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표를 찾지 못해 꼼짝달싹 못할 때에는, 그것이 나중에 어떤 의미 있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초조해지겠지요. 하지만 나중에 되돌아보면 반드시 무언가 얻은 것이 있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쓸모없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 110페이지)

 

이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나. 나중에 되돌아보면?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난 후에, 많은 것이 떠나간 후에, 사라진 후에야 알 수 있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그럼 그렇게 지나간 시간과 많은 것은 어떻게 되찾아야 하는 건지 답이 없다. 아니, 그렇게 들렸다. 막연하게 하는 말은 내 입에서 맴도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인문학자까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어 암담했다. 너무 느긋하게, 아무런 불행도 겪어보지 않은 채로, 그냥 다 잘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좀 삐딱해졌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느낌도 잠깐이었다. 뭔가 위로와 토닥임을 건네는 듯한 그의 말에, 근거 없는 안도감까지 밀려오는 것처럼 잠시 멍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혹시나 차근차근 말하는 투가 지루한 설득처럼 들리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차분히 들을 수 있어서 진중하게 들리는 그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흔하디흔한 단어처럼 들리는 ‘마음’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어떤 힘을 얘기하면서 세상 살아가는 모습과 접목하려 하는지 기대됐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토대로 저자의 마음 이야기는 시작한다. ‘왜?’ 왜 굳이 그 두 책으로 마음의 힘을 꺼내려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강상중의 책을 끝까지 읽은 게 없어서 아쉬운 마음에 펼쳐 들고 싶었던 이유가 크다. 두 책을 이미 읽은 독자라면 저자의 이 책으로 같이 얘기 나누는 듯한 느낌을 받을 듯하다. (아마 독서토론 하는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마음』이나 『마의 산』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저자의 이야기를 소화하거나 공감하기에 무리가 되진 않는다. (책의 뒷부분에 두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가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다) 『마음』의 주인공 ‘나’(선생을 지칭하는 ‘나’와 선생의 유서를 받은 ‘나’)의 생각과 『마의 산』에서는 요양소에서 7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 주인공 한스의 여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야기의 토대로 삼는다. 답 없는 고민과 방황으로 세월을 보낸 것처럼 보이는 두 주인공의 삶을 비춘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혹은 모양에 관한 언급은, 잠깐 이렇게 돌아가도 괜찮다는 말을 대신하는 것으로 들린다. 저자 자신이 재일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받은 상처와 고민이, 성장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러서 이런 삶의 자세를 만든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어쨌거나 지금 그의 모습은 이런 말을 해도 좋을 것처럼 안정되어 보이니, 괜한 믿음에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다. 과거의 그러한 시간이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삶의 연속성으로 해석된다. 그 의미를 담아 이야기를 계승한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마음이란 것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 건지에 대한 나름의 자기 이해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힘 20페이지)

 

사람은 생물이기 때문에 죽어 버리면 당연히 그걸로 끝입니다. 하지만 그 끝나 버린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받은 누군가가 있어서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 주고, 그걸 떠맡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일이 계속된다면, 죽은 사람의 인생이 그냥 끝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영원이 되는 것이지요. 이야기가 계승됨으로써 그저 사라질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삶에, 다시 한 번 생명의 등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 166페이지)

 

『마음』과 『마의 산』 두 작품 모두 제1차 세계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저자는 100년 전의 두 청년이 마주한 현실과 지금 우리가 보는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유예(모라토리엄)의 시간을 인정하고 보듬게 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가 걸어온 인생과 그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소설 속에서 ‘나’와 한스는 그 후에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갔는지 말하진 않는다. 그래서 저자의 생각이 덧붙여진다.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하듯 풀어가는 소설 형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드러낸다. 과거의 그 시간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항로가 불가능했을 거란 것. 소설 속 청년들이 평생 붙잡아 묻고 있던 질문과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의 길이 그들의 마음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저자의 말을 전한다.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방황하던 자신의 청년 시절에 버팀목이 되어준 두 소설과 함께 이야기 전달자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야기의 계승이야말로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우리 삶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거라고. 세대를 뛰어넘어 삶의 바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입버릇처럼 살기 어렵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불안은 친숙하고, 희망은 멀어진 단어이며, 대책 없는 문제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남들과 비슷하게라도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좌절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손 내밀면 누군가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관계의 어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보다 돈이 우선시 되는 현실이 앞을 캄캄하게 만들기 일쑤다. 그런 세상에서 남들보다 다르게, 느리게 간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저자는 그 부분에 대해 충분히 걸어도 좋을 시간이라 말한다. 마음은 시대와 함께 있으며 마음 안에 자리한 시대의 질병과 고민을 치유하면서 가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때로는 삶을 리셋할 수도 있고, 지금 가진 것을 버리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는 확신을 할 필요도 있음을 시사한다. 복수의 선택지가 얼마든지 있으니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그저 무의미한 달리기를 계속할 이유가 없다는 것. 지금 그렇게 달리고 있는 것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의미 없는 개념에 끌려다니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할 때다.

 

그리하여 저자는 모라토리엄을 권한다. 두 소설 속 ‘나’와 한스가 머물렀던 공간과 시간. 한스가 아무 의무감 없이 몸과 마음을 뉘였던 요양소 같은 곳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의 7년이 무의미하게 흘러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가 사람과 세상을 배울 수 있었던 최적의 시간과 장소가 아니었나 싶은... 너무 한가한 소리처럼,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때로는 충전의, 성장의 시간으로 자리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도 필요함을, 가져도 좋음을 말한다. 남들에게 떠밀리듯 조급하게 가는 길이나 다른 이의 말에 휩쓸리는 시간들은 자칫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저자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자신만의 가치관을 갖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시선에, 남들의 말에 휩쓸려 살아가는 인생으로 머물지 모른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정작 나를 나로 살아가게 하는 건, 나 자신의 마음이 발휘하는 힘이 아닐 텐가. 그러니 나 자신을 위한 유예가 때로는 필요한 것임을 상기하게 한다.

