것이 영웅화시키는 얼간이란 점으로 본다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존재다. 그들이 한참 선전하던 시기에 사용된 윤전기가 있었다. 신문을 만들어서 빨리 보급하려면 인쇄시설이 필요하지 않은가? 처음에 독립기념관에 있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 시절에 못된 짓만 했다. 그런데 그 기계를 사용한 사주가 다시 반환 요구했으나 독립기념관에서 거부했다. 그것이 기증된 이상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현실이 한국에서 최근에 벌여진 일이다.

 

스펙타클(spectacle)이란 단어는 본래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구성된 인간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모른 채 뭔가 엄청나고 상당한 일들을 보면 이래 말한다. “우와 스펙타클하다!” 오히려 스펙타클한 것은 그 사람들이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정신적으로 파고들어가고 있는 그 사람들의 의식이다. 어째든 정확한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발언되는 스펙타클하다가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째든 명계남이 직접 본 노무현이란 인물은 내가 알고 있는 노무현보다 더 바보였다.

 

나같이 중산층 이하의 서민들이라도 고급 메이커 이름 정도 하나 둘은 외운다. 가령 차는 벤츠, 아우디, 포르쉐라든지 내가 좋아하는 전자기타는 깁슨, 펜더, 잭슨이라든지 말이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것은 운전하는 사람만 몰고 전자기타는 기타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구매한다. 그러나 옷은 다르다. 옷은 자동차처럼 개인 선택이 아니고, 기타처럼 취미영역도 아니다. 옷이란 것은 일상생활에 늘 입고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사항이다. 그래서 옷에 명품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으나 대충 듣기론 닥스나 폴로 정도만 안다. 그리고 알마니 일까나? 노무현이 넥타이가 하도 낡고 지저분해서 새로 받은 넥타이를 차는데, 그것이 알마니인줄 모르고, 알마니가 유명하다고 물었다.

 

할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더 비주류적인 인간생활에 빠져 있던 것이다. 비주류다 못해 같은 비주류권조차도 비주류였다. 그가 탄핵 이후 노사모에서 시위를 했고, 얼마 뒤에 진보사회단체에서 항의시위를 할 것이니 노사모는 빠지라고 한다. 문제는 그 단체들은 시위 후에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 정도면 양반이 아닐까? 그가 대통령 경선에서 이인제를 이기기 전에 그를 매도하는 것은 반대진영이 아니라 같은 후보자였다. 그가 대선후보로 지정되자 그의 사무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같은 당내에서도 아웃사이더였다.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당내에서 그를 밀어준 것이 아니라 노사모가 그리고 노사모를 본 국민들이 그를 밀어줬다. 물론 돼지저금통으로 만든 대선자금 말고 또 다른 돈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정녕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가 달린 대선운동은 다른 후보와 달랐다. 다른 것은 그가 가진 것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본 바보들이 있었다. 물론 너무 바보스럽게 오면 비판의식이 상실한 교조주의자로 변질될 수 있겠지만, 그런 점들은 노무현이란 진보적인 대통령의 맞수인 보수주의자보단 오히려 진보주의자였다.

다른 서적들을 보면 노무현은 상당히 진보주의자들에게 실망하고 섭섭한 감정을 털어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통령이 1번 바꾼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계속 꾸준히 하나씩 개혁으로 통해 풀어갈 수 없다. 대통령은 혁명이나 쿠데타로 뽑은 자가 아닌 이상 그는 모든 것을 조금씩 고쳐갈 운명이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러시아혁명으로 통해 차르를 붕괴하고 케렌스키와 백위군을 몰아내도 여전히 러시아는 가난하고 어지러웠다. 단지 그들은 더 망가지기 전에 스톱만 했을 뿐, 혁명이 일어나도 그 스톱된 위치가 개선된 점은 아니다.

