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그리고 축복 - 장영희 영미시 산책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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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제일 먼저 학교 교정을 떠올릴 것 같다. 학창 시절에 공부로 배워야 했던 시는 직유와 은유, 대구를 통해 분석하고, 이미지를 규정화시켜 머릿 속에 넣어야 했던 글들이었다. 그러니 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즐기고, 그대로 받아들였던 적은 글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시를 이렇게 멀게, 어렵게 느끼며 살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뭐 그래도 합본 개정판이 출간된 지금에서라도, 이 책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시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관한 시는 발에 차고 넘칠 정도로 여기 저기서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연애 중일 때는 사랑에 관한 시만 눈에 들어오고, 이별한 후에는 슬픔과 그리움에 관한 시만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시는 어려운 장르인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T.S. 엘리엇의 시를 읽으면서 인생의 의미를 돌아본다. 남의 인생은 크고 멋있고 위대해 보이지만, 내 삶은 작고 일상적이고 시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지를 뒤흔들 새로운 시작을 꿈꾸지만, 늘 여지없이 무너지곤 하는 것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일 테고 말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커피 스푼으로 뜨든 삽으로 뜨든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 한 잔 커피에도 삶의 향기는 있지 않을까요.' 라고. 나의 저녁과 아침과 오후의 일상이 별거 아닌 게 아니라고 말이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지니고 다닙니다 (내 마음속에

지니고 다닙니다) 한 번도 내려놓을 때가 없습니다.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 당신고 가고

나 혼자 하는 일도 당신이 하는 겁니다. 그대여)

나는 운명이 두렵지 않습니다 (임이여, 당신이

내 운명이기에) 나는 세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진실된 이여, 아름다운 당신이 내 세계이기에)

이제껏 달의 의미가 무엇이든 그게 바로 당신이요

해가 늘 부르게 될 노래가 바로 당신입니다.

e. e. 커밍스는 시에 대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은 물론, 영어에서 대문자로만 통용되는 'I'도 소문자 'i'로 사용한다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시의 내용에서도 나보다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랑의 원칙에 대해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다.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가치와는 좀 많이 차이가 나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꼭 엄청 나이든 사람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하핫.. 어쨌건 그녀는 이 시에 대한 해설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사랑하므로 그 사람이 꼭 필요해서 '나와 당신'이 아니라 '나의 당신'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라고. 오랜 기간 연애도 해보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기고, 그렇게 그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살다 보니.. 이제는 나도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의 가치라서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주 오랜 기간 동안 스테디셀러였던 <생일> <축복>이 출간 11주년을 맞아 합본 개정판 <생일 그리고 축복>으로 재 탄생한 책이다. 장영희 교수. 그녀가 고르고 옮긴 영미시와 번역, 그에 대한 해설, 김점선 화백의 그린 화사하고도 멋들어진 그림이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는 문구가 무색할 만큼, 내용도 예쁘고, 그림들도 뭉클하게 아름답다. 장영희 교수는 49세에 유방암, 52세에 척추암이 연거푸 찾아왔을 때도 끝내 맞서 싸우고 이겨냈지만, 결국 56세에 간암을 선고 받고 1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가 타계한 날은 화가 김점선 화백의 사십구재 날이기도 했다. 당시 투병 중이던 장영희 교수가 일 년 동안 연재한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을 부제로 사랑을 주제로 한 49편을 묶어생일’, 희망을 주제로 한 50편을 묶어축복이라 했다. 그리고 두 권이 통합되면서 판형과 함께 그림과 글씨도 대체적으로 더 작아지면서, 아름다운 삽화의 농도와 질감까지 살아나고, 더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시들과 그에 대한 해설과 그 생각들을 이미지로 형상화 시켜 보여주는 그림들을 만나다 보니... 아주 어릴 때부터 생각해왔던 이렇게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게 되었다. 물론 나이를 먹어 연륜이 생긴다고 해서, 지혜롭고, 모든 일에 답을 갖고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을 '되돌릴 수 없는 청춘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의 내 계절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순간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살면서 말이다. 이 아름다운 책은 내가 매년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무게를 느끼게 될 때마다, 한번씩 다시 꺼내어 읽어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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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17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복》 이 개정 합본으로 나왔군요. 저도 이 분의 글을 좋아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교수님의 글을 처음 접해서 좋아하게 됐습니다.

피오나 2017-03-18 11:24   좋아요 0 | URL
오.. cyrus님도 만나보셨군요 ㅎㅎ 합본으로 출간된 개정판은 소장하기에도,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도 좋게 더 예쁘게 나왔더라고요. ^^