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서회 전후

독서실 창밖, 낙옆 하나 둘, 골목길 어데론가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아침, 커피 한 잔. 완연한 가을 아침입니다. 오디오에서 임재범의 <만남>이 들려오는군요. 노래의 가사처럼 여러분과의 만남도 우연일까요? 함께 클래식을 연주하고, 책 읽고, 이야기 나누고, 글쎄 우연한 만남이긴한데 이만한 누림이라면 뭘 더 바라겠어요. 소복이 쌓이는 하얀 눈, 샤미센 선율, 다다미방, 찻물 끓이는 소리, 솔방울 소리, 적막,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평생 살면서 <설국>을 네 번쯤 읽은것 같군요. 학생때, 40대, 50후반, 그리고 지금....스무살, 지식과 문학의 향연에 푹 빠져살던 그 무렵, 신구문화사에서 출간된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을 어느 헌책서점에서 구입했었죠. 이 작품이 특별히 뜻깊게 다가오는건 요즘 세상이 너무 빠르고 분주하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시마무라, 고마코, 요코...단지 서 너명 남짓한 등장인물, 시골 산 속의 어느 온천장, 샤미센, 게이샤, 소복이 쌓이는 눈, 눈, 눈. 이런 소설은 너무 빠르게 읽으면 안 됩니다. 차 한 잔 음미하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다지오 보다는 차라리 라르고 템포가 적절하겠군요. 시나브로 초겨울 문턱입니다. 독서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 <설국>이 전해주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맘껏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역시 문학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움이 더하는것 같군요. <설국>을 사흘에 걸쳐 드문드문 읽다가 어젯밤 늦게까지 마저 다 읽었습니다. 시마무라의 짙은 고독감, 고마코의 뜨거운 관능미, 요코의 청순미가 손에 잡힐듯 느껴지는군요. 모임 날까지 하루 더 시간이 남아 <이즈의 무희> <천 마리 학>도 읽으려고 합니다. 중편 분량이라 하루면 다 읽을듯싶은데, 오늘 하루 가와바타 야스나리 특유의 섬세하고 서정적인 문장을 맘껏 즐겨봐야겠군요. 

고마코의 쓰러질듯 술취한 얼굴을 연상케 하는 농염하게 익은 홍시, 비록 샤미센 선율은 없었지만 새콤달콤 맛있는 유자차, 가을의 밑바닥을 녹색과 흰색으로 곱게 물들인 롤케익....여러분과 함께한 토론 시간 더없이 즐거웠죠. 시마무라에게 도쿄로 함께 가고싶다는 요코의 애잔함, 그리고 낙옆 쓸쓸한 늦가을 오후, 이런 날 <설국>은 더없이 적절한 소설 같습니다.

2. 일본 문학의 특징

소설가 이호철은 일본문학의 특징을 세 가지로 거론한바 있다. 사소설, 민중과의 괴리, 에로티시즘이 그것인데, 물론 이런 특징이 모든 작가에게 해당하는건 아닐테지만 최소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경우는 정확히 해당한다. 다만 초기작인 <이즈의 무희>의 경우 민중계층인 유랑 무희와 그녀의 가족이 주요 등장인물이라는 점에서 다소 예외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이호철이 든 특징에 해당한다.

<이즈의 무희>는 황석영의 단편 <삼포가는 길>과 분위기가 흡사한 면이 있어 한일 양국의 문학적 특징을 비교하는데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가령 <이즈의 무희>에서 학생 신분의 화자는 무희 소녀 가족을 단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 - 화자는 무희 소녀에 대한 이성으로서의 관심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는데 반해, <삼포 가는 길>의 등장인물 모두는 민중계층이고, 실제 민중들의 고단한 삶 자체가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3.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이기도 한 <설국>에서 작가의 분신 격인 시마무라의 시선을 통해 고마코에 요코에 대한 묘사는 치밀하고, 집요하게 이뤄진다. 마치 '하이퍼 리얼리즘'이 연상될 정도로 세밀한 묘사는 자연 풍경 묘사와 더불어 한 편의 인물화와 풍경화를 함께 보는듯한 착각이 들게하는데, 이점은 <천 마리의 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호철은 '사소설'의 특징은 작가 한 개인만이 모든 소설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개인적 관심사가 전부인 작가는 괴기스러움, 에로티슴으로 밖에 탈출구가 없음을 함께 지적한다. 또한 그는 일본문학계에서 자살하는 작가들을 심심찮케 볼 수 있는데, 작가가 양심적일수록 결국 도달하는건 자살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대다수 일본 작가들이 자살을 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지적은 편견일 수 있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 경우는 상당히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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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강력한 진보적 가치관을 가졌다해보자. 한데 생활은 그냥 보통사람과 하나 다를바 없다. 가령 독실한 종교인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생활은 그냥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이 한다. 이럴경우 진보적 가치관이니 종교의 독실함 여부가 생활 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요한건 어떤 가치관을 지녔다든가 종교적 신실성 여부가 아니라 그것들을 생활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느냐 여부다. 백날 머리속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떠들면 뭘해, 그게 만약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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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칸투스문학살롱 토론작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관심사를 소설하나로 좁히면 어떨까. 실은 이것도 만만하지 않다. 한국문학 하나면 모를까, 세계문학이면 말이 달라지지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선 언어권으로 나누면 영미문학, 불문학, 독문학, 중남미문학, 동유럽문학, 러시아문학, 일문학, 중문학으로 퍼진다. 영미권 하나만으로 좁혀도 고대, 중세, 근대, 현대문학으로 구분되고, 장편과 단편으로 또 나뉜다. 다 그만두고 셰익스피어, 제임스 조이스, 카프카 등은 한 작가에 집중해도 아마 단기간에 읽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피상적으로 이해하는거야 문제가 다르지만 하다못해 평전, 작품론까지 병행한다면 평생 투자해도 세계문학을 고르게 읽어내지 못할것이다.  