 

물론 그것은 프랑스혁명도 마찬가지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을 단두대의 이슬로 보내도 여전히 프랑스 내의 농민과 노동자는 계속 굶고 허덕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계속 어지럽고, 당통이 죽고 로베스피에르도 역시 단두대 아래 사라진다. 혁명조차도 그런 난항을 겪는데, 혁명보다 더 정부를 운영하기 힘든 개혁정치는 오죽하겠는가? 그런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교훈으로 통해 얼마든지 우리는 알아갈 수 있는 점들을 노무현은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의 비난이었다. 내가 가장 속이 시원한 부분 중에 하나 명계남이 그런 진보주의자들을 무척이나 비판한 것이다. 진보라는 존재는 인식에 대한 재확인, 재인식,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도리어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다.

 

물론 진보도 문제이거니와 보수는 그런 인식에 대한 재확인, 재인식, 전환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제대로 하고 있다면 사회적인 불평등, 부익부 빈익빈, 지역갈등, 노동문제 등은 기본적으로 나올리는 없을 것이다. 모르겠다. 최근에 부산 북구강서구 을에 후보로 나온 문성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올해 겨울에 나온 부러진 화살에서 그 영화 속에 문성근이 출연한 이유로 그 장면이 나오면 안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선거 전에 영화배우 인물이 공식적으로 이미지가 보이면 선거활동에 유리한 점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아주 예전에 문성근이 출연한 영화중에서 그가 아주 변태적이고 정신병자 역을 맡은 영화가 TV에서 100회나 방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요건 무엇인가? 지금 나온 것은 그렇지만, 과거는 왜 나오는 것인가? 어째든 내가 적는 글이기는 하나 이 글이 100% 객관적이고 비판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까지 있었던 일화로 본다면 반 이상은 맞는 것 같다. 적어도 있지도 않은 일들을 꾸며 되어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는 전문적인 소설가들에 비하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보 노무현 - 대한민국의 가시고기 아버지
장혜민 지음 / 미르북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평소 정치와 사회적인 글들보다는 정치학과 사회학적인 글을 더 많이 보고 적고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번만큼 2012년 5월에 일어난 아이러니한 사건을 옮겨 적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故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인 유시민을 대해서이다. 그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퇴임할 때까지 노무현의 정치적인 대변자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던질 때에는 모든 것을 제겨두고 봉하마을로 내려와서 분노와 좌절, 그리고 슬픔을 토해내었다.

 

그런 유시민이란 인물이 최근에 정치적 테러를 당했다. 그것도 다른 정당적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정당적인 존재에서 말이다. 노무현처럼 그도 사실 야권 제1당에 뿌리를 내려 권력을 얼마든지 유지시켜 볼 수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보처럼 그냥 자신의 눈앞의 이익을 손에 놓아버린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은 각자 어떻게 보일지 모르나, 적어도 보통 사람이라면 정치적인 권력에 눈독을 안 들 수가 없을 것이다. 정치란 권력에 향한 의지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다.

 

유시민이 정치적 테러를 당한 이유는 바로 주사파 급진적이라고 하나 내가 볼 때는 그저 좌파를 빙자한 수구적인 세력일 뿐이었다. 그런 조직들에 대한 테러에서 유시민이는 이번이 처음일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그는 이미 참여정부에서부터 노무현과 같이 그들에게 현실적인 괴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았으나, 결국 결과는 비참했다. 하지만 유시민이 욕을 먹어도 비난을 들어도 자신이 추구하던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에서 그가 경호하고 싶은 노무현의 입장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었을까?

 

서적 본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세력들이 이제는 싸워야할 대상보다는 공동으로 바라보고 협력해야 할 무엇을 향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괴만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보란 무엇이냐, 그는 항상 왕과 귀족이 누리던 권리를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누리는 사회로 인권이 확대되어 나가는 과정을 진보라고 이야기했다.> 바로 진보란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려고 하는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 그 오랜 대립과 갈등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현재 우리가 가고 있는 진보와는 다른 진보를 꿈꾸었다. 보수가 기득권과 강자의 자유를 보장하며 힘에 의한 질서를 강조한다면, 진보는 바로 그들이 누리는 권리를 힘없는 사람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집단이라 보았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세력에는 파괴만 있을 뿐, 창조적이고 새로운 대안이 없어 보였다.> 나 역시 진보주의 경향이나 이 말에 상당히 동감한다. 과거 프랑스혁명성공 찾아온 당통의 죽음과 테르미도르반동은 그야말로 진보의 실패를 보여준 혁명이고, 러시아혁명 역시 레닌 사후 스탈린의 집권으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후퇴시키는 오염원이 되었다.

