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왕국
현길언 지음 / 물레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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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을 읽으면 주제나 의미에 대한 부분에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가치관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난해하여 보통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 매우 부적당한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너무 쉽게 적어 마치 이원화적인 대립관계만 내세우면, 그것은 단순히 한쪽의 이데올로기가 강조하는 정치적 공세이지 그것 자체에 철학이란 단어를 수식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이나 혹은 그 이상의 서적을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치와 철학에 대한 사고를 간단히 유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어본 “숲의 왕국”에서 이런 문제를 잘 고민했는지, 작가가 매우 쉽게 이해하기 쉽도록 말을 풀어 넣었다. 게다가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한 곳은 인간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자연 숲속이고, 그 숲속이라고 하여도 조지 오웰의 소설인 “동물농장”처럼 숲속의 나무들이 동물들이 직접 인간처럼 행동하기보단 그 숲 자체의 나무로서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움직인다. 물론 작품 중간에 나무들이 움직여서 땅을 메우고, 시냇물을 막고, 가시를 날리는 것은 상당히 만화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나, 그 상상력에 대한 글은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적은 작가나 그것을 바라보는 문인들 역시 이 소설은 우화(寓話)라는 점에서 숲속의 나무들을 인격을 갖춘 존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에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하여 나무들이 인격화하여 그들이 직접 사람과 교감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숲속의 주인인 원노인과 원노인 아래서 같이 일을 돕는 목상무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숲속의 기운이 좋고 나쁨을 알 수 있지, 그 이상으로 대화를 듣거나 직접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동물농장의 돼지들이 인간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보단, 자연의 나무들이 어느 특정 인간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대화능력을 소유한 원노인이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다. 고등학교 시절 625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어 그의 마음은 아마 매우 수척해져 있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 숲일지도 모를 돌산을 보며, 그곳을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60년 동안 노력하고, 목상무는 원노인이 40년 전에 거둔 고아로서 함께 그 숲속을 가꾸게 하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제 머리가 하얗게 된 노인과 중년의 남성이 되었다. 노인은 어느 제안을 했다. 숲속의 왕을 정하자고 말이다. 이때까지 잘 견뎌온 그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 이 작품의 주인공인 노인은 사실 몇 년 전 암에 걸려 수술을 했다. 다행히 효험은 있었으나 그의 인생이 길지 않음을 노인 스스로 알고 있던 것이다.

 

노인은 그래도 아랑곳없이 그저 숲만 돌보고 숲에서 즐기고 많은 것을 나누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보단, 기독교에 대한 관념적으로 대하던 그는 정말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저 자신의 신이 정하는 것처럼 자연에 있는 숲속이 잘 될 것이라 생각했다. 숲속에 이때까지 왕이나 계급은 없었다. 단지 노인만이 숲속의 주인이었다. 노인은 숲속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숲속의 나무와 그 나무를 찾아오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벌레와 시냇물까지 모두였다.

 

아름다운 숲이란 모두가 모여 옹기종기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갈등도 빚어도, 그것 역시 하나의 과정이었다. 친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처음 나무를 심을 때 리기디소나무나 밤나무와 같은 큰 나무들이 좋았다. 하지만 그 나무를 심는다고 주변에 잡초와 잡목을 베자, 그만 홍수피해가 나버린 것이다. 잡초와 잡목들은 홍수가 오면 그 홍수를 막는 힘이었다. 숲속에는 언제나 크고 인간에게나 혹은 동물에게나 실용적인 나무만이 모든 것이 아니었다.

 

당장 쓸모없이 보인 것들이어도 노인에게 모두 소중한 생명이었다. 노인이 가꾼 숲은 전국의 유명한 숲이 되고, 거기에 오는 어린아이들은 모두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였고, 나비와 벌은 춤을 추었다. 시냇물의 물맛은 너무 좋아 주변에 산짐승이나 아니면 원노인도 찾아와 갈증을 해소했다. 그 모든 작은 하나들이 이루는 숲이었다. 아마 그런 숲에서 원노인은 자신이 숲의 주인이 아니라 숲의 주인 중에 하나이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곳에서 말이다.

 

노인이 숲의 왕을 뽑고 싶은 것은 이제 자신의 기력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다는 점과 동시에 이제 숲 스스로가 자신들을 가꿀 수 있는 능력이 된 것을 알았다. 노인은 숲을 믿었고, 숲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상무에게 숲을 부탁하고, 어디로 여행만 다닌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 숲은 조용하지 않았다. 왕의 자격에서 누가 되는가에서 인간과 동물에게 실용적이지 못한 작은 나무들이 차례라 밤나무, 잣밤나무, 벚나무에게 찾아가나 계속 주소가 틀렸다. 하지만 탱자나무에게 갔을 때 탱자나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숲은 이제 나무들만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명령했다.

