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 감상

인문학과 예술은 일상의 표면 아래 감춰진것, 그동안 여러 형태의 이유로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들춰내고 밝히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은 실체가 워낙 단단하고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끈기있고 치밀하며 섬세해야한다. 이제와서 굳이 과거의 아픈 상처를 왜 밝혀려드나? 굳이 들춰내면 덧나는 일을 왜 밝여야하나? 단 하나의 이유때문이다. 진실! 물론 진실이라고 다 같은 진실은 아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처럼 진실은 때로 역설적으로 기능할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의 주제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12명의 순교자가 아닌 배교자, 그리고 배교자 중 한 명으로 낙인찍힌 신 목사의 진실관은 사건의 실체를 한 점 덧붙임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이 대위의 진실관과 대립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서 신 목사가 고수하려는 진실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처럼 역설적 진실이라는 점이다. 반면 <침묵의 시선>에서 조슈아 오펜 하이머가 밝히려는 것은 단지 역사적 실체를 드러내려는게 일차적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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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작가 멤버에게 문자 전하다. 영화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에 대한 토론모임은 11월 27일 화요일 오후 8시에 하자고. 전북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S씨하고도 통화했다. 최 작가와 하는 토론 모임을 함께 해보자고. 어떤 형태든 인문학 관련 모임, 그것도 수준있고 심도있는 모임이었으면 더욱 좋겠다. 사실 스터디 그룹이나 토론모임은 평소 늘 꿈꿔왔던 것인데, 워낙 작은 동네라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엇보다 하고자하는 사람이 우선 없다. 하지만 계속 두드리다보면 언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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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S씨가 모임에 합류했으면 좋겠다. 나이든 우리로서는 늦깍이 공부를 하는 그와 공감대를 이루기 쉽고, 철학적 기초가 다져진 그가 곁에 있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듯싶어서다. 문제는 논문을 쓰기 전이라 마음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진즉 사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스마코스 윤리학>을 펴든것도 순전히 S씨와의 만남 때문이다. 만나기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요지를 좀 알아둬야 대화가 될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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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해망동 수산시장에 다녀오다. 여기도 역시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가게 주인에게 물으니 도무지 손님들의 왕래가 뜸하단다. 하다못해 만만한 호떡집조차 손님이 없다고 하니 말해 무엇하랴. 여기나 저기나 썰렁하니 불황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있다. 대체 언제쯤 활기를 찾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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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내내 베토벤 <교향곡 7번> 4악장만 집중 연습했다. 연습을 줄기차게하면 고음도 가능할듯. 일단 느린 템포로 되풀이 하며 정확한 운지, 박자감각을 기억해야한다. 끊임없는 반복, 반복만이 이 곡을 무난히 연주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느릿느릿 뚝심있게 걸어갈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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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읽기는 생각보다 성과가 너무 더디다. 어느덧 4개월이 흘렀건만 2차서와 평전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대체 언제까지 읽어야하나. 원전은 언제 읽을 것이며, 카프카, 보들레르, 프루스트는 또 언제 읽어야할것인가. 제법 많은 시간을 들였건만 막막하다. 애초 시도 자체가 무리였던걸까. 물론 내 실력으로 한계가 있으니 대강 스케치만 하려했다. 그러나 이조차 욕심인가보다. 벤야민을 읽는다고 애꿎은 조셉 콘라드, 헤밍웨이, 마르케스는 들춰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여하튼 좀더 가보기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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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문화카페에서 만든 꽃바구니, 처가에서 따가지고 온 감을 들고 이웃 Y씨 댁을 방문했다. 검사 마치고 2주만에 귀가했는데 부부 모두가 많이 야윈 모습이다. 설성가상이 따로없다. 그간 신장 상태만 염려했는데 병원에서는 엉뚱하게 종양이 의심된단다. 수술은 12월 초순경이라 아직 한참 기다려야한다. 그때까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할까.  오늘 오전 동군산병원에서 투석을 했다고. 병원 내에 투석 전문치료센터가 개설되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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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서실이 한가해서 책읽기는 그만이다. 문제는 한가해도 너무 한가하다는것. 수능무렵이니 그러려니해도 내심 걱정된다. 요즘 군산의 자영업자들은 내남할 것 없이 속이 새까맣게 타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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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동네문화카페' 모임날, 멤버인 Y씨 부부도 방문했다. 이런 저런 애기끝에 나에게 두 가지 조언을 해줬다. 부부 중 한 사람이 몸이 아프면 그 순간 모든게 텅비게 된다고. 그러면서 평소 가보고싶은데 더 많이 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게 후회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부부가 자주 여행을 가야한다고. 평소 부부애가 워낙 각별한 분이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법하다. 또 하나는, 할수만 있으면 이것저것 내려놓고 맘을 비워야한다고. 누군가에게 기부를 하는것도 좋지 않느냐며 덧붙였다.  