남은 여생 기껏 15년 남짓한데 소설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것저것 호기심만 들썩이다간 필경 겉핥기로 끝날것 같다. 자, 끝까지 가볍게 호기심만으로 갈거냐, 아니면 하나만을 심도있게 파볼거냐. 여하튼 깊이 고민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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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인생 후반을 소설읽기로 보낸다? 괜찮을 것 같다. 그리스 고전, 단테,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프랑스 고전희곡, 시골장터에 쌓인 수많은 물건들마냥 개성 가득한 불문학, 체홉을 비롯한 근대 러시아문학, 영미문학, 괴테, 실러 등 독문학, 중남미와 스페인 문학, 일본문학, 중국문학, 게다가 현대문학만해도 얼마나 광범위한가. 여전히 접근을 허용치 않는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프란츠 카프카.....보르헤스, 나보코프, 윌리엄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등등. 나열하기도 벅찬 수많은 작가들, 밤하늘의 별,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단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서가를 세계문학 작품으로 채우는것도 보기 좋을 것 같다. 여러 출판사, 양질의 번역서들, 양장본, 보급판 할것 없이 알록달록 다양한 소설들이 서가 빼곡이 들어서서 읽기를 기다린다면 얼마나 기분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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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참 많이 변했다. 몇가지 신상명세서를 밝힌 후 단 한 번 클릭으로 번듯하게 <문학서재>를 지었으니..... 어째 세상살기가 너무 번잡스럽고 각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우리 모두 같을 터이다. 하지만 어느 한구석을 곰곰히 살펴보면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것 같다. 요즘 몇몇 문우들께서 개설한 문학서재들을 보니 멋져 보였다. 해서 나 역시 남들따라 서재하나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한데, 너무 쉽게 집이 지어지다 보니 좀 싱거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재미도 있고 그 옛날 스므살 때 처음 글쓸 때 처럼 기분이 요상해진다. 문제는 서재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 내용일 것이다. 비록 손쉽고 값싸게 짓긴 했지만 기왕 지은 서재, 멋지게 꾸며볼 작정이다. 바라건대, 여러 문우들께서 서재를 자주 찾아주셨으면 참 좋겠다.>     - 2001년 10월 문학서재를 개설하며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개인 홈페이지라는걸 만든게 <문학서재>라는 곳이었다. 17년전인 2001년 당시 '한국문학도서관'에서 무료로 제공한 <문학서재>는 개인 블로그의 원조쯤될것이다. 우후죽순! 한마디로 문학을 가까이 하는 이들치고 한번쯤 <문학서재>를 만들었을 것이다. 요즘이야 휴대폰이 발달해서 카톡이니 트위터 등 SNS가 워낙 유행이라 굳이 개인 홈페이지를 사용할 일이 없다보니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글을 게시해도 읽는 이가 거의 없다. 

 

그 옛날 <문학서재>에 글을 쓰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데갔을까? 글을 쓰긴 할까? 짐작컨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쓰지 않을 것 같다. 간혹 <문학서재> 이곳 저곳을 들어가봐도 누구 글쓴 흔적이 없다. 글은 고사하고 썰렁하니 주인조차 출입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글을 잘 쓰고 못 쓰고 보다 글 쓴다는 그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니 지난 16년여를 누가 계속 글을 쓴단 말인가. 사실 문학은 직업 작가가 아닌담에야 젊은시절 한때의 관심사일뿐이다. 말 그대로 20, 30대 문학청년 시절의 열병의 하나일뿐이며, 그 이후는 어쩌다 옛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일종의 추억거리에 불과하다.