 

처음에 사람을 내쫓고, 동물을 내쫓고, 벌레도 내쫓자 숲은 마치 아무도 오지 않은 적막한 공간이 되었다. 이제 시냇물도 막고, 하다못해 서로 싸우고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오는 것은 외로움과 괴로움, 아픔과 슬픔이었다. 시냇물이 막자 뜨거운 태양이 지면을 비추면 나무들은 목이 타들어가 갈증으로 괴로워하고, 비가 많이 오면 이미 삼림이 황폐해져 모두 토사에 밀려 피해를 보았다. 거기다가 진딧물까지 나무의 진을 빨았고, 숲은 신음에 가득했다. 그리고 숲속 밖의 인간들은 숲속 안의 나무들이 병들고, 열매도 못 맺고, 더 이상 즐거움이 없자 모두 없애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과 남의 머리를 붙잡고 자신이 그 남의 머리 위로 올라가고 싶은 심술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여 최악의 극단적 상황까지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들을 죽이고 멸종하게 하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들이 계산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자기 자신들이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들은 자신이 잘 살기 위해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탱자나무 역시 처음에 인간을 멸시했으나, 그 역시 원노인의 정성 아래 이만큼 자라고 자란 것이다. 탱자나무는 처음에 자신이 인간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으로 알았으나, 원노인은 탱자나무의 향이 좋다고 여겼다. 원노인에게 모든 것은 다 필요한 존재였다.

 

사랑받지 않은 존재가 없듯이 숲속의 나무들과 그리고 풀들은 모두 자신들이 이 숲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것을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밤나무나 도토리나무 등과 같은 큰 나무들은 인간들에게 직접 열매도 주고, 좋은 경치도 준다. 인간사회에서 그들은 매우 능력이 있는 재산가 내지 엘리트다. 하지만 작은 풀과 작은 잡목들은 당장 필요 없어 보이는 존재로 그들보다 밤나무나 도토리나무 심지어 사과나무를 심어보는 것이 이익이 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럴까? 사소하고 작고, 별로 두각을 나타나지 못하는 나무나 풀 역시 숲속에서 바꾸어 말하여 우리 인간사회에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그런 작은 존재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지? 혹은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너무 비관적인 사고에 빠져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며, 모두를 곤란하게 하는지가 우리 현실을 나무에 빗대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주 일어난 일이고, 또한 그런 문제로 숲속은 멸종을 맞이하나 다시 살아난다. 혁명이라든지 쿠데타와 같은 강제적인 폭력과 행위보단 조금씩 서로 대화와 토론을 거치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면 모두 고생하고 모두 곤란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와 철학은 무엇일까? 남을 배려하고 남을 인정해주는 관용이 아닐까?

 

원노인이 숲속에서 왕을 지정하게 되면 당연히 서로 다투고 난관에 부딪힐 것을 미리 예상했다. 하지만 원노인은 다 잘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힘이 아닌 서로의 힘으로 모두 서로 도우며 잘 살 수 있는 길을 말이다. 우리 인간사회에서 균형이란 중요하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고,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다. 그런 점들을 모두 같은 존재로서 인정해주면 왕은 소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왕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왕이 되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세계일까? 하지만 그 길은 결코 평탄치 않은 사실은 이 소설에서 잘 보여준다. 그것은 어렵고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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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한
김우영 지음 / 푸른사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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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한, 라이라는 한자어인 래()로 의미는 오다는 말이고, 따이한은 대한(大韓)이라는 의미이다. 즉 한국이 온다 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래라는 말이 베트남에서는 혼혈아이를 아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가령 흑인에 대해 깜둥이라 하는 것과 농촌사람들을 촌놈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책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소설이듯이 역시 소설 내용도 예사롭지 않았다. 너무 예사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라이따이한이라고 하여 전쟁에서 어느 전투원이 베트남여자를 운명적으로 만나 이별을 그리는 단순한 전쟁이란 비극적인 이데올로기를 로맨스란 환상으로 가려운 것이 아니라 전쟁과 낭만에서 태어난 암울한 비극의 씨앗에 대해 적은 것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들을 모은 것들인데, 10편이 되는 단편소설들을 모은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느끼는 예사롭지 못한 점들은 너무 예사로운 이야기들을 마치 그 사람의 입장과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적어간 것이다.

 

특히나 답답한 일들이 있으면 막소주를 마신다는 것처럼, 서민의 애환과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만든 사회구조라는 점에서 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새롭게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라이따이한 소설은 총 10편으로 구성된 것처럼 (1) 625전쟁 시 1.4후퇴로 개마고원 산자락 고향을 내버려두고 내려온 어느 순박한 노인의 이야기 통일 꽃”, (2) 중 수교로 통해 한국사람들이 중국에서 가서 중국 교포나 현지인과 만나 남겨진 2세에 대한 슬픈 이야기 한궈쓰성츠”, (3) 성실한 농부가 소 육성사업 실패에 따른 인생좌절에 대한 이야기 까치다리 동동”, (4) 일제강점기 시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팔 하나 잃은 노인의 귀국 이야기 상봉”, (5)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국인데도 버림받은 베트남가족 이야기 라이따이한”, 김삿갓이 먼 과거서 현대 첨단기술로 통한 세계일주를 다룬 세계 특사여행”, 수술 시 수혈 받은 피가 에이즈로 감염되어 인생의 좌절을 겪는 몽실대과 그 남편의 이야기 악파의 피”, 과학자들의 미래지향적 과학이야기 우리들의 천국”, 가난한 문필가 남편과 그 가족들의 가난함 일상과 오순도순한 이야기를 다룬 자화상”, 한국 시인이 몽골처녀와 한눈에 반해 서로 결혼한 찐따화 니엔거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떻게 생각한다면 낯설 수 없는 이야기나, 낯설 수밖에 없는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게 된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정보와 교통 발달,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한다고 여겼으나, 정말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보통 서사라는 것이 개인적 영역이 아닌 보편적 영역이나, 이 이야기는 현대에 살아가는 어느 특정인물에게 일어난 것을 적어가고 있으므로 매우 개인적인 보편성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런 인물들이 우리에게 전혀 새롭지 않은 존재다. 그러다 보니 더욱 새롭다고 여긴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접하는 TV와 미디어 세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의 반에 반도 안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실제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사회생활이나 학교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TV의 이야기로 가득 메우는 것을 본다. 우리는 현실에 살아가는 존재인데, 왜 현실이 아닌 드라마의 이야기가 더욱 현실 같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이 책의 뒤편에 가면 안용산이란 시인이 적은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글쓰기는 바로 이 시대와 살아가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세계와의 부딪침이다. 그래서 인식과 표현을 두 날개로 삼아 힘차게 날아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또 다른 문구가 있다. 문학가인 구인환 교수의 문구처럼 <소설은 스탕달의 말대로 인생의 길가에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에는 처절하게 살아가는 인생의 삶의 양상이 다채롭게 비친다. 일상생활의 살아가는 즐거움과 슬픔 그리고 한이 서리어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과 미움 갈등과 평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 초탈의 철학이 숨 쉬게 된다. 또한 격동의 역사 흐름 속에 민족의 수난과 그 극복 또 전란과 평에의 희구가 숨가쁜 현실을 이룬다.>

