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다이어리
케빈 브룩스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신원 미상의 남자에게 납치되어 외딴 벙커에 갇힌 여섯 명의 사람들, 이라는 설정만으로 자연스레 몇몇 영화들이 떠오를 것이다. 큐브, 쏘우, 더 홀 등등...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더 이상 기존의 그 어떤 작품도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케빈 브룩스는 그만큼 독창적이고, 충격적인 작품을 그려냈으니 말이다.

이봐요, 이 글 읽고 있어요? 만약 그렇다면 신호를 보내 주세요. 천장을 두드리든가 뭐라도 하시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당신하고 연결된 김에 할 얘기가 있어요. 말 좀 할게요. 난 내가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알아요. 아주 잘 알고 있죠. 당신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고요. 실은, 거의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내 생각까지 죽이지는 못해요. 생각하는 데 몸이 필요하진 않거든요. 생각은 공기를 필요로 하지도 않아요. 생각은 음식이나 물, 피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러니 만에 하나 당신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난 계속 당신을 생각할 거예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난 당신을 생각할 거라고요.

일요일 이른 아침, 열여섯 소년 라이너스는 거리에서 우연히 팔걸이 붕대를 한 시각 장애인을 만난다. 그의 부탁에 가방을 밴 안으로 옮겨주려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고, 다음 날 외딴 벙커에 무참히 던져진 자신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방 여섯 개와 부엌, 욕실, 그리고 간단한 가구들과 냉장고, 식기 류 들이 모두 여섯 벌씩 있었다. 다음 날 내려온 승강기 속에는 아홉 살 소녀 제니가 있었고, 이틀 뒤에는 젊은 여자와 덩치 큰 남자, 며칠이 더 지난 뒤에는 경영컨설턴트라는 뚱뚱한 남자, 마지막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노인까지 도착한다. 이제 그곳 벙커에 납치된 사람들은 모두 여섯이다. 감시 카메라와 도청 장치가 설치된 그곳에서 그들은 필요한 물품들을 종이에 적어서 승강기로 올려 보내고 식재료들을 지급받는다. 그리고 탈출을 시도하거나, 감시 카메라를 부수려고 하는 등의 행동을 할 때마다 무언의 처벌을 받기도 한다. 온도를 내리거나, 불이 켜지지 않게 하거나, 음식을 지급하지 않는 등의 제제를 받으며 사람들은 점점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마음을 접기 시작한다. 하지만 라이너스 만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강구한다.   

여섯 명의 서로 모르는 이들은 모두 이유도 모른 채 지옥 같은 상황에 놓여 빠져나갈 방법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한 버스에 타고 있는 모르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서로에게 기대려 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지 않고, 서로를 도와주려 하지 않고 말이다. 그들의 삐걱거리는 관계는 열여섯 소년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인해 조금씩 달라지지만, 소년 역시 원래 그렇게 사람들과 잘 지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 장소가 그를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납치한 정체불명의 인물은 어느 날 아침 이런 쪽지를 보내온다.

들어라_내 말을: 다른 사람을 죽이는 남자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대체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며, 이들은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는 열여섯 소년이 쓰는 일기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이후 보여지는 몇 장의 여백은 그 어떤 충격적인 단어로 표현된 이야기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렇다. 삶이 항상 해피엔드일 수는 없으니까. 나는 이렇게 기가 막힌 결말을 본 적이 없다.

아냐와 같은 사람의 문제는 위험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평생 안락함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그들이 아는 두려움이라곤 작은 것들뿐이다 -- 걱정, 근심, 사소한 것들. 아냐는 아마 한 번도 무엇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진짜로 두려웠던 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벌써 곤경에 처한 것이다.

두려움은 도움이 된다.

두려움은 오싹한 영화를 보거나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니다. 두려움은 다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주로 청소년 소설을 발표했던 케빈 브룩스가 2013년 발표한 <벙커 다이어리>는 그의 열세 번째 작품으로, 납치되어 벙커에 갇힌 소년이 두 달에 걸쳐 쓴 일기를 그리고 있다. 납치, 폭력, 마약, 고문, 강간, 살인 등 충격적인 요소가 가득하나, 자극적인 소재로 흥미를 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존재에 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시종일관 내용이 어둡고, 결말 또한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기에 발표 당시 어린 독자들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책 표지에 경고 문구를 넣어야 한다거나 16세 미만 연령에게는 읽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발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훌륭한 어린이 청소년 도서에 주어지는 유서 깊은 카네기상을 이 작품이 받은 것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그는 무려 10년 전부터 이 작품을 낼 계획이었으나, 어두운 내용과 결말 때문에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고, 편집자들은 그에게 조금만 밝게,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고쳐 쓰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고, 1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만약 그가 편집자들의 조언 대로 내용을 고쳐 썼다면 훨씬 오래 전에 책을 출간할 수 있었겠지만, 아마도 지금 이 작품만큼의 찬사는 받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10대 청소년 화자의 순수하고도 투쟁적인 자의식이 느껴지는 케빈 브룩스의 문체 또한 너무도 멋지다. 열여섯 소년을 화자로 설정한 것도 매우 탁월하고, 소년의 사유 또한 너무도 매력적이다. 철학적이지만 난해하지 않고, 자극적인 소재지만 진부하지 않다. 게다가 결말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놀라우며, 한마디로 그저 굉장하다. 독창성, 재미, 가독성, 문장, 플롯, 캐릭터, 그리고 역대급 결말까지... 모든 항목에서 별 다섯 개! 강추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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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4-30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찜했습니다....

피오나 2017-04-30 23:24   좋아요 0 | URL
ㅎㅎ 탁월한 선택이 되실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