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로 간다 - 열혈 명계남, 리얼 증언과 한맺힌 싸움의 기록
명계남 지음 / 모루와정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2012년 5월 23일 나는 정말 봉하로 갔다. 이번에 출판된 문성근 배우의 친구이며, 영화제작자 겸 배우인 명계남의 책 제목인 <봉하로 간다>라고 말이다. 이 책은 명계남 배우가 노무현이 처음 정치스타로 되는 시기인 2000년으로 올라간다. 그 당시 북구강서구 을인 허태열 후보에게 패배한 노무현에 대한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이른바 노사모가 결성되었다. 그는 그런 노사모의 중간에서 노사모와 더불어 노무현, 그리고 문성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 갔다.

 

여태까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자서전 내지 일화를 다룬 서적들을 보면 상당히 고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복받쳐 슬펐다고 한다면, 이번에의 이 서적에서는 그리움으로 복받쳐 악으로 표출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는 단순히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당시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다루는 것보다는 그런 일들에 대하여 아주 열렬하게 깐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 조금 즐겁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배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배설이란 단어에서 말을 막 내뱉는 것이나, 그 내뱉게 한 일련의 과정과 형태를 보자면 배설 따위는 양반인 것 같았다.

 

노무현이란 인물이 당한 것도 그러하나 명계남 자신이 당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제일 인상 깊은 이야기가 바다이야기란 사행성 도박게임에 대한 일화다. 당시 명계남은 전혀 도박과 무관하고 그 엄격하고 무서운 칼날을 지닌 검찰과 법원에서조차도 무죄로 분명히 판결났다. 그러나 누가 명계남이 바다이야기의 중요사업자란 말을 억지로 만든 것이 이른바 공상 과학적 사고를 비꼬는 pata-physics라는 형이상이상학 영역으로 넘어갔다. 쉽게 이 단어에 대한 말한다면 나는 당신이 그것을 직접 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았으나, 나는 당신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법이 여태까지 우리 일상과 사회에서 가장 잘 통용되는 이야기다. 또 다른 것을 다루어볼까? 명계남은 노무현 시절에 국가정치인사에 등용되지 않았다. 물론 노사모 많은 회원도 그렇다. 얼마나 참 국내 인식이 웃기는지 어느 사람이 사업을 벌이려다가 노무현 출마를 보고 대선지지를 호소했다. 그런데 막상 되고 나서 그 사람은 아무런 자리를 받지 않았다. 그는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의 동네에서 그는 자리 하나 못 찬 병신이라고 하여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고 한다. 보통 일반인이 이 정도면 유명인이라면 어떠하랴?

 

명계남의 이야기를 보니 어느 신문을 쓰던 기자가 명계남이 장관자리 요구라는 기사를 썼는데, 그런 허위사실에 대한 정정과 사과를 요구하던 명계남에게 기자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그런 기사를 썼고, 그게 사실이 아니면 말고, 왜 미안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 한국의 언론수준은 세계적으로 상류에 끼지 못한다. 끼지 못하는 이유는 미디어란 자체가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 상당히 영향을 받고 있는 만큼 그것에 알맞게도 저널리스트가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 사진기자들이 받는 상인 퓰리처에서 우리나라 기자들은 몇 명이나 받을 수 있을까? 아니 몇 명이나 거기 후보에 올라갈 수나 있을까에 더 이상 희망을 거는 건 포기하겠다.

 

그 정도로 한국에서 언론이란 것이 과연 진실과 정의를 보도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허위와 불의로 가득한 세계로 조장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언론의 미디어 기능에서 사람들을 일차원적인 사고로 한정짓게 만드는 일은 정말 무섭다. 명계남의 일화에서 어느 부산 횟집식당에 갔는데, 명계남보고 봉하에 가면 한 몫 하겠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신문과 방송에서 그런다고 한다. 그것이 아니라고 하니 믿지 못한 것은 이해하겠다. 그렇지만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결정하란 말에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말에 처음부터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의도를 왜 들이대는 것이냐 말이다.

 

봉하사저를 설계한 정기용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하고 만든 가옥이 아방궁이란 말에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고 한다. 그런 정기용에게 분노를 만든 대표적인 신문사의 싸움일화는 정말인지 질리지도 않을 이야기다. 단지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천황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느낀 군중심리적 불안요소를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과 마녀사냥으로 풀었다. 사실 대지진이든 소지진이든 지진이란 현상은 자연과학적으로 지각 아래 맨틀과 맨틀의 운동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다. 누가 주술을 부려 만들 수 없는 일이거와 억지로 무기를 동원해도 만들 수도 없다.

 

지진으로 일본이 술렁거리고 있을 때 모 신문 사주는 천황에게 자신이 제대로 조선인들을 통제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한다. 허구일까? 거짓일까? 적어도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벌일 적에 오만 칭송에 조선인들을 관동군으로 보내는 것이 영웅화시키는 얼간이란 점으로 본다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존재다. 그들이 한참 선전하던 시기에 사용된 윤전기가 있었다. 신문을 만들어서 빨리 보급하려면 인쇄시설이 필요하지 않은가? 처음에 독립기념관에 있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 시절에 못된 짓만 했다. 그런데 그 기계를 사용한 사주가 다시 반환 요구했으나 독립기념관에서 거부했다. 그것이 기증된 이상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현실이 한국에서 최근에 벌여진 일이다.