 

정말 이 소설은 인간의 한이 몸서리치는 소설이었다. 단지 어느 개인, 그것도 딱 집어내어 농촌사람, 베트남 어느 3대 모녀, 중국의 어느 모자, 몽골의 어느 아가씨, 고향에 다시 온 할아버지, 고향을 그리워한 어느 할아버지, 에이즈에 걸린 부부, 입안에 생선가시가 걸려도 병원비 몇 천원이 아까워 그냥 빠질 때까지 노력하는 문필가의 아내, 모두 일반사람이고, 흔히 볼 수 있어도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들은 너무 화려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들만 찾지, 어둠 뒤에 소외된 자들에게 항상 무관심의 장막으로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엔 깊은 아픔과 여운이 남는다. 글자도 모르면서 고향의 첫사랑을 그리워해 하모니카를 부는 마고원 할아버지의 슬픔에서 이들은 외롭게 혼자 쓸쓸히 죽어간 이웃일 수 있고, 에이즈에 걸린 부부는 그저 착실하게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인데도 한 순간에 모두에게 멀어져야 하던 비극일 것이다. 몽실댁이 둘째 딸과 막내딸을 위해 떼어내는 모습은 참 애처롭다. 막내가 엄마의 젖을 먹으려고 추워서 엄마의 품에 안기려고 해도 엄마 몽실댁은 강제로 부정한다. 그녀에게 들어간 악마의 피가 그녀의 아이들에게 가지 않도록 말이다. 게다가 둘째 딸에게 밥을 직접 지어 먹으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남편과 자신은 라면을 끓여 먹는다. 마지막에 몽실댁은 자신의 언니네 가족에게 두 딸을 맡기고, 남편과 같이 자신의 고향인 몽실골로 간다.

 

이렇게 허무한 운명처럼 이들에게 닥친 고난에서 정말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특히 진짜 그런 느낌이 드는 것 중에 하나가 사할린에서 돌아온 어느 징용당한 할아버지다. 팔을 잃어 외로이 러시아에 있다가, 러시아인과 결혼했으나, 그녀마저 죽고, 고향으로 영구귀국을 한다. 돌아오자 환영보단 소외가 심했다. 자기가 살던 집인데, 오히려 타국살이보다 낯설었다. 예전 아내는 재혼을 하고, 일가친척들은 모두 외면한다. 자기처럼 돌아온 위안부 할머니는 자신이 돌아왔다고, 주변 친척 중에 혼삿길 막았다고 인연까지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런 일들은 종종 본 것 같았다.

 

한궈쓰성츠와 라이따이한에선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타국으로 발을 넓히며 타국의 여인과 짧고 허황된 사랑을 이야기한다. 특히 라이따이한에서 할머니는 월남전에 한국인의 아이를 얻고, 그 중 딸아이가 한국베트남 수교로 출장 온 한국인의 딸을 놓는다. 그래서 3대 모녀가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라이따이한 1세인 딸의 아이가 뇌성마비환자였다. 아버지란 작자는 도망치고,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이 모녀들을 돌보던 한국인 선교사가 노력하나, 선교사에게 돌아온 말은 차갑고 이기적인 답이었다. 그나마 월남전에 온 남자는 괜찮았다. 미안하다는 말과 조금의 돈을 부쳐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사경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이 책의 저 모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슬펐는지 작가는 진안 운장산의 최승호 시인이 만든 라이따이한의 노래라는 시를 읊는다.

 

엄마는 예 있는데, 아빠는 어디 있나

얼굴도 못 본 나, 새똥처럼 던져놓고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로 갔나

<메콩강> 줄기 따라 핏줄 이리 흐르건만

모르겠네 모르겠네 뿌리를 모르겠네

내 나이 스물 넘고 서른 넘어도

모르겠네 모르겠네 아빠 아빠 나라 <따이한>

궁금치도 않다던가 뿌리놓은 씨앗들

야자수 뒤흔드는 <스콜> 바람에 행여나 오시려나 아빠의 소식

그러나 바람만.....무심한 바람만.....

