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먹는 행위나 음식 자체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나지만, 그 음식이 면이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여전히 빠르고 쉽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 같은 걸 선호하지만, 그 패스트푸드에 면을 포함하고 싶은 거다. 간단하게 사 먹거나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빠른 시간에 해결할 수 있고. ^^ 물론 간단하게 만든다는 것은 포장된 걸 단순히 끓여 먹는 수준을 말하는 거고, 먹는 속도도 남들보다 느리지 않다. 맛은 보장 못 한다. 제대로 만들어서 파는 전문가의 손길만 하랴. 그저 흉내만 내는 맛, 그렇게라도 한 끼 해결하고 비슷한 맛을 내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도 감지덕지. 반드시 끼니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면 음식은 더욱 나를 반긴다. 특히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자랐는데도 엄마와 난 식성이 다르다. 위에서 말했지만 나는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는 정도로만 먹는 걸 선호하는데, 엄마는 밥에 찌개 종류를 좋아한다. 외식할 때도 무슨 탕이나 구이 같은 것을 먹으러 가자고 하고, 나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데서 주섬주섬 몇 번 먹고 마는 걸 좋아하니 마음을 통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엄마와 나의 마음이 통할 때가 있는데, 바로 국수를 좋아한다는 거다. 둘 다 위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면 종류는 피해야 한다고 항상 지적받는데, 그런데도 자꾸자꾸 손이 가는 건 새우 과자가 아니라 국수다. 그러니 이런 책이 반가울 수밖에.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표지 때문에 책의 종이에 코를 킁킁대며 국물 냄새를 흡입했다.

 

 

 

『어이없게도 국수』 제목부터 눈에 저절로 들어온다. ^^ 저자의 나이 마흔에 닥쳐온 변화가 감당이 안 될 때 글쓰기를 떠올렸단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글쓰기. 주제를 무엇으로 할지 정한다면 15년여의 커리어의 그녀에게 글쓰기가 처음부터 벽으로 다가오진 않았을 듯하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그녀는 무엇을 쓰려고 했을까. 생각도 하고 고민도 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 자신의 일상, 공부, 책, 아이들. 많은 것을 떠올렸으나 그녀의 40년 인생에서 꾸준히 옆에 있었던 것은 딱 하나였단다. 바로 국수. 어이없게도, 국수였단다. (일단 한번 웃어보고) 하고 많은 것 중에 국수를 떠올린 그녀가, 나도 잠깐 어이없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꾸준히 자신의 곁에 있었다는 게 국수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고 기쁜 일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 인생 통틀어 줄곧 내 곁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게, 나는 하나도 없더라. 그러니 저자의 국수 찬양과 견문이 경건해 보일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 하나쯤 있을 거라 쉽게 생각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거다. '기껏해야 국수'가 아니라 '대단한 국수'였던 거다. 저자의 추억을 채우고, 성장에 함께 하며, 위로가 되었던 건 다름 아닌 국수였다.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지켜주었다던 국수 이야기다.

 

콩나물, 그날 들어온 생선, 기계로 뽑은 납작한 칼국수 면을 고춧가루 듬뿍 풀어 끓여낸 모리국수는 원래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을 위해 만들어주던 음식이었다. 국물이 시뻘게지도록 투하한 고춧가루도 그렇지만 마늘이 듬뿍 들어간 데다 생선과 국수의 전분으로 걸쭉해진 국물이 칼칼하고 든든했다. (20페이지)

 

유전적으로 뼛속까지 면식수행자인 저자의 입맛이다. 하루 한 끼는 국수를 먹으며 살아온 저자에게 국수는 남다르다. 저자의 삶에 국수가 강하게 각인되는 이유다. 특히 사람과 함께 한 국수의 기억은 대단했다. 단순히 뱃속을 채우며 먹는 행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국수를 먹으면서 치유되는 마음의 상태를 경험했던 거다. 그러니 이런 국수 찬양이 가능해진 거 아닐까. ^^ 한 사람의 일생을 담아낸 기억으로 함께 하는 국수. 소소한 일상부터 크고 작은 일 옆에 항상 국수가 있었다. 삶의 형태와 배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우리네 세상살이가 그대로 담겨 국수의 의미를 새기기도 한다.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을 위해 만들어주었다는 얼큰한 모리국수는 삶의 고된 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매운 맛이 되기도 했다. 처음 국수를 만나게 해준 고모와의 추억, 야근에 몸이 늘어지지 않게 힘을 주었던 두부국수와 비빔국수, 여럿이 함께 먹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닭한마리 국수, 소맥과 삼겹살의 강림 후에 열기를 식혀주는 열무냉국수, 손때 묻은 덩어리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는 수제비, 진한 팥국물에 담가 조금 퍼졌을 때 먹으면 맛있는 팥칼국수, 참새방앗간 같은 고속도로의 가락국수도 빼놓을 수 없는 국수 가족이다.

