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린다 작가정신 시그림책
함민복 지음, 한성옥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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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시를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 나만 해도 벌써 이 계절에 시집을 몇 편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시 초보자인 내가 느끼기에 소설, 에세이보다 시가 좋은 이유는 바로 '여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말의 빈자리, 풍경의 테두리, 단어의 부재, 그 속에서 자유롭게 해석하고 상상할 수 있는 자유.

특히나 이번에 만난 책은 내가 사랑하는 그 '여백'이 아주 극대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름하여 '시그림책' 이란다. 시인 함민복의 「흔들린다」와 우리나라 1세대 그림책 작가 한성옥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 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장석주 시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인들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라, 말을 버려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의 바닥에 닿으려고 말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들면, 그 말의 빈자리에 시가 들어선다"고. 이 말만큼 시를 간결하고도 핵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와닿았던 말이었다. 함민복 시인은 “시인은 삶을 옮기는 번역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시는 자본주의 시대에 소외된 개인의 삶을 육화해 가난을 일으켜 세우는 긍정의 힘을 노래해 왔다. 이번 작품 <흔들린다>에서 그는 커다랗게 자란 참죽나무의 가지를 치는 과정에서 목도한 생(生)을 노래하고 있다.

 

 

수채화처럼 보이다가도, 수묵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간결하고 투명한 느낌의 그림들의 분위기는 지금 이 계절을 닮아 쓸쓸하면서도 가슴 한켠을 시리게 만든다. 마치 정말 숲에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구름 한점 없는 높은 하늘을 올려다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흔들림의 과정을 겪어 왔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고, 내면의 욕심때문에 흔들렸던 적도 있을 테고, 혹은 대의를 위해서,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등등의 수많은 이유로 우리의 생은 그렇게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심을 잡고, 자기 자신을 잊어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그래야 살아 나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시 한편을 나뉘어 그림을 곁들인 페이지에 조금씩 뿌려 놓은 것이 하나의 책이기 때문에, 뭔가 텍스트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겨우 시 한편으로 어떻게 책을 만들 수 있지? 싶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그림으로만 읽을 수도, 오직 한 편의 시만으로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시그림책'이다.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고요한 산의 정경에서 시작해서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고, 어둠에 휩싸인 세상이 보인다. 집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의 푸르름은 가지가 베어지고, 점점 더 시간을 견뎌가면서 모습을 달리한다.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튀우는 일이었구나

 

 

이 책은 여백도 많고, 글자도 많지 않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고, 앉은 자리에서 금새 다 읽어버릴 수도 있는 책이지만, 어쩐지 책장을 덮고 나서 여러 번 다시 들춰보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시를 소개하면서 그림을 곁들이고 있는 책은 많지만, 이렇게 시 한 편을 오롯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스토리를 만드는 그림이 함께하는 책이 또 있었던가 싶다.

흔들리냐, 나도 그렇다.

아프냐, 나 역시 그렇다.

가끔 바람이 부는 쪽으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어떤 목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데, 주변에서 나를 가만두지 않을 때,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가족들에게 시달리고, 친구에게 실망하고,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가 당신에게 바로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다. 조금 쉬어 가고 싶은 순간, 이 책을 읽어 보자.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느껴지는 휴식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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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1-04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석주 시인의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소설은 덧셈이고 시는 뺄셈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피오나 2017-11-05 00:16   좋아요 0 | URL
오.. 소설은 덧셈이라는 생각에도 공감이 되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