무정한 아빠처럼 그저 그냥 그렇게 지나네요.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낯선 세계의 모습이나, 그 세계의 그들에겐 매우 현실적으로 참담하고 암담할 것이다. 자기의 몸을 망친 것도 모자라 이들의 한은 너무 철저했다. 이념과 전쟁에 상관없이 그저 순박하게 살고 싶던 그녀들, 폭탄이 떨어지자 온몸이 산산조각이 난 이웃들, 옆집 처녀는 배의 창자가 터져 그날 먹은 음식까지 알 정도라 했다. 이 부분이 나올 때 폭격으로 인해 나체로 길가를 달리던 어린 베트남 소녀의 사진이 기억났다. 그 사진은 퓰리처상을 받은 네이팜탄 소녀였다. 사실 네이팜탄 소녀나, 개마고원에서 내려온 마고원 할아버지나, 징용당한 할아버지나 모두 아무런 죄가 없이 그저 세월의 잔인함 속에 어둠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이야기하기 싫어한다. 아픔의 기억은 사라지려 하나, 그 사라진 기억 너머에는 아픔의 공간까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책을 읽으며 짧은 여운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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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사회비판총서 1
연구모임 사회 비판과 대안 엮음 / 사월의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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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철학과 사상에 대해 조금씩 배우려고 했던 시기이다. 철학과 사상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담론과 흐름 그리고 비판과 고찰이란 시점을 내놓은 것으로 필두로 거기에 대해 어떤 학파가 있는지 그리고 어느 학자들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초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기존 관료화, 제도화, 규격화, 획일화이라는 모더니즘에 거부하는 사상적 풍조로서 베트남전쟁 이후 막 태동하던 사상운동이었다.

 

그 근원에서 학문적인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담론과 사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대하여 담론을 만들고, 대중을 넘어 시민사회를 이끌어갈 지식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만든 사상과 철학이 (후기)구조주의였다. 주로 프랑스 파리를 기반으로 하여 현대철학과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응되던 부류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였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사회문화연구소의 개설과 더불어 당시 1930년 전후로 독일에서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시에는 미국이나 국외로 옮겨, 다시 전쟁이 끝나자 독일로 돌아와 세계지성의 큰 중추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글을 적는 스타일과 문화 내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문과 많은 연관성을 가졌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성의 대한 비판과 억압에 대한 해방, 인간의 인권으로 당시 나치와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류의 큰 위기 속에서 그것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시행한 것이다. 그런 점을 미루어볼 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라는 서적은 당시 독일 지식인들이 바라보는 국제사회와 그리고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변하고 또한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지 고찰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서 느꼈으나, 대부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식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영향을 주던 사상가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헤겔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적인 역사적인 논리로 통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란 말처럼 당시 사회는 이상적이지 못했다. 이성적이란 것은 무엇일까? 차라리 이성이라고 말하나, 실제로는 비이성이 하나의 교조주의로 변하여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결국 인간을 하나의 수동적인 존재로 낙하시켰다. 그러한 것이 당시 독일의 나치가 공산당과 사회당 대립이었고, 또한 소비에트와 나치의 대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학문바탕이 되던 마르크스는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좀 더 현실적인 인식아래 지켜봐서 유물론적인 변증법을 전파했다. 당시 계몽이란 명제가 진실로 계몽이었는지 보다는 계몽으로 위장한 하나의 억압이요 신화였다. 이런 전반적인 역사적 근거로 하여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식인들은 2차 대전부터 시작하여 베트남전, 심지어는 악셀 호네트 프랑크푸트르대학 3대 소장까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을 살펴본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독일만 아니라 유럽 및 전 세계는 광기로 미쳐있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고, 그 전쟁의 산물은 폭력을 해결하는 폭력이라고 했으나, 오히려 그 폭력들을 합리화시킨 도구로 되었다. 그 와중에 인종차별, 남녀차별, 노동자 및 소수약자 인권 침해는 여전히 등한시 되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으로 우리나라 역시 그런 문제를 지적했다. 산업화라는 모더니즘 경제사회로 돌입하면서 공사장과 공장의 근로자들을 산업화 사회를 위한 일꾼이란 칭호를 사용했지만, 막상 각종 인권침해와 노동착취, 산업재해로 약자들은 피멍을 입었다.

 

국가라는 조직이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나 그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 슬로건이 결국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헤게모니적인 부분으로 이런 문제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아도르노 의견처럼 문화산업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단지 발터 벤야민이 주장한 19세기의 파시주라는 파리의 건축양식처럼 그 양식에서는 꿈, 환상, 현실이 공존하는 몽상의 세계였으나, 20세기에 다가오면서 높은 빌딩이나 백화점은 파놉티콘이란 일망감시체계처럼 상업적 기능을 변화했고, 예전처럼 소비의 대상은 소수 부르주아가 아닌 대다수의 대중으로 바뀌었다.

 

문화의 향유가 결국 소비라는 자본의 사용으로 변모된 것이다. 대중문화라는 것은 결국 문화의 소비로 이어지는 것이고, 문화의 소비에서 대중들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기보다는 일정한 틀에 갇히는 꼴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영화, 드라마, 잡지 등은 우리의 취향들을 모우기 보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따라가는 셈이 된다. 우리는 과연 현실 속에 살아가는 존재지만, 우리가 담론지어 보는 것은 현실일까? 주변에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대화하면서 자신의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본 환상과 가상이 현실의 이야기를 대체한다.

 

문화산업에서 대중들을 집단적으로 획일화된 관료적인 미디어로 통해 그들은 비판의식을 상실한다. 더구나 미디어의 의해 정치적 참여나 의지 역시 박약해지는 것을 지적한다. 가령 인간들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대안으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이성을 맹신한 무조건적인 부분이냐는 것이다. 바로 인간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다수결의 이름 아래 존재적 정체성으로 뭉친다.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학력차별로 구분되는 엘리트주의와 저학력자들, 성으로 구별되는 남성과 여성, 지역으로 분리되는 지역주의까지 만연하다.