 

그렇다면 유시민을 가격하고 그 유시민의 노력을 묵살하는 진보란 과연 진보적일까? 내 눈에 그저 스탈린이 나타난 이후 스탈린에 붙어 러시아혁명 이후의 러시아권력층이 되려고 하는 인물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 진보의 한계, 진보의 앞길을 제시한 노무현, 그 뒤를 따라가는 유시민, 이 둘을 비교하면 답이 나온다. 둘 다 바보라는 것이다. 물론 바보는 노무현 쪽이 크다. 그의 바보짓은 너무 바보 같아 화가 나고 욕이 나오고 때로는 눈물이 나온다. 너무 바보 같아서 그런 바보를 다시 볼 수 없음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다시 인상 깊은 실화가 나온다. <정부는 일만 열면 노사 화합을 외칩니다. 그러나 노동조합 한 번 해보려고 하다가 전기도 끊기도 수돗물도 끊긴 공장 바닥에서 스티로폼 한 잔 깔고 앉아 생라면을 씹고 있는 노동자가, 가족이 가져다준 주먹밥마저 빼앗겨서 불타 버리는 광경을 바라보는 노동자가, 그리고 끝내는 감옥 갔다가 해고되어 길거리에 내쫓긴 이들 노동자가 그것을 내팽개친 기업주의와 이 땅 위에서 화합하고 살기를 기대하십니까?>

 

이 글에서 나는 여기까지는 아니나 비슷한 상황을 본다. 반평생 넘게 배를 타면서 선원일을 하던 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노무현이 네 부모만큼 좋아하냐 말에, 부모와 비교하는 것은 조금 그렇지만 적어도 노무현은 우리 아버지 같은 노동자들을 진실로 생각한 사람이다. 우리 아버지가 오셔서 배타는 이야기를 해준다. 온도가 40~50℃ 되는 기관실에 갖은 소음과 진동,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고 말이다. 배가 좋으면 몰라도 침몰 일보직전이라면 노동적정시간 준수는 기대하지 못하고 열 몇 시간 이상 일에 시달리고, 주말에도 일을 한다고 한다.

 

물론 배를 타는 특수한 상황이니 문제 발생 시에 어떻게는 조치를 해야 하나, 그래도 배를 타고 외국으로 국내로 오고가는 화물선의 비화를 들어보면 선원노동자의 실태들을 알게 해준다. 아버지 몸에 새겨진 상처자국과 화상자국, 고된 노동으로 물집이 생기고, 신체기능까지도 장애가 오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는 이미 귀가 난청이다. 단지 저렇게까지는 아니나, 저렇게 당한 사람만큼 노동착취를 당하고, 불평등한 계약에 서명하지 않으면 배에 타지 못한 적도 있었다. 나에게 대한민국은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에 내가 <네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웃기지만 그런 사람들을 가장 착취한 부류가 왜 선거만 되면 시장과 골목길을 돌며 서민층을 보살핀다고 하나, 왠지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나보고 바보 같은 노무현을 왜 좋아하냐 물어본다면, 당신은 그런 비참한 경험을 하고 있는 당사자와 그 당사자의 가족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해가능하면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당장 먹을 쌀이 없어 굶는 서러움, 집이 없어서 어느 처마 아래나 배 갑판에서 자던 날들, 배우지 못한 이유로 핍박당한 사연들 그 모든 일들을 겪어야 했던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비화를 말이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에겐 관대해도 타인에게 날카롭다.

