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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극과 스릴러 장르를 뒤섞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년)는 오늘날 미국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우화다. 미국은 19세기초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인 신대륙에 건너올 당시 메이플라워 호에 함께 싣고온 그들만의 하나님과 정의를 앞에 내세운다. 이후 그들은 뉴프론티어를 기치로 내걸고 황량한 서부로, 서부로 나아갔고, 투지에 넘친 개척정신은 찬란한 부와 영광을 거머쥐게 했다. 하지만 이들의 영광은 태생적으로 원주민 인디언들을 폐멸시킴으로서 가능했기에 과거, 영광의 이면에 가려졌던 잔혹함과 어두움의 그림자는 오늘날 끔찍한 악몽이 되었다. 

갈브레이드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운운했던 아메리카 천민자본주의는 영화에서 끔찍한 유령이자 사이코 킬러인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로 환생한다. 그렇다면 아메리카는 어떻게 악몽에서 벗어날것인가.  

코맥 매카시는 원작의 서두에서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의 항해>를 인용하며 노인의 지혜이자, 지성으로 만개한 유토피아 '비잔티움'을 대안으로 내세우지만 이들의 희망은 부질없는 몸부림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미국을 위한 대안은 없다]로 수정돼야 정확하다.   

또한 상징적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인 비잔티움이 단지 전통사회를 회고하고 반추하거나 푸념만 일삼는곳이라면 자칫 지루함에 못이겨 급기야 영화를 마저 못본채 졸음과 하품을 유발할 것이다. 물론  비잔티움으로 가는 여정에 동참하기위해서는 우선 저자 메카시의 처방대로' 사나운개'를 한눈에 알아보는 예리한 눈썰미가 필요할 것이다.

동시에 노인이든 젊은이든 궁극적으로 비잔티움, 즉 지성과 예술의 세계만이 유일한 희망이겠지만 오늘날 부동산업자 트럼프를 그들의 리더랍시고 추종하는 저급함을 볼때 과연 그 정도 처방으로 아메리카라는 중증 환자를 제대로 치유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회복 불가능한 미국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부고장이거나 우울한 만가라는게 저의 결론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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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 킬러- 일체의 망설임없이 양심이나 도덕, 혹은 상식에 붙잡혀 머뭇거리지 않고 냉혹하게, 단 한 치의 오차없이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자, 맘몬, 이 시대의 유령, 자본가..... 피 터지는 삶의 전쟁터에서  최후의 승자는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도  불사조처럼 죽지않고 단지 사라질 따름이다. 그는 여전히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배회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나운 개'를  잘 알아보지 못한채 살아가는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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