늦가을, 오후들어 부슬부슬 비가 내리자 낙엽이 흩날린다. 그동안은 좀 따뜻하더니 갑자기 을씨년스럽다. 하긴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될 때다. 책, 글쓰기.....평생 가까이 한 단어들이지만 오늘따라 문득 정겹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그 많던 사람들은 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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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세일즈맨>감상. 이란 태생인 파르하디 감독은 2011년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에 이어 <세일즈맨>으로 2016년 칸 영화제 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국제적으로 굵직한 상을 수상한바 있다. 사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놓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파르하디 감독은 사소한 사건 하나만으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주제는 '용서와 복수'.

흔히 종교는 자비와 용서를 너무 쉽게 말하지만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보듯 결코 값싸게 베풀어져선 안 된다. 당사자의 아픔을 제 3자가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일즈맨>에서 남편 에마드는 끝내 복수를 고집하지만 성폭력 피해 당사자인 아내 라나는 용서를 주장한다. 이게 가능할까? 과연 아픔을 지닌자가 어떻게 용서를 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에마드 부부의 상반적인 주장에 대해 어느 한 쪽에 동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파르하디는 용서쪽으로 기운다. 흔히 하는말로 복수는 다시 복수를 부른다고 경고하며,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을 당했다하더라도 용서를 통해 구원 받으라고 종교는 말한다. 하지만 파르하디 감독은 이런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논리인가. 인지상정, 그냥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태도가 복수와 용서를 구분하는 척도다. 가령 초반부의 택시 내부에서의 에피소드를 보자.

에마드와 그가 가르치는 학생, 어느 중년 부인이 택시에 동승한다. 학생은 운전수 옆 좌석, 에마드와 낯선 중년 부인은 뒷좌석이다. 한동안 달리던 차 안에서 부인은 갑자기 운전수에게 앞자리 학생과 자리를 바꾸겠다고 한다. 옆좌석 에마드의 다리가 자꾸 밀착돼 불편해서다. 더이상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관객은 에마드와 부인간에 뭔가 불편한 일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스치듯 가벼운 장면이지만 감독은 뭔가 남녀간의 어떤 도덕적인 문제이거나 다른 무엇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런 정도야 그냥 보통사람간에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따져보면 에마드는 선생 신분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바로 앞좌석에 있는 상태에서 초면의 부인에게 결례되는 행동을 한 셈이다. 감독이 굳이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관객은 에마드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다만 그런 에피소드는 보통 사람간에 흔히 일어 날 수 있는 가벼운 도덕적 하자일뿐이다. 바로 이점이 보통 사람간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부도덕적인 문제인데, 바로 에마드의 아내 라나 역시 그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나를 성폭력하려했던 노인의 우발적인 행동 전모를 알게된 관객은 과연 어떤 입장이 될까. 파르하디 감독의 입장은 라나가 대변하는 셈인데, 그녀는 노인의 행동을 우발적인 보통사람들의 성충동으로 여기고 결국 용서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을 우발적으로 할 수 있고, 그런 범죄는 비록 있을 수 없는 악한 행동이지만 특별한 범죄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보통 사람도 어느순간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고 보는거다. 문제는 이때 범죄자가 국가적 폭력이라든가, 흉악범이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것. 바로 그래서 라나는 용서를 주장한다. 이런 태도는 무슨 종교적인 거창한 용서나 자비의 행위라든가, 철학적, 도덕적인 어떤 심오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거듭말하지만 단지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선택이자 행동이라는 것. 

파르하디 감독에 의하면 택시 안에서의 에마드가 그렇듯 보통 사람들은 언제든 죄를 저지를 수 있고, 도덕적으로 어떤 순간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종교인도 아니고 어떤 수행승도 아닌 사람이 이런 우발적 행동을 했을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비록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복수가 아닌 용서를 해야한다는 게 이 영화가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이자 보통 사람들의 도덕관이자 삶의 태도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아이러니하고 이중적이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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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이 세상에 너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무한한 우주에서 유일무이하게 하나뿐인 내 아들이라니 이게 얼마나 대단한가.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기적인가. 네가 가진 장점을 하나하나 들어보자. 굳이 일일히 나열하지 않더라도 한 두가지가 아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아들, 그것만으로 네가 최고라는건 의심할 여지 없고. 남이 뭐라든 말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인생은 길고긴 마라톤. 네가 하고싶고 꿈꾸던 것 망설이지 말고 하라. 내가 믿어주고 알아줄테니. 두려워말고 거침없이 가고싶은 길 걸어가도록 하라. 늦었다고? 그렇지 않다. 이제 겨우 긴 도상의 출발점에 서있으니. 60중반인 나도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계속 탐구하고 알아보고 찾아볼게 많으니까. 궁금한건 끝도 없이 생기고 또 생기고, 인생은 찬란한 가을 햇빛처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것. 너도 이런 인생을 맘껏 즐기고 탐구하고, 당당히 마주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다시 가만히 속으로 불러보는 내 아들! 귀한 내 아들.