 

그날 이후로 우리들은 어디를 어떻게 지나 지금 어디까지 걸어온 걸까. 나는 또 버려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또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쓸려와 버린 것일까.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음의 힘 133페이지)

 

두 소설과 이 책 속의 또 다른 소설로 인생길에서 저절로 보일 수 있는, 메마른 우리 마음의 치유를 위한 힘을 끌어낸다. 저자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과 이어짐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 이야기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다양한 의견을 새겨 넣으면서도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을 권한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고, 이어가고, 그리고 이 이야기를 훗날의 언젠가, 누군가 읽고 계속 이어받아 가길 바란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내 안에서 머물고 우러나고 힘을 발휘하는 마음뿐이라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 마음을 나누며 함께 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저자와 같은 목소리가 계속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눈으로 보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과 용기를 다독이기에 충분한 멘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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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6-1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고 <담론>을 읽게 되었는데 모라토리엄 시간을 깊게 보내신 우리시대 최고의 스승을 만난 느낌이었어요.

구단씨 2015-06-18 23:08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 <담론> 펼쳐보지 못했어요. 곧 저에게도 그 책을 접할 기회가 왔으면 좋겠네요.
보물선님의 말씀으로 더 만나고 싶은 책이 되었어요. ^^
감사합니다.
 

 

 

나는 정리를 잘한다, 고 생각했다. 여기서 ‘잘’의 의미는 눈앞에서 없애버린다는 뜻이다. 청소하는 걸 워낙 싫어해서 그런지 눈앞에 뭐 있는 꼴을 못 본다. 내가 정리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버리거나 쌓아두거나. 쌓아놓는 것도 위태로울 수 있으니(특히 책), 적당한 높이로 쌓아두다가, 한 번씩 꺼내 확인하고 버리거나 하는 정도. 청소도 너무 싫으니 최소한으로 하는데, 그것도 청소기 돌리기 귀찮아 아주 간략한 방법으로, 몸을 최소한으로 움직인다. 알라딘에서 책 구매하면 따라오는 스티커형 영수증을 떼어서 먼지 찍찍이로 쓴다. 이건 집에 넘쳐난다. 함부로 막 쓴다. 찍찍 소리 내면서 먼지나 머리카락을 다 떼어내고, 천 원에 100장짜리 물티슈를 사서 막 뽑아서 닦는다. 물론 여기서 정리를 안 하니 눈에 보이는 곳만 닦는다는 게 함정이다. 제대로 된 청소가 안 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한번 뒤집어엎기 전에는 제대로 된 청소라는 게 불가능한 나이므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괜찮아. 이 정도면 숨 쉬고 사는 데 지장 없으니까.

 

어질러 놓는 게 싫다고 말하면 혹자는 내가 엄청나게 깔끔하고 항상 주변을 깨끗하게 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던데(주변에서 그렇게 알고 있더라), 절대 그렇지 않다. 오백 권도 안 되는 책이 몇 년 동안 정리가 안 되어 책 있는 방에는 잘 안 들어간다. 가끔 필요한 책 꺼내러, 새로 사들인 책 던져놓으러, 뭔가 꽂히면 다 팔아버리려고 들어가는 게 전부다. 그 정도면 왜 청소하거나 정리하지 않느냐고 엄마가 한소리 할 만한데, 적어도 책 있는 방에 한해서는 그리 뭐라 하지 않는다. 꾸준히 책을 사는데도 늘 책의 양은 그대로라 잔소리할 명분이 없어서인 듯하다(이건 내 생각). 분명 매일같이 택배 기사님이 책 던져주고 가시는데, 책이 새끼 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이건 지난번에도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한번 읽고 다시 안 읽는 책은 팔거나 지인에게 나눔 하거나 기증하거나 하니까. 그리고 이 이상으로 책을 늘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을 지키려고 하다 보니, 얼추 지켜지는 것 같기도 하고. 늘 게으른 습관처럼 많이 읽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요즘엔 읽고 싶어졌다고 막 책 사기도 좀 그렇고... 암튼, 책 정리에 관해서도 청소 안 하는 나의 습관이 적용되니까, 아주 조심해야 함.

 

그에 반해 나는 엄마가 정리 안 하는 걸 가끔 뭐라고 하는데, 그건 엄마가 정리 안 한 게 눈에 그대로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안 쓰는 그릇은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두든지 버리든지 하면 되는데, 언젠가 쓸지도 모른다면서 굳이 버리지 않는다는 것. 부피가 큰 냄비 같은 경우 더 눈에 띄는데, 내 살림 아니니까 함부로 버리지도 못하겠고... 아예 주방에 안 들어가는 게 상책. 그러면 또 늙은 엄마 밥 시켜 먹는다고 또 한 소리. 아, 이걸 우째...