Y씨가 기부의 필요성을 말한건 내가 평소 책을 지나치게 구입하니 한게고, 맘을 비우라는건 독서실 빈방을 이용해서 문화모임을 하고싶다고 하자 이에 대한 만류로 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가령 나이들도록 일 욕심, 돈 욕심을 내는건 옳지 않지만 누군가를 위해 바람직한 일을 한다면 설령 죽을때까지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또 기부 행위야 다다익선이지만, 반드시 돈만이 기부가 아니다. 가령 각자가 가진 재능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것도 돈 못지 않은 기부방식이니 말이다. 다만 시간, 돈, 일 어느것이든 단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사용하는 이기적 행위가 문제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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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정기연주회 메인 곡은 베토벤 <교향곡 7번>으로 결정되었다. 드보르작 <교향곡 8번>과 세 번에 걸친 찬반투표 결과 베토벤으로 최종 결론난거다. 지휘자와 트럼펫 파트 J선생은 내심 드보르작인듯했지만 나는 끝내 베토벤을 고수했다. 작년에도 베토벤 7번이었다가 도중 변경돼 은근히 미련이 남았었다. 특유의 난해한 리듬감도 끌렸다.     

아마추어 트럼펫터가 소화하기에 무리하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4악장을 연습하고 보니 예상을 뛰어넘었다. 과연 내 실력으로 연주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전전긍긍하던차 이런 내 속을 알고 있는냥 지휘자가 넌즈시 묻는다. 

- 요즘 연주실력이 좀 정체된 느낌이던데 베토벤 7번은 엄청 고음이라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자칫 무리하게 연주하면 입술이 망가질지도 몰라요. 마침 아는 친구가 시향 트럼펫 부수석인데 혹 레슨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격주로해도 무방하니까요.

이젠 예전의 뜨겁던 열정도 좀 식었다. 욕심을 비우고나니 부담감도 사라졌다. 최선을 다해 연습하되 결과에 만족하려고 한다. 그래서 레슨은 유보하고 종래 하던 방식대로 연습할 작정이다. 하지만 걱정이 아주 없는건 아니다. 1악장 붓점음 리듬은 그렇다쳐도, 연속적으로 내야하는 3옥타브 A음, B음을 과연 어떻게 소화해야할지가 관건이다.

뭐 연습말고 별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꾸준한 연습, 과거에 레슨하면서 배운걸 연상하면서 공부하는 심정으로 도전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인건 앞으로 10여개월이라는 많은 시간이 주어진점이다. 가능한한 하루도 거르지 말고 연습할것. 교칙본 연습을 꼬박꼬박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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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의 최근작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는 어긋난 소통과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낙빈왕의 시 <咏鹅, 영아>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이자 문학적 메타포이다. 영화는 먼저 불통의 관계를 보여준다. 윤영(박해일)과 아버지, 윤영과 송현(문소리), 송현과 그녀의 남편, 민박집 사장(정진영)과 아내 혹은 딸은 서로 붙통 관계이다. 여기서 윤영과 송현이 불통 관계라는 것은 일견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면서도 최소한 사랑의 관계만큼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

장률 감독은 일단 영화를 소통이 안되는 상황을 계속 보여주지만 차츰 영화가 전개되면서 서서히 소통을 회복한다. 먼저 남편과의 갈등 끝에 헤어진 송현은 군산의 민박집 사장을 만나자 새로운 소통을 시도한다. 또한 아빠와 엄마의 갈등으로 엄마를 잃은 민박집 사장의 딸은 윤영의 우울한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역시 새로운 소통을 시도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남녀의 사랑을 내세운 소통 방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긋난 소통이자 어긋난 사랑으로 귀결된다. 먼저 자신의 잘못으로 아내를 불귀의 객으로 만든 민박집 사장은 아내에 대한 죄책과 회한으로 송현의 사랑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송현의 일방적인 짝사랑일 수밖에 없다.