아내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내 아내로 선택할거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지난 세월 터무니없는 일로 괴롭히고 힘들게 했지만, 그래서 당신은 나를 전혀 남편으로 택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고맙고 또 고마울뿐이니. 내가 읽고 공부한 수많은 책이 곁에 있지만 당신은 그 자체로 몇 만 권의 책보다 훌륭한 인생의 교사였다. 돌아보면 나의 지난 삶이 썩 자랑스럽지 않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내세울건 하나, 당신을 아내로 맞아 일생을 함께했다는것. 놀라워라! 어째서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택했는지, 어찌 그리 기막힌 결정을 했는지, 나의 아둔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당신을 아내로 택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할 수록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귀한 것

내 자신, 혹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을 진정으로 귀하게 여기면 남도 그렇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찮다고 여기면 남도 따라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의 시선, 견해 따위가 아니라 우선 내가 가진것을 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부가 중요하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내가 가진것, 내 자신을 귀하다고 여기면 스스로 그렇게 될뿐만 아니라 남도 따라 그렇게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바라는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라는 구약 히브리서 11장 1절은 진리다.

자신감

자신감은 자기가 가진것, 자신을 스스로 믿는 일에서 출발한다. 설사 그것이 망상이더라도, 실제와 다르더라도 자신이 소유한것 혹은 자신을 굳게 믿으면 그냥 그렇게 된다. 스스로 그렇게 된다니 신기한 일 아닌가? 오늘날과 같은 과학 시대에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맹신이요, 망상이며 환상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사람의 능력은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설사 지금 내가 스스로 자신있게 믿었던 어떤 것이 아니더라도 만약 지속적으로 믿으면 머지않아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이게 바로 믿음의 기적이고, 인간능력의 기적이다. 전혀 과학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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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 한켠의 노란색 민들레,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그저 스치고말 작은 꽃. 청명한 하늘, 눈부신 가을 햇살에 꽃잎이 더욱 화사하다. 노란 민들레 꽃. 허리를 구부리고 자세히 보는가, 아니면 무심하게 스치는가에 따라 민들레는 전혀 달라 보인다.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무심히 피어있는 민들레.

인생의 정체는 무엇인가? 정녕 찬란한 가을 햇살마냥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인가? 아니면 부질없는 수난, 끝없는 고난의 연속인가? 시지푸스의 도로에 그치고말 헛된 노동인가?  

민들레마냥 그저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고있는 인생. 우리네 인생도 민들레와 다를바 없다. 허리 구부리고 자세히 볼 것인가, 아니면 스치듯 건성으로 볼것인가, 인생 역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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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아픈 사람이 하나둘 생긴다. 소소한 병, 심각한 병. 병의 경중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사는 방식도 달라진다. 누구랄것없이 중병이들면 하루아침에 생활 패턴이 달라진다. 오로지 어떻게 병을 치료할것인가만이 생의 목표가 되고 그 어떤것도 거들떠볼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일상의 여유는 건강할때 외에는 누릴수가 없다. 여유! 지극히 사소한 단어지만 이말처럼 소중한게 또 어데있을까. 그러므로 건강할때, 평소에 가능한한 여유를 만끽하며 누리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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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어영부영 게으름피다간 어떤것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 아예 시도조차 할 수없는게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것, 뒤로 미룰게 아니라 당장 시도해야한다. 여하튼 죽을때 후회없도록, 그렇다고 시간을 아무렇게 사용할 수는 없다. 어떻게해야 소중하게, 값지게 사용할것인지 요모저모 따져보고 궁리해야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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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발적인 독서방시향을 좀 좁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령 세계문학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냐는거다. 문학 작품만으로도 철학, 영화 역사, 회화, 음악 등등 전방위적인 사유의 확산이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철학과 문화비평은 기본 소양 부족으로 한계가 있다. 그나마 가능한게 소설인데, 관심사의 분산으로 집중적인 독서가 안 되는거다. 물론 독서의 가치를 즐거움에만 둔다면 마치 산책하듯 온갖것을 맛보고 스쳐가는정도로 부족할것 없지만 문제는 심도있는 사유, 밀도있는 사유가 불가능해서 늘 불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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