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알았는데 휴대폰에 쓴 글을 블로그에 고스란히 옮길 수 있다. 옳거니! 어차피 긴 글은 쓰지 못하니 단문이라도 부지런히 쓰자. 다행인건 카카오톡에 개설된 모임방 글도 클릭 몇 번에 옮길 수 있다. 낙서하듯 쓴 글, 누가 읽지 않아도 상관없는 글이니 휴대폰과 블로그를 일기장 삼아서 일기쓰듯 꾸준히 쓰자. 이런 형식이면 아마 하루 한 꼭지씩도 쓸 수 있겠다. 

노트에 볼펜으로 쓰던 일기쓰기에서 블로그 글쓰기로, 지금은 휴대폰 글쓰기에서 다시 블로그로 처음처럼 일기쓰듯 하고 있으니 결국 나의 글쓰기는 돌고 돌아 출발점으로 회귀했다. 글쓰기 혹은 일기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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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던 카프카 읽기를 시작한다. 실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솔출판사에서 간행한 카프카 전집을 비롯해서 국내 카프카 연구자인 독문학자 이주동 교수의 <카프카 평전>(2012년, 소나무)과 <군중과 권력>(1987년, 한길사)의 저자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카프카의 고독한 방황>(1983년, 홍성사) -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현혹, Die Blendung>(1981년, 국제문화출판공사)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  카프카에 관한 한 가장 권위있는 막스 브로트의<나의 카프카>(2018년, 솔), 국내 카프카학회에서 출간한 몇 권의 카프카 연구서 등 대부분의 책들을 진즉 구입했다. 하지만 달랑 한 두 권 읽고 끝낼 일이 아니다보니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하지 않으면 책을 펴들 수가 없었던 거다.      

일단 출발은 이주동 교수의 <카프카 평전>이다. 저자는 카프카학회 회장직을 역임하는 등 평생 카프카를 연구한 학자인데 이 교수의 평전은 상당 부분 막스 브로트의 저서에 빚지고 있다. 물론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 생전에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카프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였기에 일차적으로 그의 평전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다만 브로트는 친구 카프카와 평생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카프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카프카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이 교수의 입장에서 <카프카 평전>이 과연 이 부분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 교수의 평전과 함께 솔출판사 전집 중 단편집인 제 1권 <변신>을 병행해서 읽을 예정이다. 계속해서 막스 브로트의 평전을 마저 읽고, 최종적으로 작품읽기에 돌입해야겠다. 현재로서는 일기나 편지까지 읽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는게 아니니 한 작가에게만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문학의 경우 카프카뿐 아니라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이미 젊은시절에 읽은적 있지만 솔직히 대부분 이해하질 못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데 평생 문학을 가까이 했으면서도 현재 상태에서 카프카에 대한 이해력은 거의 백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60중반 너무 늦은 나이지만 이제라도 이해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카프카는 물론이고 아직도 읽어야 할 작가가 내게는 너무 많다. 호메르스, 단테, 세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플로오벨, 스탕달,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마르셀 프루스트, 카뮈,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토마스 만  등등. 젊은시절의 독서야 막연한 지식욕, 지적 과시, 낭만적인 문학취향 등이 두루 짬뽕되었기 때문에 텍스트를 엄밀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했고, 더우기 문학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지 않은 나로서는 심도있는 이해를 한다는게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진정한 독서는 지금부터라는게 내 생각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래봐야 기껏 10년 남짓할까? 그러나 이마저도 건강해야 가능하다. 아~ 인생은 짧고 읽어야 할 책은 넘쳐나니 이게 과연 행복한 고민인지 아니면 불행한 노릇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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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제 3회 토론 주제는 '몸'으로 최종 합의되었다. 토론 주제는 그때그때 회원들의 관심사에 따라 자유롭게 정하는데, 결정에 앞서 '몸'이라는 주제가 너무 포괄적라는 이의제기가 있었다. 마침 회원인 홍 화백이 '몸' - 한 사람의 변해가는 과정을 캔버스에 담고싶다는 - 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린다는 계획이 있다기에 아예 <홍삼식의 그림에 나타난 몸에 대하여> 로 결정했다.

앞으로 한 달간 '몸'이라는 주제와 씨름해볼 작정이다. 어쩔수 없이 이번에도 타인의 사상과 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워낙 아둔한 머리인지라 내 생각만으로는 딱히 뽑아낼 게 없으니 도리가 없다. 