 

그런 부분은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제기한 문제이고, 오늘날 그 문제의 제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고 해도 그곳은 자유주의국가라고 하나, 단지 자본주의로 이루어진 전제국가였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유색민족에 대한 인종차별, 여성에 대한 인종차별 역시 현실적 문제였다. 아메리카 드림이란 것은 결국 백인남성 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신화에 불과했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옳지 않아도 그 속에서는 당연한 논리로 결부 짓는다. 이성의 한계가 와도 이성의 계몽은 결국 자신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칸트의 말처럼 인간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억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난다. 드골의 강압정치와 노동자의 불만, 그리고 여성들과 학생(이들 속에는 중학생도 많았다)들이 정부에 대해 반발감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 책 서문에 나와 있듯이 그들의 시작은 좋았으나 시작의 철로는 언제나 일직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탈선하기 마련이다.

 

파시즘이란 단어는 보통 지극한 우파들에게 붙어지는 칭호다. 그러나 파시즘이란 단어는 좌파 역시 피해가지 못할 단어이다. 단지 그 잔혹성과 원인성이 기존 권력과 무력을 소유한 자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좌파파시즘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변증적 논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의 전복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을 보듯이 기존 정치체를 전복되어도 인간의 세계에는 평화가 오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프랑스 국민들은 모두 굶어죽었고, 러시아 국민은 전쟁으로 더 많이 죽었을 것이다.

 

극단과 극단의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없앰으로서 사회의 장애를 외면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곧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일까라는 의문을 주게 된다. 인간은 자신 혼자서 살 수 없는 정치적 동물이나, 오히려 정치적으로 되었기에 억압과 갈등이 시작된 점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이성적 계몽과 비판적인 안목으로 타인에 대한 인식과 인정으로 가야하는 점이다. 하버마스나 프롬, 호네트 편을 읽으면 전형적으로 대화단절이란 것을 실감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외면이 결국 타인을 인정하지 않게 되어 언제나 자신의 소유만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의 감성과 무의식까지 억압하는 것도 옳지 않다. 예술이란 것은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도 안 되지만, 현실에 대한 모방성 역시 중요하다. 예술이 자본의 가치로 환원된 이상 그것은 예술의 가치를 상실하고, 그런다고 예술이 대중들을 탈피한 존재로 있을 수도 없다. 루이 알튀세르의 말처럼 유몰론과 관념론은 끊임없이 대립하여 나가는 것처럼 예술 역시 현실 그 자체와 분리된 현실을 격리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대립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단락은 아도르노편인데, 그의 사고는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아주 유사한 상황을 지적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정치권력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나 정치적 무정부주의, 극단적 채식주의나 원시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우호적 관심을 갖는다. 아무리 극단적인 체제 비판세력이라고 하더라도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그에 대해 자기 확신의 논리를 가진 사람은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편이 아니라 저편에 봉사하는 논리도 결국은 실천 가능성이나 현실적 유용성을 입증해야 한다면, 결국 같은 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제시된 액자택일은 이미 타율의 일부다.” 이런 방식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양자택일을 거부하는 사람은 노이로제 환자 취급을 받기 쉽다. 그러나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유란 흑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선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과거의 야만이란 신화가 과학이 들어서면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야만이 과학이란 기술로 통해 새롭게 억압을 시작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야만은 통제력이 강하고,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의식구조를 지배할 수 있는 전방위적인 신화이다. 그 신화는 결국 아도르노 말처럼 인간의 극단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더 가속화시킨다. 어떤 나쁜 존재가 있어서 그 나쁜 존재를 없애도 그 존재가 나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오산이듯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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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호 2023-12-08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보고 이책 삽니다
 
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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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단어는 어떻게 우리는 봐야 하는 것일까? 전쟁은 항상 여러 가지 부분들을 떠오르겠으나, 적어도 2가지로 나눌 것이다. 전쟁에 대한 잔혹함과 광기에 젖어버린 공포, 그리고 전쟁으로 통한 영광이라는 화려한 신성화를 말이다. 전쟁은 항상 이런 2가지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으나, 어느 순간 한쪽의 영역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에 대한 잔혹함과 광기에 젖어버린 공포이다. 인간은 공포라는 것을 매우 무서워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공포의 맛을 보아도 금방 잊어버린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이 바로 그런 공포를 잊지 못할 경우 정신적 외상으로 평생 불구자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공포라는 것을 잊으려고 잊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전쟁이란 점이다. 전쟁이 그렇게 공포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통 중세국가까지의 전형을 보면 전쟁이 일어날 경우 보통 군인과 군인들까지의 정치적인 무력 충돌에 가까웠다. 특히나 고대를 보면 전쟁이 발발해도 민간인에게 피해가는 것을 특별히 금지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행군하는 도중 주변 농민들의 논이나 밭을 망치는 자가 있으면 상하를 막론하고 참수형에 처한다고 했다. 그런데 조조 자신의 말이 놀라는 바람에 논을 망치자, 조조는 비록 연기는 했으나,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고, 주변의 만류로 그동안 자신이 길러온 머리카락 한줌을 베어 효시한다.