 

스펙타클(spectacle)이란 단어는 본래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구성된 인간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모른 채 뭔가 엄청나고 상당한 일들을 보면 이래 말한다. “우와 스펙타클하다!” 오히려 스펙타클한 것은 그 사람들이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정신적으로 파고들어가고 있는 그 사람들의 의식이다. 어째든 정확한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발언되는 스펙타클하다가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째든 명계남이 직접 본 노무현이란 인물은 내가 알고 있는 노무현보다 더 바보였다.

 

나같이 중산층 이하의 서민들이라도 고급 메이커 이름 정도 하나 둘은 외운다. 가령 차는 벤츠, 아우디, 포르쉐라든지 내가 좋아하는 전자기타는 깁슨, 펜더, 잭슨이라든지 말이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것은 운전하는 사람만 몰고 전자기타는 기타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구매한다. 그러나 옷은 다르다. 옷은 자동차처럼 개인 선택이 아니고, 기타처럼 취미영역도 아니다. 옷이란 것은 일상생활에 늘 입고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사항이다. 그래서 옷에 명품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으나 대충 듣기론 닥스나 폴로 정도만 안다. 그리고 알마니 일까나? 노무현이 넥타이가 하도 낡고 지저분해서 새로 받은 넥타이를 차는데, 그것이 알마니인줄 모르고, 알마니가 유명하다고 물었다.

 

할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더 비주류적인 인간생활에 빠져 있던 것이다. 비주류다 못해 같은 비주류권조차도 비주류였다. 그가 탄핵 이후 노사모에서 시위를 했고, 얼마 뒤에 진보사회단체에서 항의시위를 할 것이니 노사모는 빠지라고 한다. 문제는 그 단체들은 시위 후에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 정도면 양반이 아닐까? 그가 대통령 경선에서 이인제를 이기기 전에 그를 매도하는 것은 반대진영이 아니라 같은 후보자였다. 그가 대선후보로 지정되자 그의 사무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같은 당내에서도 아웃사이더였다.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당내에서 그를 밀어준 것이 아니라 노사모가 그리고 노사모를 본 국민들이 그를 밀어줬다. 물론 돼지저금통으로 만든 대선자금 말고 또 다른 돈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정녕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가 달린 대선운동은 다른 후보와 달랐다. 다른 것은 그가 가진 것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본 바보들이 있었다. 물론 너무 바보스럽게 오면 비판의식이 상실한 교조주의자로 변질될 수 있겠지만, 그런 점들은 노무현이란 진보적인 대통령의 맞수인 보수주의자보단 오히려 진보주의자였다.

다른 서적들을 보면 노무현은 상당히 진보주의자들에게 실망하고 섭섭한 감정을 털어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통령이 1번 바꾼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계속 꾸준히 하나씩 개혁으로 통해 풀어갈 수 없다. 대통령은 혁명이나 쿠데타로 뽑은 자가 아닌 이상 그는 모든 것을 조금씩 고쳐갈 운명이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러시아혁명으로 통해 차르를 붕괴하고 케렌스키와 백위군을 몰아내도 여전히 러시아는 가난하고 어지러웠다. 단지 그들은 더 망가지기 전에 스톱만 했을 뿐, 혁명이 일어나도 그 스톱된 위치가 개선된 점은 아니다.

 

물론 그것은 프랑스혁명도 마찬가지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을 단두대의 이슬로 보내도 여전히 프랑스 내의 농민과 노동자는 계속 굶고 허덕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계속 어지럽고, 당통이 죽고 로베스피에르도 역시 단두대 아래 사라진다. 혁명조차도 그런 난항을 겪는데, 혁명보다 더 정부를 운영하기 힘든 개혁정치는 오죽하겠는가? 그런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교훈으로 통해 얼마든지 우리는 알아갈 수 있는 점들을 노무현은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의 비난이었다. 내가 가장 속이 시원한 부분 중에 하나 명계남이 그런 진보주의자들을 무척이나 비판한 것이다. 진보라는 존재는 인식에 대한 재확인, 재인식,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도리어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다.

 

물론 진보도 문제이거니와 보수는 그런 인식에 대한 재확인, 재인식, 전환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제대로 하고 있다면 사회적인 불평등, 부익부 빈익빈, 지역갈등, 노동문제 등은 기본적으로 나올리는 없을 것이다. 모르겠다. 최근에 부산 북구강서구 을에 후보로 나온 문성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올해 겨울에 나온 부러진 화살에서 그 영화 속에 문성근이 출연한 이유로 그 장면이 나오면 안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선거 전에 영화배우 인물이 공식적으로 이미지가 보이면 선거활동에 유리한 점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아주 예전에 문성근이 출연한 영화중에서 그가 아주 변태적이고 정신병자 역을 맡은 영화가 TV에서 100회나 방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요건 무엇인가? 지금 나온 것은 그렇지만, 과거는 왜 나오는 것인가? 어째든 내가 적는 글이기는 하나 이 글이 100% 객관적이고 비판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까지 있었던 일화로 본다면 반 이상은 맞는 것 같다. 적어도 있지도 않은 일들을 꾸며 되어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는 전문적인 소설가들에 비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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