 

특히 엄마의 옷 얘기는 하다 보면 끝이 없는데, 매일 입을 옷이 없다면서(이건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말 아닌감? 옷을 사도 입을 옷이 없어. ㅎㅎ), 입을 거 하나 사야겠다면서, 서랍에 옷이 한 가득이다. 해가 바뀌었으니, 계절이 바뀌었으니 옷 하나 산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을 터이니, 뭐가 어떻겠느냐마는, 문제는 서랍의 옷을 버리지 않는다는 거다. ‘이건 놔둬, 입을 거야.’ 하면서 버리지 않은 옷이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나는, 새로 옷을 사는 양만큼 버리라고 했다. 어차피 좁은 집이기도 하지만, 한 번 안 입은 옷은 곧! 입을 일이 없다는 거다. 엄마한테 항상 부르짖는 게, 작년에 안 입고 올해 안 입은 옷은 내년에도 안 입는다는 것. 그러니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 버리라는 것!!!! 입지도 않은 옷에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아서 입을 거라고 끌어안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잔소리 끝판왕을 흉내 내는 나지만, 그래도 옷 주인이 안 버리는 것을 어쩌랴. 맘대로 하시라면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

 

 

주말 동안, 지난겨울부터 정리하려던 것을 이제야 마음먹고 정리하게 되었다. 지난주에 아름다운 가게 기증 접수 신청해놓고, 곧 수거하기 오신다기에 미리 다 정리해놓으려고. 사실 내 성격대로 했으면 다 끌어내 놓고 버리면 끝인 것을, 엄마는 또 그 물건들을 꺼내놓고 한참을 망설이신다. 이걸 써? 말어? 버려? 말어? 누구 줄 사람 없나? 이건 필요할 것 같은데? 이건 다시 입을 것 같은데? 아, 고민은 언제 끝나나... 엄마가 망설이는 사이 나는 다 끌어다가 내놓았다. 조카가 타던 킥보드, 롤러블레이드, 안 듣는 음반, 옷, 신발, 가방 등등. 특히 이번에 물건 꺼내다가 놀란 건, 아니 우리 집에 한복이 열 벌도 넘게 있더라. 그것도 엄마 한복은 비싼 것만 남아 있더라고. 그 와중에 엄마는 이 한복 비싸게 했는데, 언제 입을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도로 원래의 박스에 넣으려고 하기에 얼른 꺼내서 내보낼 박스에 넣었다. “엄마, 요즘엔 이것보다 예쁜 한복 더 많아. 앞으로 한복 입을 일이 몇 번이나 더 있다고? 그리고 엄마 살쪄서 이거 맞지도 않잖아?!” 와아, 나의 마지막 말에서 엄마의 입이 닫힌다. 정말 모든 이유를 들어서도 남겨둘 수 있겠지만, 엄마는 몇 년 사이에 살이 쪄서 예전 한복이 안 맞는다. 그 옷에 맞추기 위한 만큼 다시 살이 빠지지도 않을 것 같다. 그걸 본인도 인정하는 순간 그 한복들은, 예전 옷들은 기증할 박스에 풍덩 담겼다. 아이고, 개운해라.

 

특히 어디서 숨은 그릇이며 냄비들이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지,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더라. 쓰던 게 아니고 새것들. 커피잔 세트 여러 개, 그릇 세트 여러 개, 냄비 세트 여러 개... 나도 처음 보던 것들이 구석구석에서 막 쏟아져 나왔다. 엄마한테 이거 다 언제 샀던 거냐고 물었더니, 언제인지는 몰라도 본인이 산 게 맞댄다. 세상에... 그동안 짝짝이 그릇 사용할 게 아니라 이거 다 꺼내어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지금은 쓰지도 않을 그릇들이기에 그것도 미련 없이 나눔 박스에 넣었다. 아름다운 가게 직원 둘이 수거하러 왔는데, 우리가 꺼내놓은 물건들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더라. 가지고 온 차량이 1톤 탑차였는데, 그 안에 3분의 2 정도 채워졌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원래 우리 다음으로 수거하러 갈 곳이 있었는데, 센터에 들어가서 이 물건들 내려놓고 다시 나와야겠다고, 정말 엄청나다고 하시더라고. 그러면서 기증 물품은 자기네가 정리하고 수량 및 금액 확인해서 연락 주겠다고 하더라. 원래 수거할 때 박스 기준으로 몇 개라고 서로 확인하고 가져가는데, 우리한테 수거한 물품의 양이 워낙 많아서 박스로 정리가 안 되기에 그렇다고 말하더라고. 내가 봐도 많긴 많더라. 그런데 며칠 지나면 또 정리하고 버릴 게 나올 것 같은 이 불길한 예감은 뭐란 말이야...

 

엄마의 많은 것들이 빠져나간 자리가 조금(아주 조금) 휑하다. 속이 다 후련하다면서 옆에서 자꾸 건드렸더니 엄마가 팩~! 소리를 지른다. 우리에게 쓸모없는 물건이 누군가에게 재활용된다는 건 좋은 일인데, 엄마의 물건이 나간 자리가 마음까지 휑하게 하나보다. 괜한 심통에 나한테 뭐라 그러네. 그래도 나는 책 때문에 엄마한테 욕먹지는 않았지롱~(미리 땡스기브에 기증 신청해서 끝내버렸다는.)

 

 

문득, 이번에 며칠 동안 정리하면서 든 생각은, 이렇게 한꺼번에 버리고 말고 할 게 아니라, 평소에 정리만 잘해도 오늘 같은 중노동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거다. 한꺼번에 정리하고 치우고 버리고 하려니까 몸이 고생이다. (이번에 몽땅 버린 물건 중에 내 것은 거의 없다는 게 쫌 억울하다. 엄마 거니까 엄마 혼자 다 해야 하는 거 아녀?! 엄마가 등짝을 후려치는 소리가 막 들리긴 하는데...) 허리가 아파서 파스까지 붙였는데, 정말이지 정리 잘하는 달인이 되고 싶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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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fair7 2021-03-23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릇 세트를 왜 버린 거에요 ? 쓰던 그릇을 처분하고 ㅡ 새 그릇 세트를 쓰면 되는데
 

 

 

 