 

가락국수 하니까 생각나는데, 예전에 만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으로 찾아와 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집 근처에 국숫집이 없는 것 같아 근처의 포장마차를 머릿속에서 찾고 있는데,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손지갑 하나 들고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가서 국수를 먹자는 건가 싶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일단 탔으니 가보자 했는데, 도착한 곳은 내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가락국수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휴게소만한 맛이 없다나 뭐라나.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따라 들어가 먹었는데, 역시, 그랬다. 맛이 있네 없네 여러 말을 해도 가락국수 맛은 고속도로 휴게소를 따라올 수가 없었던 거다. 인정!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저자 못지않은 국수의 추억이 있었네그려.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중국집은 화교들이 주인이었고, 주인이 당연히 주방을 꿰차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에서 혹독한 화교 탄압 정책을 펴면서 재산을 몰수당하다시피 한 수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중국집 주방에 한국인들이 들어서게 되었단다. 이때까지만 해도 짬뽕은 매운 음식이 아니었다는 것이 당시 중국집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분들과 옛 맛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의 전언이다. 화교들의 대거 이탈로 '어쩔 수 없이' 주방에 한국인들이 입성하면서 매운 걸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네 식성에 맞게 고출가루가 듬뿍 든 얼큰한 빨간 짬뽕으로 진화했다는 얘기다. 이는 1970 들어 급성장한 국내 외식산업의 두드러진 특성인 '매운맛의 보편화'라는 트렌드와도 일치한다. (100~101페이지)

 

국수에 누군가의 추억만 담긴 게 아니다. 국수는 한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도 품고 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즐기는 짬뽕은 처음엔 빨간 국물도 아니고 매운 맛도 아니었다는 것. 오랜 시간 진주를 벗어나지 않고 그 맛을 이어온 진주냉면은 이제야 경남 지역 일부에서라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올챙이국수, 막국수, 옹심이 같은 가난한 자들의 식량이었다던 메밀은 배고픔과 동의어로 들린다. 한국의 거의 최초 패스트푸드였다던 구포국수의 명맥이 궁금하나 그 흔적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물자의 부족과 빈곤은 밀면과 비빔당면을 탄생시켰다. 그러고 보면 국수는 상당히 만만한 음식이었나 보다. 배고픔의 허덕일 때 금방 찾아내고 응용하여 허기를 달래주곤 했던 것이 국수의 다양한 버전과 발전을 이루어낸 건 아니었을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들려준 29개의 에피소드가 대부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저자 자신의 기억이 보태어진 국수의 추억이 기록되는 거였다.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 하나쯤 심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그런 이유다. 겨우 국수 한 가닥일 수 있지만 그 한 가닥이 모여 일생의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 나와 삶을 견디게 해주곤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물론 그 대상이 국수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저자의 이야기가 큰 거부감 없이, 낯설지도 않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마음 한 자락 열어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살아보니 그런 힘을 발휘하는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때로 위로가 되고, 흔들릴 때마다 붙잡아주며 구제하고, 한 템포 쉬어가게 해줄 수 있음을...

 

'나에게도 그런 음식이 있나?' 곰곰 생각하다가 떠오른 건 짬뽕이다. 미친 듯이 허기짐이 찾아올 때, 가슴 속이 답답할 때 매콤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랄 때. 그럴 때면 집 근처의 작은 중국집까지 직접 가서 먹는다. 전화 한통이면 금방 배달 오는데 뭐 하러 굳이 가서 먹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짬뽕만큼은 만들어져 배달 오는 그 시간도 별로다. 그 몇 분 사이에 불어버린 면이 싫어질 것 같아서. 주로 배달 위주라 매장에는 겨우 테이블이 서너 개뿐인 그곳까지 가서 먹는 게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부끄러움이고 뭐고 없다. 일단 먹고 보는 거다. 다 먹고 난 후에 찾아올 개운함을 기대하면서 그 매운 국물을 들이켠다. 언제부터 짬뽕을 그렇게 먹었는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데, 그 시작 역시 엉뚱하다. 이십대 초반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예쁘게, 조금씩 먹어도 모자랄 판에 짬뽕 한 그릇을 다 비워낸 적이 있다. 그릇째 들고 짬뽕 국물을 들이켰다. 앞에 앉은 그가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야, 짬뽕을 너처럼 맛있게, 한 그릇 다 먹는 여자는 첨 봤다." 그러면서 쌍엄지까지 추켜올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민망한 기억인데, 그때 난 뭔가가 정말 답답했던 것 같다. 그 매스꺼운 속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못 살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떨리고 설레는데, 짬뽕을 그리 먹을 수는 없었을 거다. 분명! (아마도... ㅠㅠ)

 

비록 내가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먹는 일이 단순히 먹는 행위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을 풀어가는 과정임을 알고 있다. 음식이기 이전에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소통을 이루어내는 하나의 매개가 되는 거다. 같이 먹는 음식, 먹으며 얘기하는 자리, 포만감이 불러오는 마음의 여유, 날카롭게 곤두서있던 시선을 누그러트리기도 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으로 쌓여가는 정 마일리지까지. 음식이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세상 경험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기도 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창이 되기도 한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의미 있는 행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은 먹는다는 것 한 가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저자가 자신의 인생에 동반한 국수를 통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국수가 지나온 삶을 추억하게 하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게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그런 웃음을 다 날아가고 얼굴에 추억의 웃음꽃이 피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힘이 되는 그 어떤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 짓게 되는 것, 행복해지게 하는 것, 삶을 기운 나게 하는 것. 그게 저자에게는 국수였을 텐데, 이 책을 읽을 당신에게는 무엇이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뜨거운 국물에 담긴 면발을 땡기고 싶다. 호로록~ 호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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