이점은 민박집 사장의 딸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폐증을 앓는 환자지만 윤영의 모습에서 동병상련의 모습을 발견한다. 윤영과 민박집 사장딸은 나중에 어느 섬을 찾아간다. 이들은 함께 숲속에 들어서는데, 숲속 오솔길이 나오자 사장 딸 혼자서 들어간다. 이 장면은 윤영과의 관계가 단지 완전한 소통이 아님을,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즉 이 영화에서 남녀는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완전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랑까지는 발전하지 못한다. 

이쯤에서 영화의 주제를 말해보자. 당나라 시인 낙빈왕이 7세때 썼다는 시 <영아>는 공교롭게도 윤영의 죽은 어머니가 아들을 부를때 '영아'라고 부른데서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자애로운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을 부를때 인자한 음성, 사랑에 가득한 목소리로 '영아'라고 부를때, 아들은 엄마의 사랑 가득한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윤영은 사랑하는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던차 어느 술집에서 송현이 윤영을 향해 '영아야"라고 부르자 순간 윤영은 희미하게 기억속에 사라졌던 엄마의 목소리가 송현의 모습에 오버랩된다.  



 

하지만 송현은 단지 영아야라고 부를뿐, 윤영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다. 윤영은 영아라고 부르는 송현을 향해 사랑의 춤사위를 낙빈왕의 시<영아>를 부르며 보여준다. 마치 숫컷 극락조가 춤을 추며 암컷 극락조를 부르며 구애하는 모습과 흡사한 장면이다.

이제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층위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표면에 네 사람의 어긋난 소통, 혹은 사랑을 다루면서 동시에 다른 이면에는 동아시아 3국의 현제적 상황 나아가 조선적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한데 아우르고 있다. 만약 장률 감독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가 단시 연애물에 그쳤다면 뛰어난 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장률 감독은 윤영과 송현의 어긋난 사랑을 다루면서 앞에서 말한대로 동아시아의 현재적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대사는 "어데선가 많이 본듯하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주로 윤영이 하고 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동아시아 3국, 즉 중국, 한국, 일본인들은 거의 외모가 흡사하다. 이들은 길거리 어데선가 만난다면 거의 구분하기 힘들정도다. 실제 그런 장면이 몇 번 나타난다. 가령 관광객으로 온 중국인들, 일본인, 나아가 조선족까지 서로 구분하기 힘들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 조국 한국으로부터 차별받는 조선족의 모습은 특별히 여러 장면에서 나타난다.


 

먼저 시인 윤동주를 보자. 일본 후쿠오카의 한 감옥에서 죽은 윤동주는 조선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연변의 수도 용정에서 출신이다. 그런데 극우 아버지를 둔 윤영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 여인도 용정 출신이자 윤동주의 먼 친척뻘이다. 하지만 윤동주는 국민시인으로 대접받고 가정부는 조선족으로 냉대받는다. 만약 윤동주가 후쿠오카에서 죽지 않고 용정에서 그대로 살았다면 그 역시 조선족일 되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통치시기에 한국을 통치하면서 숱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한국에게 씼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런 사실앞에서 진정으로 사죄를 하지 않는 역사의 죄인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군산은 일본인들의 적산가옥이 그대로 남아있는 현장이다. 일본인들의 세운 동국사도 그대로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그들의 역사적 현장, 실은 수탈의 현장인 이곳을 옛 추억을 회상케 하는 그리움으로 장소로 찾아오고 우리는 관광지화해서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는동안 역사의 진실은 은근슬쩍 감춰지고 관광상품만이 활개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한국인은 바로 같은 한국인인데도 조선족으로 업신여기는 행위와 다를바 없다.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나아가 조선족까지 어데선가 많이 본듯한것은 비슷한 모습, 하나의 모습 같아서 그렇다.

이런 동아시아 3국, 조선족의 현실은 다름아닌 윤영의 처지와 다를바 없다.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그, 단지 그리움의 표상인 영아라는 소리를 귓전 가까이 듣지만, 막상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상태, 이게 바로 일본으로부터 한국, 한국으로부터 조선족이 처한 현실을 의미한다. 서로 비슷한 외모에서 가까움을, 어데선가 본듯한 그리움을, 그래서 사랑을 기대하지만 이런 기대는 번번이 어긋나고 미끄러지며 심지어 냉대받고, 조롱까지 받는다.

장률 감독은 재중 동포로서 한국사회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그의 현실은 윤영의 처지, 어긋난 사랑, 기댈곳 없는 그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연애담을 말하고 있지만 한 층 꺼풀을 들어가면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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