늘 그렇듯 먹는 행위나 음식 자체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나지만, 그 음식이 면이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여전히 빠르고 쉽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 같은 걸 선호하지만, 그 패스트푸드에 면을 포함하고 싶은 거다. 간단하게 사 먹거나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빠른 시간에 해결할 수 있고. ^^ 물론 간단하게 만든다는 것은 포장된 걸 단순히 끓여 먹는 수준을 말하는 거고, 먹는 속도도 남들보다 느리지 않다. 맛은 보장 못 한다. 제대로 만들어서 파는 전문가의 손길만 하랴. 그저 흉내만 내는 맛, 그렇게라도 한 끼 해결하고 비슷한 맛을 내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도 감지덕지. 반드시 끼니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면 음식은 더욱 나를 반긴다. 특히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자랐는데도 엄마와 난 식성이 다르다. 위에서 말했지만 나는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는 정도로만 먹는 걸 선호하는데, 엄마는 밥에 찌개 종류를 좋아한다. 외식할 때도 무슨 탕이나 구이 같은 것을 먹으러 가자고 하고, 나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데서 주섬주섬 몇 번 먹고 마는 걸 좋아하니 마음을 통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엄마와 나의 마음이 통할 때가 있는데, 바로 국수를 좋아한다는 거다. 둘 다 위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면 종류는 피해야 한다고 항상 지적받는데, 그런데도 자꾸자꾸 손이 가는 건 새우 과자가 아니라 국수다. 그러니 이런 책이 반가울 수밖에.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표지 때문에 책의 종이에 코를 킁킁대며 국물 냄새를 흡입했다.

 

 

 

『어이없게도 국수』 제목부터 눈에 저절로 들어온다. ^^ 저자의 나이 마흔에 닥쳐온 변화가 감당이 안 될 때 글쓰기를 떠올렸단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글쓰기. 주제를 무엇으로 할지 정한다면 15년여의 커리어의 그녀에게 글쓰기가 처음부터 벽으로 다가오진 않았을 듯하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그녀는 무엇을 쓰려고 했을까. 생각도 하고 고민도 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 자신의 일상, 공부, 책, 아이들. 많은 것을 떠올렸으나 그녀의 40년 인생에서 꾸준히 옆에 있었던 것은 딱 하나였단다. 바로 국수. 어이없게도, 국수였단다. (일단 한번 웃어보고) 하고 많은 것 중에 국수를 떠올린 그녀가, 나도 잠깐 어이없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꾸준히 자신의 곁에 있었다는 게 국수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고 기쁜 일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 인생 통틀어 줄곧 내 곁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게, 나는 하나도 없더라. 그러니 저자의 국수 찬양과 견문이 경건해 보일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 하나쯤 있을 거라 쉽게 생각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거다. '기껏해야 국수'가 아니라 '대단한 국수'였던 거다. 저자의 추억을 채우고, 성장에 함께 하며, 위로가 되었던 건 다름 아닌 국수였다.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지켜주었다던 국수 이야기다.

 

콩나물, 그날 들어온 생선, 기계로 뽑은 납작한 칼국수 면을 고춧가루 듬뿍 풀어 끓여낸 모리국수는 원래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을 위해 만들어주던 음식이었다. 국물이 시뻘게지도록 투하한 고춧가루도 그렇지만 마늘이 듬뿍 들어간 데다 생선과 국수의 전분으로 걸쭉해진 국물이 칼칼하고 든든했다. (20페이지)

 

유전적으로 뼛속까지 면식수행자인 저자의 입맛이다. 하루 한 끼는 국수를 먹으며 살아온 저자에게 국수는 남다르다. 저자의 삶에 국수가 강하게 각인되는 이유다. 특히 사람과 함께 한 국수의 기억은 대단했다. 단순히 뱃속을 채우며 먹는 행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국수를 먹으면서 치유되는 마음의 상태를 경험했던 거다. 그러니 이런 국수 찬양이 가능해진 거 아닐까. ^^ 한 사람의 일생을 담아낸 기억으로 함께 하는 국수. 소소한 일상부터 크고 작은 일 옆에 항상 국수가 있었다. 삶의 형태와 배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우리네 세상살이가 그대로 담겨 국수의 의미를 새기기도 한다.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을 위해 만들어주었다는 얼큰한 모리국수는 삶의 고된 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매운 맛이 되기도 했다. 처음 국수를 만나게 해준 고모와의 추억, 야근에 몸이 늘어지지 않게 힘을 주었던 두부국수와 비빔국수, 여럿이 함께 먹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닭한마리 국수, 소맥과 삼겹살의 강림 후에 열기를 식혀주는 열무냉국수, 손때 묻은 덩어리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는 수제비, 진한 팥국물에 담가 조금 퍼졌을 때 먹으면 맛있는 팥칼국수, 참새방앗간 같은 고속도로의 가락국수도 빼놓을 수 없는 국수 가족이다.

 

가락국수 하니까 생각나는데, 예전에 만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으로 찾아와 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집 근처에 국숫집이 없는 것 같아 근처의 포장마차를 머릿속에서 찾고 있는데,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손지갑 하나 들고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가서 국수를 먹자는 건가 싶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일단 탔으니 가보자 했는데, 도착한 곳은 내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가락국수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휴게소만한 맛이 없다나 뭐라나.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따라 들어가 먹었는데, 역시, 그랬다. 맛이 있네 없네 여러 말을 해도 가락국수 맛은 고속도로 휴게소를 따라올 수가 없었던 거다. 인정!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저자 못지않은 국수의 추억이 있었네그려.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중국집은 화교들이 주인이었고, 주인이 당연히 주방을 꿰차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에서 혹독한 화교 탄압 정책을 펴면서 재산을 몰수당하다시피 한 수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중국집 주방에 한국인들이 들어서게 되었단다. 이때까지만 해도 짬뽕은 매운 음식이 아니었다는 것이 당시 중국집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분들과 옛 맛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의 전언이다. 화교들의 대거 이탈로 '어쩔 수 없이' 주방에 한국인들이 입성하면서 매운 걸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네 식성에 맞게 고출가루가 듬뿍 든 얼큰한 빨간 짬뽕으로 진화했다는 얘기다. 이는 1970 들어 급성장한 국내 외식산업의 두드러진 특성인 '매운맛의 보편화'라는 트렌드와도 일치한다. (100~101페이지)