서가를 살피던 중 철학아카데미와 '아트앤스터디'에서 철학강의를 하는 조광제 교수의 [주름진 작은 몸들로 된 몸](2003년, 철학과 현실사)이 눈에 띄었다. 아니 이런 책이 있었나? 워낙 오래전에 구입한 터라 내가 구입했는데도 제목이 낯설었다. 제목이 그럴듯해 반갑게 빼들었다.

후설과 메를로-퐁티를 전공한 현상학자답게 이 책의 1부는 후설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소개한 개설서 수준의 내용이고 2부에서는 현상학으로 다져진 저자의 몸 철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현상학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몸 철학이 이번 토론주제에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일별해 볼 일이다.   

문득 인사동 '철학아카데미'에서 했던 조 교수의 [현대미술의 정체]라는 강의가 떠올랐다. 여하튼 이번 토론은 홍 화백의 그림이 대상이니 이래저래 잘 되었다.

평생 독학으로 일관하는 나에게 조광제 교수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과거 인사동에 위치한 '철학아카데미 강좌를 몇 차례 청취한적 있는데, 당시 조광제 교수와 이정우 교수의 강좌를 수강한바 있고, 이후 '아트 앤 스터디'에 개설된 두 분 교수의 강좌를 연이어 수강하기도 했다. 워낙 여러 강좌를 수강하다보니 정규대학 과정으로 치면 아마 4년치 커리큘럼을 이수할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조 교수는 언젠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강원도의 힘>으로 기억하는데, 동해안 어느 횟집에서 대학  시간강사 역을 연기했던것 같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듯 조 교수는 영화관련 책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영화에세이 <인간을 넘어선 영화예술>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난다. 특히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을 시간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글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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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극과 스릴러 장르를 뒤섞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년)는 오늘날 미국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우화다. 미국은 19세기초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인 신대륙에 건너올 당시 메이플라워 호에 함께 싣고온 그들만의 하나님과 정의를 앞에 내세운다. 이후 그들은 뉴프론티어를 기치로 내걸고 황량한 서부로, 서부로 나아갔고, 투지에 넘친 개척정신은 찬란한 부와 영광을 거머쥐게 했다. 하지만 이들의 영광은 태생적으로 원주민 인디언들을 폐멸시킴으로서 가능했기에 과거, 영광의 이면에 가려졌던 잔혹함과 어두움의 그림자는 오늘날 끔찍한 악몽이 되었다. 

갈브레이드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운운했던 아메리카 천민자본주의는 영화에서 끔찍한 유령이자 사이코 킬러인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로 환생한다. 그렇다면 아메리카는 어떻게 악몽에서 벗어날것인가.  

코맥 매카시는 원작의 서두에서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의 항해>를 인용하며 노인의 지혜이자, 지성으로 만개한 유토피아 '비잔티움'을 대안으로 내세우지만 이들의 희망은 부질없는 몸부림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미국을 위한 대안은 없다]로 수정돼야 정확하다.   

또한 상징적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인 비잔티움이 단지 전통사회를 회고하고 반추하거나 푸념만 일삼는곳이라면 자칫 지루함에 못이겨 급기야 영화를 마저 못본채 졸음과 하품을 유발할 것이다. 물론  비잔티움으로 가는 여정에 동참하기위해서는 우선 저자 메카시의 처방대로' 사나운개'를 한눈에 알아보는 예리한 눈썰미가 필요할 것이다.

동시에 노인이든 젊은이든 궁극적으로 비잔티움, 즉 지성과 예술의 세계만이 유일한 희망이겠지만 오늘날 부동산업자 트럼프를 그들의 리더랍시고 추종하는 저급함을 볼때 과연 그 정도 처방으로 아메리카라는 중증 환자를 제대로 치유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회복 불가능한 미국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부고장이거나 우울한 만가라는게 저의 결론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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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 킬러- 일체의 망설임없이 양심이나 도덕, 혹은 상식에 붙잡혀 머뭇거리지 않고 냉혹하게, 단 한 치의 오차없이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자, 맘몬, 이 시대의 유령, 자본가..... 피 터지는 삶의 전쟁터에서  최후의 승자는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도  불사조처럼 죽지않고 단지 사라질 따름이다. 그는 여전히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배회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나운 개'를  잘 알아보지 못한채 살아가는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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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씨에게서 문자가 왔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2016년)을 감상할 수 있겠냐고. 처음 들어보는 감독이다. 하긴 요즘 영화들을 거의 안 봤으니 모를밖에. 2016년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전주국제영화제 등 국내 유수 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으니 이정도만으로도 수작임이 틀림없다. 유튜브를 검색하니 짧은 홍보영상만 있다. 한가한 오전이라 마땅히 할일이 없다. 이럴때는 역시 KT 유료영화 체널이 제격이다. 엔간한 영화들은 거의 볼 수 있고 관람료도 저렴해서 그만인데 한 가지 흠은 TV브라운관으로 봐야 한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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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은 철학교수, 교사, 학생 혹은 철학도를 비롯한 지식인들이다. 당연히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적인 대화, 분위기로 일관된다. 하지만 제작비가 수월찮게 들어갔을테고, 흥행을 무시할 수 없을텐데 흡사 대학원 세미나를 방불케하니 참 놀라운 노릇이다. 여기서 언급된 책과 사상가를 한번 나열해볼까. 