 

 

우리가 과학적인 수준이 낮고,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들이 많았던 그 고대사회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실행하는 전쟁에 비해 낭만적이고, 인간적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들은 민간인이나 농민, 여자, 어린이, 노인들에게 칼날을 들이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칼을 들고 싸우기에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그 칼의 무거움이 상대방의 몸을 가르고 찌르고 있을 때 그 순간적인 느낌이 자신의 몸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을 쏘고, 대포를 발사하게 되면 그 행위자 자신이 직접 타인들을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본인이 그렇게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의문점을 놓치기 마련이다.

 

 

게다가 체계적이고 관료적이며, 획일화 구성이 된 군사조직에서 명령을 실행하는 자는 자신의 명령을 내려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았으니, 그 살인에 대한 죄의식이 없고, 살인을 저지르는 당사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명령에 의해 실행했기에 그 죄의식이 없어진다. 물론 처음에 살인할 때의 긴장과 공포는 엄숙해도 어느 순간 인간들은 타성에 젖어버리고,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도 분간하지 못해 광기에 빠져버리는 일들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었다면, 그 과정과 절차 그리고 그 전쟁에 일어난 동기부여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런 전쟁에 대한 참혹함과 무절제적인 인간의 타락은 항상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회의감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죄의식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영광스럽게 보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대사회가 이성의 세계고, 과학의 세계라고 해도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로 씌우진 허상에 불과하다. 진짜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왜 나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가라고 누군지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떠한 이유라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살인에 대한 동기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우리는 눈가림에 의해 살인자의 살인행위를 비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찬양하는 것에서 분노한다고 말이다”

 

 

전쟁의 동기를 보면 정말인지 어설프게 짝이 없다. 왜 없냐고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말 자신의 국민과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인가? 라는 질문에서 모두들 진실보다는 진실 아래 감추어진 타락과 욕망을 하나의 합리적 이데올로기로 교체하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전쟁에 반대한다>를 읽어보면, 이때까지 우리가 전쟁이란 큰 세계적 흐름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얼마나 많은 살육과 은폐 그리고 조작까지 계속 유지되고, 아직도 진행 중이란 사실이다. 다시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그것도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자. 우리가 전쟁을 하는 이유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자.

 

 

그리고 그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 어떤 동기로 무엇이 진정한 시작점인지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때까지 품어온 생각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것은 힘의 논리로서 정치적, 국제적 상황을 좌우되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 제2차 대전이란 사건을 보자. 이때 죽은 자들은 수천만 명에 이른다. 게다가 유태인들이 독일 가스실에서 수백만 명이 허무하게 죽었다. 당시 그들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잔인하게 죽어간다는 사실을 이미 기존 전쟁참전국 중에 연합군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알았지만, 도와주지 않았다. 또한 스페인이나 남미에서 독재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독재정치라는 행위를 했다.

 

 

그런데도 눈감고 모른척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고, 심지어 그런 독재자를 물리치려고 한 인권운동가까지 몰래 테러하여 죽였다. 자기 국가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어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 나라 국민이든 지도자든 여자든 아이든 노약자든 말이다. 그저 총으로 사격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모두 폭탄투하로 무참히 살해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인이라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를 무참히 밟아 무고한 한국인을 죽이고,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으며, 경제수탈과 각종 죄악을 저지른 일본 군국주의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 분노가 결코 모든 일본인들의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어낸 극단적인 파시스트가 싫었다. 그런데 일본이 1945년 8월 전쟁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패배선언을 하려고 했는데, 미국에서 원자탄을 폭격했다. 이때까지 일본이 패배를 시인한 것은 미군의 핵 투하가 아니라 이전부터 준비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핵 투하로 피해본 것은 진실로 군사기지가 주둔한 곳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들이 모여 살던 주택지역이란 점이다. 이 책에서는 투하된 지점에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럼 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그렇게 허무히 사라진다는 말인가?

 

 

폭탄 투하 후에 그 기억이 생생한 자들의 증언 잊을 수 없다. 어느 여자가 턱이 사라져서 혀가 아래 치우친 채 핵폭발 후에 생긴 검은 비를 맞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어느 소녀는 너무 괴로워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잘라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과연 전쟁에서 누가 더 많은 피해를 보고 아픔을 겪었는가? 일본은 자신의 전범에 대한 기억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신들이어야 말로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들은 핵탄두의 위력 앞에 피해자로 착각한 것 같다. 물론 피해자는 맞다. 그런다고 가해자 속성이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어느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국민들의 위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유도하여 자신들로 하여금 전쟁참여를 합당화시키는 공작도 펼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누가 자원하여 목숨을 버리려고 할 것인가? 하지만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라는 숭고함 앞에서는 누구나 위대한 전사로 거듭 태어난다. 하지만 전사의 애국심과 자유를 위한 수호심을 갈구함에서 그들의 진실성은 의심하지 않은 바이나, 그 마음 자체가 향하는 화살을 의심보다는 절망으로 비추어진다.

 

 

전쟁에 나가면 모두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우리를 지킬 것이며, 만약 타국에 출격하면 우리는 세계평화와 더불어 그 나라의 인권과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말이다. 실제로 한국전쟁에서 숨진 많은 연합군 병사들은 고귀하게 죽어갔다. 하지만 진실로 아픈 사실은 그들이 정말 죽어야 할 존재라는 점이다. 전쟁은 결국 외부의 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부의 적을 같이 처단하기 좋은 실험도구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순간 반국가세력을 낙인찍히며, 그들은 마녀로 만들어 국민들을 선동하고, 국민들은 순간 모두 하나가 되고, 그 마녀를 그 마녀동조세력까지 제압해야 모두 만족하는 신화가 발생한다.