 

그런다고 모든 노동자를 노무현이 구해낸 것은 아니다. 인간 노무현은 혼자이고, 그는 권력도 돈도 없었다. <원진레이온 사건은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돼 주었다. 레이온 실을 만드는 회사였던 원진레이온은 작업 중 이황화수소라는 독가스가 새어 나와 인체를 마비시키는 일이 빈번했다. 엄연한 직업병이었으니 회사는 당연히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약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현은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다시 한번 회사를 찾았다. 그곳에서 독가스에 중독되어 사지가 마비된 환자가 휠체어에 타고 나와 있었다. 곁에는 어린 딸아이와 가족들이 있었다. 그 환자의 얼굴은 차마 눈뜨고는 쳐다볼 수 없는 상태였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에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서둘러 인사를 건넨 뒤에 부랴부랴 차에 올라타 정문을 나오려는 순간, 그 어린 딸아이가 붕고차 유리문에 울며 소리쳤다. “우리 아빠 좀 살려 주세요” 소녀의 등 뒤로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가 보였다. 일그러진 뺨 위로, 기묘한 그 표정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현은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겪은 사람이 자신이 고용주와 계약을 해서이고 그리고 그 계약은 자유라고 하며, 게다가 이런 일을 당하면 왜 좋은 직장을 가지지 못했냐고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한심하다.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이 전국에 과연 얼마나 되는가? 그런 사람 옆에 가족들을 포함하면 얼마나 되는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다. 최소한의 법과 제도를 어긴 것은 누구인데, 항의하는 자들에 대해 법의 파괴자라고 한다. 과연 파괴자는 누구이며 그것을 만든 자가 누구인가? 바보 노무현은 이들을 위해 투쟁했다.

 

바보처럼 굴다가 변호사직도 정지당하고, 바보처럼 굴다가 감옥에도 가야했다. 그가 간 이유는 산업재해로 죽은 공자노동자들이 항의하는 자리에 갔는데, 거기에 상관없는 사람이 갔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이 주인이고,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노동변호사 인권변호사란 말이 나오는데, 실상 인권변호사에서 인권을 중시하고 지키는 변호사란 단어가 생겼는데, 모든 변호사는 인권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감은 어디로 갔는가?

 

그의 바보짓은 계속 되었다. 부산 북구 총선에서 당시 여권의 핵심인데도 이길 수 없는 게임을 했고, 지역주의에 눈물을 지어야 했다. 그리고 연속적인 도전에서 제대로 승리의 깃발을 잡지 못한 그가 2002년 대권을 향했다. 웃긴 말로 진보 사이에서나 같은 당에서도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고졸이라 상대해주지 않은 것이다. 진보라고 떠들어대는 인간 역시 엘리트주의로 무장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렇다. 그의 퇴임 후에 측근비리에서 스캔들이 터졌는데, 부인이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 가난하게 살아오고, 가난하게 물러났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바보 같이 권력을 대비하지 않았고, 재임시절 그는 자기가 얼마든지 활용 가능한 돈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대통령 개인 판공비 수조원에 달하는 거액을 사회에 헌납했다는 것에서 나는 그것을 실제로 지켜보았다. 2003년 매미태풍으로 한국은 거대한 재난재해로 몸살을 앓았다. 당시 그 재해복구비용을 노무현의 판공비를 내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음 해부터 내가 군부대 간부로 근무하면서 예산용도와 예산의 출처를 확실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보처럼 남 좋은 일만 실컷 만들고, 자기가 누려야할 앞가림을 제대로 처신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족들이 시달릴 때 자신의 지나칠 정도의 강박증이 그렇게 내몰았다. 그래서 원망스럽고 마음이 더욱 아픈 것이다. 2009년 봄에 그에 대한 언론과 권력이 목을 조르고 있을 때 그는 주변 사람들과 바라보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붙잡지 말고 버리라고 했다.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힘들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일화 중에 가시고기라는 생선이 있다. 가시고기 부부가 알을 놓을 경우 암컷은 놓자말자 다른 곳에 가서 죽고, 수컷은 알을 지킨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암컷이 알을 놓을 때 그 특유한 냄새로 천적이 와서 알을 노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고, 수컷은 그런 알을 지키고 난 뒤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로 하여금 자신의 살을 파먹도록 한다. 먹이를 찾아다니면 다른 천적에게 공격당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가시고기 아버지 바보 노무현, 정말 그는 가시고기마냥 모든 것을 다 던지고 시대를 떠나갔다. 하지만 육체는 던져도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엄청난 바보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런 바보를 생각하면서 뒤에서 몰래 바보처럼 울고 있는 나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