 

국수에 누군가의 추억만 담긴 게 아니다. 국수는 한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도 품고 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즐기는 짬뽕은 처음엔 빨간 국물도 아니고 매운 맛도 아니었다는 것. 오랜 시간 진주를 벗어나지 않고 그 맛을 이어온 진주냉면은 이제야 경남 지역 일부에서라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올챙이국수, 막국수, 옹심이 같은 가난한 자들의 식량이었다던 메밀은 배고픔과 동의어로 들린다. 한국의 거의 최초 패스트푸드였다던 구포국수의 명맥이 궁금하나 그 흔적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물자의 부족과 빈곤은 밀면과 비빔당면을 탄생시켰다. 그러고 보면 국수는 상당히 만만한 음식이었나 보다. 배고픔의 허덕일 때 금방 찾아내고 응용하여 허기를 달래주곤 했던 것이 국수의 다양한 버전과 발전을 이루어낸 건 아니었을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들려준 29개의 에피소드가 대부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저자 자신의 기억이 보태어진 국수의 추억이 기록되는 거였다.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 하나쯤 심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그런 이유다. 겨우 국수 한 가닥일 수 있지만 그 한 가닥이 모여 일생의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 나와 삶을 견디게 해주곤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물론 그 대상이 국수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저자의 이야기가 큰 거부감 없이, 낯설지도 않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마음 한 자락 열어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살아보니 그런 힘을 발휘하는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때로 위로가 되고, 흔들릴 때마다 붙잡아주며 구제하고, 한 템포 쉬어가게 해줄 수 있음을...

 

'나에게도 그런 음식이 있나?' 곰곰 생각하다가 떠오른 건 짬뽕이다. 미친 듯이 허기짐이 찾아올 때, 가슴 속이 답답할 때 매콤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랄 때. 그럴 때면 집 근처의 작은 중국집까지 직접 가서 먹는다. 전화 한통이면 금방 배달 오는데 뭐 하러 굳이 가서 먹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짬뽕만큼은 만들어져 배달 오는 그 시간도 별로다. 그 몇 분 사이에 불어버린 면이 싫어질 것 같아서. 주로 배달 위주라 매장에는 겨우 테이블이 서너 개뿐인 그곳까지 가서 먹는 게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부끄러움이고 뭐고 없다. 일단 먹고 보는 거다. 다 먹고 난 후에 찾아올 개운함을 기대하면서 그 매운 국물을 들이켠다. 언제부터 짬뽕을 그렇게 먹었는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데, 그 시작 역시 엉뚱하다. 이십대 초반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예쁘게, 조금씩 먹어도 모자랄 판에 짬뽕 한 그릇을 다 비워낸 적이 있다. 그릇째 들고 짬뽕 국물을 들이켰다. 앞에 앉은 그가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야, 짬뽕을 너처럼 맛있게, 한 그릇 다 먹는 여자는 첨 봤다." 그러면서 쌍엄지까지 추켜올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민망한 기억인데, 그때 난 뭔가가 정말 답답했던 것 같다. 그 매스꺼운 속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못 살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떨리고 설레는데, 짬뽕을 그리 먹을 수는 없었을 거다. 분명! (아마도... ㅠㅠ)

 

비록 내가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먹는 일이 단순히 먹는 행위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을 풀어가는 과정임을 알고 있다. 음식이기 이전에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소통을 이루어내는 하나의 매개가 되는 거다. 같이 먹는 음식, 먹으며 얘기하는 자리, 포만감이 불러오는 마음의 여유, 날카롭게 곤두서있던 시선을 누그러트리기도 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으로 쌓여가는 정 마일리지까지. 음식이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세상 경험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기도 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창이 되기도 한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의미 있는 행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은 먹는다는 것 한 가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저자가 자신의 인생에 동반한 국수를 통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국수가 지나온 삶을 추억하게 하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게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그런 웃음을 다 날아가고 얼굴에 추억의 웃음꽃이 피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힘이 되는 그 어떤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 짓게 되는 것, 행복해지게 하는 것, 삶을 기운 나게 하는 것. 그게 저자에게는 국수였을 텐데, 이 책을 읽을 당신에게는 무엇이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뜨거운 국물에 담긴 면발을 땡기고 싶다. 호로록~ 호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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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통해 중고책을 구매할 때 책 상태를 가장 먼저 확인하게 되는데, 보통 ‘최상’으로 기재된 책을 사곤 했다. 이왕이면 깨끗한 책으로 읽고 싶기도 하고, 혹시 나도 한번 읽고 되팔게 될 때 좋은 상태 그대로 팔고 싶기에 그렇기도 하다. 아니면, 꼭 필요한 책인데 책 상태가 별로인 것만 있다면 그것도 그냥 구매하기도 하는데, 언젠가는 그 책의 최상인 상태를 다시 구하곤 한다. ^^

 

며칠 전, 알라딘에서 새 책을 구매하면서 직배송으로 올라온 중고도서 한 권을 장바구니에 같이 담았다. 절판본이기도 하고 정가 이상으로 거래되는 책인데 내 눈에 띄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글이라 한 권 더 사서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해줘야겠다 싶은 마음에 냉큼 담았는데, 책 상태가 ‘상’으로 기재되어 있다. 제품 상세페이지 열어봐도 어떤 부분에서 그 책이 상급으로 분류되는지 따로 설명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었다. 어디가 찢어졌나? 너무 낡았나? 그래도 상급 정도면 지저분한 상태는 아닐 것이니 그냥 결제했다. 막상 도착한 책을 살펴보니 새 책과 같았다. 너무 깨끗했다. 담당자가 실수로, 혹은 지나치게 완벽한 사람이라 ‘이 정도의 책은 상급으로 할 거야.’라고 생각했을까? 뭐, 암튼, 구매자의 입장에서 좋았다. 이왕 받은 김에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싶어서 펼쳤는데, 이 책이 왜 상급으로 분류되었는지 알겠더라. 이 책이 양장본이었는데, 양장본 뒤표지 안쪽에 처음 이 책을 구매한 사람의 메모가 있었다.