 

 

내가 몇 번이나 강조하나 나는 인간들이 정의롭거나 진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이미 정의롭고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다른 희생거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응징할 뿐이다. 패권주의적인 특성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라는 거대한 울타리에 넘어오는 적이 있다면 무슨 수단이 되었든 죽이고 밟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강력한 힘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 실행하기란 무리다. 그 대단한 무리들이 직접 자국을 밟아오지 않은 이상 미친 사람처럼 무모한 행위는 불가라는 점이다.

 

 

결국 우리는 진실을 어디다 두고 말할 수 있는가? 가령 베트남전쟁에서 많은 국가들이 공산주의와 상대로 전쟁을 수행했다. 문제는 그 공산주의라는 존재가 처음에는 민족해방운동에서 자기주권 확립과 민주주의적 체계를 위해 호치민이란 인물이 지도자로 나섰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이나, 혹은 북한의 김일성처럼 관료적이고 독재적인 철권통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서방국가에서는 그들을 적으로 여기고, 자유주의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참전한다. 웃기는 사실은 베트남 국민들을 해방이란 하나, 그들이 가장 많이 살해한 적은 베트콩이 아니라 그냥 주민이었다. 베트콩 기지를 가서 섬멸한 게 아니라 베트남 주민들이 몰린 민간에 총을 발사하고, 폭격을 날렸다.

 

 

그리고 많은 어린아이가 죽었다. 네이팜탄이란 폭탄은 워낙 작은 알갱이로 구성되어 조심성 없는 아이들이 만지면 폭발하여 어린아이들의 손발이 절단되어 죽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느 아이가 폭격으로 다리를 잃어 참전군이 구출하여 그 아이에게 의족을 달아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들을 해방하고, 의족이란 과학적 진보로 통해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폭격을 하지 말고, 하더라도 정확히 하면 될 것을 말이다. 전쟁에서 민간인들의 학살은 그야말로 체계적이지 못해 그것만 노리는 것 같다. 민간인들은 어차피 타국에서 온 군인들에게 영원한 적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이념의 꼭두각시로 참전하나, 그 상대들은 이념이 아닌 국가적 민족적 자주에 의해 싸우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가족과 국가일 경우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뿐이다. 결국 베트남전쟁은 참전국의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패배는 패배만 적용된 게 아니다. 군사적인 패배까지는 군인들의 영역이나, 그들의 패배까지 동원된 국민들의 고통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거리로 내쫓겨 나고, 겨울에 배포할 담요들이 모두 전쟁물자 예산으로 변모되었다. 그렇다면 진정 전쟁을 원하고, 거기에 동조한 어리석은 국민들에게 과연 진실한 패배자는 누구인가? 참전국인가? 아니라면 누구?

 

 

참고로 군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의 백인 내지 흑인이었다. 물론 여기까지 좋다. 전쟁에 동원되면 군인들은 월급을 받기 때문에 자기의 경제적 목적 달성이라고 하자.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목숨은 하나이고, 거기서 나갈 군인들은 자신들이 참전국이란 사실이지 흰둥이와 검둥이가 나눈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종차별에 딸려오는 불만은 결국 전쟁 내에서 타국과의 전쟁이 아닌 자국과의 전쟁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피해자였다. 죽게 될 경우 자신의 인생은 모조리 끝이고, 돌아오더라도 팔과 다리를 잃게 되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물론 이념적 진리 앞에 희생은 피할 수 없는 딜레마나, 그 딜레마 자체가 필요 없을 수 있는데, 있게 한 점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의 나라들은 이런 행위를 만들고 전쟁에서 가난한 국민을 내몰며, 그 덕분으로 특정기업들에게 큰 달러가 들어간다.

 

 

인권을 위해서라는 슬로건, 파시즘을 끝낸다는 슬로건에서 그들은 인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인권으로 위장한 자신들의 권력과 경제적 독점을 차지하고, 파시즘을 처벌한다는 명제 아래 자신들 역시 파시즘이었다. 단지 상대방의 파시즘이 너무나도 강하여 자신들의 파시즘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선전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주의적인 인간상을 말하는데, 차라리 마키아벨리가 아쉬울 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유럽사회가 워낙 전쟁이 많아 군주의 폭력적이나 다소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정치적 공작을 펼쳤으나,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마키아벨리 이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군주론은 다시 적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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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삶이냐 홍신사상신서 24
에리히 프롬 지음, 정성환 옮김 / 홍신문화사 / 1991년 11월
평점 :
절판


인상 깊은 문구 : 그들에게는 자신의 철학은 상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개념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좌표계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란 이름은 예전에 기다 겐이라는 일본 철학자가 저술한 <현대사상지도>에서 처음 보았다. 그의 학문적인 사상에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독일의 지식인 집단이었다. 당시 1920~1930년대에 활성화하였으나,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핍박을 받자 외국으로 망명가거나 혹은 전쟁이 끝난 직후 다시 독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20세기 중반 전후로 세계의 학문과 사상, 철학의 중심이던 프랑스의 구조주의와 더불어 활발한 연구를 한 집단이다.

 

때마침 세계 2차 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인권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오로지 자본의 자유만을 추구한 자유주의와 스탈린이 추구하던 파시스트적인 공산주의, 기존 유럽사회 만행하던 파시스트이나 겉으로는 사회주의로 둔갑한 사회파시스트들, 이 모든 것이 어지러운 유럽과 전 세계적으로 퍼진 현상이었다. 지식인이란 그저 독재자와 탐욕의 얼룩에 물들인 자들에겐 방해꾼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 중에 발터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도망치려고 했으나, 그것이 좌절되어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한 지식인이다.