플라톤, 알랭 [행복론], 칸트 "밤하늘엔 별이 총총  내 마음의 도덕률", 파스칼<팡세>,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푸코, 레비나스, 호르크 하이머, 유나바머 선언, 솔제니친, 한나 아렌트와 그녀의 남편인 귄터 슈테른, 레이몽 아롱, 아도르노, 슬라보예 지젝....68혁명, 프랑스 대혁명, 저항가수 밥 딜런의 우상 우디 거스리.....대충 떠오른게 이 정도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단순히 전시하듯 폼으로 나열되지 않는다는거다. 즉 지적물이 소도구로 이용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영화 속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는것. 

 

대개 주인공이 지식인 나부랑이면 두툼한 책 몇 권, 혹은 책이 잔뜩 꽃힌 서가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대개는 들러리 전시용일뿐이다. 하지만 <다가오는 것들>에서 책과 인물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라는게 신기하다. 그나저나 이런 영화를 어떻게 큰 돈 들여 찍나. 흥행은 차치하고 대체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참 어지간하다. 새삼 프랑스라는 나라의 지적 무게가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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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현실, 관념적 세계와 현실세계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주인공 나탈리는 물론이고, 그녀의 남편인 하인츠, 나탈리의  제자인 파비앙 모두 공통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즉 철학이라는 순수지식, 관념의 세계는 현실, 혹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어떻게 타개하고 해결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현실을 관조하거나 관찰한다. 그래서 곧잘 철학은 현실을 대상으로하고,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문제삼으면서도 정작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치부되곤한다. 

 

고교 철학교사인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직업이면서 동시에 남편에게 딴 여자가 생기고, 모친의 죽음, 딸의 결혼 등 한꺼번에 몰려든 현실적 난제에 직면한다. 대개 이런 경우 영화와 소설의 상투적인 해결법은 연하의 제자인 파비앙 -   파비앙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탈리가 주도하는 총서 시리즈에 [아도르노]를 저술한 철학도다 - 를 과의 로맨틱한 결합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탈리는 냉철하게 정면돌파를 택한다. 현실과 지적관념의 세계 중 그 어떤것도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고 그대로 뚫고 나가는 정공법이다. 

 

그녀는"위기가 기회"임을 행동으로 증명한다. 즉 비록 일생을 함께하려했던 남편이 떠나갔고, 치매에 걸린 모친이 세상을 떠났으며, 딸은 결혼해서 엄마 곁을 떠났으니 분명 홀홀단신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를 오히려 자유를 찾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거다.   

 

아마 상투적인 영화였다면 지적인 제자 파비앙과 가정을 꾸미는게 순리일거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철학도인 젊은 파비앙에게 현실은 관심 밖이다. 그에겐 오로지 지식세계가 전부이며, 아직 세상 경험이 적은 급진적, 관념적인 젋은이인거다. 반면 나탈리는 현실의 신산을 모두 맞본 지식인이다.

그녀에게 철학은 남편처럼 관념놀이거나 단순한 지적, 이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과 조화를 이뤄야하며, 현실을 타개해 주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즉 철학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자한다. 따라서 파비앙에게 향한 애틋한 로맨스는 마음에만 담아둘뿐 결국 각자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나탈리는 이제사 한 여성으로서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시도하며, 주체적인 삶을 살게된거다. 즉 그동안 자신을 구속했던 모든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게된다. 그 어떤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삶, 지적으로 충만한 삶, 세상을 당당히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 결국 행복한 삶이란 바로 이런 삶을 말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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