 

처음에 책 보자마자 실장님 생각이 났는데 선물로 드릴게요! 재미있게 읽으세용. ^^*

2010, 8, 3 은영이~

 

 

2010년 8월 3일에, (아마도 여직원일 터인) 은영이가, (같은(?) 직장의 상사인) 실장님에게, (뭔가 어울릴 듯한) 이 책을 보자마자 생각나서, (마음을 담아) 선물로 안겼던 것. ^^

 

누군가의 지극히 사적인 메모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더 어떤 마음을 담아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호기심이 쏠렸다. 이 책의 어떤 면을 보고 실장님에게 잘 맞을 책이라는 판단을 했는지, 혹시 은영이는 실장님에게 실장님 이상의 감정이 있었는지, 실장님은 이 책을 선물 받고 다 읽긴 했을는지, 지금 은영과 실장님은 여전히 어떤 관계로든 교류하며 지내는 사이인지... 무엇보다 가장 궁금했던 건 이거다. 이 책은 어떻게 5년여의 세월이 흘러 나에게까지 왔을까, 하는 것. 실장님이 이 책을 다 읽고 안 읽고의 여부와 상관없이, 어떻게 이 책이 실장님의 손에서 흘러나왔나 하는 물음표가 생겼다. 실장님은 이 책을 헌책방에 팔았는지, 너도 한번 읽어봐라 하며 실장님의 지인에게 주었던 건지,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는지, 그 손에서 떠나온 책은 5년 동안 어떤 주인을 만나고 다녔을지... 별것 아닌데, 몰라도 그만인데, 중고책 한두 번 사는 것도 아닌데, 괜히 궁금해졌다.

 

 

사실 나도 아주 오래 전에는 구입한 책 첫 장에 구입한 날짜나 어떤 마음으로 구입했는지 하는 마음을 적기도 했다. 책 하단에는 내 책도장을 찍기도 했고, 맘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밑줄을 긋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 위의 사연처럼 책의 첫 장에 마음을 담은 메모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냥 있는 그대로 읽거나 보관하기 시작했다. 책도장 절대 안 찍고, 메모나 밑줄도 안 한다. 아마도 소장하지 않는 책을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하면서 그랬던 듯하다. 누군가가 받을 책이 깨끗하고 새 책 같았으면 하는 마음. 별것 아닌 마음인데, 내가 받는다고 생각하니 그랬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 같은 것이다. 누군가는 나와 생각이 많이 다를 수도 있지만, 뭐, 나는 그렇다고.

 

 

 

이런 사연 있는 책을 받은 경우가 2년 전쯤에도 한번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최근에 출간된 책에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아주 오래전에 출간된 책을 구입할 때 만날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했다.

거의 20년 전쯤에 출간된, 지금은 절판된 책을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그냥 딱 한번만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서 굳이 찾아다녔다. 아주 얇은 문학도서였다. 오랫동안 단 한권의 중고도 보이지 않다가 발견한 반가움에 냉큼 결제했다. 책 상태도 나쁘지 않아서 만족했지만, 무엇보다 그 책의 전 주인이 적은 메모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이 책이 나에게 오기까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주인들을 만났을지 모르겠지만, 날짜를 보아하니 아마도 이 책의 처음 주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의 출간일이 1996년 9월 6일, 책 안에 써진 이의 흔적은 1996년 10월 27일. 이 정도면 처음 이 책을 새 책 상태로 구매한 이의 흔적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마음속에서는 공부를 하고자 하나 뭔지 모르는 힘이 날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지금도 도서관 자리를 옮긴 채 건성으로 종이 위에 눈동자를 남겨놓을 뿐이다. 멍한 머릿속은 어떠한 input도 거부한 채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그러나 실망이란 말만큼은 하지 말자.

너무도 익숙해버린 단어지만 정말 이젠 떨쳐낼 때다.

넌 네 나름대로 열심히 삶을 즐겼고 여러 환경의 변화로 새로운 방향 전환이 필요한 과도기일 뿐이다.

더 이상 내 삶을 타인의 시각에, 잣대에 맡기지 말자.

내 삶에 행동 주체, 판단 주체로서 내 자신을 세워야 한다.

1996. 10. 27. 일요일

도서관 2열에서 교수법 print를 기다리며... ”

 

이렇게 쓰여 있다.

 

글씨체로 성별을 구별해도 된다면, 글쓴이는 아마도 남학생일 것 같다. 남학생이라면 제법 글씨를 잘 쓰는 편인 것도 같다. 나에게 온 이 책이 문학 수업을 들을 때 참고할 만한 책이라는 애기를 들었는데, 이 책을 소장했던 사람이 아마도 문학을 전공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교수법 print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사범대쪽 학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그냥 이 수업이 맘에 들어서 수강한 학생일 수도 있겠고...