 

그런 세계 속에서 전쟁도 끝이 나고, 냉전사회가 왔고, 인간은 다시 평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막상 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은 그런 복잡하고 난해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서적 <소유냐 삶이냐>는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를 고찰하고 비판하고 생각해보려 하는 철학도서인 것이다.

 

예전에 내가 알던 블로그 이웃이 자신의 블로그 화면에 에리히 프롬의 사진을 올려놓고, 그의 글귀를 적은 놓은 것을 보았다. 당시에 <소유냐 존재냐>이란 것이었는데, 원문이 <To Have or To Be>라는 제목이었다. 이렇게 보아나 저렇게 보아도 가질 것이냐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위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난 뒤에 그가 낸 서적 중의 당연히 명작이 되어버린 이 도서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흔히 우리들은 쉽게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만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므로 함께 살아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은 매우 깨끗하고 아름답고 누가 보더라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문구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더 반대로 가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여기려 하는 사람일수록 더 심한 존재의 위험성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을 만큼의 이상을 원하고 노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특히나 우리의 일상을 능동적인 동사형으로 언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명사적인 언어로 채우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사랑하는 생겼다고 가장하자. 그러면 보통 우리는 “나는 애인을 가지게 되었다.” 내지 “나는 애인을 가졌다.”라고 한다. 즉 목적의 대상이 하나의 존재인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소유물인 객체로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말을 어떠한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물론 의미적으로 애인이 생긴 점은 같으나 이것은 소유와 존재로서 분리되어 보인다. 전자는 사랑하는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의 소유물이고, 후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소유물이란 점이다. 즉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인지 아니면 그 사람과 유대감인지에서 판가름이 나는 셈이다. 솔직히 이런 사소한 단어와 언어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소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이런 일상적인 흐름에서 우리 인간들은 쉽게 놓치고 만다.

 

왜 그럴까? 너무 당연한 것에 대하여 의문과 비판, 그리고 자아고찰이 부족하거나 필요 없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것은 자기가 항상 가지면 가질수록 계속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물이 빠진 항아리이다. 물론 항아리 안에 물이 차있지 않으면 그것은 항아리의 활용가치가 상실하게 되어 그것은 물리적으로 항아리독이라도 실질적으로 아무 필요 없는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항아리가 가진 기능을 사용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항아리에 필요 이상으로 물을 붇게 되면 물은 항아리는 넘칠 것이고, 그 수압이 강할수록 항아리의 어딘가에는 물이 새게 될 것이다.

 

그 물은 새더라도 결국 그 물을 부은 인간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고,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 넘칠 물 이상으로 물을 더 집어넣으려고 한다. 오늘날 이런 모습을 우리 주변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볼 수 있다. 자신에게 충분한 재산이나 금전적 능력이 있어도 타인의 재산을 가로채거나 약자들을 갈취하거나 착취하는 이들, 충분히 세계적으로 안정화할 수 있는데도, 무기와 병력을 늘려 전쟁의 위협을 야기하는 존재들, 이 모든 존재들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서 지적하는 인간의 모순적인 현상일 것이다.

 

자기가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것을 남에게 빼앗아하고, 그 빼앗기 위해 준비하고 소모한 자신의 소유물을 대체하기 위해 또 자신의 욕망에 이끌린다. 자기의 소유만이 오로지 정의이고, 그 외의 존재들은 의미가 없다. 인간에게 과연 삶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많은 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목표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적인 요소는 인간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인간이란 통계적으로 나누어 일부 10% 내외의 존재들은 수치적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존재가 언제부터 수치로서 대하여 그렇게 실행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확률의 숫자로서 그들의 삶을 결정하고, 그들에게 삶의 기회를 박탈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줄 수 있는 인간으로서 가치는 소실된다면 점점 세상은 각박해 보일 수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의 그런 비판은 자본주의와 관료주의로 통해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서 결정되고, 관료주의로 통해 인간의 양심은 맹인처럼 변했다. 과거 독일 나치에서 가스실을 보낸 어떤 사람이 자신은 단순히 상부의 지시를 따르기만 바빴다.

 

그는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이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양심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직행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양심에 가책도 없었고, 그저 시키는데로 하는 기계적인 삶을 살았다. 결국 그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함에 따라 전범재판소에서 유죄를 확정 받았다. 에리히 프롬은 그렇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남을 괴롭히는 것보다, 차라리 사디스트처럼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자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여겼다. 그는 고통을 주더라도 그 고통에 대해 타인과 공유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인과의 공유에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가 이 책의 궁극적 목표다. 또한 위대한 성인인 붓다, 그리스도 같은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소유하지 않으려 했고, 그 소유를 남과 공유하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존경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성인을 존경하고 떠받들어도 결코 그 성인들처럼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성인들의 행위를 한 것을 보고 그들을 동조하는 것으로 모든 성스러운 행위를 했다고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모이고 모여 그 성스러운 존재를 이름삼아 자신들만의 소유를 기획하고, 그들은 거기에 매달리는 삶을 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삶을 창조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인간의 윤리관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사회로 갈수록 인간들은 니체가 비판하는 “자신만의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그 이상으로는 배타적이다. 자신의 주변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결국 인간은 자신의 주변사람이 결국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계속 상승 중이고, 그 대상은 한계가 있다. 어느덧 그것이 범접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그 무엇이라도 소유할 기회라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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