 

일요일의 도서관. 수업에 필요한 복사물을 기다리는 시간.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또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머릿속이 안타까움으로 가득했을 수도 있겠다. 눈으로는 글자를 쫓고 있으나 읽는 그대로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 또한 공감했다. 자꾸만 실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오직 자신을 위한 일이어야 하는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음에 답답하고 힘든 마음을 토로하는 공간으로, 이 책이 선택되었던 듯하다. 단 몇 줄의 글이 그(혹은 그녀일지도 모를)의 마음을 풀어놓는, 다시금 열정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줄 수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글을 바라보던 시간이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건너 나에게 왔던 이 책은, 다시 또 내 마음을 풀어놓는 공간이 될지도 모르겠지, 하면서. 누군가의 흔적으로 시작된 시간여행, 1996년에 학생이었을 이 책의 전 주인은 아마도 나랑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공감. 비슷한 고민으로 그 시간을 보냈을 동기 같은 마음. 일요일의 도서관 2열에서 수업자료, 혹은 과제물을 위한 자료를 기다리는 그 시간의 무료함이나 불안함일 수도 있겠지.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모를 누군가의 흔적 하나로, 타임슬립하여 십몇 년 전의 그 시간으로 잠깐, 돌아가고 싶어지게 했던 순간이다.

 

 

운명처럼 내 손에 들어온 헌책에서 지나간 것들의 흔적을 발견할 때면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커진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잊히기도 하고,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 일부러 저장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다시금 마주하는 시간이 온다. 설핏 웃다가,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 걸어놓았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떨림과 울림이 찾아오거나... 시간은 흐르고,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이별을 한다. 무언가를 향해 달리기도 하고, 잠시 멈추어 숨고르기를 하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면서 잊히는 것은 잃어버린 것으로 진행된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그럴 때, 이렇게 우연히 찾아드는 것들이 우리를 유실물 보관창고로 안내한다. 나리코처럼...(『잃어버린 것들의 나라』가쿠타 미츠요) 우리의 잃어버린 흔적을 찾아서. 아니면 누군가가 우연처럼 나의 흔적을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무엇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세상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진짜로 깨닫게 되는 것은 대개 나이가 한참 들어서이다. 나 역시 서른 중반이 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던 물건, 혹은 시간, 장소, 사람조차도 잃어버린다 해서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그것이 없어지고 난 빈 공간을 안고 살아간다.

(7페이지, 작가의 말)

 

 

 

5년 전 혹은 20여 년 전,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리에 앉아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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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eze 2015-03-2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메모가 있는 중고책을 팔다니요. 실장님은 선물해주신 은영씨를 잊었나 봅니다. ㅋ

구단씨 2015-03-20 18:24   좋아요 0 | URL
5년은 아마도, 그런 시간인가 봅니다. ㅋㅋ
그냥, 은영이의 마음이 궁금하더라고요. ^^
 

 

한 페이지에 그림 하나, 한 페이지에 문장 하나. 미스 반 하우트의 <해피 시리즈>는 아주 단순하게 표현한 듯하지만, 물고기의 표정 하나하나 세세하게 담고 있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책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 매력적인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요술까지 부린다. 지금껏 동물을 그린 여러 그림을 봤어도 이렇게 표현한 그림은 처음 봤다. 물론 내가 그림책을 많이 접하지 않아서 모르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색감과 표현이 낯설면서 새롭고 자꾸 눈에 들어온다. 어른인 내 눈에 이렇다면 아이들의 눈도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내가 아동도서나 그림책을 보고 재미있다고 느껴지면 아이들도 재미있다고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주의.) 그래서인지 곧 4살이 되는 조카가 한참을 보면서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나는 조카의 표정을 보곤 했다. 웃으면서도 심오하게, 가끔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주 웃으면서... 나는 옆에서 조카가 그림 한 장 넘길 때마다 옆에 있는 단어를 읽어줬다. 글을 모르는 아이도 그림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는다는 것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조카의 표정이 그림 속 물고기, 아이와 꼬마 괴물, 새의 표정과 너무 닮아 있었다.

 

 

<행복한 물고기>

시리즈의 첫 번째인 <행복한 물고기>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실제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감정이기에 어떻게 보이는지 더 궁금했다. 기쁘고 즐거운, 떨리고 놀라운, 궁금하고 화나는, 자랑스럽고 샘나는 감정을 물고기를 그린 색과 표정으로 말한다. 거울을 보지 않는 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얼굴로 나타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거울을 본다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표현된 물고기의 표정을 보면서 사람의 감정에 따른 표정을 그대로 보게 된다. 화나면 찡그리고 미운 주름이 생기는 모습, 놀라워서 눈을 동그랗고 크게 뜨는 것, 기쁘고 흐뭇해서 함박웃음 짓는 입 모양,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의 불안함을 그대로 담았다.

물고기로 표현된 감정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는데, 아이들의 순수한 표정을 보는 듯했다. 어른이 되어 때로는 감정을 표정에서 숨기고 세상을 대해야 할 때를 경험하곤 하는데, 아직 감정을 숨기거나 표정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만 같다. 특히 눈빛과 입 모양을 달리하면서 말을 대신하는 표정은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눈빛과 입 모양으로 보이는 표정이 얼굴 전체에 담기지 않나?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는지, 입모양에 따라 어떤 웃음인지도 보이는 정도이니 얼마나 솔직한 언어인지... 시각적 효과를 그대로 담고 있는 <행복한 물고기>의 이야기에 눈으로 즐긴다는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행복한 꼬마 괴물>

어느 시기가 지나면 아이들은 매일 보는 가족이 아니라 타인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을 배운다. 그 시작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동네 놀이터나 기타 장소에서 또래의 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 혼자, 항상 내가 먼저였던 것이 이젠 나만의 것이 아니고 '함께' 하는 게 뭔지 배워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친구를 만들고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어른인 우리도 이 관계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 서로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화해하고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행복한 꼬마 괴물>이다.

아이와 꼬마 괴물의 만남. 같이 놀다가 지루하기도 하고, 그러다 약 올리고 다툰다. 속상한 마음에 울면서 "다신 너랑 안 놀아." 하며 팽 돌아서기도 한다. 그렇게 사이는 멀어지고 시간이 흐른다. 왜 싸웠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뉘우친다. 그러면서 기다린다. 친구가 다시 오기를... 머쓱한 마음이지만 화해도 하고 서로에 대한 믿음도 쌓아간다. 이젠 해피해피 스마일~! ^^

아이들 사이에서 우정을 만들어가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보니 참 단순해보이지만, 현실에서 그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 역시 만감이 교차하는 어느 순간을 만날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생각, 내가 뭘 잘못하고 잘했는지 반추하는 모습, 타인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 아닌 사람과 항상 잘 지낼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관계를 잘 유지해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과정을 담은 <행복한 꼬마 괴물> 이야기는 어른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느끼지 못할 것들을 그림과 감정 표현으로 들려준다. 책 속에서 아이 자신의 모습을 많이 볼 것 같다. 특정한 어느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그 나이에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고 갈등이다. 그렇게 배워가는 모습이 참 예쁠 것 같다. 우정의 풍경이 이렇게 그려지고,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 돈독해지는 것. 살아가는 모습이 비춰지는 이 순간에 행복을 느끼게 되는 아이들의 표정도 내 머릿속에 그려본다.

 

 

<행복한 엄마 새>

엄마가 되기를 꿈꾸고 바라는 일. 엄마 새를 통해 보여주는 건 우리네 엄마이자,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이다. 아이를 잉태하고 뱃속에 품어 보듬고 세상에 내보내는 일이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지만, 평범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 같다. 보살피고 다독이고 아껴 주면서 키우지만, 잘못된 부분에서는 호되게 나무란다. 사랑과 행복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지켜본다.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실패부터 생각하지 않게 많은 일에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잘 할 거야.' '잘 할 수 있어!' 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한없는 신뢰를 보낸다. <행복한 엄마 새>는 그런 마음을 그대로 담은 엄마 새와 아기 새의 시간을, 아기 새를 품고, 낳고, 키우고, 세상으로 향해 나가기까지 지켜보고 보살피는 엄마의 여정을 담았다. 그 여정에서 느낄 수 있는 놀람의 단어들과 표정을 하나의 단어, 문장으로 표현했다. “꿈꾸어요.” “바라고, 또 바라요.” “우아!” "즐겨요" "나무라요" "귀 기울여요" "용기를 주어요" "떠나보내요" 일련의 과정이 이 단어들로, 그대로 시간의 역사를 만든다. 아이를 보는 엄마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다.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엄마에게' 라고 써져있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책이 아닐까 추측한다. 어디 작가의 어머니뿐이랴. 세상 모든 어머니가 이 책에 담겨 있는 걸. 아이와 함께 보내는 순간들이 얼마나 애틋한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고맙고,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들. 몇 개의 단어로 빛나는 순간과 엄마의 사랑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아이가 자라서 누군가의 엄마와 아빠가 되면 똑같이 겪을 감정이 기대된다.

 

 

처음 이 책을 펼치지 전에는 물고기로 어떻게 사람의 감정을 표현할까 싶은 궁금증이 있었지만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하나, 등장하는 주인공의 표정 그대로 표현하는 게 너무 완벽해 보인다. '아, 이렇게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표를 머릿속에 띄웠다. 이 시리즈가 아마도 4세 전후의 아이들에게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글을 모르는 아이도 말을 시작하고 단어를 쓰며 눈에 보이는 사물이 뭘까 궁금해 할 수 있는 나이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넘쳐 '이건 뭐야?' 하는 말이 돌림노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오는 게 이때의 아이들 모습이다. (아이가 없어도 여러 명의 조카들이 이 나이를 통과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래도 좀 안다. ^^) 특히 보는 게 많아지고, 보이는 그대로 습득하기 쉬운 나이이다 보니 주변의 어른이 어떻게 행동하고 가르치는지 중요하게 영향 받을 시기다. 그대로 성립된 자아가 커가면서 어떻게 작용할지 생각하고 염려해야만 한다. 미스 반 하우트의 <해피 시리즈>는 우리가 살아가는 그런 일상적인 모습을,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키워야 하는지를 그림 하나와 단어 하나로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방법으로 그 마음을 설명하고 그린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그림이다. 평소 관심이 없던 것도 한번 눈에 들어오니 소장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그림이 원색적이면서도 화려해서 한 번씩 펼쳐보고 싶어진다. 이런 색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터치 하나, 색깔 하나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이미지가 뇌리에 남는다. 게다가 보통 흰 바탕의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는 보편성을 버렸다. 검은색을 바탕으로 깔아놓고 그림을 그렸다. 온통 검은색 바탕에 어둡고 무겁게 보일 수 있는데,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이 전체적으로 밝고 환하게 보이게 한다. 원색의 강렬한 대비가 멋스럽다. 표현 재료로 오일 파스텔을 재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일 파스텔은 다루기 쉽고 발색이 선명하며 속도감 있는 선묘에 적합하지만, 혼색이 어렵고 표현도 거칠어 정교한 표현을 하기에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작가는 오히려 오일 파스텔의 단점을 활용하여 그 표현 재료만이 가능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캐릭터가 분명해지고 다채로운 색채를 멋지게 조화시켰다. 특히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한글의 문자 구조를 연구하고 연습한 끝에, 네덜란드 문자로 그려진 원작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글자의 시각 이미지를 재현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처음의 의미를 그대로 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보인다.

 

기존에 만났던 그림책과의 차별성이 매력적이고, 이런 간단한 표현과 문장에 인간의 온갖 감정을 다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책을 접할 아이와 어른들에게 전하는 글과 의미가 따뜻하다는 것이다. 아이의 정서에 이 책이 줄 온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이 책을 따라 그리기를 해도 좋을 듯하다. 서투르지만 함께 그리고 표현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배워가는 여정을 부모와 아이가 함께한다는 게, 큰 의미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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